254화.
“하… 역시 쉽게 끝나지 않는군.”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막 떠나려는 순간 이현성이 한숨과 함께 의미 모를 말을 했다. 란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허나 그녀의 궁금증은 곧 해결되었다.
천막을 열자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자가 있었다.
“역시 기를 과하게 운용한 것이 실수였군요. 선배님.”
“대단한 솜씨일세. 하마터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테니까. 후배.”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자는 바로 지옥대제였다.
수천 명이 주둔한 진지에서 원하는 기운만 골라서 감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나 지옥대제는 그것을 해냈다. 운인지 실력인지는 알 수 없으나 중요한 것은 그가 알아차렸다는 점이었다.
이는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며, 결국 피를 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과찬이십니다. 선배님. 이 후배, 한 수 잘 배웠습니다. 다음부터 기를 운용할 때는 더욱 신경을 써야겠군요.”
“관일창왕이 숨어들었나 싶었는데… 정체가 뭐지? 그리고 다음은 없네.”
지옥대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심복인 지옥쌍괴와 친위대가 주위를 포위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또 다른 초절정고수들인 북천강과 서천강은 보이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혹시 모를 기습을 대비해서 외곽에 자리를 잡고 있기에 소집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에 반해 이현성은 란희라는 짐까지 있는 상황이었다.
“함부로 장담하시는 것은 곤란합니다. 선배님. 이 후배는…….”
“이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딴 개소리를 하느냐! 당장 그녀를 놔주어라!”
지옥대제의 곁에는 그와 닮은 젊은 사내가 있었다.
그는 이현성을 향해서 버럭 화를 냈다.
나백을 보며 이현성은 피식거렸다.
이현성의 그런 반응에 나백은 더욱 분노했다.
덕분에 그는 주변의 반응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닥쳐! 네 녀석이 끼어들 상황이 아니다! …미안하군, 후배.”
“아닙니다. 선배님. 자식 농사가 제일 어렵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후배는 아직 자식이 없지만, 참고하겠습니다.”
이현성의 예의 갖춘 조롱에 나백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거렸다. 허나 이미 부친의 호통을 들었기에 차마 대놓고 분노를 터트릴 수가 없었다.
지옥대제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자식이었다.
하물며 자신의 후계자가 이런 자리에서 무시당했으니 지옥대제가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언제까지 나와 말장난을 할 텐가?”
“후배의 이름은 이현성이라고 합니다.”
“이…현성? 들어본 적이……!”
중얼거리던 지옥대제의 눈이 커졌다. 그는 물론 주변에서도 이현성의 정체를 눈치채고 말았다.
덕분에 이현성 대신 누군가 그의 별호를 외쳤다.
“거, 검신!!”
“거, 검신이 이곳에는 왜!”
모두가 혼란스러워 하는 가운데 이현성은 지옥대제를 향해서 포권을 취했다.
“다시 인사드립니다. 후배, 검신이 지옥대제 선배님을 뵙습니다.”
“……!!”
“정말 검신이었어!”
스스로 인정한 검신 이현성을 보며 혼란은 극에 달했다. 그 순간 이현성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이를 본 지옥대제는 아차했다. 허나 이미 때는 놓친 후였다. 비명과 함께 란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무슨… 꺄!”
이현성이 허공섭물로 란희를 날려버렸다.
지옥대제가 눈치채지 못하게 갑자기 날려버렸기에 좌중은 물론 란희 본인마저 놀라고 말았다.
허나 아무리 검신이 화경고수라도 사람을 허공섭물로 날리는 것은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곧 하강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주변에 수천의 고수가 퍼져 있는 상황이었다.
하강하는 순간 바로 제압될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런 것조차 생각하지 않은 이현성이 아니었다.
“혼자가… 아니었군.”
“이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선배님.”
허공섭물이 한계에 도달한 순간 예상대로 란희는 하강하게 되었다. 허나 그녀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누군가가 그녀를 낚아챘다.
그는 바로 암월 호법이었다.
귀림의 호위들과 함께 후방 퇴로를 확보해두고 있던 그는 지옥성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포착하고 주변에 은신해 있었다. 암천 사대호법의 후예인 암월이었다.
검술만큼이나 은신과 경공술이 무척 뛰어났다.
지옥대제 외에 그의 은신을 눈치챌 수 있는 자는 이곳에 없었다. 지옥대제마저 이현성에게 정신을 쏟고 있어서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이런 수가 통했지,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쌍괴!”
“명!”
지옥대제의 외침과 동시에 지옥쌍괴가 사라졌다.
란희를 사로잡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독왕의 족쇄였다.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허나 움직인 것은 지옥쌍괴만이 아니었다.
“멍청한 놈.”
“아들을 너무 폄하하지 마십시오. 선배님. 그만큼 사랑…….”
“닥쳐! 네놈이 검신이라고 불린다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살아서 벗어날 거라 생각하지 마라!”
소성주인 나백 역시 란희를 구하기 위해서 움직였다.
그 역시 초절정고수였지만, 지옥성 초절정고수 중에서는 말석이었다. 그가 암월과 함께 사라진 란희를 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무릇 여인은 곁에 두는 장식이자 성욕을 푸는 존재이지,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지옥대제였다.
그렇기에 정략결혼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지옥대제는 란희에게 마음을 빼앗긴 아들 나백이 못마땅하게만 보였다. 소성주로서 제법 잘 하고 있는 나백이 부친인 지옥대제에게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녀를 통해서 묘족을 휘어잡아야 하지, 란희의 치마폭에 휘둘려선 안 된다. 자신의 뒤를 이어서 지옥성주가 되기 위해서는 응당 그래야만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란희가 도망쳤으니 그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콰쾅!!
“으아악!!”
“살려… 으아악!!”
“선배 아니, 성주. 수하들의 안위는 생각하지 않…….”
“닥쳐!”
검은 불꽃이 이현성을 덮쳤다.
허나 그 정도로 당할 이현성이 아니었다.
그는 수도(手刀)로 자신에게 향한 검은 불꽃을 베었다.
그 결과 베어진 검은 불꽃은 주변에 튀었다.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지옥성 고수들로서는 그야 말로 날벼락을 만난 셈이었다.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지옥대제는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덕분에 지옥대제는 더욱 거대한 검은 불꽃을 일으켰다.
이를 본 지옥성 고수들은 기겁하며 서둘러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고수라도 저 검은 불꽃에 닿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번만은 수도로 벨 수 없다고 생각한 이현성을 검을 쥐었다.
콰쾅!!
“후…우…….”
“과연… 검신이란 말이지.”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이나 막았다면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옥대제도 이현성의 실력을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그는 잠시 잃었던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평정심을 잃고 중상이라도 입는다면 그만큼 창피한 일이 없었다. 지옥대제는 자신이 검신에게 질 거란 생각 따윈 아예 없었다.
아직도 그의 마음에는 방심이라는 것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방심은 이현성에게 기회를 주었다.
쾅! 콰쾅! 쾅! 쾅!
지옥대제의 극양지장(極陽之掌)과 이현성의 검술이 충돌할 때마다 천지가 흔들렸다. 초절정고수들의 격돌도 그 여파가 대단한데, 무려 화경고수들의 격돌이었다.
그러므로 당연한 결과였다.
그로 인해 지옥성 고수들만 죽어나갔다.
아무리 서둘러 물러나도 화경고수들의 격돌로 인한 여파가 그들에게 미쳤기 때문이다. 이미 수십 명이 죽은 상황임에도 지옥대제는 전력을 다했다.
이현성은 가볍게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게 수십 초를 교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승기를 잡지 못했다.
‘젠장, 이게 말이 돼! 백이 녀석보다 어린놈의 자식이 어떻게!!’
그의 나이에 초절정지경에 오른 것도 말이 안 된다.
사파사세의 후계자들도 본신의 능력만으로 경지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현성은 대단한 배경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절정지경도 아니라 화경에 올랐다. 게다가 그 실력은 이미 팔왕급이 아니었다.
팔왕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독왕과 싸워본 적이 있는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게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부정할 수는 없었다.
소문처럼 팔왕보다 강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허나 팔왕과 오제는 다르다. 검신이 팔왕보다 강한 것은 인정하지만 오제인 자신의 상대는 아니었다. 순간 지옥대제의 전신에서 진득한 검은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지옥겁화(地獄劫火).
그를 지옥대제로 만들어준 지옥마화결(地獄魔火訣)의 정수였다. 더 이상 시간을 끈다면 이겨도 창피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마침내 비장의 패를 꺼냈다.
“지옥겁화지멸(地獄劫火之滅)!”
“후…….”
지옥대제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지옥겁화가 그의 양손에 모여들었다. 그렇게 압축된 지옥겁화의 위력은 천하를 멸할 정도로 강력해진다. 지옥대제는 독왕을 쓰러트릴 때도 지옥겁화지멸을 펼치지 않았다.
지옥겁화지멸은 천사존을 쓰러트리고 사파지존이 되기 위한 그의 숨겨둔 패였다.
‘검신 애송이를 상대로 꺼내기에는 너무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지옥겁화지멸이라면 검신도 순식간에 재로 만들어 버릴 거라고 확신했다. 지옥성 역시 성주 중에서도 지옥겁화를 깨우친 자가 손에 꼽힌다. 하물며 지옥겁화지멸은 개파조사 이후 그가 처음이었다.
그러니 자신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한 만큼 이현성 역시 긴장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예전의 나라면… 당장 도망쳤어야 했겠지만…….’
성승과 태극검선을 만나기 전의 실력은 팔왕급에 불과했다. 조금 넉넉하게 평가해도 팔왕보다 조금 앞선 정도였다. 허나 지금은 다르다. 성승의 깨달음을 전수받았고, 태극검선에게서 태극의 정수를 물려받았다.
태극의 정수 덕분에 성승께서 전수해주신 깨달음의 일부 역시 깨우친 지금, 이현성은 새롭게 태어났다.
순간 이현성의 검에서 거대한 황금빛이 흘러나왔다.
그의 혼원과 태극이 만나면서 태극문양이 사라지고 대신 생겨난 현상이었다. 황금빛의 기운이 암천의 무학과 만나는 순간, 지옥겁화지멸이 이현성을 덮쳤다.
콰콰~쾅! 콰쾅! 쾅! 쾅! 콰쾅!!
사파지존을 넘어 무림지존을 꿈꾸는 지옥대제의 지옥겁화지멸과 새롭게 태어난 이현성의 검이 충돌했다.
그 거대한 폭발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로 인해 지옥성 고수 수백여 명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것도 그들이 수십 장이나 물러났기에 그 정도로 그쳤지, 아니었다면 족히 천 단위의 어마어마한 희생을 일으켰을 정도로 가공할 위력이었다.
그 절대적인 신위는 모두에게 경각심을 주었다.
지옥대제가 어떤 존재이며, 항명은 곧 죽음이라는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새로운 하늘을 꿈꾸는 지옥사천강은 물론 무림의 절대자들에 대한 경고도 포함된다. 그것만으로도 지옥대제는 숨겨두었던 지옥겁화지멸을 꺼낸 보람이 있을 테니까.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