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귀하께서 귀왕인 증거가 있소?”
암월의 물음에 야래향은 손을 펼쳤다.
정확히는 그녀의 손에 껴 있는 반지를 보여주었다.
“…그게 바로 귀왕이오?”
“귀왕은 저고, 이건 귀왕인…….”
“…귀(鬼) 일맥은… 잊었나 보구려.”
암월의 목소리가 살짝 굳어졌다.
미세한 차이지만 귀백은 느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기에 묻지 않았다. 다만 경계했다.
그의 변화가 긍정적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왕과 귀백이 찾아왔소. 장주께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하외다.
암월은 천리전음(千里傳音)의 수법으로 거처에 있는 이현성에게 뜻을 전했다.
장거리에 있는 존재에게도 뜻을 전할 수 있는 고차원 전음입밀의 수법이 바로 천리전음이었다.
천리전음을 펼치기 위해서 높은 내공은 물론 내공을 세밀하게 제어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초절정고수라 해서 모두 펼칠 수 있는 수법은 아니었다.
“장주께서 귀하들을 만나 뵙겠다고 허락하셨소. 기척을 죽이고 따라오시오.”
“고맙소.”
그렇게 세 사람은 은밀하게 이현성의 거처로 향했다.
그들의 존재를 몇몇이 눈치챘으나 모른 척했다.
이현성의 허락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직 초절정지경에 오르지 못한 야래향만 아니었다면 그들의 존재를 눈치챈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녀가 십대살수급이 되었으나 절대살수급에는 오르지 못했기에 문가장 내에 있는 초절정고수들의 기감을 속일 수는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두 분.”
“야래향이 은공을 뵙습니다.”
이현성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과거 북경에서 지낼 때,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흑룡대를 갈고 닦을 수 있게 힘써준 것도 그들의 호의였다.
그러니 그들이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혼례를 치르신다고 들어서 인사드리려고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불편하실 것 같아서 초청은 하지 못했는데,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저희의 입장을 생각해 주신 것인데, 어찌 은공께서 미안함을 가지십니까.”
그렇게 세 사람의 대화가 오고 갔다.
그 가운데 암월만이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허나 그답지 않게 침묵을 깨고 끼어들었다.
“장주, 드릴 말씀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그전에… 귀왕께선 귀 일맥 아니, 귀림의 뿌리를 아시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야래향은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암월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암월은 귀백에게도 물었으나 그 역시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뿌리를 잊은 저들은… 자격을 상실했소. 저들이 돌아간 후 따로 말씀드리겠소.”
“…뭔지 모르겠으나. 원하는 대로 하시오.”
암월의 단호한 반응에 야래향과 귀백은 불편했으나 내색하진 않았다.
귀왕인을 전해준 이현성은 귀림의 은공이기 때문이다.
암월은 다시 침묵한 채 그들이 떠나길 기다렸다.
그들도 암월이 불편한지 잠시 후 돌아갔다.
“무슨 일이기에 그러시는 것이오. 암월 호법. 그대답지 않구려.”
“…장주. 본인은 24대 암월. 암천회주이자 살수천자님의 호법인 것을 기억하시오?”
“물론이오. 이 암천이 살수천자님의 신물이라는 것 역시 기억하오.”
이현성은 그의 태도에서 보통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기에 타박하지 않았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살수들의 정점에 오르신 살수천자님을 추종한 수많은 살수가 모였소. 그분께선 그들을 해산시키려고 하셨소. 허나 그들은 간곡히 청하며 곁에 머물기를 원했소. 결국 살수천자님께선 그들의 청을 받아들이셨소. 그게 바로 암천회의 시작이오.”
“기억하고 있소.”
이미 수년 전 암월에 들었던 이야기였기에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암월은 설명을 이었다.
“영광스럽게도 초대 암월께선 그분의 지근에서 모실 수 있었소. 그리고 월(月)이라는 이름을 허락하셨소.”
“암월이 아니라 월이란 말이오?”
“맞소. 처음에는 말이오. 월, 그분처럼 이름을 하사받은 자들인 몇몇 더 있었소. 그들은 각기 귀(鬼), 살(殺) 그리고 령(靈)이라 불리게 되었소. 그분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암천회 사대호법이오.”
과거에는 듣지 못했던 부분이었기에 이현성은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굳은 그의 얼굴을 보면 매우 중요한 내용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시에는 사대호법보다 더 뛰어난 살수들이 존재했음에도 살수천자님께서 그분들을 곁에 두셨고 아껴주셨소. 그만큼 그분에 대한 충성과 믿음이 대단하셨다고 하오. 그런 사대호법이 기특하다고 생각하신 그분은 야장(夜匠) 님을 통해서 네 가지 무기를 만드셨소.”
“야장?”
“당시 최고의 대장장이로, 살수가 아님에도 살수천자를 추종하던 기인이시외다. 장주의 암천검도 그분의 작품이외다.”
“아, 그렇군.”
살수천자는 일개 살수가 아니었다.
그 위대함은 많은 사람이 추종하게 만들었다.
야장은 그런 기인 중 한 명이었다.
“야장님의 손에 탄생한 네 가지의 무기를 살수천자께선 각기 암월, 귀왕, 유령 그리고 살백이란 이름을 내려주시며 사대호법께 하사하셨소.”
“음? 혹시…….”
그 순간 이현성의 머릿속에 번뜩인 것이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암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월께서 암월이라고 불린 것은 바로 살수천자께 암월을 하사받은 후이외다. 그리고 이게 바로 그 암월검이오.”
암월은 자신의 검을 보여주었다. 이가장에서 함께 지낸 시간이 적지 않은 만큼 그의 검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주 오랜 세월을 견딘 검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 세월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뛰어난 검이란 뜻이었다.
“그 이후 사대호법 간에 문제가 생겼소. 사대호법 중 가장 떨어지는 귀께서 귀왕이라고 불리니 나머지 세분이 언짢으셨던 것이오. 물론 불만을 내색하진 못하셨소. 그분께서 친히 붙여주신 이름이니 말이오. …살수천자께서 명을 달리하신 후 암천회가 갈기갈기 찢어진 이유이기도 하외다.”
암월의 말에 이현성은 헛웃음이 나왔다.
고작 그러한 이유로 그 엄청난 세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니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혀는 분쟁의 근원이란 것을 떠올리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평생 그분의 릉을 지키며 생을 마감하신 초대 암월 님을 제외한 세분은 암천회 내에 자신들을 따르는 자들을 이끌고 새로운 세력을 일구셨소. 가장 먼저 움직이신 분은 살백이셨소. 사대호법 중 가장 뛰어나셨던 만큼 가장 많은 살수들이 그분을 따라 나가셨소. 그 후 그분은 살백이란 이름을 버리고 스스로 살왕이 되셨소.”
“설마……!!”
놀라는 이현성을 보며 암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바로 초대 살막주인 초대 살왕이외다.”
“역시… 그럼 살막이 암천회의 후신이며, 살왕이 살수천자 님의 후예란 말이구려?”
이현성의 물음에 암월은 단호하게 말했다.
“암천회와 살수천자 님의 아류임은 인정할 수 있으나 어찌 그분의 후예라 칭할 수 있겠소! 암천회는 몰라도 살수천자 님의 후예는 오직 장주님뿐이외다. 오랜 시간 암천검의 소유주는 수없이 많았으나 암천검의 주인으로 인정받은 분은 장주님뿐이오!”
“알았소. 흥분하지 마시오. 암월 호법.”
이현성의 말에 암월은 헛기침은 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말이 이어졌다.
“암천회의 아류는 살막만이 아니오. 초대 유령께도 자신을 따르는 살수들을 이끌고 스스로 유령왕이라 칭하며 유령곡을 세웠소.”
“헉! 유령곡의 뿌리 역시 암천회였단 말이오! …설마!!”
놀랍게도 삼대살종 중 둘이나 암천회에서 떨어져 나온 아류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 순간 이현성의 눈이 커졌다.
그런 그를 보며 암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주님의 생각대로요. 귀왕의 귀림이 마지막으로 암천회에서 떨어져 나와 세운 곳이오.”
“놀랍군… 삼대 살종이 모두 암천회에서 분리한 세력이었다니…….”
그제야 이현성은 암천회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거대한 세력이었단 것을 깨달았다.
힘으로 흡수한 것도 아니고, 추종자들만으로 암천회를 세운 살수천자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엿볼 수 있었다.
“초대 암월 님을 따르는 자들도 있었으나 그분께선 오로지 살수천자 님의 곁을 지키기 위해서 모두 물리셨다고 하외다.”
더 놀라운 점은 오로지 살수천자만을 추종해서 삼대 살종에 들어가지 않은 자들도 수두룩하다는 점이었다. 암월만이 아니라 야장 등 많은 기인들이 그 대표격이었다.
“사대호법 중 가장 약하면서도 귀왕을 하사받은 것은 그만큼 그분께서 초대 귀왕 님을 아끼셨단 것을 의미하오. 그럼에도 귀림에서 자신들의 뿌리와 그분의 흔적을 잊고 있소. 이세암천(二世暗天)이신 장주를 따를 자격을 상실한 것이오.”
“그래서 그들을 그리 대하신 것이오? 암월 호법.”
“…….”
이현성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암월은 반박하지 않았다.
이현성은 헛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알기로 살수천자가 탄생한 시기는 수백 년 아니, 그 이전이었다.
이미 암천회의 존재가 사라지기에 부족하지 않은 긴 시간이었다. 암월 호법이 아직까지 맹약을 지키고 있는 것이 오히려 놀라운 일이었다.
허나 살수천자를 따르겠단 맹약을 귀왕과 귀림에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암월 호법은 생각이 달랐는지 귀왕을 비난하고 있었다.
이현성으로선 그를 타박할 순 없고, 귀왕 역시 비난할 수도 없었다.
“그들을 비난하지 마시오. 너무도 오랜 시간 아니오. 귀림만이 아니오. 살막과 유령곡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오.”
“…….”
아무리 이현성의 말이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운지 암월은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허나 이현성은 강요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이어진 그, 그리고 암월들의 정신을 부정할 수는 없었으니까.
‘허… 귀림과 나의 인연이 생각보다 길었구나.’
* * *
“왜 그러십니까. 귀왕.”
문가장을 다녀온 후 이상해진 야래향이 걱정되는지 귀백이 물었다.
그런 그의 물음에 야래향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대장로께선… 그자의 말이 신경 쓰이지 않으십니까?”
“누굴 말씀하십니까? 혹시 은공의 호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귀백의 되물음에 야래향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가 떠올랐는지 귀백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신경이 아예 안 쓰이는 것은 아닙니다. 본림의 식구가 아님에도 감히 본림의 뿌리를 언급했으니 말입니다. 허나 그뿐입니다. 귀왕께서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실만한 일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긴 한데… 왠지 마음에 걸리네요. 그자가 그런 말을 한 의도가 말입니다.”
귀백이 보기에도 암월이 자신들을 비웃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것으론 보이지 않았다. 허나 귀림의 뿌리를 남이 지적해도 될 부분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불쾌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러나 귀왕은 아닌 듯싶었다.
“잠시 귀역(鬼域)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굳이 그러실 필요는… 알겠습니다. 귀왕께서 원하신다면…….”
귀왕야가의 비역인 귀역이라면 혹시 자신이 걸리는 점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야래향은 바로 귀역으로 향했다.
“여기에도 특별한 기록이 없네.”
귀역 안에는 귀왕진결만 보관된 것이 아니었다. 귀림의 중요한 절학들은 물론 기록들 역시 보관되어 있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