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사색이 된 이현영을 보며 장무열을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안절부절못했다. 그때 한승이 물었다.
“장주님의 혼사를 벌써 거행합니까?”
“아, 아닙니다. 대협. 이십일 정도 남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촉박하지만 늦은 것은 아니었다.
부지런히 간다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어디… 어딥니까? 장주의 혼사가 진행되는 곳이…….”
눈물의 혼례
“집사님. 이거 어디에 둘까요?”
“대인께서 선물을 받지 않으신다고 하신 걸 잊었나! 당장 돌려보내!”
“죄, 죄송합니다.”
문교교의 혼례를 며칠 앞두고 여기저기서 선물이 물밀듯이 전해왔다.
그녀가 누군가. 내각대학사의 여식이었다.
그녀의 혼례를 축하하기보다는 내각대학사에게 잘 보이겠다는 뇌물에 가까웠다.
그걸 알기에 문종학은 축하선물을 일절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은근슬쩍 선물을 전해왔다.
덕분에 문가장의 안살림을 맡고 있는 집사는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선물을 보내오는 자들 대부분이 권문세가들이기 때문이다.
“대인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게 실수하지 말게나.”
“예, 집사님.”
내각대학사라는 높은 자리에 있음에도 변하지 않는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문가장을 찾아왔다.
처음에는 그들의 방문이 부담스러워서 돌려보냈다.
그 의도가 순수하다고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목 높은 문종학조차 감탄할 정도로 뛰어난 인재들도 적지 않았다.
결국 일부는 받아들였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집사였다. 그는 일개 집사로 그칠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자청해서 문가장의 안살림을 맡았다.
문가장이 여타 권문세가 정도는 아니었지만, 탄탄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그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게다가 소장주인 문태규는 전시에서 장원을 해 한림원의 학사가 되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문가장을 인재의 보고(寶庫)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리고 서방님께서 곧 도착하실 테니, 철저히 준비하게.”
“예. 집사님.”
집사의 지휘 아래 혼사 준비가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하, 할머니 어때요?”
“곱다. 그러니 그만 호들갑 떨어라.”
“호, 호들갑이라니요.”
혼사 준비가 차분히 마무리되어가고 있으나 소란스러운 곳이 있었다. 바로 문교교의 거처였다.
혼사도 혼사이지만, 얼마 후 도착할 이현성을 본다는 생각에 안절부절못했다. 조금이라도 더 예뻐 보이고 싶었는지 화장을 했다 지웠다, 했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이를 보며 그녀의 외조모인 독고혜가 결국 한소리를 했다. 문교교는 그녀의 말에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생각해도 좀 과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서였다.
“과함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다. 아가.”
“예… 할머니…….”
“그렇게 좋더냐?”
“그럼요…….”
독고혜의 물음에 문교교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 손녀를 보며 독고혜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어렸다.
핀잔을 주긴 했으나 손녀의 저런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사랑에 빠진 여인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행복해야 한다. 아가.”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할머니.”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문교교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독고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네 어미에게 이 말을 해주지 못한 것이 항상 걸렸다. 그리고 난 언제 네 어미 곁에 갈지 모른다. 그런 나이가 되었고… 그러니 할 수 있을 때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할…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직 이렇게 정정하신데… 그런 말씀 마세요.”
“…이 할미가 주책을 부렸구나. 그래, 안 하마.”
울먹이는 문교교를 보며 독고혜는 사과를 했다.
혼례를 며칠 남긴 행복한 새 신부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
‘이 애미에게 조금만 시간을 주려무나. 증손주까지는 볼 수 있게…….’
* * *
“대학사 여식의 혼례가 며칠 후라고 했던가?”
“예. 폐하.”
놀랍게도 문교교의 혼례를 황제까지 신경 써주고 있었다. 그런 그의 물음에 천위령주는 부복한 채 대답했다.
“듣자 하니 대학사가 축하선물을 일절 받지 않는다고 하던데?”
“말이 축하선물이지, 뇌물에 가깝기 때문이겠지요. 폐하.”
“허허… 역시 대학사로세.”
남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부(富)를 쌓으려고 난린데, 문종학은 내각대학사의 자리에 오른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진정한 관리의 표본과 같았다.
그러니 어찌 황제가 흡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짐이 선물을 보내면 대학사가 곤란하겠지?”
“어찌 폐하의 성은을 곤란해 하겠습니다. 폐하의 뜻대로 하소서.”
천위령주의 대답에 황제는 흡족했다.
그가 원하는 대답이기 때문이다.
“대학사의 인품에 맞게 보내게.”
“대학사도 폐하의 성은에 망극해 할 것이옵니다.”
“선물만 보낼 순 없고,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겠는가.”
“누구를 보내신들 대학사는 감복할 것이옵니다. 폐하.”
황제의 기분을 맞추기 위한 감언이 아니었다.
대학사라면, 진정한 관리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황자를 보내면 오히려 대학사가 곤란하겠지. 가려를 보내게. 마침 신랑과의 연도 있으니까.”
“신(臣), 천위령주. 천명을 받드나이다.”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결정한 것 같으나 그 속에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는 아무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듯이.
‘나는 미끼를 던졌소. 그댄 어쩔 생각이오?’
* * *
“오, 오셨어요. 오라버니 아니… 가가.”
혼사를 며칠 앞두고 이현성이 문가장에 도착했다.
몇 달 만에 이현성을 본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런 문교교를 보며 이현성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교매, 잘 지냈지?”
“예… 가가.”
교매라는 이현성의 부름이 쑥스러운지 문교교는 몸을 베베 꼬았다. 그 모습에 딴죽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와~ 너무하네. 이 언니는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칫. 언니는 지난 몇 달 동안 가가와 함께 계셨으면서 질투할 걸 질투하세요.”
“요게~”
문교교와 제갈현지의 모습은 한 사내를 둔 연적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사이좋은 자매의 모습이었다.
그녀들은 이현성을 함께 모시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의식적으로 어색함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아녀자들의 분란은 부군에게 좋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두 사람은 한 사내를 함께 모시는 가족이 된다.
그에게 해가 될 일은 할 생각도 해서도 아니 된다는 것이 그녀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나는 장인어른과 장로님 아니, 할머님께 인사드리고 오겠소.”
“예. 가가.”
아직 문안인사를 드리지 않았기에 이현성은 밖으로 나갔다. 이제 두 사람만 남았으나 어색하지 않았다.
이가장에서 지낼 때도 이미 자매처럼 지내온 그녀들이었다. 입장이 조금 바뀌었으나 어색하지는 않았다. 어색해서도 안 된다.
“혼례 준비를 하느라 수고했어. 내가 도와줬으면 좋았을 텐데…….”
“언니는 장원의 일로 바쁘셨잖아요. 그리고 뭐 혼례 준비를 제가 했나요? 집사 아저씨가 다 해주셨는데요.”
보통 혼례 준비는 그 집안 여인의 몫이었다.
허나 문교교의 모친은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
그렇다고 독고혜가 나서기도 힘들었다.
무림인으로서 거칠 것 없이 살아온 그녀에게 권문세가의 혼례 준비를 맡기는 것은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집사가 혼례 준비를 주관했다.
워낙 뛰어난 인물이었기에 문제없이 잘 준비해주었다.
“참, 언니네 가족분들을 소개시켜주세요.”
“그러자 구나. 나도 대인 아니, 너희 아버님께 인사드려야 하고.”
두 사람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의 가족들에게도 인사드리기 위해서였다.
이런 그들의 노력이 세 가문의 관계를 어색하지 않게 만들고, 점점 가까워지게 만드는 것이다.
* * *
검은 그림자가 문가장의 담을 넘으려고 했다.
문가장의 경비를 맡고 있는 금위군사들과 금의위사들조차 그림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황제의 검이라는 금의위사들의 실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림자가 은밀했다.
하지만 그런 그림자의 암행을 눈치챈 자가 있었다.
“돌아가라. 더 이상 접근한다면 손을 쓰겠다.”
그림자를 향해 경고를 하는 자는 바로 암월이었다.
사실 이현성은 암월을 이가장에 잔류시킬 생각이었다.
장원의 장로일 뿐만 아니라 제갈현지의 조부와 같은 규염을 혼례에 참석시키지 않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리고 또 다른 장로인 독고혜 역시 문가장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암월까지 동행하는 것은 과했다.
이가장에는 고수라고 할 만한 존재가 호법인 적양신장 구연청뿐이었다.
수개월 전에 있었던 혁련세가의 습격을 생각하면 너무도 많은 고수가 장원을 비우는 것은 위험했다.
그럼에도 암월은 동행을 고집했다. 어쩔 수 없이 이현성은 문가장에 나가 있던 흑룡대를 급히 복귀시켰다.
머릿수를 채웠다고 하지만 묵룡대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고는 한 번뿐이다. 거부한다면…….”
“자, 잠시만요! 저희는 문가장에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에요.”
검을 뽑으려는 암월을 보며 그림자, 아니 여인이 다급히 말했다.
그럼에도 암월은 경계를 거두지 않았다.
뛰어난 암행실력을 보여준 여인도 문제였지만, 그녀의 곁에 있는 노인이 암월을 긴장시켰기 때문이다.
그가 누군가. 암천회주의 호법인 암월의 후예. 24대 암월이었다.
그런 그가 생사를 자신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실력자를 앞에 두고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다. 일남일녀는 평범한 무림인이 아닌 살수였다.
그것도 암월에 견줄 수 있는 절대살수.
자신 외에도 초절정고수가 몇몇 더 있다고 한들 살수는 위험한 존재이고, 절대살수는 방심하는 순간 목숨이 사라질 수 있었다.
“물러나지 않겠다면…….”
“저희는 은공… 이현성 대협과 인연이 있어요. 그분의 혼사를 축하드리기 위함이니… 부디 검을 거둬주세요.”
“우린 귀림(鬼林)에서 왔소. 은공께 귀왕(鬼王)과 귀백(鬼伯)이 왔다고 전해주시오. 그분의 혼사를 앞두고 작은 오해로 소란이 나서 좋을 것은 없지 않겠소.”
흠칫!
암월은 노인의 말에 흠칫 놀랐다. 그들의 정체는 암월조차 놀라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두 사람은 바로 귀림의 귀왕과 귀백이었다.
두 사람의 입장상 고관대작과 무림명숙들이 참석할 이현성의 혼례에 참석하기는 힘들었다. 그렇다고 은공인 그의 혼례에 인사조차 드리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혼례 전날, 찾아온 것이다.
“귀하께서 당대 귀왕이시오?”
“아니외다. 이 늙은이는 귀백이오. 이분께서 본림의 귀왕이시오.”
암월은 당연히 귀백이 당대 귀왕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귀림은 삼대살종 중 하나이며, 귀왕은 살막의 살왕에 견주는 절대살수였다.
그런데 야래향은 아직 귀왕이라고 불리기에 능력이 부족했다. 그녀가 귀왕의 자리에 오른 지 5년이 되었으나 아직 초절정지경에 오르지는 못했다.
애초 귀왕의 자격은 초절정지경이 아닌 귀왕인의 운용 여부였다. 귀왕진결과 귀왕살무를 익혀서 급성장을 할 수 있었으나 초절정의 벽은 높고도 두꺼웠다.
물론 그간의 노력 덕분에 이미 초절정지경에 한발 걸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