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살수-170화 (170/314)

170화.

“혈천과 사파사세와 연관이…있단 말이오?”

“그런 뜻이 아니외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혈천에 대해선 처음 알았소. 다만 천웅창제의 경우는 무언가를 의식하며 조심스러워하는 것을 느꼈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혈천이 아니었나 싶소.”

암월은 천웅방 팔패 시절 암월영패라고 불리며 천웅방주의 그림자인 암중호위로 있었다. 항시 천웅방주의 곁에 있었기에 그의 변화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암월의 말은 매우 신빙성이 있었다.

혈천만 해도 머리가 아픈데, 사파사세까지 연관이 있었다면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설마 혁련세가가 허창에 있을 줄이야.”

“어쩔 생각이시오, 장주.”

허창상단이 혈천.

정확히는 혁련세가에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무림맹의 총단이 있는 허창이기에 설마하며 의심을 지웠다.

그야말로 등하불명인 셈이었다.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지 않겠소. 암월 호법.”

“옳은 말씀이지만, 본장이 직접 움직이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소.”

혈천이란 거대한 암류의 존재를 몰랐다면 몰라도 알게 된 이상은 무조건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결정적으로 혁련세가의 습격으로 인해 묵룡대는 반파되었고, 잠룡대 역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그뿐이랴, 장로인 규염과 호법인 구연청 역시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다. 물론 이현성과 암월이 건재하고 신룡표국, 중앙상단의 패룡대, 중앙상회의 경비대 그리고 풍운각 역시 무사했다.

그렇다고 한들, 지금 이가장의 고수를 움직이는 것은 무모했다. 적은 혁련세가 한곳이 아니었으니까.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이 숨을 수도 있소.”

“…장주, 무림맹을 이용하는 것이 어떻소?”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이가장의 고수를 무리하게 움직인들 그때까지 혁련세가가 그대로 있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허나 같은 허창현에 위치한 무림맹이 움직인다면 사정이 다르다.

게다가 허창상단의 일로 무림맹주는 그에게 빚이 있었다. 남의 칼을 빌린다는 것이 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지금으로선 매우 현실적인 제안이었다.

“무림맹이라…….”

* * *

“경하드립니다. 사부님.”

“아직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란다. 현아.”

이현호는 진심 어린 얼굴로 축하의 말을 전했다.

이에 한승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쑥스럽기도 했고, 그의 말처럼 아직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금 전, 무림맹 총군사의 밀사가 천중산장에 방문했다. 밀사가 전달한 총군사의 밀서에는 무림맹 호법으로 영입하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영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한승은 선뜻 무림맹 호법 자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혹시 무림맹에 안 좋은 감정을 갖고 계십니까?”

“그게 아니란다. 내가 무림맹의 호법이 될 자격이 있나 싶단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부님이시라면 자격이 충분하십니다!”

“…….”

한승은 이현호의 말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주저하던 그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으로 이현호를 보았다. 더 이상 제자를 속여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거라.”

“예 사부님.”

“…나의 사부님. 그러니까 너의 사조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남기신 유언이 있었단다. 그건 바로 천검비록을 9성까지 익히기 전까진 무림에 나가지 말라고 하셨지.”

“그러셨군요. 하지만 제자가 알기에 사부님께선 이미 9성에 오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제야 이현호는 지금까지 사부가 은거기인처럼 천중산장에서만 생활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사부인 한승이 이미 수년 전에 천검비록을 9성까지 익힌 걸로 알고 있는 이현호로선 지금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허나 그는 몰랐다. 사조의 유언이 한승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한승은 호흡을 가다듬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십여 년 전, 그러니까 내가 천검비록을 9성까지 익히기 전이었다.”

한승은 십여 년 전에 있었던 어느 비사에 대해서 제자인 이현호에게 밝혔다.

처음에는 사부의 말이 지칭하는 것이 뭔지 몰라서 어리둥절하던 그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뒤늦게나마 깨달았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의 비사가 바로 자신과 얽힌 이야기임을.

“…무림인들이 아이들을 붙잡았을 때, 검을 잡았단다. 하지만 차마 나설 수가 없었다. 사부님의 유언을 거역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지.”

의심이 확신에 가까워지자 이현호는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십여 년 전의 일이었지만, 죄책감에 그때의 일을 한시도 잊지 못한 한승이었다.

말하면서 감정이 격해진 그는 이현호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놈들… 그 짐승놈들이 여아에게 못된 짓을 하려고 했다. 내가… 내가 주저하는 사이 그놈이… 여아의 곁에 있던 남아의 몸에 비수를 던졌을 땐 머리가 하얘졌다.”

“…왜 나서지 않으셨나요. 사조님의 유언… 때문이었나요?”

이현호의 말에 한승은 씁쓸한 표정을 넘어서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점도 있었지만, 내가 나서려는 순간 한 여인이 나섰기 때문이란다. 나와 비교해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은 여협이었지.”

부들부들.

여아가 자신의 친누이인 이현영이고, 남아가 바로 자신임을 확신한 이현호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특히 제 누이에게 짐승놈들이 못된 짓을 하려고 했단 말에 폭발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머리가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 여협께선 단숨에 짐승놈들을 베셨다. 그리곤 여아를 안고 사라지셨지. 나는… 당시에 나는 남아의 시체라도 묻어주려고…….”

“누, 누이를 그 여협께서 데려갔단 말입니까! 왜……!”

“…네 누이는 살아 있었단다. 최소한 당시에는 살아 있었단다.”

“……!!”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누이인 이현영이 살아 있을 거라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존경하는 사부로부터 죽어가는 자신을 구했다고 들었지, 누이에 대한 말은 한 번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으레 누이가 죽었다고 생각했지, 지금까지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한승은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구나. 사람 목숨보다 유언에 얽매여서 어리석은 선택을 했단다. 정말 미안하구나.”

“…….”

이현영이 살아 있단 말에 이미 이현호는 정신이 나갔다. 한승의 말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흐릿해졌던 눈동자가 돌아왔을 때, 이현호의 얼굴은 차갑게 변해 있었다.

“…저를 지금까지 보살펴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떠나려는 게냐.”

“…죄송합니다.”

“…….”

한승은 그의 뜻을 막을 수 없었다. 이현호가 자신을 얼마나 존경하고 따르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자신에게 들 배신감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이현호를 막을 자격이 없음을 알기에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 무, 무슨 일이야. 현아.”

“…미안하오, 은설 누이.”

검 한 자루만 챙긴 채로 무서운 얼굴로 산장을 나서는 이현호를 발견한 한은설은 당황했다. 그런 무서운 표정을 짓는 이현호를 처음 봤기 때문이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가 떠나려고 한다는 것을 느꼈는지 이현호를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이현호가 사라진 이후였다.

평소와 다른 이현호의 모습에 다급한 마음이 든 한은설은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지! 현이가… 아버지?”

한은설은 깜짝 놀랐다.

무릎을 꿇고 있는 한승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이현호가 산장을 떠난 것이 부친인 한승과 연관이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를 부정하고 싶은지 말을 더듬었다.

“아, 아버지…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

한은설의 물음에도 한승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자리에서 일어난 한승이 나직하게 말했다.

“가솔들에게 재물을 넉넉하게 나눠주고 내보내거라. 그리고 너는 종리 아우와 함께 정주 이가장으로 가거라.”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갑작스러운 부친의 말에 한은설은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떠난 이현호와 무릎을 꿇고 있던 부친.

설상가상으로 가솔들을 산장에서 내보내고 사부와 함께 이가장으로 떠나라는 부친의 말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결국 한승은 가슴 속에 숨겨두었던 치부를 그녀에게도 보여주었다. 한은설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그 어떤 사람보다 대협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부친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부친이 불의를 보고 외면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동시에 이현호가 떠난 이유 역시 알 수 있었다.

“어, 어떻게…….”

“난 무림맹으로 가려고 한다.”

부친의 뜬금없는 말에 한은설은 어이가 없었다.

이 와중에 무림맹으로 가겠단 부친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무림맹의 힘을 빌린다면 분명 그녀를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용서를 구할 생각이다.”

“아…….”

무림맹의 방대한 힘이라면 현호의 누이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굳건히 믿었다.

그리고 무림맹의 힘을 빌리기 위해선 총군사의 제안을 수락해야 한다.

그렇기에 무림맹으로 가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몰라도… 너와 종리 아우는 그 아이가… 내치지 않을 게다. 날 대신해 네가 그 아이를 돌봐주거라.”

“…예…….”

천중산장을 떠난 이현호의 행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주 이가장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렇기에 한승은 딸과 의제를 이가장으로 보내려고 했다. 자신이 원망스럽다고 그들까지 내칠 모진 녀석이 아님을 알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산장에서 일하는 가솔들에겐 미안하지만, 재물을 넉넉히 나눠주는 것으로 미안함을 대신할 생각이었다.

뒷일을 한은설에게 맡긴 한승은 검 한 자루를 쥐었다.

“…미안하구나. …못난 이 사부를 용서치 말거라.”

* * *

“고얀놈… 형님, 조금 더 기다리셔야겠습니다.”

제갈현지는 무영대의 비밀연락망을 이용해서 빠르게 제갈인섭에게 서신을 전달했다.

서신을 읽은 제갈인섭은 그답지 않게 여러 표정을 보여주었다.

내각대학사의 여식 문교교와 함께 이현성을 모시기로 결정했다는 말에 얼굴이 굳어졌다가 이가장이 습격을 받아서 인사드리러 가기 어렵다는 말에는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피해가 있지만 잘 수습하고 있으니, 장원이 안정되는 대로 인사드리러 가겠단 말에 그나마 얼굴이 펴졌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지옥엽이 다른 여인과 함께 한 사내를 모신다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은데, 장원이 습격까지 받았다고 하니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만약 잘 수습하고 있다는 말이 없었다면 당장 이가장을 쳐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현지가 무사하다고 하니 다행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어쩔 생각인가? 혼사를 반대하지 않을 생각인가?”

제갈현지가 누구인가. 제갈세가의 자랑이라 불리는 지봉이었다. 그 어떤 사내에게도 내주고 싶지 않은 그런 여식이었다. 그녀는 그런 자격을 가졌다.

그렇게 몇 년이나 애태웠던 제갈현지가 이젠 다른 여인과 함께 한 사내의 여인이 되려고 한다.

제갈인섭만이 아니라 제갈세가로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장로이자 친형인 제갈인겸의 말에 제갈인섭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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