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물론 그들은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입니다. 선발대로 백호당주님이 일대만 이끌고 먼저 출발하셨습니다.”
“벽력도군(霹靂刀君)께서 말입니까!”
“오! 팽가주시라면…….”
사신당의 하나인 백호당은 오대세가를 필두로 무림세가와 대문파급 고수들로 구성된 무력집단이었다.
그런 그들을 지휘하려면 오대세가의 초절정고수가 당주를 맡아야 했다.
하나같이 자존심 강한 무림세가와 대문파 출신 고수들이 아무나 자신의 위에 두려고 하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백호당주로 선출된 고수는 하북팽가주인 벽력도군 팽홍원이었다.
“낙관하기는 어렵습니다.”
“백호당주님의 실력이 부족하단 말씀이십니까? 신창(神槍).”
모두가 팽홍원이라면 이번 사태를 해결할 거라 믿었다.
허나 반대 의견을 내놓은 자가 있었다.
신창양가의 가주 신창이었다. 신창양가는 산동악가와 함께 정파무림의 창술을 대표하는 가문이었다.
수년 전, 산동악가가 태산혈사로 봉문을 하면서 신창양가는 명실상부 정파 제일의 창가(槍家)로 확고하게 자리매김을 했다.
게다가 신창양가는 오대세가에 근접한 십대세가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원래 백호당주 후보로 신창이 가장 유력했다.
허나 오대세가의 벽을 넘지 못하고 팽홍원에게 당주 자리를 넘겨줘야 했다.
무위만 본다면 오히려 신창이 위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신창이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좌중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도 사사로운 감정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총군사님. 제 말은 제때 도착할 수 있냐는 말입니다.”
“……!!”
신창의 말에 좌중은 눈이 커졌다.
일리가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허창과 천중산의 거리는 육칠 일쯤 된다. 물론 그건 일반 백성들의 발걸음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백호당의 고수들이라면 사일 정도로 줄일 수 있었다.
허나 그러기 위해선 전력을 다해서 움직여야 하는데, 상당한 체력이 소비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흘 안에 사파고수가 역천마라경을 손에 넣지 못한다는 보장이 없다.
그에 반해 기마술에도 일가견이 있는 신창양가라면 체력을 보전하면서도 비슷한 시각에 도착할 수 있다.
즉, 적임자가 아닌 사람을 보냈단 뜻이다.
이를 신산이라고 불리는 제갈윤호가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무림맹의 무력집단인 사신당과 별동삼대는 총군사의 권한으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지만, 무림세가인 신창양가는 그렇지 못했다.
신창양가에 협조요청을 한 후 대답을 기다려야 한다.
그것도 무조건 협조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렇기에 제갈윤호는 백호당을 움직이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산동악가에서 기마대를 지원해줬습니다.”
“……!!”
“오! 그게 정말입니까! 하하. 역시 총군사이십니다!!”
예상치 못한 산동악가의 언급에 신창은 얼굴이 굳어졌다.
산동악가는 창술만 아니라 기마술 역시 신창양가에 비견되는 가문이었다.
허나 걸리는 것은 그들이 봉문 중이란 점이었다.
봉문을 한 가문(문파)은 외부활동을 해선 안 된다.
그런 산동악가가 기마대를 움직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들은 봉문한 상황이 아니었습니까? 총군사님.”
“맞습니다. 신창. 허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봉문을 풀었습니다. 아, 물론 태산혈사에게 피해를 입은 산동무림의 허락 하에 말입니다.”
산동무림은 끝내 혼세교를 끌어내지 못했다.
허나 그 과정에서 그들의 비밀교단을 찾아낼 수 있었다. 비록 텅 빈 비밀교단이지만.
이는 조사단에 합류한 산동악가가 혈안이 돼서 조사한 덕분이었다. 그로 인해 산동무림인들은 산동악가에 대한 분노가 많이 줄어들 수 있었다.
덕분에 30년 봉문이 수년으로 줄 수 있었다.
빈틈없는 제갈윤호의 처사에 신창은 입을 다물었다.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더 이상의 딴지는 시비로 보일 수도 있었다.
‘부디 제때 도착해야 할 텐데…….’
* * *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설마 언놈이 빼돌린 거 아니야?”
무림인들은 눈이 뻘개져서 천중산을 헤집고 다녔다.
천중산에 역천마라경이 있다는 소문과 달리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늦게 도착한 무림인들에겐 희망이 생겼다.
하지만 이미 며칠째 천중산을 들쑤시고 다닌 무림인들의 머리에 의구심이 들었다. 헛소문이거나 이미 찾아서 도망친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의구심을 풀어주듯 누군가가 외쳤다.
“능광백팔검(凌光百八劍)이 역천마라경을 가졌다!”
“미친!”
누군가의 외침에 무림인들은 능광백팔검에게 달려들었다. 능광백팔검은 일검(一劍)에 백팔 번의 변화를 담을 수 있는 절정검객이었다.
천중산에 들어온 무림인 중에서 열 손가락, 못해도 서른 명 안에는 꼽히는 강자였다.
“컥!”
“으아악!”
“흐흐 역천마라경은 내 것이야. 누구도 빼앗을… 큭!”
천중산에 온 수백의 고수 중에서도 상위에 속한 능광백팔검이었다. 그런 그도 역천마라경을 손에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빼앗기고 말았다.
한 손이 열 손을 감당하지 못하는 법.
능광백팔검이 뛰어난 고수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에게 달려들다가 죽은 고수가 여럿 있었다.
허나 이십여 명이 한꺼번에 달려드니 그도 결국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역천마라경은 새로운 주인을 맞이했다.
“제…엔… 장!”
“아…안…돼!!”
역천마라경이 발견된 지 두 시진도 채 되지 않았으나 주인이 여섯 번이나 바뀌었다. 그러는 족히 백여 명이 넘는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말았다.
천중산은 피로 물들었고 피 비린내가 진동했다.
이쯤 되니 천중산을 떠나는 자들이 생겨났다.
스스로 실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이들과 겁을 먹은 자들이었다.
그렇다고 한들 역천마라경의 쟁탈전에 참여한 무림인들의 수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그 사이 또 다른 무림인들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콰쾅!!
“쥐새끼들! 주제도 모르고 역천마라경을 노려?”
“헉! 대, 대별노괴(大別老怪)!!”
“미친!”
좌중은 경악했다. 녹림십팔채주 중 세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가 바로 대별노괴였다.
녹림을 흑도로 분류하지만 사파와 비견되는 저력을 가진 세력이기도 했다. 그런 녹림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대별노괴는 강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했다.
그는 파산부법의 달인이자 초절정고수였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초절정고수가 움직인 셈이었다.
“선배, 그건 곤란하겠소. 역천마라경은 나 역시 필요해서 말이오.”
“어떤 새끼가! …안휘마검(安徽魔劍)?”
그때, 또 다른 초절정고수가 나타났다.
오대세가의 수좌이자 검왕의 가문인 남궁세가는 하남성과 인접한 안휘성에 위치했다.
그런 남궁세가의 영향인지 안휘성은 유독 검가나 검파가 많았다.
어느 날, 남궁세가의 문을 두들긴 간 큰 검객이 있었다. 그는 가주와의 비무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대 남궁세가의 가주와의 비무가 쉬울 리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선을 넘고 말았다.
남궁세가 고수를 습격하여 셋이나 목을 벤 것이다.
분노한 남궁세가가 움직였다.
당시 막 가주에 오른 창천검군은 가문의 위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직접 검을 쥐었다.
사람들은 호랑이의 코털을 뽑은 검객의 무지함을 비웃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검객이 창천검군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 검술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것도 잠시, 접전을 보이던 검객이 마지막에 도망쳤다.
그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창천검군에게 밀린 것은 검술이 아닌 내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창천검군은 그에게 안휘마검이란 별호를 붙여주었다.
“초, 초절정고수가 별거냐! 우린 수십 아니, 수백 명이다!”
“마, 맞아! 역천마라경을… 컥!”
수백여 명이 천중산에 몰려왔으나 초절정고수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초절정고수는 초절정고수만이 상대한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강기는 강기만으로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절정고수도 인간이었다.
수백 명과 싸우다 보면 지쳐 쓰러질 수 있고, 운이 나쁘면 눈먼 검에 찔릴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몇몇은 주변 무림인들을 선동했다.
허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그냥 둘 안휘마검이 아니었다. 검왕가라고 불리는 남궁세가의 가주조차 인정한 검술의 대가인 안휘마검이었다.
언제 움직였는지 선동하던 자 중 한 명을 베었다.
“선배, 공유합시다. 독차지 하려다가 쥐새끼들에게 물리면 쪽팔리지 않겠수?”
“젠장, 뒤통수치면 죽인다.”
대별노괴는 마뜩치 않았으나 안휘마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어차피 역천마라경은 자신의 품에 있으니 손해 볼것도 없었다.
초절정고수 둘이 손을 잡았다. 이제 역천마라경을 손에 넣을 가능성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무림인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썅! 죽여라! 죽여!”
“비, 빌어먹을…….”
기연에 눈이 먼 무림인들은 무시무시했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할 정도였다.
미친 듯이 달려드는 무림인들을 각자 수십씩 벴음에도 끝없이 몰려드는 그들을 보며 안휘마검과 대별노괴는 치를 떨었다.
초절정고수도 인간임을 증명하듯 두 사람의 입에선 거친 숨소리와 거친 욕설이 나왔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며 이 상황을 조종하는 자들이 있었다.
‘클클클. 아직 끝나면 안 되지.’
역천마라경이 천중산에 있다고 소문을 낸것은 물론, 이 상황을 뒤에서 조종하는 자들이 바로 혁련세가였다.
무림맹의 시선을 돌리는 한편, 중원무림의 힘을 조금이라도 깎아먹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런 혁련세가에서 파견된 고수들은 천중산에 온 무림인들을 선동하며 일을 더욱 키웠다.
허나 대별노괴와 안휘마검은 서서히 지쳐갔다.
이러다가 저들이 죽으면 곤란했다.
무림맹의 시선을 조금 더 붙잡아 둬야 하기 때문이다.
“컥!”
“큭!”
“누, 누구냐! 배신한 놈이!”
대별노괴와 안휘마검을 공격하던 무림인들 중 몇몇이 죽으면서 그들 사이에 혼란이 생겨났다.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는 생각에 옆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칠 대별노괴와 안휘마검이 아니었다.
“헛! 도망친다!”
“안 돼!!”
그들은 끝없이 밀려드는 무림인들을 모두 죽이는 것보다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다.
그 뒤를 무림인들이 쫓기 시작했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지쳤다고 해도 초절정고수들이었다.
그들은 빠르게 포위망을 벗어났다. 허나 수백이나 되는 무림인들 중에 경공술이 특기인 자가 없을 리가 없었다.
그들이 빠르게 두 사람을 추적했다.
덕분에 두 사람은 정신없이 도망쳐야 했다.
그렇게 한참 도주하고 있을 때였다.
“이런! 네놈들도 역천마라경을 노리는 게냐!”
“꺄!”
“누이! 커억!!”
채~챙!!
도주하던 와중에 안휘마검이 급히 검을 휘둘렀다.
하필이면 그들이 도주하는 방향에 약관의 남녀가 보였기 때문이다.
고작 약관의 남녀였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었다. 무림의 오랜 격언에 ‘아이와 여인 그리고 노인을 조심하라’는 말이 있었다.
방심하게 만든 후 수작을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