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묵룡수
“소녀 주가려, 황제폐하의 지엄하신 천명을 수행하고 돌아왔사옵니다.”
황제의 침전에 한 여인이 부복했다.
그녀는 정주 태가장에서 환궁(還宮)하기 위해 떠난 장공주(長公主) 주가려였다.
그녀의 암행은 기밀사항인 만큼 대전에서 정식으로 보고할 수 없었기에 황제의 침전에서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수고가 많았구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어차피 보고는 형식에 불과했다.
성승과의 만남은 이미 천위령(天衛令)을 통해서 황제의 귀에 들어갔다.
그렇다고 해도 황제의 명에 따라서 움직인 만큼 황제에게 직접 보고하는 것이 옳았다.
그것이 황실의 법도였다.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다. 혹 구룡검이 무겁더냐?”
“아니옵니다, 폐하. 소녀, 아직 부족하지만 구룡검에 걸맞은…….”
“변명은 되었다. 네게서 구룡검을 거두려는 것은 아니니…….”
움찔.
황제의 질책 아닌 질책에 주가려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물론 황제는 그녀를 벌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자신을 실망시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허나 구룡검의 무게에 짓눌려서 검을 감당할 수 없었다 하면 다시 거둘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구룡검(九龍劍)은 황실수호검.
황제의 숨겨진 패 중 하나다.
아끼는 누이라는 이유만으로 구룡검을 계속 맡길 순 없었다.
실제로 그녀에게 구룡검을 하사한 이유는 그만한 잠재력을 엿봤기 때문이지, 혈육의 정 때문이 아니었다.
“허나 정진해야 할 것이다.”
“소녀, 폐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사옵니다.”
“그만 돌아가봐도 좋다.”
황제의 축객령에 주가려는 침전에서 물러났다.
잠시 후, 황제가 나직하게 말했다.
“천위령주,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저 아이가 조금 변한 것 같지 않은가?”
“공주마마께서 심적으로 성장을 이루신 것 같사옵니다. 폐하.”
“허허. 자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그녀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황제는 그녀를 총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황실 여인으로서의 미래 대신 구룡검을 하사한 것이다.
하지만 구룡검의 무거움을 감당할 수 없다면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땐 공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고, 정치적 도구로 이용될 수도 있었다.
주가려의 오라버니이기 이전에 황제이기 때문이다.
“허나 아직 많이 부족해.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
강력한 황권 아래 황실은 무탈했다.
아니, 무탈해 보일 뿐이었다.
실제로는 오히려 심상치 않았다.
흡사 폭풍전야처럼 뭔가가 잔뜩 짓눌려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주가려에게 자극을 주고 있었다.
준비되지 못한다면 그녀는 폭풍을 감당하지 못하고 휩쓸려 사라지게 될 테니까.
“그보다 ‘그’ 아이가 태가장의 주인이 되었다고?”
“…폐하의 뜻대로 처리했사옵니다.”
우연과 우연이 겹치면 그땐 진짜 우연일 수 없는 법.
당사자들만 모를 뿐, 그 이면에는 황제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현성이 북경을 떠나 하남에 정착한 것도, 혼란의 중심인 정주에 그를 둔 것도 모두 황제의 뜻이었다.
“더 이상 관여하지 마라. 나의 존재가 드러나면 재미없지 않느냐.”
황제는 이현성이라는 돌멩이를 던졌다.
그리고 지켜보기로 했다.
돌멩이 하나가 정주, 나아가서 무림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를.
* * *
“형 조장도 말인가? 허… 생각보다 많군.”
적운 부대장의 보고에 허정은 한숨이 나왔다.
태가장… 아니, 이가장의 경비대는 총원 56명이었으나 낭아파와 싸움에서 4명이 죽고, 3명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로 인해 49명으로 줄어든 상황이었다.
물론 49명 역시 온전한 것은 아니었고, 다들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 49명 중 3명이 태천광의 지시로 잔류했다.
정확히는 죽은 4명 중 2명을 포함하면, 총 5명이나 되었다.
게다가 그들 중에는 조장급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그들이 이가장과 장주인 이현성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친 것은 아니었다.
허나 이 일이 알려진다면 이가장이 화합하는데 저해가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제 느낌에는 이들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놓친 자가 있단 말인가?”
“경비대가 아닌 식솔 중에도 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군. 그럴지도 모르겠군.”
이가장에 잔류한 경비대원 56명 중 무려 5명이나 태천광의 지시를 받았다.
그런 태천광이 경비대에만 눈을 남겨뒀을 리가 없었다.
적운만 아니라 허정 역시 동의했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보고하실 겁니까, 대장.”
“보고를 하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이 일을 지시했던 허정으로서는 선뜻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허나 결국 자신이 짊어져야 한다.
경비대장인 자신이…….
“…우리 선에서 결정할 수는 없지. 보고하고 오겠네.”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허정은 장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장주인 이현성은 이미 그의 방문을 예상하고 있는 듯싶었다.
“허 대장,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가?”
“저… 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허정은 적운의 내사(內査) 결과를 이현성에게 보고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이현성의 얼굴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경비대 이외에도 태 대인의 지시를 받은 식솔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저희의 의견입니다. 장주님.”
“그렇군. 이런 조사를 한 이유가 뭔가?”
“예? 그, 그건…….”
생각지 못한 이현성의 물음에 허정은 당황했다.
이현성을 턱을 괴며 말했다.
“내가 모르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가? 그럼에도 놔둔 이유가 있었네. 왜일 것 같나?”
“…저희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맞네.”
“…….”
직설적으로 말하는 그를 보며 허정은 말을 잃었다.
그런 허정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이현성이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난 경비대에 대한 전반적인 권한을 자네와 부대장들에게 일임했네. 그러니 이 조사 역시 타박할 이유가 없지. 오히려 일을 잘해주고 있으니 칭찬받아 마땅하지. 허나!”
“…….”
“…그들이 태 대인의 지시를 받고 잔류했다고 해도 자네의 관리감독 하에 있네. 암살이나 분란을 일으키기 위해서 잔류한 것이 아닌 이상, 그대들은 그들을 포용하고 온전한 경비대원이 될 수 있게 만들어야 했네. 그럼 오히려 태 대인에게 전해질 정보를 우리가 제어할 수 있을 테니까.”
허정은 이현성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한 수 아니, 두 수 뒤까지 바라보고 있는 이현성이 놀랍기만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조사결과를 온전히 믿을 수 있나?”
“적운 부대장은, 전직 첩보부대의 총기(總旗) 출신으로…….”
“그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네. 다만 그 역시 태 대인의 지시를 받는 사람이 아님을 자신할 수 있냐는 말일세.”
“……!!”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도, 의심해본 적도 없기에 허정은 당혹스러웠다.
지금은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으나 사실 그렇게 된 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었다.
즉, 그의 속내까지 알고 있는 사이는 아니란 뜻이었다.
그때 적운이 몸담았던 백호소가 태천광 휘하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배신한 것이 아닌 이상 무조건 정리할 필요는 없네. 허나 이미 움직인 이상 확실하게 마무리를 짓게. 방법과 결과는 허 대장에게 일임하겠네.”
“예. 장주님.”
허정은 굳은 얼굴로 집무실을 나갔다.
그의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쯤 이현성은 피식 웃었다.
“나쁘지 않은 변화군. 조금은 기대해도 되겠는데?”
* * *
“아미타불…! 장로들의 생각은 어떤가?”
소림방장실에 11명의 노승들이 모였다.
그들은 소림 이대제자인 공자 항렬의 승려들이었다.
황실로 떠난 공암 등 자리를 비운 셋을 제외한 소림 이대제자들이 전부 모였다.
소림의 품으로 들어온 하나의 마물로 인해서였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불태웠으면 좋겠습니다.”
“소승 역시 생각이 다르지 않습니다.”
소림 이대제자이자 장로들은 눈앞의 비급을 바라보며 치를 떨었다.
철혼대마력(鐵魂大魔力)의 마공서를 보니, 일갑자 전에 있었던 천마대전이 떠오른 탓이다.
당시에 죽은 선사들과 사제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물론 이 자리에 있는 장로들의 사부나 동문사형제들이다.
그러니 하나같이 불쾌감을 드러내는 것도 당연했다.
“공벽,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저도 사제들과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이었다? 그럼 지금은 다르다는 뜻인가?”
소림방장인 공심대사의 물음에 소림장로이자 소림삼신승의 한 명인 금강신승(金剛神僧) 공벽대사가 합장(合掌)을 하며 불호(佛號)를 읊었다.
“아미타불…! 봉인해서 보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인가? 언젠가 분란의 씨앗이 될 수도 있거늘…….”
좌중은 의아했다. 괴력난신 철마에게 가장 치를 떠는 사람은 바로 공벽 그였다.
그렇기에 더욱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공벽을 바라봤다.
“천마대전은 물론이고, 철마 또한 분명 본사의 큰 상처입니다. 허나 그렇기에 저희는 기억하고 계속 경계해야 합니다. 그때와 같은 슬픔을 다시는 겪지 않기 위해서…….”
“그 상처를 기억하며 스스로를 경계하잔 말인가?”
“아미타불…! 소승의 생각은 그렇습니다. 장문 사형.”
공벽의 말에 여기저기서 불호가 울려 퍼졌다.
한순간 분을 참지 못하고 노기를 드러냈던 자신들의 모습에서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다.
공심은 사제인 공벽을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아미타불…! 공벽 사제의 뜻을 잘 알겠네. 장로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아미타불… 소제는, 공벽 사형의…….”
장로들 전원이 공벽의 뜻에 찬동했다.
철마의 마공서는 매우 위험한 마물인 만큼 장로 중 한 명이라도 반대를 한다면 봉인하는 것을 재고해야 한다.
허나 장로 전원이 찬성한 이상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모두의 뜻이 그러하니, 철혼대마력은 봉인하는 것으로 하겠네.”
소림방장 공심대사의 선언으로 장로회의의 안건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아직 안건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사제. 이것을 선물한 태가장주… 아니, 이가장주가 외문무공을 원한다고 했는가?”
“그가 먼저 외문무공을 요구한 것은 아닙니다. 장문 사형.”
공벽은 방장과 장로들이 괜한 오해를 할까 봐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사실 소림의 무학이 아닐지라도 장경각의 비급이 외부에 전해지는 것은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다.
소림의 장로라 해도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장로회의에서 허락이 떨어지거나 소림방장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공심대사는 그들 중 한 사람을 바라봤다.
“공공 사제. 마땅한 것이 있는가?”
“본사의 절학을 제외하면, 고목신공과 거령괴공… 묵룡수…….”
공심대사의 물음에 장경각주인 공심대사가 대답했다.
소림의 서고인 장경각에는 불경과 소림비급만이 아니라 도경이나 유교 경전 등 다행한 고서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소림에 귀의한 기인들의 절학이나 세상을 혼란하게 만든 사술과 마공 역시 회수해서 봉인해두었다.
이를 관리 감독하는 것이 장경각주인 공공대사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