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살수-107화 (107/314)

107화.

소림이 있는 등봉현에도 개방의 분타가 존재했다.

그런데 이곳 정주 분타에 와서 서신을 전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성승의 출타는 무척이나 민감한 사항인 만큼 정보를 차단했기에 정주 분타주조차 알지 못했다.

그렇다 해도 천하의 사대금강이 직접 서신을 전했다.

어찌 그를 소홀히 대하겠는가.

“걱정 마십시오. 당장 방주님께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용무를 마친 범광은 합장을 한 후 곧 돌아갔다.

범광이 전한 서신을 보며 분타주가 나직하게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서신은 지급(至急)으로 개방 총타에 전해졌다.

* * *

“으음… 무림맹이라니…….”

범광이 전한 서신을 받은 노걸개(老乞丐)는 근심 어린 말을 흘렸다. 이에 동배의 노걸개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미 예상한 바 아닌가, 방주.”

“그렇긴 하나 설마 성승께서 무림맹을 거론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두 사람은 개방의 용두방주와 태상호법이었다.

개방은 천하 3대 정보집단의 하나답게 무림에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조심스러운 일이고, 뒷받침할 증거가 없기에 공론화시키지 못할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성승의 서신을 받게 되었다.

“다른 분도 아니고, 그분께서 말씀하실 정도라면 외면할 수 없지.”

“사형께서 소림에 다녀와주십시오.”

“그래야겠지.”

개방의 최고수는 용두방주가 아니라 태상호법이었다.

게다가 그는 현 방주의 사형이기도 했다.

무광(武狂)인 그는 용두방주의 자리조차 수련에 방해가 된다고 고사했다.

다행히 현 방주는 그에 비해 무재가 그리 떨어지지 않았고, 포용력이 뛰어나서 용두방주로서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 두 사람 덕분에 개방은 천하제일대방의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현 방주가 가장 의지하는 인물이 바로 태상호법이었다.

개방의 용두방주는 그런 태상호법을 소림으로 보내 사태의 추이를 파악하려고 했다.

‘허나 결국 무림맹은 결성되겠지. 과연 그것이 옳은 선택일지는…….’

앙숙처럼 싸우다가도 공동의 적을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똘똘 뭉쳐 시련을 이겨내는 중원무림이었다.

그럼에도 무림맹이 오래 지속되지 않고 해산하는 이유는 어두운 면모 때문이다.

무림맹은 그야말로 거대한 권력 덩어리다.

따라서 이권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권을 쥔 자는 이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비리와 부패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로인해 무림맹 내외로 은원이 발생하고, 더불어 메워질 수 없는 깊은 골이 생겨난다.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발생했기에 구파일방은 무림맹 결성을 지양하고 있었다.

정파무림의 기둥인 구파일방이 그러하니, 오대세가 및 거대문파들 역시 선뜻 무림맹 결성을 주도할 수 없었다.

물론 그만한 명분도 없었다. 황실이, 구룡검주 주가려가 성승을 통해 무림맹을 결성하려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라면 무림맹의 외도(?)를 최대한 방지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다.

많은 우려가 있음에도 개방의 용두방주는 성승의 뜻에 따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로 사람을 보냈다.

그것이 성승의 뜻이자, 순리였기 때문이다.

* *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자네의 힘을 황제폐하와 황실의 안위를 위해 사용해주게.”

이현성과 공암대사의 비무 참관은 몇몇만 허락되었다.

주가려는 당연히 그중 한 명이었다.

그녀에겐 충격이었다. 같은 구룡검의 맹약자라도 아미파의 혜원사태보다 소림의 공암대사가 더 강했다.

그런 공암대사가 승패를 가르지 못했다.

이현성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덕분에 주가려는 더욱 그를 원했다. 그의 무력을 황실과 황제의 안위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서자 지체하지 않고 이현성과 자리를 가졌다.

“죄송합니다. 제 뜻은 황실에 있지 않습니다.”

주가려가 찾아왔을 때, 이미 예상했다.

그렇기에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단호한 이현성의 대답에 주가려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 정도의 무위라면 황실이 아니더라도 원하는 것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 무림인이니까.

그럼에도 아쉬웠다.

그런 경지에 올랐음에도 아직도 젊다.

즉, 얼마든지 더 강해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냥 포기하기에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게 뭔가. 부? 권력? 명예? 자네가 원하는 걸 폐하께서 주실 것이네.”

“죄송합니다. 마마. 제 뜻은 황실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황실고수가 되는 것을 거절당함이 아니라 자신의 청이 거부되었다는 것이 더욱 자존심 상했다.

자신은 황제의 누이인 장공주이자, 황실수호검인 구룡검주였다. 짧은 시간동안 많은 고비를 넘기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그의 거절이 마치 자신의 부족함을 지적하는 것 같아 순간 울컥한 것이다.

결국 흥분한 그녀가 선을 넘어버리고 말았다.

“감히! 황제폐하의 황은을 거부해?! 내 말이 우스워?! 구족을 멸족당한 후에야 눈물을 흘릴 참이더냐!”

“…….”

―마마!

순간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흥분해서 이성을 잃었던 주가려는 혜원사태의 전음에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지 못하듯 내뱉은 말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현성은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나직하게 말했다.

오히려 그 모습이 더 무서웠다.

“수개월 전, 어떤 무림세력의 고수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마마와 같은 제안을 했었지요. 그때 역시 거부했습니다. 그 이후 몇 번이나 위협을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그 빚을 꼭 갚겠다고요.”

움찔.

주가려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가 살기를 드러내며 위협을 한 것이 아님에도 그러했다.

이현성은 천사교를 지칭한 것이었지만, 그 속에는 자신을 위협하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저는 황제폐하와 황실에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다. 아직까지는 말입니다…….”

“…….”

그녀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이현성의 경고가 먹혔고, 스스로의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들 주가려를 몰아세울 수도 없었다. 어쨌건 그녀는 황제의 누이인 장공주였으니까.

결국 이현성은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저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마마.”

“…죄송해요. 저 역시 무례했습니다.”

흠칫!

예상치 못한 존댓말에 놀랐고, 이어진 눈물에 또 한 번 놀랐다. 자존심 높은 황족인 그녀가 일개 무부인 자신에게 존댓말과 눈물을 보일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현성은 무척 난처했다.

황실에 얽매이기 싫은 뜻을 굽힐 순 없으나, 그로 인해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행동에 이현성은 굳어버렸다.

그를 향해 머리를 숙인 것이다.

“…더 이상 황실사람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겠어요. 대신 폐하께서 위험하시면 도와주세요. …부탁이에요.”

“…고개를 드십시오. 마마.”

머리까지 숙이는 그녀를 보며 이현성은 난처하기만 했다.

주가려에게 고개를 들라고 종용했으나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방법을 바꾼 주가려를 보며 이현성은 한숨만 나왔다.

“…….”

“…알겠습니다. 저 역시 황제폐하의 백성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위험하시다면 그땐 한 손 거들겠습니다.”

덥석.

허락이 떨어지자 그제야 주가려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마워요. 그리고 약속 잊지 마셔야 해요.”

그녀는 다시 한번 다짐을 받고 밖으로 나갔다. 이현성이 말을 번복하지 못하게.

그렇게 주가려가 돌아간 후 홀로 남은 이현성은 마음이 답답해졌다. 결국 별채에서 밖으로 나왔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자 공기가 제법 쌀쌀해졌다.

오히려 답답함을 조금은 식혀주는 것 같았다.

“후… 태가장에서도 더 이상 지낼 수 없겠구나.”

태가장의 숨겨진 진의를 알 수는 없었다.

허나 황족인 그녀가 성승과 은밀한 회담을 가진 장소라면 이미 평범한 장원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최소한 황실과 연관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황제의 안위가 위협받게 된다면 한 손 거들겠다고 약조는 했으나, 황실사람이 되겠단 제안은 거부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태가장에서 지내는 것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 아래 갈 곳 하나 없겠어?”

천하는 넓다.

태가장과 정주가 아니라도 갈 곳은 많았다.

“천중산에나… 가볼까? 아니야. 아직은…….”

이현성은 하남성 남부에 위치한 천중산, 정확히는 천중산장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선뜻 결정할 수 없었다. 가족들을 만나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가족들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이 더더욱 발길을 막았다.

내각대학사인 문종학의 부탁을 받은 그의 동문들이 알아봤는데도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다.

천중산장은 물론, 세상에 살아 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 마음 때문에 선뜻 천중산장에 가볼 수가 없었다.

모두 죽었다는 상실감을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가볼 생각이었다.

언제까지 막연한 기대만 할 수는 없기에.

게다가 몇 년 후 천중산에서 혈사가 일어난다.

절세마공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 일로 한 명의 초절정고수가 세상에 드러난다.

천검(天劍) 한승.

천중산장의 주인이자 천검비록의 계승자.

무위는 물론, 인품 역시 대협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거인.

그렇기에 이현성이 가족들의 보호자로 그를 택한 것이기도 했다.

“아미타불… 같이 앉아도 되겠습니까. 이 대협.”

“아… 물론입니다.”

지척에 다가올 때까지 알지 못했다. 단순히 답답한 마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가온 사람은 성승 료굉대사였기 때문이다.

“대사님.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많이 어립니다. 그리고 하북팽가의 도왕께 사적으로 할아버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사님께서 제게 존대를 하신다면 팽 할아버지가 더 곤란하실 겁니다.”

“허허… 아미타불… 알겠네.”

무림에서의 위치만이 아니었다.

성승은 백수(白壽)를 넘은 무림 최고의 원로였다.

그런 성승이 존대를 하니 무척이나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성승은 쉽게 수락해주었다.

“무엇이 그리 답답하더냐?”

“그건…….”

* * *

“아미타불… 마마. 저흰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더 이상 나가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대사님.”

료굉대사 등 소림고수들은 소림을 향해 떠날 준비를 했다. 구룡검의 맹약자인 공암대사는 제외되었다.

태가장은 특별한 목적에 의해 세워진 장원답게 비밀 통로가 존재했다.

소림고수들이 은밀하게 태가장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떠나는 것도 비밀통로 덕분이었다.

“아닙니다. 마마의 뜻을 온전히 따르지 못함이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애초 무리한 청이었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대사님.”

무림맹 결성을 지지해달란 청은 들어주었으나, 무림맹주를 맡아달라는 청은 거절했다.

무림의 전전대 인물인 자신이 더 이상 무림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귀환살수

— 문지기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