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가문(사문)과 이름을 밝히는 것이 예의였다.
하지만 이현성은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 하는 입장이었다. 복면을 쓴 이유이기도 했다.
상대는 오대세가인 황보세가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인 천왕대주였다.
그런 그가 먼저 예를 표했는데, 자신을 숨기는 것은 크나큰 실례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천왕대주는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 정도 고수가 떳떳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럼에도 숨긴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자신은 물론 가문의 은인이기도 하였다.
자신이 죽었다면 소가주의 목숨 역시 부지할 수 없었을 테니까.
“은공의 뜻이 그러시다면 더 이상 여쭈지 않겠소. 허나 은혜를 입고 모른 척하는 것은 본가의 전통에 위배되오.”
천왕대주는 은혜를 갚을 기회를 달라 말하고 있었다.
이런 대단한 고수와 연을 이어가고 싶은 욕심이 담겨 있었다. 이를 모를 이현성이 아니었다.
그의 입장에서도 황보세가와의 연은 중요했다.
거대세가이자, 십정인 권왕의 가문이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를 밝히게 된다면 아무리 쉬쉬해도 혈천은 물론 사파사세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
혈천의 귀는 어디에든 있고, 사파사세의 정보력은 3대 정보집단에 크게 밀리지 않았다.
“본인의 청은 아까와 같소. 나의 존재를 잊어주시오. 그를 격퇴한 것을 귀하로 해주시오.”
“그건… 알겠소. 은공의 뜻이 그렇다면… 허나 그것만으론 부족하오.”
아무리 이현성의 청이라고 결국 득을 보는 것은 황보세가뿐이다.
이래선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니었다. 대황보세가의 이름에 먹칠을 할 순 없었다.
“…무리한 부탁이 될 수도 있소.”
“본인과 본가가 감당할 수 있다면…….”
“산동악가에 책임을 묻되 살길은 열어주시오.”
“그건!!”
어떤 부탁이기에 ‘무리한 부탁’이라는 말까지 할까? 생각하던 천왕대주의 언성이 높아졌다.
이번 일은 황보세가에게 무척이나 큰 피해를 입혔다.
천왕대가 반파된 것은 물론 자신 역시 한 팔을 잃었다.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팔 하나가 사라진 것으로 인해 몸의 균형이 어긋나게 된 만큼 제 실력을 발휘하기 힘들어졌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선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뿐인가. 소가주 역시 목숨이 위험했다.
그가 죽었다면… 황보세가의 운명은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산동악가의 살길을 열어주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은혜를 갚는다고 하지 않으셨소?”
“무리한 부탁이오! 그리고 은공께서 설마 악가 출신이시오!”
천왕대주와 두 대원은 이현성을 경계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이현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복면 때문에 보이지는 않았다.
“귀가가 감당할 수 있는 부탁이오. 그리고 본인은 악가는커녕 산동출신도 아니오.”
“그럼 도대체 왜 그런 청을 하시는 것이오?”
이현성의 말에 흥분했던 천왕대주가 조금은 진정된 듯싶으나 아직 완전히 진정된 것은 아니었다.
천왕대원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런 그들을 향해 이현성이 나직하게 말했다.
“이번 일에 악가가 깊이 연관된 것은 사실이오만, 주체는 따로 있는 듯하오. 결국 악가 역시 이용당했다는 뜻이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오. …귀가와 악가 그리고 산동무림의 분열. 그게 적의 뜻이 아니겠소? 강자의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주시오.”
“본인이 결정할 수 없는 일이오. 허나! 은공의 뜻을 가주께 전하리다.”
다행히 천왕대주는 이현성의 말을 이해한 듯싶었다.
가슴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했지만.
그때 이현성의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황보세가가 움직였네.
“이해해주셔서 고맙소. 귀가의 응원이 온 듯싶소. 그럼…….”
위지천의 전음에 이현성은 삼라만상을 펼쳐서 몸을 숨겼다. 눈앞에서 사라진 이현성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던 천왕대주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대는 도대체… 소가주를 모셔라. 본가의 응원과 합류한다.”
* * *
“아악!!”
“저, 정호야!!”
백랑은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사내를 집어던졌다.
그는 바로 마가장의 소장주인 마정호였다. 이에 마가장주는 불같이 화를 냈다.
“이게 무슨 짓인가!!”
“돈, 돈을 내놓으시오. 의뢰대로 살려왔으니까!”
마가장주의 호통은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살기충천한 백랑을 보며 움찔했다.
당황한 마가장주가 화제를 바꾸었다.
“왜, 왜 혼자인가?”
우드득……!
“왜겠소!”
“아, 알겠네. 도, 돈을 주겠네.”
“형님의 몫을 빼면 참지 않겠소.”
백랑의 요구는 과했다. 낭인이 의뢰를 수행 중에 죽을 경우 몫을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그게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물론 도리상 유족에게 약간의 보상을 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도리였기에 대부분은 보상하지 않았다.
“이, 이보게. 그건…….”
“장주의 자랑스러운 아드님께서 나와 형님을 버리고 도망친 덕분에 형님께서 돌아가셨소.”
“…….”
우드득……!
“형님의 마지막 부탁이 아니었다면 장주의 호위무사들이 버리고 간 그를 구해오지 않았을 거요! 이래도 형님의 몫을 빼겠소?”
그렇다. 괴한들의 시선을 묶기 위해서 흑운과 백랑을 제물로 삼았으나 그들의 안전은 보장된 것이 아니었다.
마가장의 호위무사들은 더 이상 마정호를 지키며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그는 자신들의 안위까지 위협하는 짐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를 버린 채로 호위무사들끼리만 도망쳤다.
물론 그 직후 함정에 빠져서 죽었다.
마정호는 그들이 버리고 간 덕분에 목숨을 지킬 수 있었던 셈이었다.
“아, 알겠네. 인정하겠네. 기다리게.”
“수작을 부린다면…….”
“걱정 말게. 나 역시 이 자리에 그냥 오른 것은 아니니까.”
마가장이 제법 부를 이룬 것도 그리고 그 부를 유지한 것도 장주의 안목 때문이다.
작은것을 위해 큰것을 잃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잠시 후 장주는 전표를 가져왔다.
전표를 받은 백랑은 의아했다.
아무리 흑운의 잔금이 포함되었다고 해도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못난 내 아들을 지켜줘서 고맙네.”
“고맙다는 말은 않겠소. 나에게 형님을 빼앗은 분노가 아직 가시지 않았으니…….”
그렇게 의뢰비의 잔금을 받은 백랑은 마가장에서 나왔다. 이제 이 돈을 흑운의 가족들에게 전달해야 했다. 그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서.
“하… 앞으로 어떡하지…….”
그는 혼란스러웠다.
십여 년간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의형 흑운이 죽으면서 이제 혼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길을 잃었다. 의지할 곳을 잃었다.
흑운의 가족들에게 돈을 전한 후 뭘 해야 할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괴로워하던 백랑은 누군가를 발견했다. 놀란 백랑은 급히 달려갔다.
“자,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무슨 일이오?”
백랑은 사내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그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사내들은 의아한 기색을 지울 수 없었다.
허나 백랑에게는 이유가 있었다.
“제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은공.”
“……!!”
백랑의 말에 두 사내, 이현성과 위지천은 놀랐다.
설마 자신들을 알아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복면을 한 자신들의 존재를 그가 알아차렸다는 것에 놀랐고, 동시에 살심을 품었다.
자신들의 존재는 알려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은공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눈빛이라… 이걸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형님께선… 이미 돌아가셨으니까요.”
즉, 그만 죽으면 자신들의 존재를 아는 자가 없다는 말이다. 백랑처럼 자신들의 눈빛을 기억하는 자가 또 있다면 몰라도.
허나 눈빛만으로 상대를 찾아내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아니, 거의 없었다. 그만큼 백랑이 특별한 것이다.
살인멸구를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절… 거둬주십시오.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이게 무슨 짓이오?”
백랑이 무릎을 꿇었다. 거두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위지천보다 어리지만, 이현성보다는 훨씬 나이가 많은 중년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이현성은 경멸이 아닌 호기심이 들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칼질뿐입니다. 그런 제가 엇나가지 않게 지탱해주던 의형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뻔뻔한 줄 아나, 제겐 의지할 분이 필요합니다. 당신이라면… 절 이끌어주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백랑은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강함에 매료되었다. 신마릉 안에서 봤던 이현성의 절대적인 강함에.
그를 다시 본 순간 떠올랐다.
그라면 자신의 목표가 되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백랑의 말에 이현성과 위지천은 그만 헛웃음이 나왔다.
사실 낭인치고 실력이 제법임은 사실이었다. 아니, 제법 탐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절정고수가 흔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런 그를 어찌 믿고 거둔단 말인가.
“그대 아니, 뭐라고 물러야 하오?”
“사람들은 절 백랑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본명은 곽호라 합니다.”
“…!! 곽호…….”
이현성은 깜짝 놀랐다. 그를 알기 때문이다.
고랑(孤狼) 곽호, 신룡검객 유백과 함께 그가 포섭하고 싶었던 인재 중 한 명이다.
별호가 달랐기에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구나. 흑운이라고 했던가. 그가 죽은 후 혼자 다니게 된 것이구나. 허… 이것도 운명일지 모르겠구나.’
산동의 외로운 늑대, 곽호.
흑운, 그는 이현성이 회귀 전에도 다른 이유로 죽음을 맞이했다.
곽호는 그 후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못한 채 떠돌았다.
그것이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으나 더욱 그를 고립시켰다.
고랑 곽호는 그렇게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애초 이현성이 산동성에 들린 두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넓은 산동성에서 곽호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은 알았다.
그렇기에 그를 만나지 못한다면 패왕도법이라도 회수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것도 먼저 따르겠다고 했다. 운명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댈 시험하겠소. 태산에서 소뿔의 골짜기와 노란 절벽 사이에 도법이 있을 것이오. 그걸 찾아서 익히시오. 그럼 그대의 청을 받아들이겠소.
태산은 높고 넓으며 험난하기로 유명한 산이었다.
괜히 오악지존(五嶽至尊)이란 별명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수많은 기암괴석(奇巖怪石)과 절애(絶崖)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중 우각동(牛角洞)과 황석애(黃石崖)라는 것도 존재했다. 이현성 역시 태산에서 우각동과 황석애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런 장소는 워낙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시험이었다.
험난한 태산을 쥐 잡듯이 돌아다니면 몸이 강해지는 것은 당연하고, 운이 좋다면 기연을 얻을지도 모른다.
“기필코 완수하겠습니다.”
“좋소, 그날을 기대하겠소.”
―난 이현성이라고 하오. 알려져서 좋을 게 없으니 다시 만날 그날까지 내 이름은 비밀로 해주시오.
위지천은 이현성과 곽호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다는 것을 알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의 곽호는 그에게 아무런 궁금증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곽호는 떠났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