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심마(心魔)? 열락음양고가 이 정도로 지독한 고독이었어?”
이현성 역시 사내였기에 여인의 섬세한 마음을 잘 몰랐다.
지독한 일을 당할 뻔한 여인이었다. 정신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괜히 겁탈을 당한 여인들이 광녀(狂女) 혹은 색녀(色女)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으로 정신이 망가지거나 스스로의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 색욕을 정당화시키면서 변하는 것이다.
제갈현지는 천지호연심법 덕분에 정신이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았으나 심마에 빠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삼라…만상이라면 가능할까?”
삼라만상이 무슨 만능 해결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심마가 찾아온 것이 스스로의 정신을 지키기 위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라만상의 힘이라면 그녀의 심령을 달래주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아니, 반드시 가능해야 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하… 정말 사람 힘들게 만드는 아가씨라니까.”
* * *
“당장 치료해!”
“그, 그게… 컥!!”
불같이 화가 난 언중경은 의원의 목을 꺾어버렸다.
아들인 언유광 때문이다.
언유광은 열락음양고의 양고를 복용한 상황이었다. 음고를 복용한 제갈현지와 음양화합을 통해서 성욕을 해소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니 그 역시 제갈현지처럼 열기로 인해 혈맥이 팽창했다.
허나 의약당의 의원들은 열기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젠장! 당주 늙은이를 너무 빨리 죽였어!”
의약당주는 신의(神醫)라곤 할 수 없지만 하북성에선 제법 명성 높은 의원이었다. 그렇기에 진주언가의 의약당주를 맡긴 것이다.
허나 언중경은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그를 제거했다. 그의 의술이 아깝지만, 비밀이 세어나가는 것은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선택이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을 당시에는 몰랐다.
“그 계집! 그 계집을 빨리 찾아야 해!”
제갈현지만 찾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아들인 언유광을 구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권력, 가문의 숙원까지도.
언중경은 가주의 권한으로 병력을 최대한 움직였다. 본가는 물론 주변까지 샅샅이 뒤지기 위해서였다.
그로 인해 이 일이 장로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장로들은 굳은 얼굴로 언중경을 찾아왔다.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것이다.
“가주, 도대체 이게 무슨 소란이오!”
이미 장로들이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언중경은 당황하지 않고 굳은 얼굴로 설명했다.
“제갈 소저가 사라졌습니다. 장로님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짜증 섞인 얼굴로 모여든 장로들은 언중경의 말에 경악했다.
현재 본가 내에 제갈 소저라고 불릴 인물은 단 한 명. 지봉(智鳳) 제갈현지뿐이다.
제갈세가주의 여식이자 삼봉의 일인. 그리고 가문의 대공자인 언유광과 혼사를 추진하고 있는 그녀였다.
그런 제갈현지가. 그것도 본가 내에서 사라졌단 말은 장로들을 경악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보고에 의하면 별채를 지키고 있던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혼절해 있었고, 제갈 소저는 행방불명이라 합니다.”
“제, 제갈 소저가 왜!”
“규 대협이나 제갈 대협께선 어디 계시오, 가주!”
“두 분은 취하셔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장강어옹 규염과 제갈세가의 장로 제갈인성이 본가 내에 있었다면 그녀 스스로 떠날 가능성은 희박하였다.
게다가 그녀를 호위해야 할 제갈세가의 무사들이 혼절해 있었다면 결국 납치를 당했단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최악이었다.
전대 가주인 권군의 고희연 때도 천지신검(天地神劍) 제갈인겸이 본가 내에서 습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갈세가주의 여식이 납치를 당했다.
제갈세가가 진주언가에 책임을 물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본가 내에서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이오!”
“본가의 경비를 어찌 섰기에!!”
“당장 경비 책임자를 문책해야 합니다.”
흥분한 장로들을 보며 언중경은 나직하게 말했다.
“장로님들. 진정하십시오. 문책은 나중의 일입니다. 그리고 제 권한으로 병력을 총 동원했으니 곧 단서가 나올 겁니다.”
“흐음… 알겠소. 가주.”
이로서 주도권은 언중경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죄송하지만 장로님들의 거처 역시 수색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가주. 그게 무슨 뜻이오?”
“오해하지 마십시오. 혹시 납치범이 장로님들 몰래 숨었을지도 모르기에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흠흠… 그럴 수도 있겠지.”
진주언가는 거대 가문이었다. 본가 내에 존재한 전각만 수십 채였다.
그중 장로들의 거처는 가주 다음으로 넓었다. 당연히 마음먹고 숨는다면 숨을 장소는 적지 않았다. 그 점은 장로들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또 무엇이 말이오. 가주.”
“아직 연락드리지 못했는데, 조금 전 하북팽가의 귀빈들이 방문했습니다.”
“하, 하북팽가에서 말이오!”
하북팽가는 같은 오대세가라도 제갈세가 이상으로 강력한 가문이었다. 특히 태상가주인 도왕은 남궁세가의 검왕과 쌍벽을 이루는 절대고수였다.
그런 하북팽가에서 귀빈이 방문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런 그들의 방문 사실을 자신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 불쾌했다.
“제갈세가에 볼일이 있는 듯합니다. 허나 너무 늦은 시각에 방문했기에 별채를 하나 내어주었습니다. 정식으로 인사는 내일 할 예정이었지요. 혹 주무실지도 모르는 장로님들께 폐가 될까봐 연락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요. 가주가 우리 늙은이들을 배려한 것인데…….”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북팽가가 머무는 별채를 수색하는 것이 그들이 불쾌하게 여길 수 있으니…….”
“그렇긴 하나 사정을 설명하면 그들도 이해해줄 것이오. 지금은 제갈 소저를 찾는 것이 우선이니 말이오.”
장로들의 말에 언중경은 내색하지 않을 뿐, 속으로 웃었다.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장로들이 먼저 제안을 한 만큼 문제가 되었을 때, 그 책임은 가주인 자신이 아닌 장로들에게 넘어갈 것이다.
“그럼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 * *
“무슨 일입니까?”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팽군악과 하북팽가의 무사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례도 이런 무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주인이기도 한 진주언가의 사람들이었기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언중경은 하북팽가의 체면을 생각해서 호법급을 보냈다.
“조금 전, 제갈 소저께서 납치를 당하셨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팽군악은 물론 하북팽가의 무사들은 기겁했다. 제갈현지가 납치됐다고 하니 기겁하는 것이 당연하다.
“현재 본가는 총력을 다해서 본가 내는 물론, 주변 일대를 샅샅이 수색하고 있습니다. 아, 오해는 마십시오. 혹 납치범이 별채 내에 숨어들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에 무례하지만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협조하겠습니다.”
자칫 두 가문 사이에 의(義)가 상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가주의 차남답게 팽군악은 의연하게 대처했다.
진주언가에 협조함으로서 한발 양보하는 대신 그들에게 마음의 빚을 지운 셈이었다.
“당숙, 언가에 협조해 제갈 소저를 찾아주십시오.”
“우린 널 호위하기 위해 온 것이다.”
“세 분 중 한 분만 제 곁에 계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습니다.”
형인 도룡(刀龍) 팽천악에 가려졌을 뿐, 팽군악 역시 도협이란 별호를 골패로 따낸 것이 아니었다.
동행한 벽력십팔도의 두 사람은 잠시 고민을 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거부했다간 자칫 진주언가에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협조 감사합니다. 팽 소협. 그럼…….”
그렇게 진주언가의 호법 예하 무사들은 하북팽가의 협조 하에 별채를 수색했다.
이러한 사실을 이현성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 * *
‘시, 싫어! 싫어!!’
이현성은 삼라만상의 기운을 통해 제갈현지의 심마를 제압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온전한 심령이 아닌 만큼 반발은 보통이 아니었다.
게다가 호심력(護心力)이 뛰어난 천지호연심법이었다. 그러니 당연한 일이었다.
―소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전 당신을 도우려는 것뿐이오.
‘싫어!!’
이현성은 삼라만상에 자신의 의지를 담았다. 허나 그녀는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제로 제갈현지가 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현성은 그녀가 자신에게 싫다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덕분에 더욱 난감해졌다.
―솔직히 본인은 소저의 심정을 다 이해할 수 없소. 허나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소. 부디 날 믿어주시오. 소저의 힘이 되어드리리다.
마침내 설득이 먹혔는지 제갈현지는 더 이상 반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삼라만상의 기운을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이현성은 다시 삼라만상에 의지를 담았다.
―약조 드리리다. 소저를 반드시 지켜줄 것을…….
두근.
순간 심마에 빠져 있는 제갈현지의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뛴 것을 이현성은 눈치채지 못했다.
이현성이 다시 삼라만상에 의지를 담으려고 할 때였다.
“어, 오라버니… 교교예요. 무사님들이 용무가 있으시데요.”
“이 대협, 팽모외다.”
곤이 잠을 자고 있던 문교교는 수색을 위해 방문한 팽가와 언가의 무인들에 의해 잠에서 깨고 말았다.
덜컥 겁이 났으나 팽가의 무인들과는 오는 사이 나름 친분을 쌓았다. 특히 팽군악은 이현성과 친우지간인 만큼 안심할 수 있었다.
다행히 그녀의 방은 이상이 없기에 마지막으로 이현성의 방으로 왔다.
진주언가의 호법은 당황했다. 자신과 동행한 인물이 누군가.
하북팽가에서 호법 대우를 받고 있는 벽력십팔도에 속한 절정도객이었다. 그런 그가 정중하게 청하고 있었다.
이현성에 대해서 모르는 그가 당황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진주언가의 호법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냥 물러날 순 없었다.
“실례인 줄 아나 잠시 안을 살피겠습니다. 그럼…….”
드르륵.
문을 연 순간 경악하고 말았다. 그리고 진주언가의 무사들은 바로 검을 겨누었다.
그곳에 자신들이 애타게 찾고 있던 제갈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현성이 그녀에게 추행(?)까지 하고 있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하북팽가의 무인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그가 제갈현지를 납치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오, 오라버니…….”
“대협…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해명해주십시오.”
“으음…….”
제갈현지의 심마를 상대하고 있던 이현성은 저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눈치챘을 때는, 이미 문이 열린 후였다. 덕분에 그녀를 숨길 수가 없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현성으로서는 이 상황을 해명할 방도가 마땅히 없었다.
진주언가의 대공자인 언유광에게 겁탈당할 뻔한 그녀를 구해서 데려왔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이현성은 만약을 대비해서 보관했던 고독이 생각났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무슨 일이시죠? 여러분들…….”
이제 막 해명하려던 이현성은 당황하고 말았다. 심마에 빠져 있는 제갈현지가 깨어났기 때문이다.
그녀가 지금 소란을 피운다면 모든 의심은 자신에게 쏠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다급해졌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