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그런 가문에 빚을 지운다면 차후 혈천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이현성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럼… 으으음…….”
이현성의 탄지(彈指)에 혼혈(昏穴)이 눌린 언유광은 그대로 꼬꾸라졌다. 제갈현지의 위로.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낸 이현성을 의식을 잃은 언유광을 발로 찼다.
“짐승만도 못한 놈.”
제갈현지를 가리고 있던 언유광이 벽 쪽으로 밀려가면서 그녀의 처참한 꼴을 보고 말았다.
이현성은 한숨이 나왔다. 그리곤 상의를 벗어서 그녀를 덮어주었다.
“하… 곤란하네, 할아버지께서 부탁하셨어도 거절했어야 했나? 아니야. 그랬다면 제갈 소저의 일생을 망쳤겠지.”
이현성은 마혈이 눌려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를 해혈(解穴)해 주었다.
허나 그건 실수였다.
심마로 인해 정신이 온전치 못한 그녀가 이현성에게 달려든 것이다.
“크으윽!”
“이, 이런…….”
그는 본능적으로 제갈현지의 양팔을 잡았다.
다행히 그녀가 다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누가 본다면 충분히 오해할 모습이 연출되었다.
그런데 그녀의 팔목을 통해 느껴지는 열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 열기는… 정상적이지 않은데… 혈맥이 들끓고 있어. 춘약(春藥)?”
이런 현상은 성욕을 돋우는 춘약 등에 중독되었을 때의 현상이었다.
그런 경우 해결책은 두 가지였다. 해약을 먹이거나 운우지정(雲雨之情)을 통해 춘약의 기운을 해소시키는 것이다.
이현성은 제갈현지를 제압한 채로 언유광의 품을 뒤적거렸다. 허나 해약으로 보이는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의 청백지신(淸白之身)을 더럽힐 수는 없었다.
그녀를 구해주려다 오히려 원수가 될 수도 있음이었다.
“이런 사달이 난 것을 보면 진주언가에 도움을 청할 순 없어. 제갈세가는 너무 멀고…….”
이 일의 원흉이 언유광이라면 진주언가에게 그녀를 맡기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그렇다고 제갈세가의 본가가 있는 호북성까지 갈 순 없었다. 이현성이 혼자라도 한 달 안에 갈 수 없는 거리였다.
그것도 전력을 다했을 때이지, 그녀와 동행해선 절대 불가능하였다.
게다가 그녀의 상태는 한시가 급하기에 그럴 여유 따윈 없었다.
“후… 우선 이곳부터 벗어나자, 저 짐승만도 못한 놈이 혼자 이런 일을 벌였을 리가 없어.”
아무리 언유광이 진주언가의 대공자라도 본가 내에서 이런 짓을 혼자 벌였을 수는 없다. 분명 그만한 조력자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최소한 가문 내에서 제법 힘을 가진 자란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녀를 이곳에 계속 두는 것은 위험하였다.
“어쩔 수 없지. 우선 이곳부터 벗어나자.”
이현성은 제갈현지를 안고 그곳을 벗어났다. 그리곤 자신의 객실로 향했다.
그녀가 사라진 것은 곧 알려지게 될 것이며,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안평현 전역이 진주언가의 권역인 만큼 어딜 가든 그들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그럴 바에는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고 진주언가 본가 내에 숨기는 것이 낫다.
그들도 본가 내에 그녀가 숨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할 테니까.
“후… 우선 열기부터 해결해야겠어.”
이현성은 자신의 침구에 제갈현지를 눕혔다.
해약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운우지정을 통해 춘약의 기운을 해소 시킬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우선 응급처치로 열기만이라도 해결할 생각이었다.
더 이상 늦는다면 혈맥이 열기에 의해 녹아버릴 수도 있고, 최악에는 열기가 뇌까지 침범해 백치가 될 수도 있었다.
춘약은 지저분한 약인 동시에 지독한 독이기도 하였다.
이현성은 제갈현지의 복부에 손을 얹었다.
스스로의 기운으로 열기를 누르려는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초절정고수인 그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조심해야겠어. 잘못하면 혈맥이 찢어질 수도 있겠어.’
이미 그녀의 혈맥은 열기로 인해 팽창한 상태라서 함부로 억누르면 오히려 혈맥이 찢겨질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이현성이 익힌 혈영공은 음험(陰險)한 기운이었기에 열기를 식히는데 도움이 된다.
내공을 세밀하게 운용한 덕분에 다행히 그녀를 괴롭히던 열기가 차츰 약해지는 듯싶었다.
‘뭐지? 춘약이 아닌가? 자, 잠깐… 고독(蠱毒)?’
그녀의 기운을 통제하고 열기를 식히는 과정에서 이질적인 무언가를 감지했다.
이현성은 평범한 무림인이 아니었다. 살수, 그것도 최고 수준에 올랐던 절대살수 중 한 명이었다.
게다가 무위로 절대살수에 오른 다른 혈살오객과 달리 정통파에 가까운 살수였다.
비록 하독술이나 고독에 대해 정통하진 않지만, 안목과 지식은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삼라만상 덕분에 미세한 차이를 눈치챌 수 있었다.
‘평범한 고독이 아니야. 춘약과 같은 현상이라면… 열락음양고?’
제법 식견을 갖춘 이현성도 환락음양고까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두 고독의 특성이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고독이라면 문제가 크다. 춘약이라면 이대로 열기를 식힌 후 해약을 구하면 된다.
이 지역 흑도를 뒤지면 구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허나 고독은 다르다.
고독 자체도 구하기 어려운데, 해약은 더더욱 어렵다. 안평현 내에서 구할 수 있을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
특히 고독의 배양방식에 따라서 해약 역시 달라지기에 배양자가 아니라면 구할 수 없었다.
‘어떡하지. 애초에 모른 척했으면 몰라도 여기서 그녀가 죽는다면 오히려 내가 범인으로 몰릴 수도 있다.’
지금 당장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녀를 구할 수 없다면 제갈현지를 다시 돌아가서 두고 와야 한다.
제갈세가까지 적으로 두면 여간 골치 아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혹시… 삼라만상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모산파의 정수인 기환십이결이 녹아든 삼라만상이었다. 심령을 제압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실제로 귀림의 소림주인 야래향의 심령을 제압하지 않았던가.
삼라만상의 기운으로 제갈현지의 머릿속에 있는 열락음양고를 조종할 수 있다면?
그녀의 몸 밖으로 배출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지금은 전혀 다른 방도가 없으니까.’
해약이 없는 이상 그녀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설사 청백지신을 더럽혀서 열기를 해소 시킨다 해도 그건 임시방편에 불과하였다.
열락음양고가 다시 성욕을 자극시킬 테니까.
‘다른 방도가 없으니.’
그 시각 언중경은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 * *
“그년이 사라졌다니! 그게 무슨 말이더냐!”
팽군악의 방문에 예감이 좋지 않은지, 언중경은 그림자를 제갈현지가 머무르고 있는 별채로 보냈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함이었다.
주변을 감시하던 그림자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별채가 너무 고요하다는 것이다.
제갈현지와 언유광이 한 몸이 되었다면 분명 야릇한 소리가 들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림자는 별채 안에 잠입했다. 그리곤 홀로 널브러져 있는 언유광을 발견했다.
별채 내를 수색했으나 제갈현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는 언유광만 챙긴 후 언중경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다음 지시를 받기 위함이었다.
“주변을 살폈으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대공자님 혼자서만…….”
“이이익!! 당장 병력을 풀어서 찾아내!!”
“그러다가 장로님들께서 의심을 하신다면…….”
무림세가는 무림방파와는 조금 다르다. 혈족 중심으로 형성된 조직인 만큼 가주라고 해도 권력을 독점할 수가 없었다.
특히 가문의 웃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장로들의 입김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신임 가주인 언중경조차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무림에서 명성이 대단한 권군(拳君) 언규철의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아직 가주가 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언중경으로서는 장로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초절정고수가 되어서 말석이라도 무림 백대고수에 이름을 올린 덕분에 장로들보단 더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다.
제갈세가와의 혈맹은 진주언가는 물론 언중경의 권력 역시 더욱 공고히 만들어줄 수단이었다.
“그건 내가 처리할 테니 당장 찾아내!!”
“존명!”
그림자는 언중경의 명령대로 제갈현지를 찾기 위해서 움직였다.
홀로 남은 언중경은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젠장! 이년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일이 자꾸 틀어지니 언중경은 짜증이 치솟았다. 동시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년이 스스로 도망쳤을 리는 없다. 그럼 조력자가 있단 말인데… 설마 하북팽가가?”
그가 할 수 있는 매우 합당한 유추였다. 애초에 그들의 방문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북팽가가 움직였다면 보고가 있었겠지.”
하북팽가의 무리를 감시하는 눈을 여럿 붙여두었다. 그들의 눈을 모두 피해서 별채를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별채와 제갈세가의 별채는 정반대다.
그곳까지 이동하면서 한 번도 걸리지 않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절대살수 아니, 삼라만상 덕분에 은신에서만큼은 살왕(殺王)에 근접한 이현성의 존재를.
“누구도 날 방해할 순 없어!”
* * *
‘한낱 미물에 불과한 고독이 삼라만상의 기운에 저항하다니.’
이현성은 삼라만상의 기운을 제갈현지의 뇌로 흘렸다.
고독의 심령을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허나 열락음양고의 저항은 예상보다 대단했다.
고독이란 특수한 방식으로 배양한 벌레였다.
그만큼 특수한 방법이 아니면 제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제갈현지에게 있는 고독은 열락음양고가 아닌 환락음양고의 음고였다.
지독하기론 고독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였다.
‘오냐, 어디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이현성은 삼라만상의 기운을 더욱 끌어올려서 음고를 압박했다.
부들부들.
음고는 물론 제갈현지 역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초절정지경에 오르면서 삼라만상의 기운 역시 강력해졌기 때문이다.
급기야 음고가 삼라만상의 기운을 피해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이를 두고 볼 이현성이 아니었다.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 굴복해라!!’
삼라만상은 물론 기환술도 기본적으로 염(念)에 큰 영향을 받는다.
여러 법문(法文) 혹은 진언(眞言)을 읊는 것 역시 염을 증폭시키기 위함이었다.
급급여울령이란 진언은 율령을 따르라는 강력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순간 음고의 떨림이 멈추었다.
‘됐어!’
다행히 삼라만상의 기운이 음고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현성은 음고에게 명령했다. 그녀의 몸에서 당장 밖으로 나오라고.
음고는 주인의 명령을 받은 것처럼 그의 명령을 따랐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코에서 징그러운 벌레가 기어 나왔다.
음고를 그녀의 몸에서 떼어낸 이현성은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꾸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증거로 남겨두는 것이 낫겠어.”
어쨌든 자신이 그녀를 이곳에 데려왔다. 사정을 모른다면 납치범으로 몰 수도 있었다.
그때를 대비한 증거가 필요했기에 고독을 없애는 대신 작은 호로병에 남아서 보관을 했다.
이현성은 그녀를 다시 깨웠다. 고독을 제거했으니 계속 제압해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크으윽……!”
“뭐, 뭐야?”
분명 고독을 제거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정상이 아니었다. 순간 당황한 이현성이지만 곧 그녀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