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즉, 상승 무리가 담긴 검무인 셈이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었다.
유백은 이현성의 검무 속에서 신룡검법의 무리(武理) 일부를 엿볼 수 있었다.
이는 그만큼 유백이 지독하게 신룡검법을 수련했기 때문이며, 그만한 재능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뿐이었다.
그 이상의 깨달음을 엿보기에는 유백의 준비가 아주 조금 부족했다.
실마리를 잡았으나 동시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어쩔 수 없지…….’
검무를 추던 이현성은 그의 표정에서 깨달음을 완전히 얻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을 전해도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소용이 없었다.
자신이 준 기회를 잡지 못했다면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원하시는 것을 얻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게 왜 이런 과분한 기연을 주신 겁니까?”
유백의 깨달음이 조금 부족했다는 것을 눈치챘으나 이현성은 내색하지 않았다.
상처에 소금을 뿌릴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나머지는 유백, 그의 몫이었다.
유백이 이현성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동시에 자신에게 기연을 준 이유가 궁금했다.
가문이 몰락한 이후, 주변의 냉대를 받았다. 유일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준 존재가 사천무림의 전설인 독종 당철영뿐이었다. 허나 그 역시 거둬준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처음 본 이현성이 자신에게 이런 호의를 베푼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안타깝다고요?”
“예. 좋은 스승 아니, 최소한 좋은 동역자(同役者)를 만난다면 그 재능을 꽃피울 텐데… 그렇지 못해 보이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
그 순간 유백은 울컥했다.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너무도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이다.
그는 순간적으로 이현성에게 ‘당신이 나의 동역자가 되어줄 수 있냐’고 말하려 했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런 분에 넘치는 청을 할 수 없기 때문도 있었고, 얼마 후면 자신은 사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북경에서 왔다는 말은 다시 북경으로 돌아간다는 말이었다.
사천과 북경은 대륙의 끝과 끝이었다.
이후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대로 인연이 끊어지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부족한 저이지만… 친우가 되어주실 수 없겠습니까?”
“친우 말입니까?”
이현성의 되물음에 유백은 지례 거절로 받아들였다.
“아, 아닙니다… 제가 주제도 모르고…….”
“아닙니다. 저보다 연장자이신 것 같은데, 제가 형님으로 모셔야지요.”
다행히 이현성은 거절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최소 열 살 이상은 차이가 나 보였기에 친우가 되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유백의 생각은 달랐다.
“나이가 무엇이 중하겠습니까? 형이 아닌 친우로 생각해줄 수 있겠습니까? 이… 형.”
“으음. 좋습니다. 유 형.”
이현성의 말에 유백이 환하게 웃었다.
오늘은 그에게 손에 꼽힐 정도로 기쁜 날이 되었다.
“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북경으로 오시오. 유 형.”
“그 말… 잊지 않겠소. 이 형.”
두 사람은 몰랐다. 그런 날이 생각보다 빨리 올 것임을.
* * *
‘오라버니… 도와주세요…….’
일은 점점 커져 갔다. 마음을 의지할 데가 없는 문교교는 더욱 고립되어가는 기분이었다.
급기야 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애초에 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기는 했으나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런 문교교의 마음속에 유일하게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현성이었다.
그가 와서 자신을 구해주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그녀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결국 기적은 일어났다.
“누구도 내 동생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만들 수는 없다!!”
누군가의 외침에 좌중은 움찔 떨었다.
목소리가 크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무림 명숙들까지 움찔할 정도로 섬뜩한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은 놀랍게도 약관쯤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교교야. 괜찮다. 이 오라비가 왔으니 이제 안심하거라.”
“오, 오라버니!”
이현성의 따스한 말에 결국 그녀의 눈에서 옥구슬과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문교교의 눈물을 본 이현성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리고는 그나마 안면이 있는 북궁연에게 물었다.
“북궁 소저. 무슨 일이 있었소? 교교가 왜 울고 있는 것이오?”
“지, 진정하세요. 이 대협.”
북궁연은 당황스러웠다.
이현성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오라비인 북궁무한조차 상대할 수 없는 고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지금 그에게서 풍기는 기세가 여태껏 자신이 잘못 판단하고 있었음을 알려주었다.
그 정도 수준이 아님을 모를 수 없었으니까.
“북궁 소저.”
더욱 차갑게 가라앉은 이현성의 목소리와 눈빛에 북궁연은 심장이 철렁했다.
수많은 사람을 베고, 스스로의 감정조차 벤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무심한 눈빛과 음성.
그것을 그녀가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북궁연은 대답할 수 없었다.
보다 못한 북궁성운이 끼어들었다.
“이 대협… 진정하… 헉!”
“북궁 대협. 본인은 북궁 소저께 물었소.”
이현성의 검이 북궁성운 장로의 목에 닿아 있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 누구도 그의 검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이현성이 검을 뽑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대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빠, 빠르다! 이런 후기지수가 있었던가?’
‘도대체 누구지?’
이현성의 정체를 모르는 명숙들은 그의 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들과 비슷한 지위를 가진 북궁세가의 장로가 제압당했다는 것이 불쾌했다.
그런 그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현성이 검을 회수하며 다시 물었다.
“북. 궁. 소. 저.”
“다, 당 소저가… 무, 문 소저를 무, 무시하면서…….”
“꺄악!!”
이현성은 문교교를 무시했다는 당 소저의 얼굴을 모른다. 허나 주변의 시선이 한 여인에게 몰렸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이현성의 무시무시한 살기가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아무리 독화라고 불린다지만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이현성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섬뜩함을 넘어 숨조차 쉬기 힘든 지독한 살기에 당령은 바들바들 떨었다.
보다 못한 사천당가의 호법 갈엽이 당령의 앞을 가로 막았다.
“건방진! 감히 본가의 영애… 큭!”
“…죽고 싶으냐. 내 동생을 눈물 흘리게 만든 계집을 응징하는데. 방해하면… 죽는다.”
오대세가의 호법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절강수(切鋼手) 갈엽.
강철조차 손으로 끊어버리는 수공의 대가였다.
비록 사천당가의 혈족은 아니었지만, 무위를 인정받아 사천당가의 호법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사천당가의 직계를 둘이나 동행하는 무리의 책임자로 그를 보낸 것이다.
“어… 어…….”
사천당가의 호법 갈엽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가슴에 검이 꽂혀 있었다.
갈엽도, 주변의 명숙들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가슴에 꽂힌 검을 바라봤다.
조금 전이야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그럴 수도 있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에 찔렸다는 것은 청년의 실력이 후기지수의 수준을 넘어섰음을 의미했다.
당연했다. 그냥 찌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일점혈이 녹아들어 있었다.
게다가 사실 두 사람은 실력 차이가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방적인 결과가 나온 것은 설마 진짜 손을 쓰겠냐는 오만한 생각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천하의 독종, 사천당가의 호법을 해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은혜는 두 배, 원한은 열 배로 갚는다고 유명한 사천당가였다.
마교와 은원을 맺어도, 사천당가와는 은원을 맺지 말라는 무림의 격언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주저하지 않고 사천당가의 호법을 찌르고, 직계혈족을 노렸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주저 없이 행했다.
이현성은 갈엽의 가슴을 찔렀던 검을 무심하게 거두었다. 그리곤 나직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심장을 피했으나, 다시 방해하면 그때는 다를 것이다.”
구명지로(求命之路).
심장을 포함한 내장기관들 사이에 존재하는 미세한 틈을 찔렀기에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인체를 꿰뚫어보는 이현성이기에 가능한, 너무나도 섬세하고 섬뜩한 검격이었다.
수없이 많은 실전을 겪었던 갈엽조차 더 이상 이현성의 경고를 무시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전의(戰意) 자체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를 지나친 이현성은 사색이 된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당령을 내려다봤다.
“…네년이냐. 감히 내 동생을 무시한 계집이…….”
“가, 감히! 누, 누구에게! 꺄악!!”
자존심하면 둘째가지 않는 당령다웠다.
말을 더듬으면서도 자존심을 세웠다.
허나 힘없는 자존심은 비참하기만 할 뿐이었다.
사천당가의 호법도 가차 없이 찌른 이현성이었다.
원흉인 그녀를 봐줄 그가 아니었다.
이현성의 검이 다시 움직였다.
살이 가르는 소리와 비명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푸욱!!
그 순간 피가 허공에 비산했다.
좌중은 경악하고 말았다.
호법이라도 사천당가의 혈족이 아닌 갈엽을 찌른 것과 혈족, 그것도 직계인 당령을 찌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들의 높고 높은 자존심을 생각하면 절대 타협되지 않는다.
“이… 형… 부탁…이오. 그녀를… 용서… 크윽…….”
“…유 형.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이현성의 검에 찔린 사람은 당령이 아니었다.
그녀를 감싼 호위무사 유백이 대신해서 찔렸다.
조금 전 헤어졌던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하필이면 이런 곤란한 관계로 마주했다.
그러한 그의 행동에 이현성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분이 풀리지는 않았으나 유백을 벨 수는 없었다.
단순히 탐나는 인재여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인정할 만한 사내였기 때문이다.
검을 거둔 이현성이 당령을 차갑게 노려봤다.
“유 형을 봐서 이번만 넘어가지. 다음에는 아무리 유 형의 부탁이래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계집.”
“…….”
반쯤 정신이 나간 당령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몸을 돌린 이현성이 문교교에게 다가갔다.
“미안하구나.”
“아, 아니에요… 오라버니…….”
이현성은 다리가 풀린 문교교를 부축해서 이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만약 저들이 보복하려고 한다면 곤란한 것은 바로 이현성 그였기 때문이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누구지? 배짱이 대단하군. 본가의 사람을 상하게 하다니 말이야. 두렵다면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싸구려 도발을 하지 않아도 숨길 생각은 없었다. 난 이현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추하군. 제 가문의 사람이 상했는데, 막을 생각조차 못 한 자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나?”
그는 사천당가의 미래라는 독룡 당천수였다.
당천수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평생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치욕 때문이다.
호법인 갈엽이나 직계인 당령도 문제였지만 사천당가의 미래라는 당천수는 또 격이 다르다.
저들에게 한 행동도 미쳤다고 할 수 있으나, 자신에게까지 저런 건방을 떨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