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먼저 손을 쓰는 사람이 상대의 목을 취할 수 있을 정도로 내상이 깊어보였다.
그때 은밀한 제안이 오갔다.
―이 정도 소란이라면 곧 금의위가 들이닥칠 것이오. 제압한 이들은 보내줄 테니, 이쯤 끝내는 것이 어떻소?
―이 빚은 언젠가 갚지.
이현성의 전음에 현휘군이 이를 갈았다.
마음 같아서는 끝을 보고 싶었으나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나름 외곽에서 싸웠다고는 하지만 결국 황도인 북경의 안이었다. 이 정도 격전이라면 금의위가 충분히 움직이고도 남을 것이다.
일개 관병도 아니고, 황실고수인 금의위라면 두 사람에게도 좋을 것이 없었다.
결국 현휘군의 북경 흑도 진출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젠장… 고작 흑도 애송이도 이기지 못하면 언제 복수한단 말인가.’
현휘군은 구웅방을 이끌고 돌아가면서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가 하북성 흑도를 일통하려는 것은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그런데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거침없는 행보에 처음으로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현휘군으로서는 뼈아픈 실책이 아닐 수 없었다.
‘돌아가는 대로 폐관수련을 해야겠어.’
자만의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한 현휘군은 더욱 강해지겠다는 결심을 다졌다.
그렇게 돌아가는 현휘군과 구웅방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이현성은 생각했다.
이것이 끝이 아니란 것을.
그가 다시 도전할 때는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기에 이현성 역시 정신을 번쩍 차릴 수 있었다.
“모두 흩어져서 복귀하라. 금의위에 걸리면 골치 아파지니.”
“존명!!”
힘찬 대답과 함께 흩어지는 흑룡방도를 보며 이현성은 씨익 미소지었다.
오늘의 싸움이 아주 무의미하지는 않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만큼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다.
‘으윽. 나도 한참 멀었구나.’
* * *
“오호? 지켜냈다고?”
황좌의 주인 황제는 오랜만에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앞에 부복한 사내, 천위령주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전반적인 피해는 흑룡방이 크지만… 방주 둘이 제압된 구웅방 역시 피해가 적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 되었네. …현휘군이란 자가 흑점이 지켜보던 자라고?”
“예. 폐하. 전(前) 천웅방주인 천잔마왕 현풍의 자(子)로, 그의 무공을 전수받았습니다. 현(現) 칠사인 천웅방주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으니, 적절한 도움을 주면 황실에도 득이 될 자라고 판단하고 있사옵니다.”
비록 관과 무림이 불가침조약을 맺었다고 하지만 결국 무림인도 황제의 백성이었다.
그렇기에 무림에도 황제의 그림자가 뻗쳐 있었다.
특히 현휘군처럼 이용 가치가 있는 자들은 흑점 등을 통해 지켜보고 있었다.
황실은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 자를 용 태감이 움직였다? 이게 우연인가?”
“정황이 포착된 것은 아니오나…….”
“…태태감의 입김이 작용했다? 허허. 요즘 두문불출하고 있다 들었거늘… 역시 태태감이로군.”
환관들의 정점에 있었다는 십이태감 중 한 명인 용 태감은 권력욕은 물론, 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
황실에 불었던 혈풍이 잠잠해진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눈을 돌리고 있었다.
관리들의 돈주머니라는 북경 흑도.
그중에서도 흑룡방을 미심쩍게 보고 있었다.
만약 추측대로 황제와 연결되어 있다면 위험할 수 있기에, 흑도방파를 움직여서 흑룡방을 찔러봤다.
허나 용 태감 본인도 몰랐다.
이런 상황조차 태태감의 작품이란 것을.
그들의 유추대로 흑룡방의 뒤에 황제가 있었다면 이번 일로 후폭풍이 불게 될 것이며, 그 후폭풍은 태태감이 아닌 용 태감이 대신 뒤집어쓰게 된다.
그렇기에 태태감은 용 태감을 이용한 것이다.
천자라는 황제조차 손대지 못하는 황실의 숨은 실력자다웠다.
“용 태감은… 아니 되었다. 아직은 두어라. 때가 아니니.”
“존명.”
쳐낼 때 과감히 쳐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었다.
자칫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를 범해선 안 된다.
그렇기에 황제는 용 태감과 태태감의 짓을 알면서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연이은 혈풍으로 인해 황실에 암운이 드리운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보다 의외군. 이번에는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늘…….”
황제의 눈들이 잠재적 가치를 가진 인재들을 지켜봤듯, 황제 역시 파란의 주인공을 눈여겨보았다.
지난 일 년간 그가 해낸 행보는 정말로 놀라웠다.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내각대학사의 내정자 문정학을 구한 것을 시작으로, 금의위를 포함한 젊은 무관들의 교두가 된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허나 진정 놀라운 것은 구문제독부와 동창이 연루된 일락방과 만금전장을 쓸어버린 일이었다.
물론 황제가 그 뒤에서 힘을 살짝 썼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대단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북경 흑도를 평정하고 흑룡방을 세웠다.
황제는 이러한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흑점에서 지켜보던 흑도의 숨은 고수까지 격퇴했다.
비록 승패를 가르지 못했다고 하지만 북경 흑도를 지켜낸 것이 사실이었다.
“조금 더 지켜봐 주지.”
그가 행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황제의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냉혹했다.
자신의 흥미를 끌기에 지켜보고 있고, 때로는 작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좌초된다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아니, 버릴 것이다.
황제는 그렇게 냉혹한 자였다.
“얼마나 더 성장하는지… 날 즐겁게 해줄지… 기대해보마.”
* * *
“…저희 적룡당에서는 12명이 죽고, 107명이 다쳤습니다. 그중 43명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다음 날 이현성은 오당의 당주들을 소집했다.
피해 보고를 받기 위함이었다.
생각 이상으로 각 당의 피해가 컸다.
특히 적룡당의 경우 백오십 여 명 중 백이십 명이라는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구웅방에서 도박장들을 중심으로 습격했기 때문이다.
청룡당의 경우, 순찰자만 습격당했기에 적룡당에 비해 적은 피해를 입었다.
“물질적 피해는 오만…….”
“되었다. 돈은 다시 벌면 그만이지. 백룡당주.”
“예. 방주님.”
“죽거나 불구가 된 방도의 가족에게 위로금과 먹고 살 방도를 마련해줘라. 그 외 부상자들은 약간의 위로금과 치료를 책임지도록.”
이현성의 후속 조치는 파격 그 자체였다.
부상자는 둘째치고, 사망자와 불구자의 가족들까지 챙기는 경우는 흑도에서 볼 수 없었다. 아니, 무림에서도 웬만한 명문이 아니라면 약간의 위로금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현성은 위로금은 물론 가족들의 생계까지 신경 쓰고 있었다.
흑도방파로서 전례가 없을 정도였다.
“방주님의 명대로 하겠습니다.”
“부족하다면 제가 조금 보태겠습니다.”
“저 역시…….”
예전 같으면 반발까지는 아니라도 불만을 가졌을 당주들답지 않게 순순히 받아들였다.
게다가 개인의 재산까지 내놓겠다는 적극적인 모습까지 보였다.
변해도 너무 큰 변화였기에 이현성이 얼떨떨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도 호되게 당한 만큼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구웅방을 쫓아냈으나 아직 그들의 전력이 건재했다. 즉, 언제 또다시 들이닥칠지 모른다.
때문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방을 위한 당주들의 마음가짐이 마음에 드는군.”
“아닙니다. 진즉에 그랬어야 했는데… 이제야 정신 차린 것이 죄송할 뿐입니다.”
겸손한 말이지만 이현성은 눈치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실제로 당주들 특히 삼당(적, 청, 금룡당)의 당주들은 사전에 만남을 가졌다.
이현성은 그들의 이런 점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흑도답고 인간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빙빙 돌리지 말고. 원하는 게 뭐야.”
“허흠.”
정곡을 찔렀는지 당주들은 헛기침까지며 얼굴을 붉혔다. 닳고 닳은 흑도인들 답지 않았다.
그들 중 적룡당주인 단벽호가 대표로 대답했다.
“저희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가르침이라… 정확히 뭘 말하는 거지?”
단번에 단벽호의 의도를 눈치챘으나 이현성은 일부러 모른 척했다.
지레짐작일 수 있고, 조금 더 애태울 필요가 있었다.
이현성의 의도대로 단벽호는 더욱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본당 아니, 모든 당의 수하들도 흑룡당처럼 무공을 익힐 기회를 주십시오.”
“무공을 말인가? 내가 왜?”
“예? 그, 그게…….”
예상치 못한 방주의 대답에 단벽호는 물론 당주들도 몹시 당황했다.
지금까지의 그를 봤을 때 당연히 자신들의 청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나 그것이 무리한 청이기도 했다.
비인부전이라는 무공을 쉽게 전수해줄 리가 없었다.
흑룡당에 도법을 전수해준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배우려면 다른 방법도 있었다.
흑룡당에서 다른 당으로 보직 이동한 이들이 있으니까.
허나 방주의 허락도 없이 익혔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먼저 허락부터 구한 것이다.
“흑룡당주. 자네 생각은 어떤가?”
“주군의 뜻이 곧 소신의 뜻이옵니다.”
과거에도 정중했던 묵장진이지만 지금은 더욱 정중하고 충성스러웠다.
구웅방과의 싸움을 통해 이현성이 자신들에게 준 가르침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흑룡방 내 유일한 무력대라는 흑룡당이었다.
만약 이현성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예전처럼 각자 싸우려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랬다면 결국 구웅방의 백웅대를 막기는커녕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잘 알기에 주군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깨달았다.
그의 반응에 이현성은 피식거리며 단벽호와 당주들을 바라보았다.
“단 당주의 청은 불가(不可)…라고 말하고 싶지만, 기회를 줘야겠지.”
앞서 고개를 떨구었던 단벽호는 기회를 주겠다는 이현성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머지 당주들 역시 눈을 반짝였다.
“하루에 최소 세 시진씩 기초훈련해라.”
“세, 세시진 말입니까? 어, 언제까지 하면 됩니까?”
“내가 그만 되었다고 할 때까지. 왜? 싫은가?”
“아, 아닙니다.”
당주들은 기겁했으나 거부할 수 없었다.
이번 일을 통해서 흑룡당과 나머지 당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겁하는 것도 당연했다.
세 시진이라면 반나절(6시간)이나 된다.
각자 맡고 있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반나절씩 훈련, 그것도 기초를 훈련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나 흑룡당은 기본 세 시진에 개인수련까지 따로 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그 외의 임무가 없기에 가능했지만 그만큼 격차가 벌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만두고 싶다면 언제든 그만둬도 좋다. 단, 끝까지 버틴 자에게만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포기할 자는 굳이 동참할 필요 없다.”
“아, 알겠습니다. 방주님.”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이현성이 그런 지시를 내린 것은 흑도인으로서 방탕하게 지낸 시간을 씻어내려는 것이다.
흑룡당을 제외한 당의 당원들 역시 이삼류 무인으로서 적게는 오 년, 길게는 십 년 이상 무공을 익혔다.
비록 그것이 하급 무공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아직 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까닭은 재능과 익힌 무공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