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하지만 다행히 그들은 아니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없으나, 최근 구웅방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이령님께서는 그들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구웅방? 북경에 그런 방파가 있었소?”
북경 흑도에는 방도(幇徒)가 백여 명이 넘는 방파부터, 열 명도 되지 않은 조직까지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물론 그만큼 모든 집단에 대해서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흑룡방을 습격할 정도라면 제법 규모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집단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 더 기이했다.
하지만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그들은 북경 흑도방파가 아니었으므로.
“북경이 아닙니다. 구웅방은 천진에 있는 방파입니다.”
“천진 말이오? 음? 천진의 오웅방은 들어봤지만, 구웅방은 처음 들어보는데?”
오웅방은 이현성도 알고 있는 흑도방파였다.
천진은 하북성 3대 도시 중 한 곳인 만큼 이권이 크다.
그런 천진을 대표하는 흑도방파답게 오웅방의 성세는 대단했다.
하지만 이현성이 오웅방을 기억하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것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오웅방의 비밀 때문이다.
그는 회귀했기에 그 비밀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추후에 오웅방의 비밀이 알려진다.
오웅방의 비밀은 이현성도 기억할 가치가 있었다.
“근래 이름을 구웅방으로 바꾸었습니다.”
“오웅방이? 이름을 바꾼 이유가 있을 것 같소만?”
“아직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북경에서 퇴출된 흑도방파들이 천진으로 흘러들었다는 첩보가 있었습니다.”
“설마……!”
이현성은 자신이 쫓아낸 흑도방파를 오웅방이 흡수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기준으로는 탐탁지 않지만, 흑도인의 입장에서는 제법 짭짤한 사업일 것이다.
‘후우. 나 때문에 세상이 또 바뀌었네…….’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이 세상에 변화를 주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회귀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흑룡방.
구웅방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오웅방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존재하다가 사라졌다.
‘그보다 오웅방 아니, 구웅방이 흑룡방을 노린다면 패웅(覇雄)… 그가 움직였다는 말인데… 이거 곤란한데…….’
패웅(覇雄) 현휘군.
구웅방의 주인으로, 흑도의 숨은 고수였다.
강한 것은 물론, 그의 숨겨진 신분을 생각하면 곤란한 상대였다.
하지만 동시에 상대해볼 만한 강자였다.
“이령 님께는 대신 고맙다고 전해주시오.”
“예. 그럼…….”
용무를 마친 쾌활림의 살수가 떠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현성은 애검(愛劍) 암천을 쥔 채 연기처럼 사라졌다.
* * *
“너무 쉽군.”
패웅 현휘군은 구웅방의 정예 삼백만 이끌고 북경으로 향했다.
방도만 일천이 넘어선 구웅방의 입장에서는 일부만 추린 셈이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황도는 검문검색이 심하기에 출입이 어렵다. 만약 전(前) 극락당주인 장 부방주가 황도에 끈이 없었다면 삼백 명 들이는 것도 어려웠을지 모른다.
“대방주님. 당연한 겁니다. 본방의 정예들을 흑룡방 애송이들이 감당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보다 흑룡방주와 흑룡당은 만만치 않을 거라 들었는데… 구 아우. 괜찮겠는가?”
“이 구완, 대방주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하하. 내 실없는 소리를 했군. 오랜만에 구 아우의 실력을 보세나.”
구웅방은 대방주인 현휘군 이하 네 명의 방주와 네 명의 부방주가 존재했다.
부방주들이 북경에서 퇴출된 방파의 수장들이라면, 네 명의 방주들은 현휘군이 오웅방을 세울 때부터 함께 온 이들이었다.
구완은 처음부터 현휘군의 편은 아니었다.
백웅파(白熊派)라는 작은 조직의 우두머리였다.
무공을 배운 적은 없으나 타고난 힘이 대단했다.
덕분에 당시 천진에서 나름 위세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 천진에 들어왔던 현휘군은 그의 잠재력을 한눈에 알아보고 제압 후 아우로 삼았다.
현휘군은 직접 구완에게 무공을 가르쳤고, 지금은 든든한 방주 중 한 명이 되었다.
구완은 물론 전(前) 백웅파 출신으로 만든 백웅대는 구웅방에서도 손꼽히는 조직이었다.
“예. 맡겨주십시오. 흑룡방주란 애송이를 대방주님 앞에 대령하겠습니다. 하하하.”
“부탁하네.”
구웅방에서 차출한 삼백 명 중 오십 명이 백웅대였다.
현휘군의 허락이 떨어지자 구완은 백웅대를 이끌고 흑룡방을 향해 떠났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현휘군이 나직하게 말했다.
“육승.”
“예. 주군.”
어둠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웅방의 방주 중 한 명이자, 현휘군이 천진에 오기 전부터 곁을 지키던 의제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현휘군의 그림자라고 불리는 인물이기도 했다.
“느낌이 좋지 않다. 자네가 지켜보다가 일이 틀어질 것 같으면 돕게.”
“존명!”
육승이란 중년 사내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휘군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러던 현휘군이 갑자기 피식거렸다.
“내가 무슨 생각을… 육승까지 갔는데 문제가 생길 리는 없지.”
구완과 백웅대는 가볍게 볼 사람들이 아니었다.
특히 구완은 현휘군이 알아본 것처럼 재능이 보통이 아니었다. 무공을 늦게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빠른 성장을 보여주었다.
비록 절정지경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타고난 신력 덕분인지 절정고수라도 상대하기가 버거웠다.
허나 그런 구완도 비교할 수 없는 고수가 바로 육승이었다.
육승과 또다른 심복의 합공은 자신조차 버거울 정도다.
그런 육승을 보낸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왜 느낌이 좋지 않은 거지…….”
* * *
“큭! 누구냐! 감히 여기가 어디라… 컥!”
“흐흐흐흐. 어디긴 흑룡방인가, 토룡방인가 하는 곳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무리가 흑룡방에 들이닥쳤다.
흑룡방은 북경 흑도를 평정한 방파답게 방도가 오륙백이나 되었다.
허나 흑룡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삼당(적, 청, 금룡당)은 본당이 아닌 외부에 본부가 존재했다.
이전의 소속이 각기 다른 만큼 은원이 섞여 있었다.
따라서 본방에 모아두었다가는 크고 작은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각기 떼어둔 것이다.
때문에 흑룡방 본방에는 백룡당과 흑룡당만 기거했다.
문제는 두 당을 합쳐서 일백이 간신히 넘는다는 점이었다.
흑룡당원들의 탈퇴 혹은 보직이동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미친!!”
“우리가 호구로 보이냐!!”
동시다발적으로 습격당한 만큼 흑룡방 본방에서는 삼당이 이미 습격당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무력적으로 제일 부족한 백룡당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때였다.
“갈!!”
움찔.
고함과 함께 한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묵장진을 위시한 흑룡당이었다.
떠날 자들은 모두 떠나고 남은 자들이었다.
게다가 묵장진의 혹독한 가르침 덕분에 눈빛부터 범상치 않았다.
그들의 모습에 괴한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거구의 사내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흑룡당이란 애송이들인가? 생각보단 괜찮아 보이는군.”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행패를 부리느냐!”
묵장진의 호통에도 괴한들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이 만만치 않은 자들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흑룡당은 전의를 불태웠다.
“조장들은 조원들을 이끌고 적을 상대하라. 죽여도 좋다.”
“예! 당주님!”
흑룡당의 조장들은 휘하 조원들을 이끌고 흩어졌다.
상대의 전력이 판단되지 않는 상황에서 무분별한 충돌은 위험했다.
따라서 조장들의 지휘 하에 움직이라는 뜻이었다.
흑룡당이 조장들의 지휘 하에 흩어지자 묵장진은 칼을 뽑아든 채 거구의 사내에게 걸어갔다.
“오냐. 내 직접 놀아주지.”
거구의 사내 아니, 구웅방의 구완이 철퇴를 휘둘렀다.
그러자 묵직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듣기만 해도 사람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를 상대하는 자는 묵장진이었다.
이 정도로 눈 하나 깜짝할 자가 아니었다.
콰아앙!
휘청!
구완의 무지막지한 힘에 묵장진은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엄청나군.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어.’
상대를 경시한 것은 아니지만 거칠어 보이는 구완의 실력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의 일격만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방심하다가는 아니,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 있는 강자라고 말이다.
웃고 있으나 구완 역시 다르지 않았다.
‘다 물렁한 놈들은 아니었군. 이 구완이 움직이기에 충분한 사내야.’
철퇴와 칼이 몇 번 충돌하면서 손해를 보는 것은 묵장진이었다.
그의 칼은 충분히 날카롭다.
하지만 너무나 단단한 구완의 철퇴로 인해 칼의 이점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근력만 볼 때 상대가 자신보다 위라는 사실을 인정한 묵장진이 내공을 운용했다.
이내 그의 칼이 빛나기 시작했다.
“좋아, 좋아. 그럼 나도…….”
기를 운용한 것은 묵장진뿐만이 아니었다.
구완의 철퇴 역시 은은하게 빛났다.
철퇴를 통해 구현된 기운은 날카로운 예기를 동반한 도기와는 많이 달랐다.
둔기인 철퇴의 특성 때문인지, 철퇴에 어린 기운은 굉장히 단단한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베지 못하면 뭉개질 수 있다는 압박감을 받았다.
컁! 컁! 컁!
이제는 흑도인이 되었으나, 수 년 전까지만 해도 장수로서 인정받았던 묵장진이었다.
지휘능력뿐만 아니라 무력 역시 뛰어났다.
그렇기에 기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런 묵장진과 달리 전형적인 흑도 출신인 구완이었다.
뒤늦게 무공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정통파인 묵장진을 압도했다.
흑도인도 고수가 될 수 있다는 예를 보여주는 듯싶었다.
허나 공든 탑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법.
뒤로 갈수록 묵장진의 진가가 빛을 발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콰쾅!!
휘청.
초반에 강력함을 보이던 구완이 점점 약세를 보였다.
십여 년도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소년 때부터 기초를 쌓은 묵장진과 같은 탄탄함을 보이는 것은 힘들었던 것이다.
덕분에 구완은 뒤로 갈수록 묵장진의 칼을 막거나 피하는데 급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틈을 보이고 말았다.
“끝이… 헉!”
묵장진의 칼이 구완의 옆구리를 베려는 순간이었다.
섬뜩한 살기가 묵장진을 휘어감았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그는 구완을 베는 대신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제법이군.”
“유, 육 방주!”
“구 방주. 몸을 추리게. 마무리는 내가 맡지.”
구완은 뭐라고 하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믿지 못하고 육승 방주를 보낸 것이 불쾌하긴 했으나 패자무언(敗者無言)이었다.
흑룡당주를 쓰러트리지 못한 이상, 대방주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큭!!”
과연 육승은 강했다.
아무리 구완을 상대하느라 지쳤다고 하지만 묵장진이 십 합도 막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빈틈을 드러내고 말았다.
육승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날카로운 검이 묵장진의 빈틈을 찔렀다.
“큭!”
“묵 당주. 아직 많이 부족하군. 하지만… 내 말을 알아들은 것 같으니 기회를 주겠네. 본방을 가볍게 여긴 무지한 자들을 처리하게.”
“존명!!”
육승의 검에도 묵장진은 무사할 수 있었다.
묵장진이 구완을 베지 못하고 물러난 것처럼 육승 역시 묵장진을 베지 못하고 물러났다.
아니, 물러났으나 대신 팔 하나를 내놓았다.
언제 왔는지 알 수 없는 흑룡방주 이현성의 검에 의해서.
다시 칼을 쥔 묵장진은 큰 소리로 대답한 뒤 구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