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수고한 게 뭐가 있겠소. 그런데 무슨 일이오?”
“도련님께서 이 대협께 소개시켜드리고 싶은 분들이 계시다고, 수련을 마치면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태규가 말이오? 앞장서시오.”
장원의 하인 중 한 명으로 문태규의 지시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인이 안내한 곳은 문태규의 거처가 아니었다. 장원에 있는 작은 정자였다.
“형님. 수고하셨습니다!”
“오라버니. 수고하셨어요.”
“수고랄 것은…….”
이현성이 도착하자 문태규와 문교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이현성은 두 남매의 인사를 받으며 정자 안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젊은 남녀들이 앉아 있었다.
권문세가의 후예들인지, 하나같이 값비싼 비단옷을 입고 있었으며 여유가 느껴졌다.
그들 중 청년들의 눈빛에서 질투가 엿보였다.
이현성이 문교교를 그저 여동생으로 보기 때문이지, 그녀의 미모는 한창 물이 오르고 있었다.
내각대학사의 여식이란 배경뿐만이 아니더라도 북경 청년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아, 저분들을 소개시켜드리려고 형님을 모셨습니다. 이분은 이부상서 연 대인님의 차남이신 연우성 공자이시고, 이분은 호부상서 방 대인님의 삼남이신 방욱 공자이십니다. 그리고 이분은…….”
“북궁무한이오.”
“북궁연이에요.”
내각대학사 내정자의 암살미수사건으로 인해 많은 관리들이 파직 등 처벌을 당했다.
사건의 중심에 있던 전임 호부상서, 이부상서, 우통정, 제주 등은 목이 날아갔다.
그들은 시작에 불과했다. 조금이라도 연관된 자는 파직 및 좌천이 되었다.
그렇게 빈 자리에는 새로운 관리들이 채워졌다. 연우성과 방욱은 새롭게 임명된 호부, 이부상서의 자식들이었다.
허나 이현성의 흥미를 끈 사람은 따로 있었다.
‘북궁세가라…….’
황도의 수비를 책임지는 구문제독부(九門提督府).
그런 구문제독부를 책임지고 있는 가문이 바로 북궁세가였다.
무림에 남궁세가가 있다면 황실에는 북궁세가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무가이기도 했다.
현(現) 구문제독은 황실 십대고수 중 한 명이며, 북궁무한과 북궁연은 구문제독의 손주들이었다.
즉,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권력의 중심에 선 고관들의 후예들이란 뜻이었다.
“구문제독님의 장손이신 북궁무한 공자와 손녀이신 북궁연 소저입니다. 형님.”
“문 대인께 신세지고 있는 이현성입니다.”
“…제가 의형으로 모시고 있고. 엄청 강한 분이세요.”
좌중은 내각대학사의 아들인 문태규가 의형으로 모신다는 부분에서 흥미를 보였으나 그뿐이었다.
이현성이 대단한 가문의 자제로 보이지 않았다.
일개 무부(武夫)라면 그들이 관심을 보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문태규의 말에 반응이 바뀌었다.
“그리고 금의위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금의위의… 교두란 말이오? 저런 젊은 분이 말이오?”
입이 무겁던 북궁무한이 처음으로 반응을 했다.
그 외에도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황제의 친위군인 금의위는 하나같이 고수이며, 그런 그들을 가르치는 교두라면 당연히 보통 사람이 아니란 뜻이었다.
저들이 놀라자 문태규는 신이 났다. 허나 이현성이 가로막았다.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교두라고 해도 정식 교두는 아닙니다. 위 대장님. 그러니까 위표 부천호님의 부탁으로 작은 도움을 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아…….”
관심을 보이던 연우성과 방욱은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흥미를 거뒀다.
정식 금의위 교두라면 친분을 맺어둬도 좋겠지만, 개인적인 부탁을 받고 가르치는 것이라면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허나 북궁무한은 달랐다.
무인이자 곧 임관(任官)을 앞두고 있는 만큼 이현성에게 호승심을 느꼈다.
“가르침을 받고 싶소.”
“태규의 말 때문에 오해를 하시는 듯합니다. 저는 그래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
이현성으로서는 난감했다.
금의위사들이야 실력으로 뭉개버리면 그만이지만, 구문제독의 장손은 그 입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후… 알겠습니다. 큰 기대는 마십시오.”
“하합!!”
북궁무한의 검이 호쾌하게 허공을 갈랐다.
검로(劍路)가 깔끔하고, 검격(劍擊)이 강력했다.
기초가 탄탄한 것이 검을 제대로 배웠음을 알 수 있었다.
이현성은 그런 그의 검을 피하거나 막아내며 관찰했다.
‘이제 약관으로 보이는데, 벌써 일류의 틀을 벗어나려고 하는구나. 역시 북궁세가인가.’
지금은 많은 무관들을 배출하는 명문이지만, 백 년 전에는 무림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무림세가였다.
그런 북궁세가가 이름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몰락했다.
북궁세가의 자존심인 멸천검법이 실전되었기 때문이다.
무림에서 약자란 무척이나 서글픈 일이었다. 그들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순리였다.
결국 북궁세가는 무림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오십 년도 채 지나기 전에 북궁의 이름이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황도의 수호신인 구문제독이라는 이름으로.
“역시 기본 검술로는 어렵군. 그럼… 이건 어떻소?”
그 순간 갑자기 북궁무한의 기세가 변했다. 이현성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멸천검법인가… 기대되는군.’
북궁세가에서도 실전되었던 멸천검법(滅天劍法).
놀랍게도 황실보고(皇室寶庫)에 잠들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북궁세가는 군부에 투신했고, 이를 악물고 공을 세웠다.
그 과정에서 북궁세가의 수많은 무인들이 희생되었다. 허나 그들의 희생은 개죽음이 아니었다.
결국 가문의 절학인 멸천검법을 되찾았고, 구문제독이 될 수 있었으니까.
북궁무한은 그런 북궁세가의 종통으로서 멸천검법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멸천검법은 무척이나 위력적인 검법이었다.
쾅!
“후… 강하구려.”
“시작일 뿐이오!”
멸천검법은 강력했다.
검을 쥔 손을 통해서 느껴지는 찌릿찌릿한 통증이 이를 증명해주었다.
허나 북궁무한의 입장에서는 생각이 달랐다.
멸천검법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유 있게 막아내는 이현성의 모습에서 북궁무한은 호승심을 불태웠다.
이런 상황은 이현성은 힘들게 만들었다.
‘다치지 않게 제압하기가 쉽지 않겠어.’
이제 혈살객은 아니지만, 그가 익힌 검법은 대부분이 살수검법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표적을 죽이기 위한 검이었기에 비무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금의위사의 경우는 실력의 차이도 컸고, 부상을 입혀도 상관없이 뭉개버릴 생각이었기에 몰아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북궁무한은 구문제독의 장손이었다. 상처를 입혀서는 아니 된다.
그러는 사이 북궁무한의 검은 더욱 강렬해졌다.
‘어쩔 수 없나.’
부상도 완쾌되지 않은 상황에서 더 이상은 무리였다.
결국 이현성은 방어 대신 검을 휘둘렀다.
살(殺)이 가득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북궁무한은 당황했다.
쾅!
“큭! 오라!”
이현성의 살검에 당황한 북궁무한이었으나 곧 신색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현성의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이현성의 검이 부서지더니 검조각들이 비산하기 시작했다. 파검술(破劍術)이었다.
무인으로서 그리고 예비 무관으로서 살아온 북궁무한으로서는 설마 무인이 제 검을 파괴해서 공격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북궁무한이 누구인가.
다음 대 북궁세가를 이끌 후기지수였다.
흔들린 평정심을 빠르게 되찾고는 검을 휘둘렀다.
휘둘러진 검은 검막이 되어서 검조각들을 튕겨냈다.
“무인이 제 검을 파괴하더니 제정신… 큭!”
“여기까지입니다. 북궁 공자.”
언제 다가왔는지 이현성은 북궁무한에게 다가가서 그의 검을 뺏어, 오히려 그를 겨누었다.
북궁무한은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이기려고 해도 검을 부수는 편법은 무인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보며 이현성이 나직하게 말했다.
“실전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진정한 장수가 될 수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군요.”
이현성은 북궁무한의 검을 되돌려주곤 돌아갔다.
수련장에 멍하니 서 있는 그를 뒤로한 채.
‘후… 그의 경지가 낮고 많이 미흡해서 그렇지, 아니었다면 위험할 뻔했어.’
황실은 물론 무림에서도 인정한 최고의 검법답게 멸천검법은 강력했다.
회귀 전에 초절정고수도 암살했던 그였지만 암살과 생사결은 다르다.
순간 이현성은 신공절학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느꼈다.
일개 살수로 그칠 것이 아니라면 자신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 신공절학이었다.
‘기연… 찾아와야겠어.’
* * *
“젊은 무관들이 대학사의 장원에 모여든다?”
천위령주의 보고에 황제는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비록 역모는 아닐지라도 권력쟁투로 인한 내각대학사 내정자의 암살미수 사건이 있었다.
그로 인해 많은 관리가 삭탈관작(削奪官爵)을 당했고 교체되었다.
그중에는 고관대작까지 포함된 상황이었다.
그런 시국에 젊은 무관들이 새로운 권력의 중심에 선 내각대학사의 장원에 드나든다면 의심스러운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흥미를 보였다.
“대학사님의 영식 혹은 금의위 부천호 위표를 만난다는 명분이지만, 실제로는 이현성에게 비무를 청하거나 가르침을 받기 위함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자존심 강한 젊은 무관들이 말이지?”
이현성을 찾아오는 무관들은 대부분 이삼십 대의 하급 무관들이었다.
개중에는 사십 대로 백호급 무관들도 있었다.
젊다는 말은 그만큼 혈기왕성하고 패기 넘친다는 뜻이었다.
그런 젊은 무관들이 어린 청년에게 가르침을 청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일각에서는 대학사께서 인재들을 모아서 새로운 파벌을 형성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보이고 있습니다.”
“병부나 사례감이 말인가?”
“…송구스럽습니다.”
호부나 이부처럼 칼바람을 직격으로 받은 곳도 있었으나, 병부(兵部)와 같은 곳은 큰 변화가 없었다.
즉, 여전히 권력을 굳건히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내각조차 손을 댈 수 없는 황실의 특수한 집단이 바로 환관들이었다.
환관들은 십이감(十二監), 사사(四司), 팔국(八局)으로 구성된 궁중 이십사아문(二十四衙門)에 종사하고 있으며 황실 전반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다.
게다가 황제의 눈과 귀이자, 비수인 동창 역시 환관들로 구성되었다.
그런 환관들의 총원체가 바로 십이감의 하나인 사례감(司禮監)이었다.
즉, 기성 권력의 상징과 같았다.
그런 병부와 태감들이 새로운 권력의 중심에 선 대학사를 경계하고 견제하려는 것은 당연했다. 자칫 자신들의 권력을 침해받을 수 있었으니까.
“놔두게. 음… 보기만 하면 재미없지. 그걸 그 아이에게 전하게.”
“그것이라시면… 서, 설마! 비고(秘庫)에 있는 그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황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던 천위령주는 갑자기 눈이 커졌다.
황제가 전하라는 것이 뭔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놀라는 천위령주를 보며 황제는 미소를 지었다.
천위령주가 놀랄 정도로 그 효용가치가 어마어마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허나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