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문교교 역시 소녀다. 아름다운 옷이나 장신구를 보며 눈이 가는 것이 당연했다.
문종학이 낙향 전에 한림원의 학사였다고 하지만 청렴한 성품을 가졌기에 녹봉 이외에 착복한 재산은 없었다.
그런 문종학의 자녀인 문교교는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사치적인 생활은 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이런 최고급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은 적이 없었다.
“하하. 농담이다. 기왕 옷을 지은 김에 대인과 태규의 옷도 짓거라.”
“그, 그래도 될까요.”
“내 이렇게 신세를 지고 있는데, 그 정도 보답도 못하겠느냐.”
시원하게 수락하는 이현성을 보며 문교교는 가슴이 뛰었다.
고은 비단옷을 가질 수 있다는 점도 있었으나 제 가족을 신경 써주는 이현성이 더욱 눈부시기 때문이다.
이현성은 소녀의 방심을 흔들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사내였다.
문교교는 고개를 푹 숙이곤 나직하게 말했다.
“그, 그럼 옷을 짓는 김에 오라버니 것도 지을게요.”
“음… 내 것도? 그래. 그렇게 하자꾸나.”
자신의 것을 빼고 그들의 옷만 지은다면 부담스러워할 수 있기에 이현성은 문교교의 청을 받아들였다.
“나는 검은색이 마음에 드는구나.”
“그렇게 할게요.”
기뻐하며 돌아가는 문교교에게서 이현성은 제 여동생 이현성을 투영했는지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동시에 가족들이 살아 있는지, 잘 지내는지 알 수 없었기에 답답하기만 했다.
하지만 애써 무시했다.
아직은 자신이 그들을 찾지 않는 것이 오히려 가족에게 나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계획대로 진행하려면 몸부터 빨리 회복해야 해.’
뭘 하든 몸이 멀쩡해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현성은 부상의 회복에 집중했다.
* * *
“합!”
위표의 지휘하에 금위군사들이 수련을 했다.
경계근무를 서야 하는 일부를 제외하곤 수련을 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일과였다.
저들과 달리 금의위사들의 경우는 따로 수련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금의위사들이 익히고 있는 무공들은 황실무공이다 보니 외부에 유출될 것을 우려해서 조심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금위군사들이 익히고 있는 창검술은 숨길 정도로 뛰어난 무공이 아니었다.
게다가 마흔에 가까운 정예군사들에게 따로 수련장을 제공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유일한 중(中) 수련장에서 그들의 수련을 시키고 있었다.
“팔만 아니라 허리를 써라! 그래서 힘이 제대로 실리겠어!!”
“예! 대장님!”
그들이 지금 익히고 있는 창술은 격창십팔세(擊槍十八勢)라는 이류창술이었다.
비록 이류창술이었지만, 백병전은 물론 군진으로도 전환이 가능했다.
만약 내공만 받쳐준다면 능히 일류창술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나름 잘 만들어진 창술이었다.
다만 격창십팔세에 어울리는 내공심법을 찾아내지 못했기에 금의위 직속 금위군사들에게 전수되었다.
금위군은 일반 금군들보다 뛰어난 군사들이었다.
그러나 절정고수인 위표의 눈에는 성이 차지 않았다.
그러던 중 위표에 눈에 들어오는 자가 있었다.
“그만!!”
위표에 외침에 창을 찌르던 삼십여 명의 금위군사들이 창을 회수했다.
그런 그들을 훑어본 위표가 외쳤다.
“오늘 수련은 이쯤 하겠다. 각자의 무기를 손질한 후 쉬어도 좋다.”
“충!”
금위군사들이 거처로 돌아가자 위표는 그들의 수련을 지켜보고 있던 인형에게 다가갔다.
조금 전까지 위엄을 보이던 위표답지 않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이 대협께서 보시기에는 어떠십니까? 저희 군사들이.”
“저 말입니까? 글쎄요. 제가 창술에는 아는 것이 많지 않아서… 그래도 물으시니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금위군의 수련을 구경하던 인물은 바로 이현성이었다.
부상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기 전이었지만, 거동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간간이 밖에 나와서 바람을 쐬곤 했다.
그 역시 무림인인 만큼 금위군의 수련에 눈이 갔던 것이다.
“무림의 창과 달리 화려함보다 간결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도검을 익힌 무림인들이 대부분이지만 창을 익힌 창수가 없지 않았다.
그들의 창에는 변화가 가미되어서 힘의 배분이나 효율성을 높였다.
그에 반해 금위군의 창은 변화보다는 위력에 치중했다.
그러다 보니 창술이 무척이나 간결했다.
한 사람만 상대하는 비무가 아닌 다수를 상대하는 군사였기에 실전적일 수밖에 없었다.
“비교적 익히기 쉽고, 군진을 운영하기에 수월하겠더군요.”
“맞습니다. 격창십팔세의 장점이지요.”
변화가 현란할수록 호흡을 맞추기 힘들기에 군진을 운용하기가 어렵다.
이건 위표는 물론 무공에 대한 식견이 제법 되는 이라면 누구나 간파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위표는 자신보다 뛰어난 이현성에게 조언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원하는 것은 들을 수 없었다.
그때 이현성의 말이 이어졌다.
“다만… 연결이 자유롭지 못한 것이 아쉽더군요.”
“예? 연결이 자유롭지 못하다니요? 물론 완벽하지는 않지만, 연계를 이룰 수 있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격창십팔세는 말 그대로 열여덟 자세로 이루어진 창술이었다.
한 자세, 한 자세만 펼치는 것보다 각 자세를 연계할수록 그 효과가 커진다.
그렇기에 위표는 격창일격세부터 격창십팔세까지 연결할 수 있게 가르치고 있었다.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위표를 보며 이현성은 고개를 저었다.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들이 익히고 있는 창술이 격창십팔세이었던가요? 격창십팔세의 형(形)이 몇 개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열여덟…….”
이현성은 그의 대답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나직하게 대답했다.
“무궁무진합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왜 첫 번째 자세에서 두 번째 자세만 연결하십니까?”
“그야 연결시키면 더 위력적이기… 하!”
그제야 이해했는지 위표는 탄성을 질렀다. 그리곤 놀란 눈빛으로 이현성을 바라보았다.
“첫 번째 자세에서 세 번째, 네 번째 동작으로 바로 연결해도 됩니다. 열여덟 자세를 조합하면 조합할수록 새로운 형이 나올 수 있습니다. 격창십팔세의 동작이 간결한 진짜 이유입니다. 조합할수록 수많은 변화를 낳을 수 있으니까요.”
그 순간 위표는 머리에 망치를 맞은 것처럼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싶었다.
“연환… 무수한 변화…….”
그는 눈앞에 이현성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이현성이 해준 말은 금위군의 격창십팔세에 대한 조언이었다.
허나 위표는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런 위표를 보며 이현성은 미소를 지었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구나.’
이현성은 자리를 비켜준 후 금의위사에게 위표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이에 금의위사들은 위표의 주변을 통제해서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했다.
* * *
“이런 선물을 받아도 될지 모르겠소.”
문종학은 새하얀 백의를 보며 말했다.
황제에게 하사받은 비단으로 지은 옷 중 한 벌로, 문종학에게 선물한 옷이었다.
최고급 비단으로 지은 옷답게 감촉은 물론 기품까지 느껴졌다.
“이렇게 신세를 지고 있는데, 저는 고작 옷 한 벌 선물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마십시오. 대인.”
“신세는 본인이 진 것을… 게다가 제 자식들의 것까지…….”
“제가 선물하고 싶었던 것이니 받아주십시오.”
청렴한 문종학이니 이런 고가의 비단옷을 입은 적이 없었다.
처음 이 백의를 받았을 때, 문종학은 여식인 문교교를 혼냈다.
비록 이현성이 허락했다고 하지만 이래선 아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물 흘리는 여식을 보며 문종학은 학자로서 청빈한 것은 당연하지만, 자신의 신념 때문에 자식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강요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깨끗한 물에는 물고기가 살기 힘든 법.
권력의 중심에 선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를 계속 괴롭혀왔던 명제이기도 했다.
“감사히 잘 받겠소. 본인 역시 이 대협께 선물하고 싶소. 갖고 싶은 것이 없으시오?”
“딱히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정 선물하고 싶으시다면 검 한 자루만 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쓰던 검을 잃어버려서 손이 허전하네요.”
청살당주와 싸운 이후 의식을 잃고 실려왔기에 검을 챙기지 못했다.
물론 전에 사용하던 검은 대장간에서 구입한 평범한 철검이었기에 미련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검이 없으니 손이 허전한 것도 사실이었다.
“아, 본인이 무인이 아니다 보니 신경 쓰지 못했구려. 괜찮은 물건으로 선물하겠소.”
“균형만 잘 잡혀 있으면 되니, 아무거나 철검을 구해주셔도 됩니다. 아, 그리고 교교에게는…….”
“이번 일로 본인 역시 깨달은 바가 많소. 그러니 걱정 마시오. 이 대협.”
이번 일로 문교교가 호되게 혼이 났다는 것을 들었기에 이현성은 더 이상 혼내지는 말라는 뜻이었다.
그런 그의 배려에 문종학은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보다… 몸은 좀 어떻소?”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행이구려. 그리고 이 대협의 가족에 대해서 동문수학했던 친우에게 부탁했으니 곧 연락이 올 것이오.”
“대인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이현성과 약속한 대로 그의 가족을 찾아야 하는 문종학은 고민을 했다.
내각대학사의 권력을 이용하면 쉬운 일이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고민하던 중 자신과 수학하던 동문 중에 이현성의 고향을 관할하는 관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간 괜히 파벌을 형성하려 한다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 동문들에게도 거리를 뒀다.
하지만 권력을 남용하는 것보다 동문의 도움을 받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에 부탁을 한 것이다.
‘찾아낼 수 있을까?’
사실 이현성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부친에게 흔적을 지우는 법을 가르쳤다.
혈천의 추살조라면 자신들의 흔적을 지웠을 것이 뻔했다.
동창이라도 십 년 전의 흔적을 되짚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일개 관리가 자신의 가족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용무를 마친 이현성은 제 거처로 돌아갔다.
그의 거처에서는 이현성을 기다리는 자가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일어나십시오.”
거처로 돌아온 이현성은 위표를 보며 깜짝 놀랐다.
그가 대뜸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이 대협께서는 제 은인이십니다. 이 대협의 가르침 덕분에 깨달은 바가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보다 제가 한 건 별로 없습니다. 그보다는 위 대장님께서 그만한 준비가 되셨기에 얻으신 것이 있었던 게지요.”
위표는 그의 말처럼 얻은 것이 있는지 기세가 예전보다 강렬해졌다.
전날 얻은 걸을 완벽하게 제 것으로 만든다면 분명 대단한 고수가 될지도 모른다.
다만 깨달음이란 한순간에 왔다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법.
깨달은 바를 얼마나 소화할지는 그의 노력과 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위표. 이 대협께서 절 필요로 하신다면 언제든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황제 폐하께 누가 되는 일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도움을 청할 수 있게 높은 자리에 오르십시오.”
“노력하겠습니다.”
농담처럼 한 말이건만 훗날 위표를 황실의 실력자로 만든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의 약속이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은 이때는 알지 못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