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천재작가
‘당한 만큼 갚는다.’
서량 마가군의 원칙이다. 당한 것보다 적게 갚는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지금처럼 당한 것에 비해 지나치게 많이 갚는 적은 가끔 있었다. 팽가장은 마가군 수장인 마등의 목숨을 잘못 노렸다가 한바탕 큰 난리를 치르게 되었다.
소란이 잦아들자 마초는 장기가 해 줬던 말에 생각이 미쳤다.
‘두부를 만든 청년이 이곳에서 가노로 있다고 했었지?’
마초는 하인들에게 수소문해 두부 만드는 가노를 만나기 위해 별채로 몸을 옮겼다.
별채는 별채라는 말이 무색하게 호화로운 건물이었다.
잠시 후, 나생이라는 자가 들어왔다. 나이는 스무 살 남짓으로 마초와 비슷해 보였다. 마른 체격에 피부가 희고 얼굴선이 가늘어 서생 느낌이 나는 젊은이였다.
“팽가장에서 부엌일을 하는 나생입니다. 공자께서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자네가 두부를 만들었는가?”
“그렇습니다.”
마초는 길게 돌려 말할 생각이 없었다.
“좋아. 듣자 하니 자네는 스스로 천 년 후의 세상에서 왔다고 떠들고 다닌다지?”
나생은 무기력한 태도로 대답했다. 벌써 이런 질문을 숱하게 받아서 이골이 난 듯한 태도였다.
“제가 천 년 후의 세상에서 왔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죄다 저를 보고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하던데요. 공자께서는 누구시길래 그런 걸 물으십니까?”
“삼십 년 후의 세상에서 돌아온 자.”
나생이 마초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눈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삼십 년 후의 세상이라… 공자께서 진심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믿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지금보다 한참 후대의 사람입니다. 계산해 보니 천이백 년쯤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원래 태원 땅에서 소금을 팔던 상인인데, 어느 날 장사를 하러 길을 떠났다가…….”
나생이 들려주는 얘기는 이랬다.
1200년 후의 세상에서 평범한 소금장수로 살던 그는 장사를 하러 다니다 도적떼를 만나서 크게 다치고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숨이 넘어가려는 순간,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빌었다. 어차피 도적떼의 화살에 맞아 젊은 나이에 죽게 된 인생, 다시 태어난다면 차라리 최고의 난세에 태어나서 역사 속의 영웅들이라도 직접 보고 싶다고.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약 1200년의 시간을 거슬러 후한 말 관중 지방의 어느 젊은이가 되어 있었다.
이야기를 듣는 마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나와 놀랄 만큼 비슷하군. 나 또한 죽음 직전에 유성을 보면서 다시 한번 살게 해 달라고 빌었고, 그 결과 삼십 년 전의 나 자신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지금부터 삼십 년 후라… 제가 보고 싶었던 삼국지의 수많은 영웅들도 그때쯤 죽었지요. 그런데 막상 이 시대에 오니 영웅은커녕 동네 호족에게 끌려와서 하루 종일 부엌일을 하는 신세가 돼 버렸습니다.”
청년은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마초를 보면서 물었다. 혹시나 아는 사람일까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마초, 자는 맹기. 정서장군 마등의 장자다.”
“마초, 마초라… 잠깐, 마초라면?”
청년 나생이 마초의 이름을 몇 번 읊조리다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랐다.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커져 있었다.
“서량의 패륜아!”
나생은 순간 아차 싶었는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마초의 눈치를 살폈다. 마초의 몸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고, 공자, 제가 실언을 한 것 같습니다.”
“아니? 실언 아닌데? 사실인데?”
마초는 나관중을 쳐다보지도 않고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누가 봐도 애써 분을 삭이는 모습이었다.
파사삭!
찻잔은 입에 닿기도 전에 깨져 나갔다. 분을 참느라 손에 힘을 주다 보니 터뜨려 버린 것이다.
비싼 도기 찻잔이 깨지는 것을 본 나생이 자신의 실언을 죽도록 후회하는 동안, 마초는 다른 곳에 생각이 미쳤다.
‘잠깐, 이놈이 내가 패륜을 저지른 걸 어떻게 알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하나. 진짜로 미래에서 회귀한 자가 맞는 듯했다.
마초의 거병 같은 큰 사건이라면 역사에 충분히 기록되었을 것이다. 1200년 후의 사람이 역사책을 통해 사정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패륜아라는 걸 알 수가 없지. 아무래도 저자는 진짜로 먼 미래에서 온 자가 맞는 모양이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아니, 그런데 천 년이 넘게 패륜아로 이름이 남는 건 너무하지 않아? 후대에는 패륜아가 없나?”
마초는 별안간에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나생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오들오들 떨다가 대답했다.
“아, 그게 수 양제라고 유명한 패륜아가 있기는 한데, 아마 그 사람 말고는 공자가 제일 유명…….”
“시끄러워!”
그걸 또 진짜로 대답하다니 아무래도 이 나생이라는 자는 눈치가 더럽게 없는 모양이다. 마초는 씨근거리다가 간신히 분을 삭이고 나생을 보며 말했다.
“패륜은 진짜 했으니까 할 수 없지. 내가 자초한 일인데 누구를 탓하겠나? 원래의 내 삶을 알고 있는 걸로 봐서 너는 진짜로 먼 미래에서 온 자가 맞기는 맞는 모양이구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소상히 말해라.”
“공자, 저는…….”
나생이 입을 열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나관중(羅貫中).
나본(羅本)이라는 이름보다 자(字)인 관중으로 더 유명한 그는 북쪽 태원 땅에서 태어났다.
후한의 행정구역으로는 병주에 해당하는 곳이다. 나관중의 아버지는 태원에서 소금과 철을 거래하는 거상이었다.
나관중은 원나라 지순(至順) 원년(1330년), 세계를 호령하던 몽골 제국이 내부의 모순으로 그 수명을 다해가던 때 태어났다. 다행히 유복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제법 총명해서 주변의 기대를 받았으니, 주변에서는 그가 과거에 합격해서 관리가 될 것이라 말했다.
* * *
거기까지 듣던 마초는 갑자기 말을 끊었다.
“잠깐, 과거가 뭐지?”
“아, 과거란 시험을 봐서 관리를 뽑는 제도인데…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 드리지요.”
“시험을 봐서? 으흠…….”
나관중이 말을 이었다.
* * *
어린 시절 수재였던 나관중은 서른이 넘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노느라 공부를 안 했기 때문이다.
공부 대신 잡극과 패설, 거리의 이야기꾼들이 공연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에 푹 빠져 살았다. 그가 가장 크게 매혹된 것은 후한 말부터 서진의 건국까지를 다룬 삼국지였다.
그렇게 실컷 놀다 보니 아버지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다. 나관중의 공부를 파하게 하고 장사를 돕게 했다.
그러나 나관중에게 훌륭한 상인이 될 정도의 끈기와 근면함이 있었다면 애초에 그 좋은 머리로 과거에 붙었을 것이다.
나관중은 게으르고 유약해서 장사에는 걸맞지 않았다. 아버지 때부터 신뢰를 쌓아 놓은 몇 개의 거래처에 소금을 팔아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우울한 마음에 취미 삼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자신이 평소 좋아하는 삼국지 이야기였다.
그렇게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천하제일의 글쟁이가 아닐까?’
그만큼 그가 가진 재능은 대단했다.
* * *
마초가 다시 말을 끊었다.
“잠깐. 그러니까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후세에서는 삼국지라고 한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너는 우리 시대를 기반으로 패설을 쓰고 있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수십 년간의 역사도 잘 알고 있겠군.”
“삼국지 시대만은 역사서를 거의 외우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
마초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 녀석은 대단히 쓸모가 많겠군. 내 지난 생의 경험에 이 녀석의 지식을 더하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마초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관중은 다시 말을 이었다.
* * *
나관중의 나이 서른여섯 살 되던 해의 일이다.
나라가 곧 망할 것처럼 세상이 흔들리던 난세였다. 상단을 이끌고 관중으로 원행을 나가던 나관중은 도적떼의 습격을 받았다.
화살을 몇 대나 맞고 들판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자니 참 시시한 인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역사를 사랑하고 이야기를 사랑했을 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이다. 패설을 써서 뜻을 펼쳐 보려 했으나 첫 번째 글을 완성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죽어가는 나관중의 눈에 하늘을 흐르는 유성이 들어왔다.
“내가 오늘 여기서 죽는구나. 지금 쓰고 있는 삼국지연의만 완성하고 죽고 싶으나, 하늘이 그조차도 허락하지 않는구나!”
나관중은 유성을 보면서 한탄했다.
“하늘은 나를 왜 이런 시대에 태어나게 하였는가? 차라리 삼국 시대에 태어났으면, 영웅들을 직접 보면서 삼국지연의를 쓸 수 있었을 텐데!”
어차피 난세에 태어나서 비명에 갈 거라면, 평소에 사랑하는 삼국시대에 태어나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그때, 나관중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유성이 번쩍 빛났다.
* * *
나관중의 과거 이야기를 들은 마초가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깨어나 보니 이곳이었다. 몇 달 전 유성이 떨어지던 날 객점에서 일하는 청년의 몸으로 들어왔는데, 일단 뭐라도 호구지책이 있어야 해서 미래의 세상에서 먹던 두부라는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솜씨가 팽가의 귀에 들어가서 강제로 부엌일 하는 가노로 끌려 왔다는 이야기로군.”
“맞습니다, 마 공자.”
“너와 나의 공통점은 첫째, 죽음의 문턱에서 유성을 보면서 이 시기로 가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다. 둘째, 유성이 떨어지는 날 이 시기로 돌아왔다, 이렇게 두 가지로군. 차이점은 나는 원래의 내 몸으로 돌아왔고, 너는 생판 모르는 나생이라는 사람의 몸으로 돌아온 것이고.”
결심이 섰다. 마초는 저 나관중이라는 청년을 곁에 두기로 했다.
나관중은 역사를 알고 있다. 그러니 원래의 세상에서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묻고 싶었다. 자신의 후손들과 사촌 아우 마대는 어찌 됐는지, 그리고 자신이 마음을 열었던 촉한의 동료들은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다.
마초는 나관중을 보며 물었다.
“할 얘기가 많지만, 핵심부터 말하지. 이곳에서 계속 두부 만드는 가노로 살 것인가? 아니면 내가 너를 빼내 줄 테니 나를 섬기며 서량에서 살 것인가.”
나관중은 잠시 망설였다.
‘팽가는 곽사의 처남이라는 점을 내세워 부를 쌓은 자다. 그러나 역사에 따르면 곽사는 몇 년 후 몰락할 것이다. 지금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헌제가 곧 장안을 탈출해서 낙양으로 이동할 것이고, 그동안 관중 일대는 대기근과 함께 이각, 곽사의 패악질이 겹쳐서 지옥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니, 주인인 팽가의 변덕 심하고 난폭한 성정으로 미루어 보아 그때까지 멀쩡히 살 수 있을지조차 알기 힘들었다.
‘하지만 내 눈앞에 있는 마초 또한 성정이 잔인하고 포악한 자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 아, 기왕이면 유 황숙께서 구해 주셨으면 좋았을 걸, 걸려도 왜 이런 놈이 걸리는 거야?’
자신을 팽가장에서 빼내 주려는 은인이 유비였으면 충심으로 따랐을 것이다. 조조였으면 조조의 심기를 잘 살펴서 오랫동안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이다.
그런데 서량의 패륜아 마초라니?
‘세력은 유비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고, 인성은 조조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는 자가 아닌가?’
그때 나관중의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과거 시험에 출제되는 성리학 경서는 먼지가 쌓일 때까지 방치했지만, 이 시기의 역사를 서술한 진수의 <삼국지>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달달 외울 때까지 읽었던 그였다.
<삼국지> 촉서 관장마황조전에서 마초의 가족관계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 나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초의 아버지 마등은 성정이 어질고 온후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를 공경했다.]
[마등이 선비를 대접하고 어진 이를 천거하며 백성을 가엾게 여겨 구제하니 삼보(三輔, 관중의 장안, 풍익, 부풍 지방)가 평안해졌다.]
‘그래, 마초는 이제 약관의 젊은이일 뿐이고, 지금 서량의 주인은 마등이다. 마등은 분명히 온화하고 명망 있는 인물이라고 역사서에도 적혀 있다. 지금 마초에게 귀부한 후, 마등에게만 잘 보이면 된다. 마등은 수틀린다고 사람을 막 죽일 위인이 아니야.’
나관중은 한껏 머리를 굴린 후, 결심을 세우고 마초에게 두 손을 모아 예를 취했다.
“소인 충심으로 공자를 따르겠습니다! 저를 팽가장에서 빼내 주신다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 잊지 않아야지.”
나관중에게는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지만, 꿍꿍이가 있다 한들 제가 어쩌겠는가? 저 자에게서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만 알아내면 그만이다.
‘그리고 미래에서 왔다고 하니 쓸 만한 문물도 전수해 주겠지. 두부를 만든 것처럼.’
마초가 생각하기에 이 청년은 눈치는 없지만, 쓸모는 있을 것 같았다.
“자네의 충심을 받아들여 흐트러짐이 없도록 하겠다. 그래서… 이제 자네를 뭐라고 부르면 되겠는가?”
“저는 본래 자를 관중(貫中)이라 합니다. 자로 불러 주십시오.”
“나관중이라… 알았네.”
마초는 나관중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초의 목적은 가족을 잃지 않는 것이다. 이 난세에 가족을 지키려면 결국 마가군의 세력을 크게 키워야 한다.
거기에 나관중이 가진 지식이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