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
249화 한시름 덜었어요
가게 입구 옆의 벽.
거기에는 아주 크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2011년, 지성분식 배산본점 오픈(현재 재개발 관계로 철거).
2012년, 화끈 오뎅 본점 리뉴얼. 2호점 확장.
2012년, 형님네 밥버거 정식 오픈.
2013년, 2월 지성분식 광안 2호점 오픈.
2013년, 우리 통닭 리뉴얼(since 1999년).
2013년, 형님네 밥버거 3호점 오픈.
2014년, 인성 식품 설립(자체 식자재 가공 공장.)
2014년, 우리 통닭 2호점 확장.
2014년, 2월 지성분식 남천 3호점 오픈.
2014년, 8월 화끈한 형제들 남천 본점 오픈(지성분식, 화끈 오뎅, 형님네 밥버거 통합).
2015년, 5월 화끈한 형제들 서면점 오픈(지성분식, 화끈 오뎅, 형님네 밥버거 통합. 태성반점, 우리 통닭 기술 제휴).
일종의 약력이었다.
원래 이렇게 쓸 계획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형우가 이런 걸 쓰겠다고 하니, 사총사 형들도 같이 붙여달라고 우겼다.
솔직히 창주 형과 덕수 형은 그렇다 쳐도, 혁기 형과 현우 형까지 조를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거절하기에는 두 사람이 가져온 아이템이 너무도 탐이 났다.
현우 형은, 특유의 염지 방법을 개발했고 거기에 노하우를 더했다.
그렇게 완성된 것이 닭갈비 튀김이었다.
실제 많은 닭갈비집은, 살이 두툼한 닭 허벅다리를 쓴다. 그걸 먹기 좋게 포를 떠서 구워서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만든 게 닭갈비 프라이드였다.
어차피 돈가스도 튀기는데 닭갈비 못 튀길 게 뭐냐고 몇 달 고심해서 개발했다는 거다.
혁기 형도 이름 올리겠다는 욕심에 반반 탕수육과 깐풍육을 개발했다. 아버님의 오랜 노하우가 깃들어 있다면서 특별한 숙성육에 감자 반죽을 더해 제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에 중식 특유의 소스를 팩으로 제조해 쉽게 조리할 수 있게 했다.
시식평은 합격!
결국 그 맛의 마력을 거부할 수 없어서 약력 마지막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화끈한 형제들의 신메뉴로서 전혀 손색이 없었으니까.
물론 두 가게 역시 인터넷으로 이름을 치면 바로 나올 정도의 맛집이기는 했다.
태성반점의 경우 오래된 노포였고 깐풍육과 부추잡채 덕에 많이 유명해졌다. 주말이면 예약 없이는 먹기 힘들 정도로 인기 가게가 됐던 것이다.
그건, 아버님이 자극(?)을 받아서였다.
강형우한테 아이디어를 얻어서 가게가 살아나자 자존심이 상했다나 뭐라나?
이후 절치부심으로 메뉴 대부분을 업그레이드했고, 그 과정에서 혁기 형도 엄청난 담금질을 당했다는 것이다.
또, 우리 통닭도 유명했다.
요즘은 부산 5대 치킨이니 10대 통닭이니 하는 데 속할 정도로 알려졌는데, 멀리 양산에서 찾아와 포장해 갈 정도로 충성 고객들이 어마어마했다.
어쨌든 그 이름을 생각하면 약력에 올리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아니, 형들이 강제로 술을 먹여가면서 협박(?)하니 거절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주혁 형은 그 약력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너… 많이 뻔뻔해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우아아 하겠는데?”
“어쩌다 보니… 할 수 있는 거 다 해보자 하니까 이렇게 됐더라고요.”
강형우는 그것뿐 아니라 옆의 커다란 사진도 가리켰다.
이번 여름 휴가 때, 다시 지성분식과 화끈한 형제들, 그리고 인성식품 식구들을 모았다. 거의 백여 명에 이르는 이들을 백사장에 모아서 단체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그걸 큰 사이즈로 출력한 뒤, 밑에 이렇게 적었다.
-좋은 음식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좋은 사람, 바른 사람, 인성식품.
“이것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손님들이 자꾸 궁금해하더라고요. 여기 가게는 작은데 무슨 사람들이 저렇게 많냐고요. 그래서 이렇게 약력을 붙인 거죠.”
“아하!”
“이거 보고 나니까, 더는 안 묻더라고요. 그런데 몇몇 단골손님들이 그러더라고요. 이런 거 진작 좀 붙이지 하면서…….”
처음에는 동네에 흔하게 있는 그런 분식집인 줄 알았단다. 그래서 무심코 지나쳤는데, 이걸 보니까 유명한 맛집 같다는 것이다.
이후 종종 들렸다가 맛에 반해서 단골이 됐단다.
여기에 강형우와 화끈한 형제들 식구들이 열심히 하니까 자신도 모르게 주변에 소개시켜 주게 됐다는 것이다.
“아직 이달 정산은 안 했는데, 잘하면 마이너스는 벗어날 것 같더라고요.”
“진짜?”
“예. 비록 오픈하고 석 달 만이지만, 한시름 덜었어요.”
솔직히 적자를 벗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플러스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속단은 금물이었다.
순간 주혁 형의 눈빛이 달라졌다.
“우리 형우, 많이 컸어? 이제 이 사부가 잔소리 안 해도 되겠는데?”
“아닙니다. 아직 많은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아니야. 넌 이미 환골탈태했다. 그러니 이 사부가 하산을 명하노라.”
주혁 형은 그렇게 말한 뒤, 어깨를 두드려 줬다.
“이제 사부에게 밀린 수업료를 바칠 때가 된 것 같은데?”
“예?”
“저녁에 한잔 어때?”
“저야 좋지만…….”
강형우는 슬쩍 눈치를 살피다가 인정둥이의 사인을 확인했다.
맡기고 가라는 의미였다.
***
“그래, 좀 공부는 된 것 같아?”
“예.”
“그래, 표정 보니 알겠다. 너… 확실히 변한 게 맞구나.”
주혁 형은 그렇게 말하면서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그리고 짠 하고 치더니 가볍게 마셨다.
“휴우, 우리 형우 때문에 내가 진짜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몰라.”
“왜요?”
“돈 빌려달라는 놈이 소식이 없으니 죽은 줄 알았지. 진짜 낙동강 뛰어드는 거 아닌가 걱정했거든.”
몰래몰래 우리 가게 왔다 간 게 그래서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처자식 놔두고 왜 똥물에 뛰어든다는 말인가?
“말도 마라. 너 진짜 곧 죽을 사람 같았다고. 이제야 얼굴이 펴지니까 나도 좀 안심이 된다.”
“진짜, 그렇게 보였어요?”
“어. 저승사자가 네 뒤에서 장부 확인하고 있더라.”
“헐.”
어이없어하는데, 마침 주문했던 안주가 나왔다.
강형우는 상추에 수육 한 점을 올리고, 마늘과 쌈장을 추가했다.
그걸 한입에 해결한 뒤 소주 한 잔을 비웠다.
두 사람은 일단 식사에 집중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배가 차자 소주 한 병을 더 주문했다.
“형, 진짜 고마워요.”
“남사스럽게 왜 이러냐?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아뇨. 이번에 형 이야기 듣고, 잠시 다녀왔잖아요. 며칠 안 되지만 생각 정리가 좀 되더라고요.”
“잘됐네. 그래, 어떻든.”
“그게요… 잘 모르겠어요.”
강형우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 주혁 형이 백 원 오뎅과 천 원 식당을 말한 건, 벌써 이 년도 전이었다. 바로 지성분식 2호점 확장을 성공하고 폭립과 냉라면으로 매출 홈런을 날렸을 때였던 것이다.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그때 알아봐야 할 걸 뒤로 미뤄 버렸다.
이후, 지성분식 3호점을 오픈했다.
거기에 화끈한 형제들까지 성공적으로 차렸고, 최고의 매출을 기록했다.
“그래서… 잘나가서 내 말을 무시했다는 거야?”
“솔직히 그런 거 생각할 겨를이 없었죠.”
분명 성공이라면 성공이었다.
월 순수익이 1억이 넘었다.
여기에 지성분식의 가치가 올라가고 있었고, 온 사방에서 가게 팔라고 하고 있었다.
대용 삼촌같이 투자하겠다는 사람도 있었고, 20억에 권리를 팔라는 이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분명 승승장구하고 있음에도 가슴 한구석이 비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왜 이런 삶을 살고 있는 걸까?
대체 장사가 뭐지?
뭔데 이렇게 힘들게 하고 있는 거야.
애써 그런 감정들을 묻어뒀는데, 이모들 식당 그 첫 가게가 철거되는 걸 보면서 그동안 눌러왔던 감정들이 터져 버리고 만 것이다.
“솔직히 바쁘게 살면 고민이 없어질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화끈한 형제들에 집중한 건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냥 상처를 덮어둔 것에 불과하더라고요.”
원인을 찾기보다, 근본을 살리는 것보다, 무시하는 걸 선택한 거다.
그런 상황에서 메르스를 맞았다.
매달 일억이 넘는 적자.
보이지 않는 탈출구.
정부는 대책이 없었고,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더불어 많은 음식점 자영업자들도 방법을 찾지 못해 힘들어했다.
그사이 하늘이가 태어났고 어쩌다 결혼식까지 하게 되었다. 그전까지 실감하지 못하던, 가장이라는 압박감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런 변화들이 내 가슴을 짓눌렀고, 목을 옥죄어 버렸다.
마치 늪에 빠진 것 같았다. 허우적대고 발악할수록 더욱더 가라앉기만 했던 것이다.
“마! 원래 장사가 다 그런 거야. 잘될 때도 있으면 안 될 때도 있는 거지.”
“예. 그걸 몰라서… 진짜 많이 흔들렸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뒤늦게 형 말이 생각나더라고요.”
“다른 가게들도 돌아보고 하라고?”
“예.”
그걸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진짜 우연히 택시 기사님에게 물었다.
혹시 오뎅 백 원에 파는 곳을 아느냐고.
“그분이 아신다고 이야기하는데, 뭐랄까? 이게 운명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강형우는 그 길로 다시 알아보고 저 먼 전라도까지 바로 떠나 버렸다.
“가보니… 어떻든?”
“좋았어요. 그냥 이런저런 생각도 많이 나고, 그냥 옛날 기억이 나더라고요.”
덮어두었던 건 허무한 감정만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아픈 상처도 있었던 것이다.
백 원 오뎅과 천 원 식당.
그 사장님들은 그분들 나름의 사명감이 있었다.
백 원 오뎅은, 어려운 기사님들을 돕겠다는 취지에서 시작한 거란다. 수익 하나 남지도 않는데 무려 20여 년을 그렇게 장사했다는 것이다.
중간에 조사하다 알게 된 기운차림 식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생활이 어려운 독거노인, 편모 가정의 가난한 학생들, 또 미혼모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보탬이 되고자 그렇게 영업하고 있었다.
그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천 원 식당도 마찬가지였다.
선자 할머니는 단돈 천 원짜리 편안한 식사를 해주고 싶어 했다. 오갈 데 없는 이들에게 한 끼나마 따뜻함을 전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유언마저도 그랬단다.
누군가 꼭 식당을 이어갔으면 좋겠단다.
그 사연이 알려지고 방송을 타면서, 많은 기부가 이어졌다고 했다. 그럼에도 운영은 여전히 적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주변 상인들의 도움으로 여전히 천 원이란 가격에 따뜻한 백반을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강형우는 천 원 백반을 먹은 뒤 울컥했다. 그 따뜻함이 잊힌 기억들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건 바로 아버지와의 추억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지갑을 잊어버리셨다.
주머니가 해진 건지, 누가 훔쳐간 건지 모르겠지만 난감한 상황이 된 거다.
가진 건 천 원짜리 몇 장과 토큰뿐.
아들 맛있는 거 사준다고 버스 타고 여기 멀리까지 왔는데, 그렇게 됐었다.
어렸던 강형우는 시장 바닥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도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한참을 달래던 아버지는 뭔가를 떠올렸는지, 시장 구석으로 나를 데려갔다.
기억하기로, 괴정시장 안동네였다.
무수히 많은 점집들과 구멍가게, 잡화점과 반찬집, 가내수공업으로 두부와 어묵 같은 걸 만드는 집들이 즐비했다.
거기서도 안쪽에 안쪽이었다. 정말 사람이 다닐까 하는 좁은 골목의 작은 식당으로 들어간 것이다.
아버지는 천 원짜리 두 장을 내고 백반을 두 개를 시키셨다.
따뜻한 시락국에 나물 반찬이 셋. 그리고 고봉으로 쌓아 올린 밥 한 그릇.
고작 천원이었지만, 아주 맛있었던 걸로 기억했다.
밥도 두 그릇이나 먹었고 국도 한 번 더 받아서 싹싹 말아먹었을 정도였으니까.
강형우가 천 원 백반 집에서 떠올린 건 그 기억이었다.
가게를 서둘러 빠져나온 건 그래서였다.
아버지 장례식 때도 울지 않았는데, 장사가 망해가도 참았는데, 기어코 눈물을 흘리고만 것이다.
이후 부산으로 돌아오면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동시에 아버지와의 많은 추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왜 장사를 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