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
210화 이런 XX
머리가 멍해진다고 해야 하나?
정말 잠깐 사이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강형우가 느낀 건, 배신감이었다. 그 감정에 휩싸이자 분노가 치밀었고, 화가 났던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게 당연한 반응이겠지.
강형우는 담배를 끄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호오오~ 흐으읍.”
몇 번 숨쉬기를 반복하자 가슴이 진정됐다. 현기증도 사라졌고 울컥하는 감정까지 사그라진 것이다.
그럼에도 강형우는 호흡을 계속 이어나갔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이제는 복잡했던 머리까지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정신이 제대로 돌아온다고 해야 하나?
새삼스럽게 장백호의 기억이 고마웠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큰 충격을 받을 게 분명하니까.
“형.”
“어? 어.”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강형우가 차분하게 이야기하니 그제야 강신원도 안도감을 느꼈다.
사실, 방금 전만 해도 조마조마했다. 이대로 달려가서 사고치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강형우가 천천히 호흡을 고르는데 뭔가 탁하고 텁텁하고 찐득한 기운까지 느껴졌다. 억지로 부정한 감정을 토하는 것 같았던 거다.
그때 강형우가 피식하고 웃었다.
“저, 괜찮다니까요. 새로 가게 생기는 게 뭐가 대수라고.”
“야, 그래도…….”
“전에 듣기로, 하루에 식당 세 개가 새로 생긴대요. 그리고 두 개가 폐업한다더라고요. 그만큼 경쟁이 치열한 게 이 바닥인데, 그걸 일일이 어떻게 다 신경을 써요.”
강신원은 뭐라 할 말이 없었는지 짧게 한숨만 내쉬었다.
“그냥 또 다른 경쟁자가 생겼다고 보면 되죠. 우리도 그렇게 시작했고, 그게 불법도 아니잖아요.”
“그, 그렇기는 한데…….”
“솔직히 예상은 하고 있었잖아죠. 영제가 갑자기 그만둔다고 했을 때, 그리고 형이 이야기했을 때 이런 날이 언제고 올 것 같았거든요.”
“그래?”
강형우가 의외로 태연해하자, 강신원도 적지 않은 안도감을 느꼈다. 믿고 의지한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던 것이다.
그때 강형우가 다시 담배를 하나 물었다.
불을 붙이고 후우~ 하고 연기를 내뿜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솔직히 충격받은 거 인정! 하지만 현실적으로 무슨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두들겨 패서 못하게 하면 되려나?”
“야, 그게 말이 되냐?”
“그렇죠? 그러니까 형은 걱정하지 말고요. 식구들이나 잘 다독이세요. 동요하지 않게.”
“어, 알았어. 그런데 매출이 걱정된다.”
“당분간은 어쩔 수 없죠. 그냥 이대로 하는 수밖에요.”
강형우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지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성분식은 기본적으로 박리다매였다. 많이 나가는 만큼 벌어가는 식이라, 매출이 줄면 위험했던 것이다.
일단 원가가 높은 편이었는데, 가성비 최고라는 돈가스의 경우 무려 40%나 되었다.
김밥 역시 겨우 오백 원, 천 원 정도가 남는 편이었고 그나마 라면이 수익성이 좋았다.
어쨌든, 매출이 줄면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강형우는 폰을 꺼내 계산기를 열었다.
반토막 잡고 바로 계산해 보니 얼추 답이 나왔다.
“확실히 적자는 적자네요.”
“그, 그래?”
2호점 점장인 만큼 강신원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금액은 그 예상을 많이 벗어났다.
“이대로라면 매달 적자가 천에서 천오백 정도 되네요.”
“그렇게나 많아?”
“예. 이러다가 형 월급도 못 주겠는데요?”
“헐.”
아까보다 분위기가 부드러워졌기에, 심각한 이야기도 부담 없이 꺼낼 수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냐?”
“일단 월급 도둑부터 잘라야죠. 손님도 없는데, 유지할 이유가 없잖아요.”
물론 다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일손이 필요한 3호점으로 돌리든가, 아니면 새로운 가게를 차리면 되니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고요. 시간 지나면 매출은 회복될 거예요. 그냥 일시적인 거라고 보세요.”
“정말… 그럴까?”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요.”
강형우는 자신만만하게 말한 뒤, 폰을 집어넣었다.
잠시 고민하던 강신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우야, 사실은… 이게 확실한 건 아닌데…….”
이영제가 그만두기 전에, 수상한 손님들이 종종 보였다고 했다. 따로 불러내서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걸 몇 번 봤다는 것이다.
그때 이영제한테 물었는데, 그냥 아무 일도 아니라고 대꾸했단다.
“계속 의심하기도 그래서 무시했거든. 은주가 가르치고 있기도 했고, 잘 따랐단 말이야.”
“형, 이제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가 보낸 것도 아니고 어차피 자기 발로 나간 건데…….”
“그냥… 아쉬워서.”
그건 강형우도 느끼고 있는 거였다.
솔직히 배신당했다는 생각이 가장 뼈아팠지만, 여긴 자유 대한민국이었다. 합법적인 개인의 의지를 막을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형,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매출 잠깐 흔들린 걸로 그렇게 죽을상을 하면 어떻게 해요?”
“야, 난 얼마나 심각한데… 넌, 웃음이 나오냐?”
“그럼 울까요? 큭큭.”
강신원은 어이가 없었지만, 묘하게도 안심이 되는 걸 느꼈다.
웃음이 어딘지 모르게 후련했던 것이다.
강형우는 강신원의 어깨를 두드렸다.
“형! 사장은 저죠. 망해도 제가 망하는 거니까, 제가 알아서 할게요.”
***
“쩝. 말은 자신 있게 했는데…….”
집 컴퓨터로 매출을 확인해 보니, 이게 그냥 웃어넘길 일이 아니었다.
일단, 이모들 식당은 순항 중이었다. 느리지만 매출이 꾸준히 상승세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3호점의 경우는 독특했다.
오픈 직후에 이미 최고점을 찍었다 싶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려오질 않고 계속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직원이 늘면서 수익이 더 늘어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정말 신기한 현상이네.”
어쨌든 세 가게 수익을 합치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싶었다.
영제네 가게 오픈발 때문에 잠시 휘청이는 정도라고 봤던 것이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했기에 2호점 매출이 반토막이 난 거지?”
솔직히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강형우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일단 한 번 들러보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이 개새끼가!”
간판을 보는 순간,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진짜 사람이라면 이럴 수가 있는가 싶을 정도였다.
<영재 분식>
뭐, 이름이야 그럴 수 있다 치자. 게다가 영제 철자도 달랐으니 다른 가게로 착각할 수도 있다 싶었다.
하지만 딱 보는 순간 알았다.
저건, 지성분식의 카피였다.
나무 원목으로 된 간판에 거의 비슷한 글자체로 적혀 있었으니까.
심지어 색상 톤도 거의 비슷했다.
유일한 차이라면, 지성분식 간판보다 싸구려라는 것.
하긴 주혁이 형이 직접 고른 고급 원목에 손수 글자를 새겨준 거니, 급이 떨어질 수밖에 없겠지.
강형우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일단 가슴을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았다.
안 그랬다가 이영제를 보는 순간 주먹부터 날아갈지도 몰랐으니까.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우리가 특허 낸 것도 아니고.”
이 근처에서 지성분식 간판을 카피한 가게는 하나둘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 하는 게 유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자 조금은 차분해졌다.
강형우는 11시 오픈 시간을 확인하고 영재 분식의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순간 헉 했다.
무슨 모델이나 아이돌 지망생 같은 알바였다. 그런 느낌이 들 정도로 여리고 예쁜 아가씨가 쪼르르 달려왔던 것이다.
물론 두어 번 보니까 금설비보다는 못했다.
공지혜보다는 더더욱 아니었고.
문제는 유니폼이었다.
베이지 색상의 체크무늬 치마에 흰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는데, 정말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딱 교복이었다. 콘셉트 자체가 그런 스타일인 것이다.
속으로, 사장 새끼가 변태인가 싶었다.
“혼자 오셨어요?”
“아! 예.”
“그럼 이쪽으로 앉으세요.”
이 아가씨가 알고 그러는 건지 모르고 그러는 건지, 한쪽 바를 가리켰다. 혼밥족들을 위한 자리였는데 정면에 바로 주방이 보였던 것이다.
강형우가 자리에 앉자, 주방 직원 하나가 물을 올려놨다.
동시에 시선이 마주쳤는데 다행이도 못 보던 얼굴이었다.
문제는 그 뒤편이었다.
나이가 좀 있는 주방 직원이 보였는데, 어딘가 얼굴이 눈에 익었던 것이다.
누구지 생각하고 있는데, 여직원이 다가왔다.
“주문하시겠어요?”
“아! 잠시만요. 조금 있다가 시킬게요.”
“예.”
여직원이 물러나자 강형우는 최대한 태연히 메뉴판을 펼치려 했다.
그런데 손이 떨려서 쉽지가 않더라.
씨발 새끼!
메뉴판 역시 지성분식과 거의 똑같았다. 재질이 싸구려인 걸 제외하면 같은 가게로 착각할 정도였던 것이다.
<영재 김밥, 새싹 김밥, 참치 김밥, 돈가스 김밥>
뭐, 김밥이야 어느 가게나 다 비슷하니 그럴 수도 있다 싶었다.
<얼큰 라면, 짬뽕 라면, 치즈 라면, 해장 라면>
라면도 거기서 거기였다. 솔직히 분식집 라면이 크게 특별한 게 있을 리가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메뉴판을 다시 넘겼는데…….
“씨발!”
돈가스, 하와이안 돈가스, 매운 돈가스.
하나하나 읽는데, 혈압 올라가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이것도 있었다.
<여름 특미, 냉라면. 6월부터 시작합니다.>
사진을 보니 웃음이 터졌다. 너무 어이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건, 홍태구가 찍은 거였다.
포샵질을 해서 색상을 미묘하게 바꿨지만 지성분식 벽에 붙인 포스터와 같았던 것이다.
이 정도 되면 의심을 넘어선 확신이 들었다.
강형우가 고개를 들어 주방을 쳐다봤는데, 아직 출근 전인지 이영제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녀석한테는, 로또 당첨 수준의 행운이었다.
게다가 여직원의 애교 가득한 목소리가 녀석의 목숨을 살렸다. 혈압이 살살 내려가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주문하시겠어요?”
“아, 예. 일단… 돈가스. 아니, 하와이안 돈가스 하나하고요. 영재 김밥 한 줄하고, 라면 주세요.”
순간, 여직원이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내 덩어리 사이즈(?)를 확인한 모양이었다.
“예.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렇게 여직원이 카운터로 가자 강형우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적진에 숨어 들어간 스파이가 느끼는 것 같은 긴장감 때문이었다.
강형우는 음식 나올 때까지 다시 메뉴판을 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뭔가 다른 게 있을까 싶어서였다.
“흠, 이건 좀 다르긴 하네.”
<새싹 김밥>
기본 김밥에, 얼마 전부터 유행했던 새싹 비빔밥의 야채 일부가 들어간 거란다. 아삭한 식감이 일품이며 성장기 어린이의 두뇌 성장에 좋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베스트로 미는 메뉴 같았다.
“설마? 그래서 영재 분식으로 지은 건 아니겠지?”
잠시 생각해 보니 그럴 가능성도 컸다.
하긴 이영제 분식보다는, 영재 분식이 어머니들한테 어필하기는 좋겠지.
그때 ‘딸랑’ 소리가 들리며 손님들이 연이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잠시 갈등하던 강형우는 고개를 돌렸다.
절반 정도가 익히 아는 얼굴들이었다. 가게 앞 사무실 단골 아가씨들이었는데, 김밥 포장 주문을 했던 것이다.
강형우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또다시 ‘딸랑’ 울렸다.
한꺼번에 여섯 명 정도가 들어왔는데, 이번에도 두 명은 눈에 익숙했다.
또다시 ‘딸랑’ 울리더니, 건너편 카페 알바들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출근 전에 먹고 가려는 모양이었다.
또다시 ‘딸랑’ 울리는데, 이번에는 근처 홈 마트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이었다.
식사 시간이 따로 없어서 잠시 쉴 때 김밥을 먹는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걸 포장하러 온 것 같았다.
그렇게 단골이었던 손님들의 익숙한 얼굴들이 이어지고, 이젠 잊을 수도 없는 얼굴이 보였다.
바로 이영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