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172화 서로 좋자는 거지
지우 형수는 미인이었다.
왜, TV 드라마 같은 데 나오는 커리어 우먼 같은 스타일 있지 않는가?
일단, 얼굴도 작고 비율이 좋았다.
여기에 몸에 딱 붙는 오피스룩을 입고 다녔는데, 거기에 홀딱 반했다고 했다.
취향이 완전 그쪽이었다나?
무엇보다 시기적인 문제도 있었다.
살짝 썸 타던 아가씨랑 깨져서 자괴감이 들었단다. 또래에 비해 많이 벌지만, 분식집 운영하는 남자는 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새벽부터 출근해서 오뎅 육수를 우리고, 간단히 아침 먹은 뒤 튀김 준비를 한다. 점심 전부터 장사를 시작해 저녁까지 일하고 나면 피로가 장난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건 집에 가서 드러눕는 것 뿐.
이러다 평생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하고 죽는 게 아닐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여신님 같은 외모의 형수께서 그러셨다.
일 열심히 하는 남자가 매력이 있다고. 그 말에 희망을 걸었다는 것이다.
“우리 와이프가 이야기하더라고. 장모님께서 그러셨대. 미래가 보이는 남자를 만나래. 지금 좀 못 나간다고 평생 못 나가겠냐고.”
어쨌든, 현실은 분식집 사장이지만 형수네 회사에서 눈독 들이고 있는 인재라고 했다. 그 대단한 두루 컴퍼니 대표께서 친구 먹자고 했으니, 그 가능성을 크게 봤다는 것이다.
“그때 내가 그랬지. 이 계약서에 사인하면, 제 미래가 보이십니까?”
“헐, 멘트가 더럽게 구리네.”
덕수 형이 짜증을 내는데도, 창주 형은 싱글벙글이었다.
“어쨌든, 그게 결정적인 계기였어. 우리 와이프가 마음을 열기 시작하더라고. 잘됐다 싶어서 잽싸게 데이트 신청을 한 거지.”
물론 그전에도 서로 간에 신호(?) 같은 게 있었다고 했다. 그랬기에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어 결혼까지 골인했단다.
황당한 건, 계약서의 존재였다.
분명 인사팀에 보고 올라갔고, 회계팀에서 계약금까지 지불했다.
하지만 계약서는 사장 결재 직전에 금고로 들어가 버렸다. 주혁 형이 갑자기 해외 출장을 가야 했던 것이다.
이후에도 바빠서 정신이 없었단다. 대단지 아파트 공사에 벡스코 행사 준비까지, 아주 일복을 타고나서 잠시도 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사이, 지우 누나는 결혼한다면서 퇴사해 버렸다.
이게 이 황당한 사건의 전말이었다.
***
“휴우~ 긴장되네.”
강형우는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에 7층 높이의 빌딩이 있었다. 얼마 전 새로 지은 사옥이라면서 이쪽으로 오라고 했던 것이다.
위치는 정말 좋았다.
동래 시외버스 터미널 뒤라서 만덕터널을 통과하면 바로 고속도로였다. 또, 해운대 방향이나 양산도 금방 갈 수 있는 위치였다.
무엇보다, 여기서 주혁이 형네 집까지 걸어서 20분이었다. 길 건너 온천천으로 내려오면 산책하듯이 퇴근이 가능했던 것이다.
맞다.
여기가 두루 컴퍼니 본사였다.
대전과 경기도도 지사 건물과 공장이 있다고 들었는데, 실제 운영의 핵심은 이곳이었다.
강형우는 심호흡을 한 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데스크로 가니 어여쁜 여직원이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자신의 외모를 봤음에도 태연하다는 거였다.
그때 이 회사가 범상치 않다고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주혁 형을 만나러 왔다고 하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그사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는데, 그럴 만하다 싶었다.
헐크 같은 덩치의 남자가 지나갔고, 얼굴만으로도 더 위험해 보이는 남자도 보였다. 분명 내근직 직원들처럼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느낌은 공사 현장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던 것이다.
그 외에도 조폭들처럼 보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잠시 후, 여직원 한 명이 자신을 불렀다.
강형우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으로 올라간 뒤 한 방으로 안내받았다.
곧 커피가 나오고 여직원이 나가자 그제야 긴장도 함께 사라졌다.
“휴우, 겨우 해결되나 했더니…….”
강형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며칠 전, 주혁 형한테 문자가 왔는데 내용이 이랬다.
[야! 그렇게는 못 해주겠다. ㅋㅋㅋ]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지 혼란스러웠다.
어쨌든 그날, 창주 형은 위약금을 물리겠다고 했다. 금액적으로 손해 보더라도 계약 해지하면 그만이라면서 그걸로 법적인 문제를 끝내겠다는 것이다.
남은 건 도의적인 거였다.
인간적으로 봤을 때, 주혁 형한테 미안한 게 많단다.
기린 빌딩에 들어갈 때도 그랬고 창주 형과 지우 누나의 결혼식 때, 커다란 화환과 더불어 축의금을 무려 백만 원이나 보내줬다고 했다.
또, 누나 퇴직금도 보너스까지 붙여서 넉넉하게 지급했단다.
그렇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선뜻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어쨌든 창주 형이 먼저 전화를 걸었다.
잠시 장난스러운 욕설이 오가고 통화가 끝났다.
그 직후, 창주 형이 그러더라.
다시 형우 너랑 이야기 좀 하고 싶다고.
결국 힘(?)이 없는 게 죄라고, 강형우는 다시 약속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기다리는 게 그래서였다.
“오! 형우 왔냐?”
주혁 형이 반갑게 웃으면서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강형우는 엉거주춤 일어서려다가 손짓에 다시 앉고 말았다.
그 직후, 비서로 보이는 분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커피와 서류 뭉텅이를 놓더니 살짝 웃으면서 나가 버렸다.
“에휴~ 내가 사장이고, 대표면 뭐 하냐?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한숨을 내쉬는데, 오히려 믿기지가 않았다.
은주 형수가 말하길, 주혁 형은 이 두루 컴퍼니의 신이었다. 직원 대다수가 그를 교주(?)처럼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죽는 소리를 하니 왠지 연기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일단 회의 결과부터 말해줄게. 우리 법무팀에서는 당연히 계약 당사자의 의사가 우선이라고 해지해 줄 수밖에 없대.”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요?”
“물론 자유 대한민국이니 맞지. 그런데 기업 한다는 놈들이라 욕심이 많잖아. 눈앞에서 맛있는 먹이를 놓치고 가만히 있을까?”
순간 몸이 저절로 움찔거렸다. 그만큼 주혁 형의 눈빛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설마 복수 같은 걸 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주혁 형이 피식 웃었다.
“사실, 골목상권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막바지라는 느낌이 있거든. 길어야 이삼 년이면 아마 제재가 시작될 것 같다고 하더라고.”
“그래… 서요?”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는 거지. 사실 우리 회사 규모로 봤을 때, 위약금은 그리 중요하지 않거든.”
이상하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매출이 조 단위가 넘어간다고 들었으니 그런 기분이 드는 것도 당연할 터.
“뭐, 머리 좋은 분들께서 그러더라고. 잡을 수 있으면 잡으라고. 그래서 하는 이야기인데… 조건만 맞으면, 계약서 그냥 없애주마.”
“예?”
“이제 와서 거짓말할 이유는 없으니 솔직히 까마. 사실 준비 끝났대. 우리도 분식 체인 운영하자고 해놨던 게 있는데 실무진들이 거의 마무리됐다는 거야.”
어차피 상권 조사야 꾸준히 하고 있었고, 자본도 넉넉했다. 적당한 자리만 나오면 바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약간의 다른 이유가 있는데, 어쨌든 하려고 하면 바로 할 수 있다더라. 오히려 이거 때문에 미뤄진 거지.”
황당하게도 창주 형이 사인하는 바람에 일 진행이 오히려 멈췄단다. 이 계약서가 오히려 족쇄가 됐다는 것이다.
순간 의문이 들었다.
약간의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
“근데 왜 안 한 거예요? 계약서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그게… 창주가 이야기를 안 해줘서지. 솔직히 다른 건 모르겠고, 그 오뎅 국물 있잖아. 우리 직원들이 그거 재현하는 거 실패해서 말이야.”
“그럼? 맛?”
“어, 그게 제일 중요하니까.”
주혁 형은 그렇게 말한 뒤 한숨을 내쉬었다.
대충 어떤 육수를 어떤 식으로 우렸는지는 감을 잡았다고 했다.
중요한 건 비율과 시간이었다. 수십 차례 시도했음에도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냥 팔아도 될 정도는 나왔어. 그런데 이상하게 성이 안 차더라고. 무엇보다 우리 상일 이사님께서 결사반대했다. 더 맛있게 할 수 있는데 왜 이딴 걸 파냐고 무조건 안 된대.”
역시 음식 장인다운 평가였고, 두루 컴퍼니다운 판단이었다.
실제로 화끈 오뎅의 핵심은 육수와 튀김이라고 했다. 그런데 완성도에서 미치지 못하니, 준비가 끝났어도 시작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맛! 에서 만큼은 김상일 이사의 평가가 가장 영향력이 크다나?
“이제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마지막 제안을 하마. 위약금 없이 계약 정리해 줄 테니까, 비결을 알려주라.”
“예? 아니, 그냥 창주 형한테 물어보면 알려줄 건데 왜 저한테…….”
“내가 바보냐? 그 맛을 만든 건 너잖아!”
“예?”
“또, 창주가 그렇게 말하더라고. 이 육수 아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너랑 자기랑 둘밖에 없다고.”
확실히 그 말이 맞기는 했다.
창주 형한테 육수를 배우면서 그 세 가지를 만들어서 섞어 쓰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다 몇몇 조합이 더 생각나서 응용한 결과 지금의 육수가 나왔던 것이다.
맞다.
따지면 화끈 오뎅 육수에서 강형우의 기여도가 일부 존재하기는 했다.
“긴말 안 하마. 우리 조건은 이렇다.”
그러면서 계약서를 내미는데, 주혁 형은 정말 작정한 모양이었다. 눈에 광기 비슷한 게 보일 정도였던 것이다.
조건은 의외로 간단했다.
맛에 대한 컨설팅을 의뢰할 테니, 그걸로 위약금 퉁 치잖다. 대신 향후 너네 회사가 커질 걸 감안해서 부산 지역에는 체인점을 내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니, 형. 근데 그거 창주 형하고 합의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저한테…….”
“창주가 그러더라. 네가 회사 대표래. 너 하는 대로 한다는데?”
설마 그때 장난치듯이 욕하면서 통화한 게 그런 내용이었던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짜 확인해 봐도 돼요?”
“마음대로.”
강형우는 설마 싶어서 창주 형한테 전화를 했다.
하지만 일이 바쁜지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이 이상의 조건은 없어. 그리고 이건 서로 좋자고 하는 거잖아.”
주혁 형이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다시 살펴보니 진짜 조건이 좋기는 좋았다.
하지만 이건 바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좀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뭐, 그러지.”
말투는 태연했는데, 뭔가 안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일까?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다.
“근데 형, 은근히 저한테 집착하는 거 같은데요?”
“어. 맞아!”
“예?”
“너한테 집착하는 거 맞다고. 나 욕심 많잖아.”
대놓고 인정하니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주혁 형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전에 그랬잖아. 이제 밑그림 그렸다고.”
“그, 그랬죠.”
“난 말이야. 이미 그림 하나를 완성했어. 여기가 바로 그 작품이지.”
아마도 두루 컴퍼니를 말하는 것이리라.
“근데, 이제 새 그림을 그리려고 하거든. 화폭은 준비해 놨고 머릿속 구상도 끝난단 말이지. 그런데, 이 작품이 걱정되더라고.”
“그래… 서요?”
뭔가, 심상치 않은 말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만큼 주혁 형의 표정은 심각했고, 얼굴에 장난기가 사라져 있었다.
그런데 나온 말이 어이가 없었다.
“너 같은 경비원이 하나 있었으면 해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