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146화 많이 먹게나
“휴우, 너무 감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자.”
애써 마음을 추스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첫 가게이기도 했고, 망하기 직전까지 갔었다.
이후 밤잠을 줄여가며 노력한 결과 첫 성공을 맛보기도 했다.
한마디로 희노애락이 모두 깃들어 있는 가게였다. 그게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하니, 계속해서 아쉬움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다고 박첨기를 원망할 수만은 없었다.
이미 재개발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나왔었다.
지난 몇 년 사이 합의와 보상도 끝났고, 기린빌딩이 들어설 때만 해도 조금씩 사람들이 빠지는 추세였다. 게다가 이미 저 뒤편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
빈집들만 흉물스럽게 남아 있는 상황.
무엇보다, 박첨기 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길 자기 혼자만 거부할 수 없게 됐단다. 이미 지성분식 쪽 라인의 상가들은 합의를 거의 마무리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못 팔겠다고 하면 이웃들이 난감해진다.
왜냐.
지성분식이 골목 안쪽 모서리에 있었다. 여길 정리하지 못하면 나머지 상가들을 밀어봐야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물론 지성분식 뒤쪽의 주택들을 매입해서 길을 옆으로 트는 방법도 있었다.
그랬다간 동네 사람들한테 욕을 바가지로 먹을 거다. 길도 이상해지고, 분진과 소음 피해도 어마어마해질 테니까.
그런 상황에서 장사가 잘될 리가 있겠는가?
결국 박첨기의 입장에서 봤을 때도, 건물을 파는 게 정답이었다.
“그래도 아직 시간은 있네.”
지금이 9월, 내년 여름이면 6, 7월 혹은 9월까지도 영업할 수 있었다.
재계약한 걸 기준으로 치면 반년 정도를 손해 보는 셈.
그게 미안했는지, 박첨기는 이사비를 300만 원 정도 내주겠다고 했다.
또, 원한다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다른 건물에 같은 가격으로 세를 내주겠다는 말까지 꺼냈다.
강형우가 알기로 거기 1층은 월세만 150만 원이었다. 보증금 조금 올리고 그걸 100만 원에 맞춰주겠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박첨기 입장에서는 해줄 만큼 해준 셈.
“그나저나 한 번 알아봐야겠네.”
강형우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점심이 지난 시간이니, 그리 바쁘지는 않을 터.
-예. 형님.
“어. 민석아, 물어볼 게 있는데, 시간 되냐?”
-하하하. 형님이 궁금하시다면 없는 시간이라도 되야죠. 예. 말씀하세요.
강형우가 몇 가지 묻는데, 금방 알아보고 전화준다고 했다.
김민석에게 전화한 건 이유가 있었다.
녀석은 원래 철거 공사업체에 일하기로 했었다. 그러다 강형우한테 맞는 바람에 쫓겨났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후 지나가다 얼핏 그런 이야기를 했다.
황당하게도 자기를 두들겨 패서 쫓아냈던 선배가, 밥버거 배우러 왔단다. 뜨내기 용역 일을 정리하고 새로운 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현재 그 선배는 형님네 밥버거 3호점에서 열심히 설거지와 청소를 하고 있었다.
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폰 너머지만 김민석이 아주 입이 찢어지게 웃는 게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요즘 아주 살판이 났다.
몇 달 전, 윤다정을 닮은 딸이 나왔다. 동시에 김민석은 딸 바보로 진화하고 말았다.
뭐가 그리 좋은지,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술 약속을 제외하면 무조건 집으로 직행이라고 했다. 게다가 장사가 잘돼서 직원도 두 명이나 쓰고 있다고 했다.
덕수 형 가게와 상권이 겹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게 기우로 판정이 날 정도였다.
무엇보다, 밥버거집 근처에 방 두 칸짜리 빌라 전세까지 얻은 상황이었다.
듣기로 가을에 날이 선선해지면 이사 가기로 했단다.
진짜, 첫 인상은 개판이었는데 요즘은 사람이 저렇게 착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새벽부터 열심히 동네 청소한다고 소문이 났고, 딸 바보란 이야기까지 퍼져서 학부모들도 안심하고 심부름을 보냈다. 급할 땐 애들을 봐주기도 했으니, 이제 완전히 이 동네 사람이 다 된 것이다.
마침 김민석한테 전화가 왔다.
-예, 형님. 알아보니까요…….
“어? 어 그래? 어, 고맙다.”
-그리고 이사하면 집들이할 거니까, 형님 꼭 오세요!
“그래. 알았다.”
-예. 예. 형님 들어가세요.
그렇게 통화를 끝내고 나니, 대략적인 일정은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철거 구역 펜스 공사가 10월부터라고 했다. 이후 겨울 내내 집들을 허물고, 봄부터 지반 공사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터 다지기만 대충 반년.
일정상 7~8월부터 공사 차량이 드나든다고 했으니 박첨기 어르신의 말이 거의 맞았다.
이제야 의심하고 있던 몇 가지가 해결되었다.
순이 이모가 몇 번이나 그랬다.
가게 장사하는 건 문제가 없는데, 이상하게 매출이 조금씩 줄고 있다고.
그게 그래서였다.
저 위쪽부터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하면서 고객들이 빠져나간 게 그 이유였다.
“이대로라면 매출에 영향이 생길 수밖에 없겠는데?”
기린빌딩처럼 대로변에 있다면 큰 상관이 없겠지만, 지성분식은 골목 안쪽이었다. 손님들 대부분이 단골이기에 동네 사람들이 빠진 만큼 매출도 빠지는 것이다.
대신, 철거 공사 들어가면 인부들이 손님으로 대체가 될 거다.
“아무래도 그쪽 메뉴도 한 번 생각해 봐야겠어.”
인부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에, 순이 이모의 솜씨라면 장사가 안 될리는 없겠지.
순간 강형우는 뜨끔해지는 걸 느꼈다.
불과 삼십 분 전까지만 해도, 가게가 없어진다는 생각에 아쉬워했다.
그런데 지금은 매상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하, 하하. 좀 어이가 없네.”
아무래도 주혁 형 말대로 장사꾼이 되려는 모양이었다.
그게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했다.
***
“많이 먹게나.”
강학희는 아주 입이 귀에 걸렸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고객한테 선물로 받은 비싼 인삼주까지 따서 직접 잔에 따라줬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강형우가 고개를 숙이며 잔을 받는데, 강학희는 연신 웃음을 흘렸다.
“다 자네 덕이야.”
“아닙니다. 아버님. 형이 잘한 거죠.”
“허허허. 그것도 그거지만, 자네가 아니었다면 없었을 일이지. 자, 많이 들게.”
그러면서 커다란 닭백숙 접시를 앞으로 내미는데, 조금 부담스러웠다.
사실 오늘 약속은, 반강제였다.
추석 연휴 첫날, 신원이 형네 가족 식사 자리였다. 그런데 강학희가 꼭 부르라고 했단다.
아~ 서글픈 세입자여. 건물주가 부르니 어찌 안 갈 수 있으랴.
물론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시간을 비워놔야 했다. 해서 선물 꾸러미를 들고 들렸는데 아주 한 상이 차려져 있었던 것이다.
상 중앙에 김을 모락모락 내뿜고 있는 닭백숙이 보였다. 그 옆에 삶은 낙지와 전복, 그리고 인삼으로 보이는 뭔가가 있었고, 대추에 몇몇 한방 육수 재료까지 그득그득했던 것이다.
이게 해신탕이란다.
용왕이 먹는 보양식이라나 뭐라나?
“자! 다리부터 하나 들고. 먹어봐!”
강학희가 손수 닭다리를 앞접시에 덜어주니 차마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강형우는 커다란 닭다리를 입안 가득 쑤셔 넣었다.
씹는데 탄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야들야들하면서 탱글탱글한 게 아무래도 시골에서 가져온 토종닭 같았던 것이다.
어째 닭다리가 무지막지하게 크더라니.
겨우 절반 정도를 씹어 넘기자, 강학희가 잔을 들었다.
“아, 예. 감사합니다.”
인삼주를 한 잔 마시자, 열이 훅 올라왔다.
겨우 기침을 참고 잔을 내려놓는데, 강학희가 말했다.
“자네 덕에, 아들 음식 솜씨가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네. 내가 하도 잘먹어서 벌써 5㎏나 쪘단 말이지. 허허허.”
기분 좋게 웃으니, 강형우도 미소를 지었다.
강학희는 손수 집게를 들고, 강형우와 강신원, 강신애의 접시에 닭과 낙지, 전복들을 나눠줬다.
그런데, 그게 참 멋있게 보였다.
크게 크게 웃는데, 정말 가식 하나 없이 행복한 기운만 느껴진다고나 할까?
“어휴~ 잘 먹었습니다.”
강형우가 일어나려고 하는데, 강학희가 잡았다.
“나랑 잠깐 내려가지.”
“예.”
강학희가 주차장으로 향하자 강형우도 조심스럽게 뒤따랐다.
“한 대 피게나.”
“예?”
“담배 피는 거 알고 있으니까. 괜찮아.”
“예. 감사합니다.”
강형우가 담배를 받자, 강학희가 직접 라이터로 불까지 붙여주었다.
“편하게 피게나. 자네도 이제 엄연한 어른인데, 눈치 볼 필요 있겠는가?”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세상 모든 세입자는 건물주가 불편합니다요.
하지만, 강형우의 입에선 결코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잠시 담배 맛을 즐기던 강학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말이야. 말년에 참 무슨 복인지 모르겠네. 그냥 가게 세 내주는거 때문에 머리 아파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허허허.”
강형우는 눈치를 살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건 확실했다. 게다가 눈빛마저 부드러워서 절대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고맙네. 다 자네 덕이야.”
“제가 한 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신원이 형 덕을 많이 보고 있죠.”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내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데 보는 눈이 없을까.”
강학희는 웃으면서 담배를 비벼 끄더니, 다시 한 개비를 더 꺼내 물었다.
그걸 본 강형우는 서둘러 불을 붙였다.
한 모금을 깊게 빤, 강학희는 가만히 담배를 쳐다봤다.
“내년에 손주 볼 생각을 하면, 이것도 올해로 끊어야지.”
“예?”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애란 말인가?
순간, 머리를 스치는 단어가 있었다.
속도위반!
설마 싶었는데, 강학희가 허허 하고 웃어버렸다.
그걸 보니 더욱 혼란스러웠다. 정말인지 아닌지가 헛갈렸던 것이다.
“처음에 아들놈이 부산 내려온다고 했을 때, 한편으로 기쁘면서도 덜컥 겁이 나더라고. 혹시 뭐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싶었거든.”
강학희는 천천히, 그리고 조금은 무뚝뚝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처음엔 같이 살게 되는 건 좋았다.
카페를 하겠다고 해서 더 좋았고, 집 아래서 한다니 극구 찬성했다.
하지만 공사를 하면서 의구심이 늘었다.
왜 잘나가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부산에 내려온 건지, 왜 하필 장사도 잘 안 되는 카페를 하겠다는 건지 궁금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알게 되었단다.
“마음에 병이란 게 참 그렇다네.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 그렇다고 병원 가서 약 먹고 주사 맞는다고 낫는 것도 아니야.”
아무래도 대인기피증을 말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그러더군. 그런 건 시간만이 해답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때가 있는 거지. 한창 열심히 일하고 사람 만나야 할 때인데 집에만 있었으니. 그걸 보는 아비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잘은 몰라도,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을 거다.
그 정도나 되니 권리금도, 보증금도 몇천만 원이나 깎아준 거겠지.
“그런데 자네하고 일하면서 아들놈이 웃기 시작하더군. 게다가 음식도 못하던 녀석이 식사를 차리지 않나, 뜬금없이 잘 차려입고 나가서 외박을… 험, 험험.”
“그럼…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이 나이 되면, 척하면 척이지. 그래서 두고 보고 있는데 갑자기 결혼을 하겠다는 거야.”
강학희는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그건 강형우도 마찬가지였다. 이은주랑 사귄다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결혼 날짜가 정해졌다고 하니 정말 황당했던 것이다.
“그때 보니까, 아직 완치는 안 된 것 같은데 그 아픔을 덮을 만큼은 성장했더라고. 그래서 허락했다네.”
“예.”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들놈이야 제 짝을 찾았으니 이제 걱정할 건 없는데. 문제는 딸이 하나 남았다는 거지.”
어라? 이야기가 왜 이쪽으로 흘러가는 거지?
강형우가 살짝 불안해하는데, 강학희가 물었다.
“자네는, 우리 딸 어떻게 생각하는가?”
***
와놔~
진짜 심장 떨어질 뻔했다. 잘못 들으면 충분히 오해할 만한 말이었던 것이다.
다행이 신원이 형이 미리 이야기해 놔서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강학희 아버님 역시, 내가 공지혜랑 만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강학희가 부탁한 건, 일종의 중매였다.
놀랍게도 그 대상은 정말 의외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