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132화 어떤 느낌인지 알겠다
“이랴사이마세!”
최근 생긴 일본 라멘집들이 하는 것처럼 일본 말이 들렸다.
미리 공부하고 왔기에 본 게 있었는데, 사장이 일본 분위기를 내기 위해 이렇게 인사한다고 했다.
단, 삼일절과 광복절은 제외였다.
강형우는 가게를 둘러보고 바에 앉았다. 그리고 방문 목적이 있기에 고민하지 않고 주문해 버렸다.
“냉라멘 하나 주세요.”
“예.”
종업원이 주문을 받고 이것저것 만지는 사이, 강형우는 가게를 구경했다.
바 형식으로 여섯 명이 앉을 수 있게 되어 있었고, 2인용 미니 테이블이 네 개였다.
빡빡하게 앉으면 14명까지는 가능한 구조.
하지만 강형우만 한 덩치가 그렇게 앉으면 숨도 못 쉴 정도로 가게는 아담했다.
매인 메뉴는 세 개였다.
된장라멘, 매운 된장라멘, 냉라멘이었는데, 가격은 전부 6,000원이었다.
여기에 사이드로 미니 덮밥과 교자, 주먹밥이 있었다.
장식도 많았는데 일본 애니메이션 피규어만 수십, 아니, 수백 개는 될 듯 보였다. 대부분 손바닥 사이즈였는데, 디테일한 걸 보면 가격이 있어 보였던 것이다.
한 개 만 원이라 쳐도, 족히 수백만 원은 될 것 같았다.
“확실히 일본 라멘집 분위기가 나네.”
사실, 아주 예전에 한 번 들려본 적이 있었다.
그때 매운 미소라멘을 시켰는데 거의 매운 짬뽕과 흡사한 맛으로 기억했다.
해장에 아주 직빵이라고나 할까?
그만큼 얼큰하고 개운했으며 일본 라멘 특유의 기름기가 많이 느껴지지 않았었다.
사실, 이번 방문은 주혁 형의 추천 때문이었다.
곰라멘을 꼭 한 번 방문해 보라고 했었으니까.
그러면서 몇 가지 이야기를 해줬는데, 이 집이 부산을 기준으로 일본 라멘 1세대라고 했다.
그걸 어떻게 구분하느냐 물었더니 의외로 간단하단다.
일본 라멘을 가져와서 한국 사람 입맛에 맞게 변형시킨 것이 1세대라고 했다.
대표적인 가게가 넷이었는데, 사하구의 오사카와 부산대 이치방, 닌자라멘, 그리고 여기 곰라멘 집이었다.
특히 닌자라멘은 일본 라멘 집 중에서 유일하게 면이 꼬불꼬불했다. 국수 중면 같은 면이 아니라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반 라면 면발을 택한 것이다.
이 가게들은 대부분 2000년대 중후반에 오픈했다.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부산 사람들 입맛을 맞추지 못해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던 거다.
반대로 이 가게들은 5년 이상을 장사해 완전히 자리 잡았다고 보면 된다.
일본 라멘집 2세대는 그 이후에 생겼다.
변형이 아닌, 일본 라멘 고유의 맛을 그대로 재현한 가게들이었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 정도로 육수가 찐하고 짰다.
마치 소금 팍팍 뿌린 곰탕을 압축해서 뽑은 것 같은 맛이랄까?
대표적인 가게가, 부산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우마이도였다.
강형우도 처음에는 힘들었고 두 번, 세 번째 가서야 겨우 적응할 수 있었다.
역시 익숙해지고 나니 그 진가가 느껴졌다.
확실히 기존의 맛과 다른 깊이가 있었다. 두툼한 고기가 올라갔고, 계란이나 고명들도 이전의 가게들과는 퀄리티가 달랐던 것이다.
아쉬운 건, 맛이 변했다는 거였다.
가맹점이 늘어나서인지 예전만큼의 깊은 맛이 나지 않는 기분이랄까?
어쨌든 최근에는 부산에도 많은 라멘 가게들이 생기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2세대에 가까웠다. 정통 일본식 라멘을 맛의 중심으로 잡은 시작한 가게들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주혁 형이 3세대까지 언급을 했다.
놀랍게도, 정통 일본 라멘집의 한국 진출이었다.
일본 라멘 장인이 인정한 제자, 혹은 장인 본인이 직접 와서 주방에 서는 가게들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라멘 3대째가 있었다.
조리는 전부 일본인이 했고, 손님과 대화하는 것 외에는 전부 일본 말로 한단다. 심지어 시스템 역시 일본식이라 장시간 조리는 필수였다.
물론, 주혁 형이 말하길 가맹점이 늘면 달라질 거라 했다.
체인 사업 본부가 욕심을 부리면, 한국 사람이 주방에 들어서게 될 거라나?
하지만 아직은 그런 조짐은 보이질 않았다.
어쨌든 여기 곰라멘은, 굳이 분류하자면 1세대 라멘 쪽이었다.
2006년부터 장사했다고 하니 역사도 오래되었고 특히 가격이 최근의 일본 라멘집들보다 저렴한 편이었다.
“근데 저건…….”
마침 눈에 확 들어오는 게 있었다.
<매운 미소라멘 4인분. 20분 안에 다 드시면 무료!>
실패하면 라멘값 지불.
순간 한 번 도전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 운동 다닐 때, 폭주한 적이 있었다. 너무 배가 고파 미친 듯 라면을 흡입했던 것이다.
기억하기로 한 번에 여섯 개 정도 먹었었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마음먹고 도전하면 네 그릇 정도는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강형우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데, 마침 종업원과 눈을 마주쳤다.
순간 움찔하더라.
아마 매운 미소라멘 4인분 도전, 그걸 유심히 보는 걸 확인한 모양이었다.
하긴, 이 덩치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했겠지.
그때 다른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황당하게도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 왜 곰라멘인지 알 것 같았다.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끼리 느끼는 동질감이 전해졌던 것이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는 사이, 사장은 익숙한 솜씨로 라멘을 만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이 집의 자랑인 냉라멘이 나왔다.
제일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건, 다채로운 색감이었다.
성인 주먹만 한 높이로 쌓인 적양배추 샐러드.
그 한쪽에 땡초가 얇게 썰려 있었고, 방울토마토가 토막이 나서 속을 보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반숙 달걀의 노른자가 선명했으니…….
정말 보는 것만으로도 식욕이 올라올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게다가 살얼음 육수 역시 진한 갈색이라 바로 그릇에 손이 갈 정도였다.
강형우는 망설이지 않았다.
후루루룹, 후루룹.
시원한 국물을 들이켜고 나니 묵은 체증이 확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더운 여름.
잔뜩 땀 흘린 뒤, 살짝 얼린 맥주를 단숨에 들이켜는 상쾌함이랄까?
“후우~ 하아~”
강형우는 신음을 낸 뒤, 천천히 여운을 느꼈다.
일단 새콤했다.
식초만의 맛이 아니라, 레몬 같은 종류의 산미가 있었다.
단지 그뿐 아니라, 약간의 단맛과 고추의 알싸한 맛까지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거 맛있네.”
강형우가 자신도 모르게 말했는데 사장이 들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말없이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곧 젓가락이 샐러드를 해치고 면발을 찾았다. 그리고 적당한 비율로 한꺼번에 집어버렸다.
후룹, 후루룹.
우적, 우저적.
샐러드와 면을 함께 먹으니 맛이 장난이 아니었다. 여기에 시원한 육수까지 곁들이니 입안에서 침이 자꾸 고였던 것이다.
강형우는 정말 5분도 안 되서 냉라멘 한 그릇을 뚝딱 비워 버렸다.
“휴우, 대충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다.”
왜, 주혁 형이 여길 먼저 가보라고 했는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냉라멘이 아니었다. 그냥 새콤달콤한 샐러드 냉면에 가깝다는 느낌이 강했던 것이다.
강형우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잘 먹었습니다.”
***
사흘 동안 냉면 종류만 무려 열두 끼를 먹었다.
부산의 대표적인 밀면집인, 국제, 개금, 가야, 춘하추동과 우암동, 망미동까지 들렸고, 아는 사람만 안다는 북청밀면도 찾아갔다.
저마다 특색이 있었는데 중요한 건 이거였다.
일단 시원했다. 그리고, 자꾸 땡기는 감칠맛이 있었다.
솔직히 개인 취향이 있으니 맛은 어디가 최고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강형우 입에는 국물은 국제, 고명은 춘하추동, 면발은 북청이었다.
물론 아주 근소한 차이로.
단순히 밀면만 먹은 게 아니라, 유명하다는 중국식 냉면도 몇 군데를 들렸었다.
화교 삼형제로 유명한 전포동의 흥화반점.
하단에서 제일 이름난 30년 전통의 복성반점.
또, 서면시장의 인하네 칼국수집의 냉칼국수도 먹었고, 하단의 유명한 냉콩국수집도 찾아갔다.
그리고 마지막 집이 바로 여기였다.
“흐음, 여기… 망한 브랜드 아니었나?”
간판을 보니 참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틈샛라면.
강형우가 기억하기로 군대 제대했을 때까지만 해도 부산에 체인점이 많았었다.
하지만 요 몇 년 사이 전부 사라졌다.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동일 브랜드의 라면을 파니 가게 유지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그랬는데, 놀랍게도 전포동 한쪽에 새로 오픈을 했다.
“어서 오세요.”
안으로 들어가니 예쁜 여자 종업원이 자리를 안내했다.
4인 테이블 다섯 개, 한쪽에는 셀프 바가 있었고 옛날 개그에 나오는 파인애플, 즉 단무지 통이 보였다.
그 옆에는 당연히 김치겠지.
강형우는 냉라면을 주문하고 잠시 기다렸다.
이 가게의 특색이 바로 벽면을 가득 채운 포스트잇이었다. 그중 몇 가지를 살피다가 고개를 저은 뒤, 이번에는 메뉴판에 집중했다.
확실히 옛날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원래 최초의 콘셉트는 라면 전문점이었다. 유명한 명동 아저씨가 개발한 빨계떡, 빨계치 같은 게 매인 메뉴였고 여기에 주먹밥이나 꼬마김밥 같은 게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새로 생긴 틈샛라면은 달랐다.
“돈가스에 오징어 덮밥, 제육 덮밥이 있고, 이건 스팸 주먹밥?”
그것뿐만 아니라 김밥천국에 흔한 몇 가지 메뉴들이 추가되어 있었다.
그 순간, 느낌이 확 왔다. 왜 체인점들이 사라졌다가 다시 생겼는지가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역시나 김밥천국 때문이었다.
실제로 냉라면의 원조는 틈샛라면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이 메뉴를 김밥천국에서 도입했고, 현재의 분식집 냉라면 형태가 널리 전파가 되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경쟁력에서 밀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반대였다.
김밥천국이 전국의 무수한 분식집들을 망하게 한 지가 벌써 10여 년이었다.
한마디로 유행이 끝난 구식인 셈.
틈샛라면은 그 일부를 흡수해, 깔끔한 인테리어로 다시 재오픈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지금이라면 괜찮겠네.”
김밥천국에 다양한 라면 메뉴들이 있지만, 틈샛라면처럼 독창적이고 독보적이진 않았다. 그냥 어디 가서도 먹을 수 있는 평범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희소성이 없다고나 할까?
틈샛라면은 이름답게 그 틈을 파고들었다.
이 정도 메뉴에 퀄리티만 갖춰진다면 충분한 경쟁력이 생길 테니까.
“냉라면 나왔습니다.”
종업원이 냉라면을 놓고 갔는데, 비주얼은 딱히 대단하지 않았다.
약간 멀건 라면 국물에 얼음이 동동 떠 있었고 절임무와 오이, 열무가 약간 보였다. 그 위에 양념장과 반숙 계란이 전부였던 것이다.
국물은 약간 싱거웠는데 양념을 푸니 매콤하게 바뀌었다.
강형우는 일단 라면부터 한 젓가락을 들었다.
제기랄.
면이 딱딱했다. 차갑게 식힌 게 아니라, 면발의 심까지 제대로 익히지 않은 것이다.
아무래도 오픈한 지 얼마 안 되다 보니 실수한 모양이었다.
강형우는 이번에 국물에 집중했다.
적당히 매콤하고 살짝 새콤했다. 게다가 라면 스프맛이 강해서 좀 짜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묘하게 땡기기는 하네.”
익숙함에서 오는 감칠맛에, 절임무와 오이의 식감이 더해졌고, 열무의 시원함이 있었다.
그걸 번갈아가며 먹다 보니 어느새 한 그릇 뚝딱이었다.
진짜 마성의 맛이라고나 할까?
“역시 원조라는 이유가 있네.”
강형우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인 뒤, 메모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여름 메뉴라고 쉽게 생각할 게 아니었다. 먹어본 것만 열 종류가 넘었음에도, 실제 주혁 형이 알려준 것의 절반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가게를 비워둘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일단 큰 틀은 잡았으니까. 한 번 해보자.”
***
라면.
전 국민이 즐겨 먹는 음식이었다.
이걸 요리라 가정하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면, 국물, 고명. 이렇게 말이다.
강형우는 일단 라면부터 차갑게 만들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