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119화 새끼 다 컸네
누가 그러더라. 인생은 실전이라고.
다시 살 수 없기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미란다.
실제로 인터넷에 도는 건 다른 이야기 같았지만 강형우는 그러려니 했다.
결론은, 다시 경찰서로 갔다.
이병선의 도움을 받아 확실히 폭행에 대한 무혐의를 받았다. 명백한 증거가 확보된 이상 오래 붙잡을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거 위로 올리면 욕먹는다나?
강형우는 그렇게 하루 종일 기분 잡치게 했던 일을 정리했다.
이제 남은 건 복수(?)의 시간이었다.
***
“아저씨, 진짜 그래요?”
“이제 좀 삼촌이라 부르지?”
“뭐가 좋다고 그래요? 맨날 전화해서 어디냐 물어보고 갈구기만 해놓고.”
이건 강형우가 가진 시원섭섭한 감정 때문이었다.
자신이 뜬금없이 연락한 것도 맞지만, 그렇게 만든 것도 이병선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얼굴 보고 돈가스에 맥주 한잔하다 보니 그다지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병선의 얼굴에 있는 미처 못 봤던 주름이 세월을 짐작하게 했다.
“십 년 봤으면 볼 만큼 봤고, 해마다 안부 주고받았으면 알 만큼 아는 거다.”
이병선은 그렇게 말한 뒤, 맥주잔을 들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기에 강형우도 잔을 쳤다. 그리고 단숨에 글라스 한 잔을 비워 버렸다.
“우아~ 시원하다.”
진짜 속이 후련한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사실 아침부터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냉정하게 분석해 보니, 예전에 겪었던 일 때문에 경찰서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안 그랬다면 바보짓에 삽질까지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또, 이병선의 말하길 평범한 사람도 이런 일을 겪으면 혼란스러운 게 당연하다고 했다.
어쨌든, 강형우는 법대로, 절차대로 무고, 위증, 영업 방해로 신고해 버렸다. 이미 증거가 명확했기에, 입장이 완전히 뒤집힌 것이다.
물론 과감하게 지를 수 있었던 건 이병선의 조언(?)덕이었다.
“사람들이 TV를 너무 봐서 그런데, 실제 재판까지 가는 건 많이 없어. 아니, 가기는 가지. 경찰이 판결을 내리진 않으니까.”
결론은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심각하게 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이런 소소한 해프닝 같은 건, 그냥 행정처분에 가깝게 땅땅땅 때리고 끝나는 경우가 오히려 대다수라는 것이다.
쉽게 표현하면, 경범죄 스티커 받는 건데 한 번에 스무 장, 서른 장씩 날아오는 정도라나?
강형우는 별생각 없이 듣다가, 상상하고 나서야 소름이 돋았다.
어라? 오만 원짜리 스무 장이면 무려 백만 원인데?
움찔하는데, 이병선이 피식 웃었다.
“새끼, 쫄기는.”
“당연한 거죠. 평범한 서민들한테는 돈 십만 원도 무서운 건데…….”
“야. 너 운 좋은 거야. CCTV 없어서 증거 불명으로 가면 어떻게 하는 줄 야냐? 네가 인정하면 빨간 줄 그이는 거고, 소송 가면 최하 오백 든다.”
“진짜요?”
듣고 나니 갑자기 열이 확 올랐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가게 망하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죄 인정받으려면 소송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는 건지?
“물론 전치 2주면 대부분 합의하라고 하지. 피해자한테 처벌불원서 받아서 제출하면 간단히 해결되거든. 아니면 공탁금을 걸든가 하면 벌금 정도로 끝나.”
“의외로 간단하네요?”
“후우, 사실 제대로 이야기하면 졸라 길다.”
그러면서 뭐가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강형우가 법을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그냥 CCTV 덕이 일이 쉽게 풀렸다는 게 이해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돈 좀 들어도 차에 블랙박스 꼭 달아.”
“그게, 차 없는데요?”
“면허는?”
“당연히 있죠. 전에 용달 몰았는데…….”
“그래. 하여간 차 사면 꼭 달아라. 내가 이 일 하니까 참 좆같은 게 많아서 그래.”
그러면서 맥주잔을 잡아서 마시는데, 술이 거의 안 줄고 있었다.
“안… 드세요?”
“맥주가 술이냐? 물이지?”
“소주 드려요?”
“말해야 아니?”
강형우는 바로 냉장고로 가서 소주와 잔을 꺼내왔다. 그리고 이병선 앞에 놓더니 바로 술을 따랐다.
“크흐, 좋네. 그런데, 이렇게 보니 너 정말 많이 컸다? 이제 수염 자국도 있고, 얼굴은 그대로인데 살도 엄청 많이 빠졌어.”
“벌써 십 년 지났어요.”
“아니지, 임마. 너 그때… 보고, 또 장사 한다고 봤을 때니까 대충 사 년 됐겠다.”
“그래… 요?”
생각해 보니 명함 받을 때 보긴 봤었다. 너무 후다닥 이야기하고 끝내서 그렇지.
“그리고, 연락 좀 자주 해라. 다른 놈들은 석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전화 오는데, 가까운데 사는 놈이 코빼기도 안 비춰?”
“누가 형사한테 그렇게 자주 전화해요?”
“대부분 내가 잡아넣은 놈들이지. 대충 90%는 개과천선해서 잘살고 있고, 나머지 10%는 협박 전화지. 뭐.”
“헐.”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병선은 피식 웃었다.
“너, 이렇게 잘된 것도 다 내 덕이다. 너 임마, 그때 요주의 인물이었어.”
“그 일 이후부터 착실하게 살았거든요?”
“니가 착실하게 산다고 세상살이가 호락호락할 것 같아? 너 그때 이 동네 조폭들 스카우트 일 순위였다. 아냐?”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농담으로 듣기에는 표정이 너무 진지했던 것이다.
“아주, 신성이 나타났단다. 장래 조폭계의 한 획을 그을 인물이라나?”
칠 대 일인가, 팔 대 일인가로 싸웠는데 옆구리에 칼 맞은 상태로 전부 쓰러뜨렸다.
그만한 독기와 재능을 가진 고삐리는 몇 년 사이에 처음이란다.
“에이~ 설마요?”
“깡병태가 너네 집 찾아간 적도 있다면서?”
이름은 몰랐지만, 짐작 가는 건 있었다.
실제로 스카우트하겠다고 우리 집에 찾아온 조폭이 있기는 했었으니까.
그날 아버지한테 진짜 안 죽을 만큼 두들겨 맞았다.
지나고 보면 해프닝에 가까웠지만, 이병선의 이야기를 들으니 섬뜩했다.
“내가 꾸준히 전화한 게 그래서야, 임마! 내가 침 발랐다고 동네방네 소문내려고 한 거라고.”
“진짜… 예요?”
“됐다. 이거 일반인들이 알 만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듣고 흘려. 그건 그렇고. 뭐 없냐? 국물 같은 거?”
“뭐 드시고 싶은데요?”
“그냥 얼큰한 거. 솔직히 돈가스 맛은 괜찮은데, 내 입에는 안 맞네.”
“라면 괜찮아요?”
“찐하게 되냐?”
강형우는 바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냄비에 물을 넉넉히 올리고 맛간장 한 숟가락을 넣은 뒤 파기름 양념장과 손질된 야채를 투하하고 뚜껑을 덮었다.
그사이 사리면 두 개를 꺼냈고 마늘 여섯 쪽을 절구에 빻았다.
불과 2분도 안 지났지만 물이 끓기 시작했다.
강형우는 스프 조금과 나머지를 전부 집어넣고 뚜껑을 덮었다. 그리고 타이머를 맞춘 뒤 다시 홀로 나왔다.
마침 가게를 찬찬히 둘러보던 이병선과 시선을 마주쳤다.
“뭐, 안 해?”
“2분만 기다리면 돼요.”
“헐, 빠르네.”
“준비가 다 되어 있으니까 그런 거죠.”
강형우는 이병선의 잔에 술을 채운 뒤, 가볍게 건배를 하고 맥주를 다 비워 버렸다.
같이 소주 마시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타이머가 울리자 강형우는 주방으로 달려간 뒤 고춧가루와 후추를 뿌리고 불을 껐다. 그리고 뚜껑이 덮은 상태로 냄비를 가지고 바깥으로 나왔다.
“빠르네.”
“그래야 손님 많이 받죠. 드세요.”
이병선은 숟가락으로 국물부터 맛을 봤다. 그리고 연속으로 서너 번 수저를 움직였다.
“크하아, 좋네.”
“괜찮죠?”
“어, 딱 좋아. 이 정도 실력이면, 라면집 차려도 성공하겠다.”
“헐, 저 이 가게 사장이거든요?”
강형우가 장난삼아 버럭 했다.
이병선은 피식 웃었다. 그런 뒤 소주잔을 비우고 라면 한 젓가락을 들었다.
순식간에 면이 사라졌다.
경찰서 갔다 와서 강형우가 가게 정리하는 사이, 밥도 못 먹고 일하다 왔단다. 그러니 당연히 배가 고플 수밖에.
그렇게 두 개 분량의 라면을 해치운 이병선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우야. 이 정도 가게 얻으려면 얼마나 드냐?”
“예? 뭐에요. 뜬금없이?”
“그게…….”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이병선을 며칠 내내 고민하게 만든 게 있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 내가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와이프가 갑자기 식당을 하겠다고 하네? 애들도 커가는데 공무원은 겸업 금지라 내 수익만 가지고 힘들대.”
“그래요?”
“마침 적당한 분식집이 매물로 나왔다고 하는데, 애 둘 키우면 할 수 있을까?”
“무조건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무지하게 힘들걸요?”
“설마, 형사 마누라보다 힘들겠냐?”
“아저씨가 사법 고시 합격하는 정도로 힘들죠.”
그 말에 이병선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농담으로 들은 모양이었다.
강형우는 소주 한 잔을 비운 뒤에야 입을 열었다.
“저 하루에 네다섯 시간 자요.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날이 일 년에 열흘 정도 되려나? 하여간 그래요. 매달 월세, 인건비에 공과금에 세금 계산도 해야 하고…….”
한참 말을 하다 보니 이상하게 기분이 차분해졌다. 그래서 먼저 음식 장사 시작한 입장에서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회사 다닐 때 비하면 열 배는 더 벌어요. 그런데 정말 백 배는 더 힘든 것 같아요.”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은 없네.”
“그렇죠. 솔직히 오늘 같은 일은 처음 겪었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손님들하고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소주잔을 비우면서 묵묵히 듣고만 있던 이병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끼, 다 컸네.”
“예?”
“됐다. 난 이만 일어나야겠다. 또 일 생기면 전화하고. 아니, 아니다. 가능하면 좋은 일로만 연락해라.”
이병선은 소주 한 병 넘게 마셨음에도 멀쩡히 일어섰다. 그리고 입구에서 지갑을 뒤적거리더니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냈다.
“이거 안 주셔도……”
“야. 공무원은 씹다 뱉은 껌이라도 공짜로 먹으면 안 돼. 나 간다!”
“아니, 대리라도 불러야 되는 거 아니에요?”
강형우가 다급히 붙잡으려는데, 이병선이 피식 웃었다.
“마! 우리 집, 바로 옆이다.”
“예?”
“간다. 나오지 마!”
혹시나 싶어 가게로 들어가지 않고 기다렸다. 그런데 골목 끝 주택 입구에서 벨을 누르더라.
정말, 걸어서 3분도 안 되는 거리였다.
***
며칠 동안 진짜 평온했다.
경찰서 갔다 온 일이 꿈인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어쨌든 지성분식 식구들이 걱정 없을 만큼 이야기를 해놨고, 만약 손님들이 물어보면 모른다고 하라고 일러줬다.
그 과정에서 최민지가 여러 번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그 때문일까?
최근에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일도, 갑작스럽게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일도 사라졌다. 몇몇 손님 때문에 발끈하는 모습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잘 대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좀 평화가 찾아왔구나.”
하지만 강형우는 나름대로 바빴다.
내부 회의 결과,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다.
일단 강형우는 자신이 알아본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근처에도 파스타집이 적지 않으며, 대부분 분위기로 먹고 들어간다고 했다. 때문에 지성분식의 인테리어가 고급이라 많은 손님들이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냉정히 보면 5,000원짜리 음식에 너무 큰 기대를 하고 있는 거였다.
그렇다고 손님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었고, 마찬가지로 지성분식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강형우의 판단 미스에 가까운 거다.
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부분 파스타를 없애자고 했다.
본점과 다르게 2호점의 경우 전체 매출의 5%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소스나 기타 재료들이 남아서 버리는 걸 감안하면 큰 수익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강형우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시도해 보고 싶었다.
“어머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호호, 무슨 오랜만이야.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강 사장님이 우리 많이 보고 싶었구나?”
매주 화요일, 혹은 수요일날 오후 늦게 오시는 어머니들이었다.
미희 어머님과 친구분들이었는데 거의 하와이안 돈가스를 드시고 가셨다.
“오늘, 제가 서비스 하나 해드려도 될까요?”
“서비스요?”
“예. 파스타를 조금 손봤거든요. 의견 좀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요.”
“호호, 우린 좋지.”
일단 서비스란 말로 어머니들한테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그래서 주방으로 가려는데, 미희 어머님께서 갑자기 물으셨다.
“혹시, 여기… 현기네 엄마 안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