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94화 이게 대체 무슨 맛
“그래, 밥은 먹고 다니는 모양이구나. 이제 살림살이는 좀 나아진 게냐?”
역시나 제일 먼저 그걸 물어볼 줄 알았다.
하긴, 가게 망한다 망한다 했던 때였다.
어르신이 떠나기 전까지 죽을상을 하고 있었으니 그게 가장 궁금할 테지.
“예. 이제 입에 풀칠 정도는 하네요.”
“고작?”
“고작이라뇨?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건데요.”
강형우가 반발을 하자 천경 어르신은 피식 웃었다.
“중요하지. 암, 중요하고말고. 세상살이에 먹고사는 것만큼 중요한 게 뭐가 있을까 마는… 그것도 제대로 먹고살아야지. 욕까지 먹으면 안 돼!”
요점은 이거였다.
당당하게, 그리고 떳떳하게 먹고살고 있느냐는 거다.
강형우는 피식 웃었다. 적어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럼요. 나름 잘해 나가고 있어요.”
“허허, 그럼 한잔하자!”
뭐가 그리 흡족한지 천경 어르신은 또다시 잔을 채웠다.
좋은 술자리였다.
먼저 공지혜가 공들여 만든 안주가 가득했다.
육전의 탈을 쓴 파전에, 무침을 가장한 도토리묵 범벅에, 당면보다 고기가 많은 잡채까지.
여기에 천경 어르신이 직접 캔 약초로 담근 술이 더해지니 흥이 안 오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지난 시간의 궁금함을 이제야 편히 말할 수 있다는 기분이 좋았다.
“솔직히, 물어볼게요. 간다 그러시면서 해 넘어가기 전에 오신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작년은 넘겼을지언정 올해는 안 넘겼다. 아직 설 전이잖니.”
“그건 그런데…….”
“인연이란 게 그런 게야. 온다 간다 딱 부러지게 말하는 건 서로가 아쉬우니 약속하는 것이고, 어떻게든 볼 사람은 보게 되어 있는 법이지.”
천경 어르신이 입맛을 다시는 건 뒷말이 있다는 거였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이렇게라도 왔으니 된 것 아니냐고.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강형우가 다시 잔에 술을 채우는데, 천경 어르신께서 흐뭇하게 웃으셨다.
“너도 슬슬 마음의 흐름을 따라가게 된 모양이구나. 어느 정도 기준도 새워진 것 같고.”
“예? 그건 또 무슨…….”
아오, 솔직히 콕 짚어서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다.
“껄걸껄, 사람 말을 하면 이해하는 게 맞는 거고, 사람 말이 아니니 모르는 게 당연한 게지.”
그럼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가?
그런 생각하는데, 천경 어르신이 고개를 저었다.
“대저 말이란 생각의 표현이기는 하나 반대로, 확장을 가두는 틀이기도 하지.”
“그래… 서요?”
“쉽게 말해주면… 흐음, 이런 거란다. 내가 천기를 보니 너는 다음 주에 십억짜리 복권을 맞겠구나. 한 오 년 뒤에 예쁜 처자랑 결혼도 할 거고, 자식은 못해도 넷 이상은 낳겠네.”
“예에?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래, 그런 게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의미를 두는 게 무의미하다는 거지. 그냥 말은 말일 뿐.”
끄응. 이해가 갈 듯하면서도 진짜 암호풀이 같았다.
긴가 민가 같은 느낌?
“좋아요. 다 좋다고요. 그런데 진짜 궁금한 건 따로 있거든요.”
“뭔데?”
“그 몽연주라고 있잖아요. 좋은 꿈을 꾼다는 거.”
천경 어르신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게… 그러니까…….”
뭐라 할 말이 많았는데, 생각만큼 쉽게 나오질 않았다.
솔직히, 그 술 먹고 전생을 기억하게 되면서 이런저런 사연들을 많이 겪었다.
노예가 되어 보기도 하고, 시위에 나섰다가 맞아 죽고, 왜적과 싸우다가 총 맞기도 하고…….
그렇게 부당함과 맞서 싸우다 무수한 죽음을 겪었다. 그런 전생들을 되짚어 올라가다가 장백호의 기억과 맞닥뜨렸던 것이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삶.
거기서 배운 건 몸을 조화롭게 해준다는 호흡이었다.
동시에 파란만장한 인생에서 스스로의 가치관을 지킬 수 있는 힘, 바로 담대한 정신력을 경험했다. 그 덕에, 수많은 진상손님과 개소리하는 인간 군상들과, 무엇보다 조성기의 괴롭힘을 이겨낼 수 있었다.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무수히 좌절했을 거다.
몇 번이나 살인 충동을 느낄 정도로, 정말이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으니까.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런 걸 느꼈다.
혹시나 싶어 실습 기간 중 신원이 형에게 잠시 지성분식 카운터를 맡긴 적이 있었다.
확실히 영업 경험이 있으니 기본은 하더라.
하지만 강형우는 봤다.
몇 번이나 손을 떨고, 식은땀을 흘렸다.
심호흡을 하면서 겨우겨우 버텨냈지만 20분도 안 돼서 기절까지 하려고 했다.
대인기피증.
그게 농담이 아니었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장백호의 기억을 얻은 건 정말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계기가 바로 몽연주였다.
하지만, 천경 어르신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그냥 술이지.”
“예?”
“그냥 술이라고.”
“아니, 그러니까 저한테는 좋은 거라고 하셨잖아요.”
왠지 억울한 느낌에 버럭 했는데, 의외로 천경 어르신은 느긋하게 웃을 뿐이었다.
“술을 준 것뿐이야. 이미 내 손을 떠난 것이니 그걸 어떻게 하든 자네 자유고, 그로 인해 뭔가를 얻었다면 그 역시 자네의 것이지. 내가 알 바가 있겠나?”
저렇게 말하니 할 말은 없네.
하지만 표정을 보니, 다 안다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몽연주에 대해 더 이상 말을 꺼낼 것 같지가 않았다.
“쯔. 그냥 인정하면 편할 것을. 그게 뭐가 어떻다고 그리 수심을 가지는 게냐.”
“아니, 답답하잖요. 그러니까…….”
“요즘 방송 보니 유행하는 좋은 말이 있더구나. 박명수라는 사람이 그랬나?”
“예?”
“그래서 어쩌라고!”
그러면서 박명수처럼 버럭 하는데,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어쨌든 그건 무책임의 대명사 같은 말이었다. 그게 천경 어르신 입에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이미 지나고 흐른 것이야. 그걸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그리고, 죽었다 깨어나도 이미 역사가 된 일은 바꿀 수도 없는 것인데.”
“그냥 인정하면 편하다는 겁니까?”
“달리 수가 있는 게냐?”
쩝. 들어보니 그렇긴 하네.
게다가 이어지는 말도 더욱 혼란스러웠다.
“몽연주는 좋은 꿈을 꾸게 해준다는 말이 있지. 본인이 원하는 걸 보게 해준다고들 하더구나. 그게 상상일지, 실체일지는 중요하지 않아.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지는 온전히 본인의 몫.”
“그렇기는 하지만…….”
“모두가 쓸데없는 고민일 뿐이야. 중요한 건 앞으로 무언가를 할 것이냐지.”
이후 술자리가 이어지는 동안, 천경 어르신은 그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부족하다는 듯 무수히 많은 당부만 남기셨다.
이날 강형우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게 두 사람이 만나는 마지막 자리라는 것을.
***
“아오, 답답해. 답답하다고!”
좋은 이야기만 많이 들었다.
정작 궁금한 건 듣지 못했고,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타박까지 받았다.
결론은, 그 모든 꿈들이 내가 보고 싶어서 꾸게 됐다는 거다.
그게 전생인지 상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
동시에 내 알 바 아니라고 하니, 더는 캐묻기가 어려웠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실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천경 어르신의 말대로 그냥 좋은 꿈을 꾼 것일 뿐.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나가면 된다. 어차피 손해 볼 건 없었으니까.
하지만 혼란스럽게 하는 건 이거였다.
“호오오, 흐으읍.”
이 단순하지만 무지하게 힘든 호흡법이 남아 있었다.
동시에 여기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장백호의 기억들이 더욱 살아난다는 점이었다.
이러다가 울컥하고 삐끗하면, 진짜 사람 많이 패 죽이게 생겼다.
“뭐, 그렇게까지 하겠느냐만.”
태연하게 넘기려고 했지만, 불안한 것도 없지 않았다.
과연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야?”
“예?”
강형우는 순간 멍해졌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다 보니 지금 상황이 겨우 보였다.
눈앞에 커다란 테이블 두 개가 붙어 있었다.
여기에 여섯 접시의 다양한 치킨이 보였고, 손에는 닭 다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건 눈앞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창주 형이 한숨을, 덕수 형이 인상을 찌푸렸다. 혁기 형조차 지겨워하는 표정이 역력했고, 공지혜만이 열심히 메모할 뿐이었다.
그들 뒤에 비장한 표정의 현우 형이 보였다.
특히 전부가 강형우의 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이제야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강형우가 지성분식 2호점을 공사하는 동안 현우 형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맛을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고, 피카소의그림 같이 해석하기 난해한 새로운 작품(?)들을 내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중요한 건, 강형우의 평가였다.
그러니까 이틀 전인가?
“형우야, 좀 살려주라.”
창주 형이 애원을 했고, 덕수 형이 울려고 했다.
“여긴 지옥이야. 지옥.”
이어진 건, 김민석과 윤다정의 울먹임이었다.
“형님, 손가락이 닭발이 될 것 같아요.”
“오빠, 저 다시 입덧할 것 같아요.”
이 사람들뿐이면 모르겠는데, 예비 형수님 고지우 누나와 엉겁결에 끼게 된 부동산 삼촌, 철물점 사장님에 덕수 형 동생 정병수까지 있었다.
거기에 공짜 치킨 먹겠다고 온 이강석과 백창호도 있단다.
그러니까, 맛 좀 보고 평가해 달라고 부탁받아 왔다가 치킨 고문(?)을 받게 된 거다.
알고 보니 할당제 비슷하게 돌아가면서 거의 일주일을 개고생하는 상황이라나?
결국 부작용이 왔다.
다들 치킨에 물렸고, 통닭 이름만 들어도 토할 지경까지 몰린 거다.
그래서 구조 요청이 들어왔다.
제발 이 끔찍한 릴레이 좀 끊어달란다.
해서 강형우는 지성분식 2호점 일이 마무리되자 다시 우리 통닭으로 향했다.
역시나 기름 쩐내가 가득한 공간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치킨들이 그득그득하게 나오는데, 하아~ 솔직히 이게 뭔가 싶었다.
김현우가 자신만만하게 자랑했다.
“이건 옆 동네 유명 가게 치킨인데, 거기 메인인 크림 까르보나라 치킨이야. 이걸 우리 가게에 맞게 응용해서 만들어봤어.”
“이 치킨은 경성대 유명한 족발집 메뉴를 응용한 거야. 촉촉 마늘 치킨인데 의외로 요즘 잘 나간다고 하더라고. 소스 묻은 채로 먹어봐.”
“이건, 무슨 특공대인가 방송에서 본 건데, 김치찜 치킨이라고…….”
“그리고 이게 요즘 인터넷에서 가장 핫하다는 가게 인기 메뉴인데, 굴소스 튀김 치킨이거든?”
그나마 여기까지는 해석이 가능했다. 왜 이런 메뉴를 준비했는지를 말이다.
하지만, 크나큰 차이가 존재했다.
유명 가게들은 기본 치킨 자체가 맛의 퀄리티가 있었다. 거기에 차별화된 메뉴가 더해져 이색적인 맛을 냈던 것이다.
반대로 치킨 맛의 균형이 무너지면 뭘 해도 엉망이었다.
강형우는 냉정하게 평가했다.
“형, 크림 까르보나라 치킨은, 수영에 삐뽀 그집 맞죠? 그런데 형이 한 건, 기름 맛이 너무 심해요. 여기 보이죠? 거품 뜨는 거?”
“마늘 치킨의 핵심은 걸쭉한 점성이에요. 이렇게 물이 되면, 마늘탕에 빠진 치킨일 뿐이라고요.”
“김치찜 치킨은, 양정에 있는 7번가 닭볶음탕 스타일이잖아요. 근데 형은 튀긴 치킨을 끓여 버렸어요.”
“굴소스 치킨은, 77통닭 깐풍기 짝퉁 같은데 중요한 건 소스를 다루는 방식이죠. 중식 볶먹 탕수육처럼 해야 되는데 형은 그냥 탕에 담갔다 뺀 수준이에요.”
이렇게 평가를 한 끝에, 강형우는 정곡을 찍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맛이에요?”
니 맛도 내 맛도 아니고, 치킨 맛도 아니라는 소리였다. 손님한테 내놨다가 욕 처먹기 좋은 수준이라는 뜻이다.
진짜 팩트 망치로 머리통을 후려갈기는 거였다. 토르가 봤으면 박수 칠 정도로 정통으로 때려 버린 것이다.
중요한 건, 가게에 모인 이들 전부가 강형우의 의견에 찬성했다는 거다.
김현우는 풀이 죽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렇지?”
“형. 미안해요.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할 것 같아요. 솔직히 저도 형한테 생닭 받아서 테스트 해 봤는데, 이건 원점부터 다시 잡아야 돼요.”
“원점?”
현우 형이 고민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실, 강형우도 지성분식 일을 하면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연한 것처럼 꾸준히 알아보고 연구했으며 그사이 거의 백여 마리 가까이를 튀겨봤던 것이다.
그랬기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형, 저랑 갈 데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