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85화 뽑아주면 안 되겠니
뭐지, 이 난장판은?
강형우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자던 자리 옆에 공지혜가 있었고, 종아리를 이강석이 베고 있었다. 그런데 방이 좁아 벽에 다리를 올린 채였고, 그 엉덩이 아래 백창호의 머리가 있었다.
정은혜는 배가 고팠는지 백창호의 종아리에 입을 대고 침을 흘리는 상태였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그래도 하나는 파악할 수 있었다. 정수리를 걷어찬 게 정은혜라는 사실을 말이다.
강형우는 냉장고를 열어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자 조금은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휴우, 살겠네.”
강형우는 잠시 고민했다.
모질게 맞아서 잠은 다 달아났다.
그렇다고 이대로 멀뚱히 있기도 이상했고, 다시 저 사이로 파고들어 잔다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일단 씻을까?
아무래도 그게 최선의 선택지 같았다. 그런데, 공지혜의 얼굴을 보자, 어제의 기억이 스멀스멀 살아났다.
“오빠, 지혜 언니 자요.”
노래방 주점에서 다들 열정을 쏟아부었다. 취하기도 취했지만 신나게 춤추고 노래 부른다고 그 비싼 한우를 모두 소화시킨 것이다.
또 배고프다고 3차를 가잖다.
강형우도 조금은 출출했던 터라, 이번에는 가까운 퓨전 주점으로 향했다.
여기서 오코노미야키하고 해물 어묵탕, 고기 꼬치 세트를 시켰는데, 얼마 마시지도 않아 공지혜가 잠이 들어버렸다.
그간에 일도 많아서 피로가 쌓인 모양이었다.
고로롱고로롱 코까지 골면서 잠드는데, 차마 깨우기가 그래서 놔뒀다.
다시 술자리가 이어지고 다들 헤롱헤롱대는데, 그때 공지혜가 일어났다.
“오빠, 달려요. 달려. 마시고 죽자고요.”
얘가 왜 이러나 싶었는데, 그 순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던 알코올 좀비들이 스멀스멀 살아나기 시작했다.
시간은 새벽 한 시.
또다시 안주 추가에 술자리가 이어졌다.
여기서부터 강형우도 기억이 조금씩 끊기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공지혜를 업고 있었다. 택시 태워도 못 갈 것 같아서 데려가기로 했던 모양이었다.
이후 떠오르는 건 하나였다.
집에 오자마자 구석에 가서 잠든 거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딱 보니 강형우가 자는 사이에 셋이서 두어 병을 더 마신 것 같았다. 그러니 다들 시체처럼 요 모양 요 꼴이 된 거겠지.
“후우, 일단 나가자!”
강형우는 입으로 괴상망측한 알코올 향수를 뿌려대는 애들을 피해서 옥상으로 나갔다.
그런 뒤, 가볍게 몸을 풀고 맨손 운동을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차가운 새벽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정도로 땀을 흘린 뒤에야 담배를 물고 평상에 앉았다.
“휴우우~”
연기가 개운하게 흩어졌다.
솔직히 어제는 애들 어리광을 많이 받아줬다.
고맙다고 하니, 우리 사장님이 최고라고 하니 어찌 거절하겠는가?
사실, 일종의 성과급 형식으로 보너스를 준 건 이유가 있었다.
어묵 국밥으로 겨우 살아났고, 파스타와 돈가스로 오픈발 비슷한 효과를 봤다. 그때마다 정신없을 정도로 바빴고 덕분에 매상이 껑충 뛰었다.
그건 열심히 노력한 대가이긴 했다.
하지만, 나 혼자 고생한 건 아니었다. 공지혜가 홀을 컨트롤했고, 순이 이모와 이강석이 불평 없이 따라줘서 그게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고생했다고 한 푼, 두 푼 쥐어주는 게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마치, 적선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건 열심히 일을 했던 것에 대한 대가가 아니었다.
그냥 사장이 기분 내키는 대로 주는, 용돈에 가까운 그런 성격의 돈이었던 거다.
물론 자본주의는 그런 게 맞았다.
사장이 자신의 자금을 투자를 해서 가게를 얻고 인테리어를 한다. 고객층을 파악해서 아이템 결정을 하고, 그걸 장사에 맞게 조리하는 과정도 손 야 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영업에 필요한 모든 잡다한 것은 전부 사장이 해야 했다.
그만큼 할 일도 많고, 신경 쓸 것도 많으니 남들보다 더 벌어가는 게 맞았다.
막말로 지성분식이 망해서 거지가 됐다.
그 손해를 직원들이 메워줄 건 아니지 않는가?
냉정하게 따지면 그게 맞았고,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강형우는 오랜 시간 고민했다.
과연 맞는 것일까?
나만이라도 다르게 해보면 안 될까?
그러던 차에 형님네 밥버거를 도왔다. 또, 제대로 한 끼에서 일하면서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중간중간 주던 돈을 없애고 일한 만큼의 금액을 모아서 주는 것.
따지면 지성분식에 한해서 적게나마 지분을 준다는 개념이었다. 장사가 잘되면 그만큼 더 가져가는 거고, 반대로 잘 안 되면 적어지는 것이다.
이 경우, 돈을 더 가져가기 위해 열심히 할 가능성이 컸다.
물론 부작용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할 일이었다.
어쨌든 다들 좋아했다.
솔직히 공지혜는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했다. 아버님 일도 있지만, 무언가 목표를 세운 것처럼 보였다.
이강석 역시 빚이 남아 있었다.
비록 한순간의 실수라 해도, 그걸 다 갚기 전까지는 김복희 여사님한테 떳떳하기 어렵다고 했었다.
정은혜는 일이 바쁘고 힘들어도 좋단다.
전에 무슨 알바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틈만 나면 불평을 늘어놓았다. 돈도 적게 주면서 밤늦게까지 일시키고 사장 아들이란 놈이 수작도 부렸단다.
그래서 지성분식이 좋다고 했다.
백창호도 사정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울에서 부킹호프에서 일할 때, 사고가 났다. 술 취한 단골 누님이 과하게 희롱을 했다는 것이다.
뽀뽀까지 당했는데, 문제는 그 누님을 좋아하던 조폭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거다.
부산으로 도망쳐 온 게 그래서란다.
솔직히 얼굴을 보면 그럴 일이 생길 것 같지 않지만, 어쨌든 백창호는 군대 가기 전까지 최대한 돈이라도 많이 벌어놓겠다고 했다.
그건 순이 이모도 마찬가지였다.
먹고살려면 최우선인 게 돈이었고, 특히 애를 키우려면 무지하게 많이 벌어야 했다.
빌어먹을, 돈! 돈!
그 지겨운 것 때문에 다들 일하고 있었다. 그러니 보람이라도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어제가 그 시작이었다.
겨우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고,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고 싶었다.
안 되면 그때 가서 또 고민해야겠지만.
솔직히 어제 하루, 월급으로만 천이백 가까이 지출했다.
그럼에도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벌어간 것도 그 이상이긴 했지만, 가족들과 함께한다고 생각하니 아쉽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폰이 울렸다.
액정에 노예 1호가 뜨는 걸 보니, 이강석이었다. 아침 해가 떠오르면서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형. 속 쓰려 죽겠어요.
“그래서?”
-해장국 좀…….
갑자기 가족이 아니라 원수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
거의 열흘은 별문제 없이 잘 지나갔다.
폭주 회식의 영향 때문에 월요일 하루만 조금 힘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순이 이모의 등짝 후리기 필살기가 펼쳐지니 금세 지성분식은 정상으로 돌아가더라.
그사이 강형우는 많은 준비를 마쳤다. 조금씩 인수인계를 진행시킨 것이다.
가장 먼저 한 건, 바로 사람 구하기였다.
“이름이 뭐라고?”
“홍성구라고 합니다. 올해 스물다섯이고, 태구 형님 소개로 왔습니다.”
당당하고 씩씩하게 말해서 일단은 합격점을 줬다.
무엇보다 취사병 출신이였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가게 확장한다고, 사람 구한다고 했더니 홍태구가 보내준 것이다.
먼 친척 사촌 동생이란다.
때문에 출신 성분은 믿을 수 있었는데, 사상 쪽으로는 조금 조심스러웠다.
홍태구랑 비슷한 괴팍과(?)라면 괜한 일을 만들 소지가 컸으니까.
그렇게 주방 보조 한 명을 채용했다.
물론 단단히 일러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동생들이라고 해도 이 가게에선 엄연한 선배다. 함부로 말 놓지 말고,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라.
무엇보다 순이 이모가 실세이니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해라.
등등이었는데, 아직 군대물이 안 빠져서인지 눈빛에 결의가 가득했다.
그렇게 홍성구가 적응할 무렵, 조리사 한 명이 더 들어왔다.
“이름은 이은주고요. 나이는 스물여섯입니다.”
작고 예쁘장한 여자였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포켓몬에 나오는 꼬북이 같은 얼굴인데, 웃으니까 진짜 많이 닮았다.
“죄송한데, 키가…….”
“백오십이요.”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았다. 머리 높이가 겨우 가슴에 닿을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그런데, 주방 일을 하고 싶다고 하셨죠?”
“예.”
“정말 괜찮겠어요?”
저 가녀린 체형으로 팬이나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까 싶었다. 애초에 싱크대 높이도 맞지 않았고 무거운 짐을 드는 것도 불가능할 듯 보였던 거다.
“이거 이력서요.”
당당하게 내미는 걸 보니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봤는데, 순간 소름이 돋았다.
“중식 조리사 자격에… 경력이 무려 오 년이나 되네요.”
“예.”
그러면서 웃으니 더욱 무서웠다.
특히 놀라운 건 이거였다.
“황룡에서 사 년, 일하셨군요.”
이 정도면 창업 공신 쪽은 아니더라도 2세대 정도는 된다.
그렇다면 적어도 월급이 삼백 이상이라는 건데, 왜 우리 가게를 온 거지?
강형우가 고민하는데 귀신이 찾아왔다. 폰 액정에 강주혁 이름이 떴던 것이다.
당황한 강형우는 양해를 구하고 주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예. 형.”
-어… 형우야. 아는 동생이 거기 지원하러 간다는데, 혹시 연락받았어?
“이은주 씨요?”
-어. 진짜 갔네. 하여간 아오~
왜 한숨 소리가 먼저 들리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주혁 형의 입에서 정말 의외의 말이 들렸다.
-부탁인데, 좀 뽑아주면 안 되겠니?
“예? 무슨 일 있어요?”
-그게, 사정은 나중에 설명할게. 하여간 실력은 내가 보장한다.
그렇게 몇 마디 대화가 이어진 뒤 통화가 끝났다.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주혁 형 입에서 부탁한다는 말이 나오다니, 진짜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하지만 면접은 면접이지.
“일단 주방에 한 번 서보세요.”
키는 작았는데, 의외로 어울려 보였다. 화구 높낮이라든가 싱크대를 조절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희한하게 딱 들어맞았던 것이다.
“그럼 할 줄 아는 요리는…….”
아차 싶었다.
분명 이력서에는 주방 보조가 아닌 조리부 소속으로 되어 있었다.
중식 자격증 딴 게 오 년 전이고, 그때부터 음식을 만들었으니 이런 말 자체가 실례였다.
무엇보다 주혁 형이 실력을 보장한다고 했으니, 나보다는 고수일 가능성이 컸다.
“호호호.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아, 아뇨. 됐습니다.”
강형우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월급은 백오십부터 시작한다고 했음에도 바로 오케이하더라.
무엇보다 뒷배경이 강주혁이니 어찌 뽑지 않을 수 있으랴.
***
“이거 잘되고 있는 건가?”
이게 족보가 꼬인 건지, 서열이 꼬인 건지 모르겠다.
분명히 순서는, 공지혜에서 순이 이모, 이강석과 정은혜, 백창호 순이었다. 근데 나이가 어중간한 두 사람이 들어오자 이상하게 바뀌었다.
일단 공지혜가 톱인 건 맞았다.
순이 이모도 서열 예외였고.
신기하게도 가장 막내가 홍성구였다. 나이가 있음에도 이강석에게 음식을 배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알고 보니 가게 안에서는 홍성구가 막내, 나가서 술 마실 때는 큰형이었다. 이강석과 백창호가 내 자취방에 들리는 횟수가 줄어든 게 그래서였다.
어쨌든 남자들은 그렇게 정리가 됐다.
그다음은 이은주였다.
가게 서열 3위.
요리 실력과 특유의 친화적인 성격으로 그 자리를 쟁취한 것이다.
신기한 건 잡음이 하나도 없었다는 거다.
아마도 주방 경력에서 나오는 아우라와 카리스마 때문인 것 같았다.
그 결과 이틀 만에 이강석과 백창호, 홍성구가 누님, 오오, 우리 누님이라 칭송했다.
또, 순이 이모는 예쁜 동생이라 불렀고, 공지혜와 정은혜도 언니, 언니 하며 따라다닐 정도가 됐다.
그게 황당하면서도 신기했는데, 나중에 공지혜가 그러더라.
무려 황룡 태화점 사장 딸이라나?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멍해 있는데, 때마침 원흉(?)에게서 연락이 왔다.
-형우야, 나 부산 왔다. 소주 한잔하자!
바로 강주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