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82화 술 한잔할래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자기 아들 일 좀 시켜달라니… 바로 이해가 되질 않았던 것이다.
“저기 그게…….”
강형우가 얼떨떨해하는데, 강학희는 의외로 진지했다.
“내가 마음이 급해서 조금 서둘렀어. 내 말은, 어차피 보증금은 돌려줄 돈이야. 그러니 조금 더 받고 덜 받고는 큰 문제가 안 돼. 진짜 장사 제대로 하겠다! 그러면 그 정도 조절해 주는 건 일도 아니라고.”
애초부터 보증금 얼마에 연연하는 스타일이 아니란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알짜라고 했다.
“난 부자는 아니야. 재산이라고 해봐야 이 건물 하나가 전부지. 중요한 건 빚이 단돈 십 원도 없다는 거야! 따지면 보증금도 빚 아니겠나?”
요즘은 부채도 자산이라고 하는 시대인데, 아무래도 경제적인 판단 기준이 다른 모양이었다.
강학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내가, 여기 이 가게만은 진짜 공을 많이 들였어. 자재비만 삼천이고, 내 지인들 도움받아 공사한 거라 시설비하고 치면 거의 사천이 든 거야.”
권리금 역시 정말 순수하게 실비용으로 계산한 거란다. 아들이 장사할 거라 생각했기에, 정말 좋고 고급스러운 것으로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가게 뜯어서 다른 데 가져다 붙이면, 최하 오천짜리 공사라고. 그렇게 따지면 삼천이 넘어.”
강학희가 열변을 토했다.
사실 정확한 가치나 내용은 전문가가 아니니만큼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이해가 되었다. 그만큼 정성을 기울였기에, 그 가치가 낮게 평가되는 게 싫었던 거다.
그날 내쫓다시피 한 게 그래서 같았다.
“예. 알겠습니다. 저도 권리금 삼천이면 무척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됐고. 대신 아까 말한 조건이 있다네.”
“좀 자세하게 듣고 싶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반신반의했다. 아니, 솔직히 의심부터 들었다는 게 사실이었다.
안 그래도 요즘 인터넷을 뒤져보면 별의별 이야기들이 많았다.
장사가 잘되면, 건물주가 바로 내쫓는단다. 계약 연장을 거부하고 나가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뒤, 그 가게를 다른 사람한테 팔아먹는다.
그건 전 주인이 열심히 일해서 쌓아온 결과물을 강도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 다른 건물을 가진 지인들에게 넘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서로 그런 방식으로 재산을 늘린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건물주들의 개갑질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특히 자기 건물 가게에, 가족이나 친척들을 취직시켜 장사 노하우를 빼가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 뒤, 계약이 끝나면 가게 주인을 내쫓고 자기 자식에게 물려준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장사하는 입장에선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한두 번 들은 것도 아니라서, 강학희의 말에 경계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근데, 걱정은 기우였다.
강학희는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우리 아들이, 병이 좀 있어.”
“예?”
“그러니까, 서울에 큰 백화점에서 일하다 내려왔는데 사람 대하는 게 어려워진 거야.”
설명을 들어보니, 황당했다.
대인기피증 카페 주인이라니, 이걸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강학희가 말했다.
백화점 판매 코너에서 고객들 상대로 십 년을 일했단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수시로 배가 아프고 어지러움을 느꼈다는 것이다.
진단해 보니 대인기피증이란다.
“서울 놈들이 얼마나 개새끼들인지. 그런 병이 다 걸리나 싶더라고.”
강학희는 진짜 화가 나는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결국 강형우도 맞장구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주혁 형이 말하길, 진상 보존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했다.
천 명 중에 한 명은 진상 손님이고, 만 명 중에 한 명은 초월적인 쓰레기라나?
무엇보다 서울 인구는 거의 천만에 가까웠다. 그만큼 숫자가 많으니 진상들도 많다는 게 된다.
“어쨌든 아들놈이 부산 내려와 카페를 차린 게 그래서야. 조용한 가게 하면서, 소소하게 손님을 대하다 보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던 거지.”
그런데 이 동네도 진상들이 있었나 보다.
몇 달 장사하면서 사람 대하는 게 조금 편해졌다 싶었는데, 다시 병이 도졌단다. 단골이라는 아줌마가 사사건건 따지고 들었다는 것이다.
“미친 할망구들 같으니라고, 에스쁘래소하고 아메리카노도 구별 못 하면서 무슨 커피 맛이 어쩌고저쩌고.”
강학희는 직접 그 상황을 겪은 것처럼, 분통을 터뜨렸다.
잠시 이야기를 듣던 강형우는 뭔가 의아함을 느꼈다.
그저 임대 희망자일 뿐인데, 왜 이런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거지?
막 그런 생각이 드는데, 뜬금없는 이야기가 들렸다.
“자네, 가게를 가봤네.”
“예?”
“거, 부동산 하시는 분이 그러시더라고. 자네가 성실한 사람이고, 동네에서도 인성 좋기로 소문났다고.”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다.
칭찬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때 강학희가 딱 부러지게 말했다.
“난 사람, 말만 가지고 안 믿어! 오직 내 눈으로 본 것만 믿는 사람이라고.”
“아~ 그, 그러시군요.”
“자네가 없을 때 들어가서 먹고 왔네. 사실 돈가스는 뭐, 고기튀김이 다 거기서 거기지 싶었는데… 공사판 노인네 입에도 잘 맞더군.”
“맛있게 드셨다니 감사합니다.”
강형우가 고개를 숙이는데, 반대로 강학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내가 거기서 그걸 봤어. 자네하고 같이 있는 사람들 말이야. 다들 밝은 표정으로 즐겁게 일하더군.”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평소에도 즐겁게 일하기는 하지만, 최근에 더욱 밝아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걸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데, 씁쓸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게 중앙에 걸려 있던 그 사진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네. 그때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내가, 내 아들이 제대로 웃는 걸 거의 반년은 못 본 것 같더라고.”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강학희는 한숨을 토하듯 말했다.
“그게… 보고 싶다네.”
***
“휴우~”
입에서 나오는 건 한숨이었고, 가슴은 답답했다.
또, 눈은 애꿎은 시계만 노려보고 있었고 마시는 커피는 썼다.
이게 에스프레소의 맛이라는 건가?
확실한 건, 앞으로 내 돈 주고 이걸 사먹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강형우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쳐다봤다.
한 장의 명함이 거기 있었다.
<카페 ‘날개’ 오너 강신원>
그 아래 심플하게 전화번호와 메일 주소가 보였다.
강학희의 절절함 때문에 받은 거였다.
아들하고 한 번 만나봐 달란다. 급한 건 아니니, 이야기하고 결정이 되면 그때 계약을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네하고 함께 일하면, 우리 아들도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솔직히 확답하기가 어려웠다.
일단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고, 대인기피증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혹시나 해서 블로그를 뒤져봤는데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말이 거의 없다는 것.
웃으면서 손님을 맞기는 하는데, 무관심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딱 필요한 말만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손님은 벙어리인 줄 알았단다.
그 외에도 제법 잘생겼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거의 한 시간 넘게 뒤졌다.
놀랍게도 얼굴이 제대로 나온 건 단 한 장도 없었다. 옆모습 실루엣 정도가 그나마 많이 나온 것이다.
“이 사람, 은신술이라도 쓰나?”
그런 의심이 합리적으로 느껴질 만큼, 수백 장이 넘는 카페 사진에서도 제대로 된 모습을 찾기가 어려웠다.
강형우는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보니, 증세가 더 심해져서 거의 집 안에서만 지낸다고 했다. 하루에 열 마디 이상 하는 경우가 없다고 했고, 가끔 담배 사러 편의점 나가는 게 외출의 전부라는 것이다.
나이는 서른넷이고 미혼, 현재 여자 친구 없음.
직장 생활하는 여동생이 한 명 있다는 것 외에 아는 정보가 전무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설득해서 고용해야 한다니…….
“하아, 진짜 무슨 게임 미션도 아니고.”
사실 절호의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보증금도 이천이나 내려줘, 권리금도 천만 원이나 깎아주기로 한 상태였다.
가장 황당한 건 이거였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그리고 강형우가 장사하는 동안에는 월세 한 푼도 안 올려 받겠단다. 오 년이든 십 년이든 하고 싶을 때까지 마음껏 하라는 것이다.
정말이지 이만큼 파격적인 조건은 다시없을 듯했다.
그게 지켜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입으로 두말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하루를 고민한 끝에, 아들 강신원에게 용기 내서 전화한 게 그래서였다.
“그나저나 약속 시각이 십오 분이나 지났는데……”
강형우가 계속 노려봐서 쫄았는지, 잘 가던 시계가 멈춘 것 같았다.
그만큼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고 있었다.
끼이익.
문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봤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생겼다. 테이블 여덟 개의 작은 카페인데, 모든 여자 손님들이 입구를 쳐다본 것이다.
솔직히 강형우도 놀랐다.
자신과 비슷할 정도의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였다.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 시선을 확 잡아끌었는데, 마치 연예인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분명히 백화점 판매 직원이라 들었는데, 무슨 모델이 다 걸어오나 싶을 정도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강신원이라고 합니다.”
단번에 알아보고 인사하는 것도 정말 신기했다.
그런데 왜 웃지?
어쨌든 강형우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강형우라고 합니다.”
“예. 이야기 들었습니다. 실제로 뵈니, 많이 비슷하네요.”
“예?”
“그게… 아버님께서 호돌이 인형 닮으셨다고.”
쿨럭.
진짜 에스프레소가 배꼽에서부터 올라와 뿜어질 뻔했다.
고릴라 인형 소리는 여러 번 들었지만, 호돌이라니.
강형우가 다섯 살 때인가, 열렸던 올림픽 마스코트가 그거였다.
상모를 쓴 호랑이 인형 말이다.
요즘은 인터넷 검색해서야 겨우 볼 수 있는 거였는데, 강학희의 연세를 생각해 보니 그 표현이 맞을 수도 있다 싶었다.
어쨌든 그렇게 훈훈한 인사가 끝나고 마주 앉았다.
대화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의외로 강신원이 먼저 물었다.
지성분식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았던 모양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어쩌다 보니 형 동생을 하기로 했다. 나이도 여섯 살이나 차이가 났고, 그게 오히려 대화하기 편할 것 같아서였다.
그러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런데, 대인기피증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어, 맞아.”
“그런데 막상 이렇게 있으니까 전혀 모르겠는데요?”
“그건… 내가 호돌이 인형을 좋아했거든.”
셀프로 떠온 물이 또다시 뿜어질 뻔했다.
아오! 그놈의 호돌이.
그런데 사연이 있었다.
“내가 아버지한테 처음 받은 선물이 그 인형이었어. 그게 좋아서 어릴 때 많이 끌어안고 자고 그랬거든.”
결론은, 내 외모에서 편안함이 느껴진단다. 진짜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까지 든다나?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나 싶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호돌이는 원래 호랑이가 모델이잖아. 형우, 널 보면 딱 그런 느낌 같은 게 있어. 강인함이랄까? 내 편일 때의 든든함, 그리고 안정감 같은 거 말이야.”
갑자기 칭찬을 하니 뭐라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무슨 클래식 음악 같은 게 흘렀다.
강신원은 폰을 받더니,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다 몇 마디를 주고받은 뒤 강형우를 쳐다봤다.
“우리. 술 한잔할래?”
***
강신원은 생각 이상으로 말을 잘하는 편이었다.
또렷이 웃지만 않을 뿐, 간간이 미소 같은 게 보였고 의외로 맞장구도 잘 쳐줬다.
백화점 일할 때의 경험들을 이야기하는데 거기도 진짜 음식 장사 못지않았다.
구두 가격이 올라가고 고객 나이가 어려질수록 진상을 만날 확률도 올라간다고 했다.
한 번은, 여자 고객한테 무릎 꿇고 구두를 신겨주다가 느닷없이 싸대기를 맞았단다.
치마 속을 보려 했다는 것이다.
그 일로 라운지 매니저부터, 서비스 총괄 부장까지 호출당했고 시말서에 감봉까지 받았다.
“내가 데이트 신청을 세 번이나 거절했거든.”
“헐, 진짜 그게 이유예요?”
“어.”
담담하게 이야기하는데, 와 듣기만 해도 열불이 날 정도였다.
그때 강신원이 전화를 받더니 갑자기 가게 입구를 향해 손을 들었다.
“어, 여기야.”
강형우는 자신도 모르게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기 한 여자, 아니, 여신이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