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67화 찾아가
혈기 왕성한 스무 살 짐승들!
특히 인정둥이는 군대에서 석 달 넘게 박혀 있다가 사회 나왔으니 흥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 기분에 신나게 술 마시고 치킨 뜯는데 누군가가 그랬다는 거다. 요즘 여자 아이돌 누구누구가 최고라고, 뮤직비디오 좀 보자고 했단다.
그때부터 쓰잘데기 없는 남자들의 자존심 배틀이 들어갔다.
이강석은 나인뮤지나 라냐 같은 그룹을 좋아했고, 반대로 백창호는 러블리와 에잇핑크가 최고라 했다.
섹시파와 청순파가 나뉘는 건 그렇다 치자.
인정둥이들은 손녀시대부터 캐라, 시스타 등의 톱클래스 쪽을 좋아했다. 처음부터 관심을 가지고 본 게 아니라 많이 보다 보니 좋아졌다는 케이스였던 것이다.
그래서 뮤직비디오를 돌려보다가 팬심으로 서로 자랑질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딱 거기서 끝내야 했다.
문제는 그 이후.
갑자기 백창호가 에잇핑크 팬이라고 뮤직비디오에 맞춰서 안무를 추기 시작했단다.
술도 취했지, 음악도 나오지, 스피커도 에어컨도 빵빵하게 돌아가는 상황.
질 수 없다는 생각에 이강석도 어설픈 섹시 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모델이 꿈이었기에 나중에 연예계로 진출할 때를 대비해 연습했다는 것이다.
하여간 김칫국만 몇 사발을 들이켜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백창호와 이강석이 열심히 꿈틀대니, 인정둥이도 흥이 폭발하고 말았다.
특히 부대 장기자랑 때문에 여러 여자 아이돌 댄스를 섭렵했다. 그 에너지를 퍼붓는다고 난리굿을 피우다 보니 춤판이 벌어졌던 것이다.
문제는 강형우가 집에 들이닥친 이후였다.
바로 PC 전원을 내렸는데, 그 직후에도 흥이 가시질 않았다.
음악이 꺼졌는데도 여전히 춤을 췄던 거다.
황당해하고 있는데, 그때 누가 대문을 두드렸다.
경찰이었다. 근처에서 소음 공해로 신고가 들어왔다고 출동한 거란다.
그제야 네 마리 짐승들이 깨갱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인정둥이의 경우, 휴가 나온 군인이었다. 경찰 조사 때문에 연락이 가면 바로 부대로 끌려갈 가능성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강형우가 빌고 또 빌고 사정사정해서 겨우 경찰들을 돌려보낼 수 있었다.
“다들 기상!”
“기상.”
이강석과 백창호가 후들들들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살짝 휘청하는 것 같았지만, 애써 무시했다.
괘씸한 놈들 같으니라고.
“이강석, 백창호.”
“예.”
“야, 니들도 상식이 있을 거 아냐. 아무리 내 방 에어컨이 시원하고, 컴이 빵빵하다지만. 그래도 그렇지. 주인 없는 방에서 그러면 되니?”
“죄송합니다.”
두 녀석이 동시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도 지은 죄는 아나 보다.
“그리고 인우, 정우.”
“옙.”
“아직 힘이 남아돌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달밤에 체조 덕인지 정신은 멀쩡한 것 같았다.
강형우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새벽 한 시였다.
휴가 나온 첫날, 자신도 새벽까지 술 마셨던 걸 생각하면 이대로 끝내기에는 찜찜했다. 게다가 일단 굴렸으면 뭐라도 먹여서 입을 막는 게 정석이었다.
“강석이랑 창호는 안에 들어가서 청소하고 정리해.”
“예.”
두 녀석이 후다닥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강형우는 지갑에서 삼만 원을 꺼냈다.
“너희 둘은 저 밑에 편의점 내려가서 술하고 먹을 거 적당히 사와라.”
인정둥이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내려갈 때야 10여 분이지만, 올라올 때는 가파른 등산코스였다. 마을버스 종점에서 더 걸어 올라와야 할 정도로 지대가 높았던 것이다.
이건 일종의 벌이기도 했다.
“싫으면 말고.”
“아닙니다.”
“형님, 좋아하는 게 매운 감자칩에 크아스 맞죠?”
그러면서 강정우는 뺏듯이 삼만 원을 붙잡았다.
“조은데이도 사와라.”
“옙.”
그렇게 인정둥이가 사라졌다.
강형우는 피식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 씻을 준비를 했다.
시원하게 샤워하고 나오니, 방 청소가 끝나 있었다.
이강석과 백창호한테 씻으라고 하고 PC를 켰다. 그리고 한글을 띄워서 오늘 일을 간단히 메모했다.
곧, 두 녀석이 씻고 나오자 타이밍 기가 막히게 인정둥이가 돌아왔다.
강형우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그 즉시 이강석이 얼음을 꺼내왔고, 백창호가 안주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인정둥이가 씻는 사이 어느새 한 상이 차려진 것이다.
맥주 두 병에 소주 여덟 병, 과자 안주에 오징어 땅콩, 소시지 같은 것들이 밥상을 가득 채웠다.
“근데 몽쉘은 누가 골랐어?”
“정우가…….”
“인우가…….”
두 녀석이 동시에 상대를 가리켰다. 그러다 내 눈치를 보더니 정우가 선수를 쳤다.
“인우가 초코파이는 지겹다고 하더라고요. 좀 고급으로 먹고 싶다고.”
“고급이 몽쉘이구나.”
역시 군바리는 군바리였다. 게다가 땀 한 바가지 흘렸으니 달달한 게 당기기도 하겠지.
강형우는 동생들 잔에 술을 따라준 뒤, 가볍게 잔을 쳤다.
“딱 이것만 마시고 조용히 자는 거야? 알았지?”
“옙.”
분위기 어색한 건 3분도 가지 않았다.
인정둥이가 군대 이야기를 꺼냈는데, 정말이지 무궁무진하더라.
이강석과 백창호는 그걸 신기한 듯 듣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강형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새벽 두시 반이었다.
피곤을 이기지 못한 강형우는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아침 일찍 일어난 강형우는 애들을 강제로 기상시켰다.
그때부터 지옥 코스였다.
키와 덩치가 있어서 택시를 나눠 타고 온천천으로 향했다.
한 삼십 분 정도 같이 달리기를 한 뒤, 대영 해수탕으로 끌고 가 개운하게 사우나를 시켰다.
그런 다음 차애전 할매집으로 데려가 다진 양파 양념장이 듬뿍 올라간 칼국수 대자까지 먹였다.
마지막 코스는 약국이었다. 인당 무려 칠천 원짜리 피로 회복제까지 마시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거 용돈.”
인정둥이만 주기 뭐해서 이강석과 백창호한테도 오만 원씩 쥐어주었다.
그 즉시, 남포동 놀러가자는 말이 나오더라.
“그래. 휴가 나와서 노는 거야 그렇다 치자. 너희 둘도 오늘 휴일이니까 바람도 쐬고 그래야지. 근데, 저녁 8시 전에 들어와라.”
애들 표정이 순식간에 천당에서 지옥으로 향했다.
“왜요?”
“내일 일 안 하니? 안 그래도 바쁜데, 저녁 먹고 일찍 자야지.”
역시 착한 애들이었다. 그냥 주먹을 불끈 쥐었을 뿐인데, 다들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그렇게 애들을 보내고, 강형우는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며칠 피곤했기에 밀린 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
“하여간 체력도 좋아!”
인정둥이는 거의 사흘을 풀로 놀았다.
첫날은 내 방에서 경찰을 불렀고, 둘째 날은 남포동을 마구마구 싸돌아다녔다. 영화를 보고, 당분간 입지도 못하는 옷을 사고 부산타워까지 들려서 사진까지 찍고 돌아왔던 것이다.
셋째 날은 어머니 국밥집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영지한테 등짝을 모질게도 맞았다.
오늘이 넷째 날이었다.
복귀 하루 전날이라 그런지 급격히 방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세상을 다 산 듯한 표정을 짓더니 방구석에서 연신 허망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나도 그랬다.
휴가 복귀할 때, 군부대 입구가 지옥문으로 보이더라.
발이 안 떨어지는데, 그 몇 분 사이에 탈영 고민을 수십 번도 넘게 했던 것이다.
마치 다시 감옥에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랄까.
“야, 일어나.”
“혀어어엉, 우리 좀 내버려 둬요.”
“어차피 내일 복귀해야 하는데, 잠시 영혼만이라도 자유롭게 풀어주고 싶어요.”
아무래도 정신부터 미리 탈영한 모양이었다.
사실, 처음 입대할 때는 잘 모른다.
그냥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게 느껴질 뿐이었고, 동시에 오기 같은 게 생겨서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휴가 복귀는 달랐다. 이미 군 생활을 겪어봤기에, 잘 알기에 돌아가기가 더욱 괴로운 것이다.
특히 남은 군 생활이 일 년 반이 넘었으니 앞이 깜깜하기도 할 거고.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셋 센다? 하나, 둘, 둘 바…….”
“왜요?”
“어디 가려고요?”
좀비처럼 일어난 인정둥이의 투정에 강형우는 피식 웃었다.
“어디긴 어디야? 가게지.”
이벤트라면 이벤트였다.
강형우는 형님네 버거에서 일하면서 알 수 없는 끈적임 같은 걸 느꼈다.
일종의 유대감이라고나 할까?
분명 지성분식도 그런 게 있기는 했는데, 뭔가 조금은 부족한 듯 느껴졌던 거다.
그래서 공지혜와 순이 이모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봤다.
그때, 무심코 나온 말이 이거였다.
“우리도 사진 하나 걸면 괜찮지 않을까?”
순이 이모의 의견이었다.
유명한 가게들 가보니 사장하고 조리사, 그리고 직원들이 단체 사진을 찍은 게 있단다. 다들 환하게 웃고 있었는데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는 것이다.
순이 이모가 말하길, 그게 묘하게 부러웠단다.
그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지금껏 여러 가게들을 떠돌기만 했던 순이 이모였다.
한곳에 정착하기를 그토록 바라곤 했는데, 결론은 출장 이모에 불과했다.
필요할 때만 부르고 일 없으면 연락조차 하지 않는 그런 사이로만 남았다는 거다.
그래서 강형우는, 이럴 때 제일 좋은 친구 홍태구를 불렀다.
역시 우리 홍 반장은 투덜대는 데는 선수였다. 그러면서도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지성분식을 방문했던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제작비는 따로 주고, 오늘 회식도 연희네 카페에서 하기로 했으니까.
“자, 다들 준비됐죠?”
강형우는 그렇게 물으면서 꼼꼼히 확인했다.
다들 레몬색 셔츠에 검은 앞치마 복장이었다.
미리 세탁소에 맡겨서 다림질까지 한 건데, 입으니까 정말 깔끔했다.
특히 공지혜는 노력의 결실을 본 모양이었다. 한 치수 줄인 유니폼이 놀랍게도 딱 맞았던 것이다.
또, 순이 이모는 미용실까지 다녀온 모양이었다. 조리모 쓰면 머리 망가진다고 일하기 전에 빨리 사진 찍자고 재촉까지 했던 것이다.
“오빠, 여기 가운데.”
그래도 사장이라고 센터에 서라니 기분이 좋기는 했다.
강형우 왼편으로 공지혜와 인정둥이가 있었다.
오른쪽으로 순이 이모와 정은혜, 백창호와 이강석이 자리 잡았다.
“역시 길쭉길쭉한 애들이 많으니 그림이 살기는 하네.”
홍태구는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었다.
그 말에 돌아보니 확실히 그랬다.
인정둥이야 180대 중반이 넘었고, 이강석도 모델을 꿈꿀 정도로 키가 컸다.
그 중심에 나까지 있으니 그렇게 보이는 것도 당연하겠지.
곧, 홍 감독의 요구 사항이 마구마구 펼쳐졌다.
“자, 제일 먼저 팔짱끼고 옆으로 45도 각도.”
“이번에는 어깨동무하고 찍는 겁니다. 웃으세요. 웃어요!”
“제가 셋 하면, 다들 높이 뛰세요.”
한두 번은 괜찮겠는데, 계속하니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지성분식 간판까지 나오게 하려고 맞은편 벽에 카메라를 설치했는데 차가 지날 때마다 멈춰야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힘들게 했던 건 홍태구의 과한 열정(?)이었다.
한 번은 사장이 제일 끝으로 가보란다.
거기서부터 키순으로 찍었고, 중간중간 좌우가 뒤바뀌기도 했으며, 어쩌다 보니 공지혜와 순이 이모를 번쩍 안아 들게도 되었다.
근데 희한하게도 재미는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경험이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어쨌든 다들 땀을 뻘뻘 흘리며 찍기를 40여 분, 드디어 홍태구가 박수를 쳤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
며칠 정신이 없었다.
우선 인정둥이들을 복귀시켰다.
귀찮았지만 부산역까지 따라가 KTX표까지 끊어줬고, 고참들이 좋아할 만한 잡지들까지 한 뭉텅이를 사줬다.
거기에 군부대 주소 받아서 과자까지 한 박스 보내주기로 했다.
돌아오자마자 홍태구한테 연락이 왔다.
“액자 나왔다. 찾아가.”
연희네 카페를 가자 홍태구가 커다란 박스를 꺼내왔다.
“이게 뭐냐?”
“뭐긴, 앨범이지.”
“앵? 부탁한 건 액자였는데? 웬 앨범?”
“그게 그렇게 됐다.”
홍태구는 피식 웃으며 박스를 넘겼다.
들어보니 묵직했다. 그래서 확인하는데, 정말로 A4 용지만 한 앨범이 여덟 개나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려고 십오만 원이나 달라 한 거냐?”
“그게, 아는 형한테 부탁하니까 액자 가격 반값으로 해주더라고. 내가 전에 일해준 것도 있고 해서. 그래서 남는 돈으로 앨범 해버렸다.”
“오오~ 그래?”
“솔직히, 사진도 진짜 많이 찍었는데 그게 아깝더라고.”
그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하긴, 그 고생을 했는데… 어쨌든 고맙다.”
“다 친구 잘 둔 덕이라 생각하고, 술이나 사라.”
“날만 잡아!”
강형우는 그렇게 말한 뒤, 오연희한테 윙크를 날려주고 지성분식으로 한달음에 향했다.
역시나, 앨범을 꺼내서 보여주니 다들 좋아했다.
특히 순이 이모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식당 일 십 년도 넘게 했는데, 이런 거 처음 받아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