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54화 가게 나와라
뭐, 이런 거지새끼가 다 있나 싶었다.
근데 무릎까지 꿇고 빌 정도면 정말 돈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그러니까? 짤렸다?”
“예. 그래서 두어 달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될까요? 한 방에 다 갚을게요.”
여친은 집을 나갔고, 일자리는 날아갔다. 맞아서 퉁퉁 부은 얼굴로 출근했다가, 그길로 쫓겨났다는 것이다.
“원래 일하던 데가 어딘데?”
“그, 그게…….”
김민석이 당황해하니 오히려 더욱 궁금해졌다.
“뭐하는 곳이냐고?”
“자, 작은 건설 사무실이거든요.”
“그런데 쫓겨났다고?”
“예.”
김민석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며칠이 지나서 붓기가 많이 가라앉기는 했다.
하지만 멍 자국은 남아 있었고, 오히려 새로운 상처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원래 철거 용역 회사거든요. 이 동네 재개발 들어간다고 해서 사무실 옮기는 김에 이사했는데…….”
억울한 얼굴로 금방이라도 울려고 해서 일단 일으켜 세웠다. 믹스 커피 한 봉지가 아까웠지만, 덕분에 대략적인 사정은 들을 수 있었다.
건설회사는 맞는데 따지면 절반 정도가 조폭이란다.
그런 곳이라, 두들겨 맞고 다니는 새끼는 필요 없다면서 매몰차게 내쫓았던 거다.
거기에 더해 억울하게 뺨까지 한 대 맞았단다.
같이 일하자고 꼬셨던 형인데, 자기 체면에 먹칠했다면서 싸대기를 갈겼다는 거다.
참, 어이없고 웃기는 상황이긴 했다.
그래서 불쑥 물었다.
“뺨 맞고 쫓겨났는데, 분노조절은 되디?”
순간 김민석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아무래도 자기도 쪽팔린 건 아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일단 친구들한테 부탁은 해놨거든요. 저기 수영로터리 쪽 가면 나이트가 있는데 작업만 좀 하면…….”
빡!
손이 안 나갈 수가 없었다.
“아씨~ 왜요?”
빡! 빡! 빡!
뒤통수를 세 대나 더 후려갈겼다.
아주 눈알이 쑥 튀어나올 정도였는데, 이걸로 뇌세포가 죽어서 조금이나마 나쁜 생각을 덜했으면 싶었던 거다.
“이 씨~”
“뭐? 씨?”
강형우가 눈을 부라리자 김민석이 움찔했다. 며칠 전의 애정 어린 주먹질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야! 너, 진짜 쓰레기구나!”
“왜요? 서로 좋은 게 좋은 거지.”
“이 새끼가. 바람난 유부녀 꼬셔서 돈 뜯겠다는 게 로맨스냐? 그게 좋아?”
“그럼 어떻게 해요? 한 방에 벌려면 그 방법밖에 없는데.”
너무도 당당한 대답에 오히려 기가 막혔다.
사실, 김민석이 무릎 꿇고 빌러 온 건 이유가 있었다.
“딱 이백만 내놔라. 그럼 신고 안 하고 없는 일로 해 줄게.”
최대한 기분 안상하게 나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라는 생각도 조금은 있었다.
어차피 공사 들어가면 정리할 거는 해야 했고, 일부 집기는 바꿀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돌아온 건 욕이었다.
-이 씨발! 좆까.
“뭐?”
-좆까라고, 이백은 무슨 이백이야? 내가 뭐 했다고?
이게 술이 덜 깼나 싶었다.
시간이 오후 두 시니 새벽까지 마셨어도 지금쯤이면 정신이 돌아왔을 텐데 말이다.
상대가 곱게 나오지 않아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저 돈을 좋은 데 기부하더라도, 무조건 받아내고 싶었다.
“얼굴 안 보고 통화한다고 막말하네?”
-하여간 몰라. 배 째~
“수영구 망미배산로 70번길 00. 오리온 원룸 204호. 딱 기다려라 배 째러 갈 테니까.”
딱 2초 뒤에, 김민석이 소리쳤다.
-형님. 죄송합니다.
“죄송이고 나발이고, 내가 전화 번호 하나 불러 줄 테니까 바로 통화해.”
-예?
“연제 경찰서, 형사계 폭력반 이병선 경사님. 폰 번호는 010-0000-1234다. 내가 5분 있다가 확인 전화 해 볼 거니까…….”
-진짜 잘못했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예? 형님, 전화 끊지 마시고.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딱 15분 뒤에 김민석이 찾아왔다.
먼저 고백하는데, 이 새끼 폭력 전과가 세 개나 있단다. 어떻게 신고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합의 유무에 따라 죄질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돈이 없어서, 국선 변호사 잘못 만나면 집행유예가 아닌 바로 깜빵행이었다.
삭삭 빌기에 한 번은 봐주기로 했다. 한 달 안에 돈 가져오기로 각서까지 받고, 보냈던 것이다.
참고로 각서는 법적효력이 없다.
하지만 그 밑에 형사님 전화번호를 넣으니 인적효력은 발생하더라.
“아니, 우리 같은 놈들이 주먹질 아니면 몸으로 돈 버는 수밖에 없잖아요.”
김민석이 억울하다고 따지는데 뭔가가 이상했다.
“우리 같은 놈?”
“예. 형도 우리 쪽 아니에요? 전직 조폭…….”
“이 새끼가.”
뒤통수를 한 대 더 후려갈기고 나서야 진정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분노조절 장애.
이건 이 새끼가 걸린 게 아니었다. 상대하는 사람이 걸리는 증상이었던 것이다.
씩씩거리며 올라왔던 화가 뒤통수를 두어 번 더 어루만져 준 뒤에야 조금 가라앉았다.
“넌 내가 조폭처럼 보이냐?”
“예. 조폭이었으니까 그렇게 싸움 잘하는 거죠. 전에 팔성파 형들하고 붙었을 때도 형님 정도는 아니었다고요.”
나름 자랑을 하는데, 지금껏 싸움 붙어서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다고 했다. 프로 라이센스를 가진 복싱선수와 붙어서 이긴 적도 있다는 것이다.
“그게 자랑이냐?”
“진짜라니까요. 그리고, 형사반장 전화번호 알 정도면 당연히…….”
강형우가 학생 때, 사고 쳤을 때 쫓아다녔던 초짜 열혈형사님이었다.
김민석이 뻥인가 싶어 지인을 통해 확인해봤는데, 어느 새 폭력반 반장까지 진급해 있었던 것이다.
가끔 명절행사급으로 연락이 오기에 그냥 안부만 묻고 말았는데, 언제 저만큼 진급한 건지 세월 참 빠르다.
“그래서 오해했다?”
“오해요? 진짜 아니에요?”
당연한 것처럼 말하는데, 순간 혈압이 팍 하고 솟구쳤다.
“선량한.”
빡!
“시민이다.”
빡!
“새끼야!”
빡!
김민석의 머리가 오뚜기처럼 움직였다.
다행이 힘 조절이 잘 됐는지 기절하진 않았고, 그냥 눈물 찔끔 짜더라.
“너, 허튼짓 하지 말고. 내일부터 가게 나와라.”
“예?”
김민석이 어리둥절해하는데, 강형우가 결론을 지었다.
“아침 6시, 내가 가게 문 열 때 안 보이면, 그길로 너 잡으러 갈 거야!”
***
공사 진행은 순조로웠다.
홍태구가 우선은 공사 반장이었다. 그리고 섭외한 지인들 중에 삽장 형님이 있었는데 실질적인 지시는 이분이 거의 다 했다.
애초에 뒤쪽으로는 걸릴 것 없는 가게이기에 우선 기둥만 보강하잖다. 그런 뒤, 벽을 뚫고 철거하면서 홀 안쪽부터 인테리어 들어가면 될 거란다.
어차피 미리 이야기는 다 끝낸 상황. 남은 건, 부지런히 자재나 날라 주면서 일하면 된다.
“어쭈? 발이 보인다?”
“죄송합니다.”
김민석은 다급히 움직이다 걸려 넘어졌다. 그리곤 괜히 자갈 뭉치에 화풀이를 하다가 포대가 터지고 말았다.
“손으로 다 쓸어 담는다. 실시!”
“시. 실시!”
그러면서 허겁지겁 움직이는데, 묘하게도 괴롭히는 맛이 있었다.
일당은 7만 원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하라고 인력회사 수준으로 맞춰준 것이다.
사실 공사비의 대부분은 장비 빌리는 가격과 자재비였다.
나머지는 강형우가 몸을 때울 생각이었고, 여기에 지인들 땡 처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선은 홍태구.
만능 재주꾼인 이 녀석과 딜을 했다. 돈가스 가르쳐 주기로 하고, 그걸 오연희네 카페에서 팔기로 합의를 봤던 것이다.
그 대신 녀석 인건비와 인부 섭외는 공짜였다.
다행이 연희네 카페랑은 상권도 떨어져 있었고, 고객층도 전혀 달랐다. 낮은 카페, 저녁에는 호프를 파는 식이어서 안주로만 나가기로 했던 거다.
거기에 동네 형들도 도와주기로 했다.
얼마 전에 몇 가지 일이 있었는데, 혁기형네 아버님께서 큰 결심을 하셨다. 전통을 고수하시던 분이셨는데, 과감히 메뉴 몇 가지를 손보기로 한 것이다.
요즘 유행한다는 찹쌀 탕수육과 해물쟁반 짜장, 짬뽕을 추가했고, 강형우의 강력 추천으로 깐풍육과 부추잡채를 신메뉴로 내놨다.
다른 건 몰라도 신메뉴는 이 인근에서 하는 가게들이 아예 없었다.
때문에 내놓자마자 매상이 쏠쏠하게 상승했고, 단골까지 늘어났단다.
그게 고마워서 밥값은 공짜였다.
여기에 밥버거가 간식으로 나왔고, 저녁에는 한 번씩 현우 형네 치킨이 왔다.
사실 팔아 준다는 의미로 시켰는데, 형들이 돈을 끝까지 안 받더라.
그러다 우연히 본 게 있는데, 덕수 형 눈빛이 조금 요상했다.
어쨌든 공사는 예정보다 사흘이나 일찍 끝났다.
김민석을 쉴 틈 없이 부려먹은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창주 형이나 배산회 모임 분들의 도움도 적지 않아서였다.
무엇보다 가게 식구들 힘이 컸다. 휴가 가라고 했더니, 다들 이삼 일 씩 나와서 거들어 줬던 것이다.
제일 열심힌 건 공지혜였다.
다이어트 겸해서 한다고 나흘이나 공사판에서 일했다. 그러다 몸살이 났고, 하루를 꼬박 앓아누웠다.
간간이 순이 이모가 간식거리를 사들고 왔고, 이강석도 사흘이나 일을 도왔다.
마지막으로 정은혜는 일 돕다가 발목을 삐끗하는 바람에 그냥 푹 쉬고 나오라고 했었다.
그렇게 여러 사람들의 도움 덕에, 지성분식의 새단장이 끝났다.
***
“후우, 하 멋지다.”
지성분식은 제일 먼저 입구 간판부터 바뀌었다.
이건 강주혁의 애정 어린 서비스였다.
“기왕 공사 하는 김에 간판도 바꾸지 그래?”
“예? 간판을요?”
“어, 그래야 뽀대가 좀 나지. 사실 전에 간판은 너무 분식집스러웠거든.”
강주혁의 지적은 이미 주변사람들을 통해 여러 번 듣긴 들었다. 김밥천국 느낌이 너무 강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간판은 정말 비싸다.
“그거 돈 많이 들어서 다음에나 하려고요.”
“그게 아니라, 회사 창고에 간판용으로 쓸려고 가져다 놓은 나무판이 몇 개 있는데 말이야? 생각 있으면 해 주고.”
“정말요?”
“그래. 내가 글씨 새겨 주는 거니까 따로 돈은 안 들어.”
진짜 돈 들어가면 안 해 줄 사람이긴 했다. 그냥 몸 쓰면 끝나는 일이기에 해 준다나?
“오오~ 근데, 형이 그런 것도 할 줄 알아요?”
“나 전공이 디자인과야. 다니다 때려치우긴 했지만…….”
그러면서 막 자랑을 하기에 믿었다.
온 건, 궁서체였다.
커다란 나무판 중앙에 한글로 ‘지성분식’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뜬금없이 진지해 보여 오히려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이건 개인적인 생각이었고, 공지혜와 순이 이모, 이강석은 의외로 호평을 했다.
글씨에서 묵직한 힘이 느껴진단다. 게다가 원목 간판이라 고급스러워 보인다면서 다들 좋아했던 것이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건, 하얀 벽체와 연한 누룽지 색깔 나무판이 너무 잘 어울린다는 거였다.
맞다.
이번에 내부공사를 하면서 인테리어를 화이트로 했다. 중간 중간 기둥이나 포인트만 원목을 쓰고 전체를 깔끔하게 흰색 칠로 끝냈던 것이다.
여기에 때를 덜 타게 하려고 코팅액을 발랐는데, 조명까지 LED로 바꾸자 광택이 나는 느낌도 들었다.
테이블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직접 아카시아 집성목을 사서 전부 손으로 만들었다.
삽장 형님 도움을 받아 자르고, 밀고, 갈고 거기에 바니쉬까지 두 번이나 발랐다.
시간상 세 번은 무리라서 거기서 스톱했는데, 광택이 장난이 아니었다. 아주 반짝반짝 하는 게 딱 봐도 새 거 느낌이 났던 것이다.
확실히 개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나무 무늬를 보고 반해서 가구로 사려고 했는데, 더럽게 비싸더라.
하지만 포기할 수 없어서 직접 한 거였다.
어쨌든 그렇게 테이블 열 개가 만들어졌고, 벽 쪽에 혼밥이 가능하게 바도 하나 만들 수 있었다.
그 결과 한 번에 받을 수 있는 최대 손님 수가 늘어났다.
빡빡하게 채우면 무려 45명이었다.
이전이 32명 선인 걸 감안하면, 무려 25%나 확장한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