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27화 우리 동네 사총사
“하아~ 끝났다.”
손에 들린 건 2,000만 원짜리 차용증이었다.
강형우는 그걸 갈가리 찢어버렸다. 그리고 냉면 사발에 넣은 뒤 완전히 태워 버렸다.
남은 재는 싱크대에 넣은 뒤, 물을 한바가지 확 부어 버렸다.
“하이고! 시원하다.”
그간 받았던 스트레스가 확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강형우는 새롭게 작성된 서류를 쳐다봤다.
월 60만 원씩, 3년 납입.
연채 이자는 3%, 고작 18,000원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파격적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강 실장이란 사람의 말대로, 아무런 조건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엄청 큰 모기업이 있다.
연 매출이 대략 칠천억에서 팔천억 수준.
그럼에도 아직 인력들이 부족하단다.
또, 사업 확장을 준비하고 있었고, 외식업계 특성상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때문에 고객분들 중 적당한 인재가 발견되면 부채를 조정해주면서 취직을 권유하기도 하고, 본인 허락하에 회사 인재 풀에 등록까지 한단다.
맞다.
강형우는 일단 인재 풀 등록을 허가했다. 그 조건으로 저런 파격적인 혜택을 받게 된 것이다.
그때 강주혁이 부탁했다.
요리 실력도 괜찮고 하니, 만약 다른 일을 하게 된다면 무조건 연락부터 하란다. 취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말이다.
“누구 머리에서 나온 계획인지, 참 대단하기는 하네.”
좋게 보면 빚진 사람의 인생을 구제해 주는 거다.
부채도 깎아주고,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면서 계속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거니까.
나쁘게 보면 이만큼 악랄한 방식은 없었다.
말 그대로 취직하는 순간, 돈 다 갚을 때까지는 노예가 되는 거니까.
문제는 이런 착한 기업이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하는 거다.
하지만 사장 꿈이 국회의원이라면, 대충은 납득할 수 있었다.
과거의 조폭이 성공한 기업가가 되어 사회에 환원한다.
이런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라면 뭔들 못하겠는가?
게다가, 이자율을 낮춘다 해도 손해는 없었다. 단지 수익이 조금 줄어들 뿐이지.
“내가 올해부터는 운이 트이려나 봐?”
작년에 천경 어르신이, 올해만 잘 버티라고 했던 게 문득 떠올랐다.
연말이 그 지랄 같은 일들이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아! 조성기 이 새끼.”
완전히 잠수를 탔는지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작정하고 문자를 남겨 놨다.
[넌 이제 친구도 아니다! 인연 끊자]
그리고 몇 번이나 망설인 끝에 안 보낸 게 있었다.
[내 눈에 띄면 죽여 버린다!]
***
“또, 오셨어요?”
강형우는 새로 생긴 단골이 무척 반가웠다.
강 실장, 바로 강주혁이었다.
원래 ‘무조건 대부’의 영역은 연산동 일대였다.
철진 기획이 처음 자리 잡은 곳은 서면인데, 거기서 확장을 거듭해 흡수하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는 것이다.
해서 연산동 지점이 안정적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파견 형식으로 출근하고 있단다.
그러다 알게 된 것이, 강 실장이 바로 그 강주혁이란 사실이었다.
정분석에게 들은 외식업계의 전설.
때문에 보통 사람들 기준으로 평가하면 안 된다고 했다.
쉽게 말하면 괴팍하고, 나쁘게 말하면 졸라 멋진 또라이란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이해했다.
올해 나이 서른둘.
겉으로는 일개 실장이지만 실제로는 외식업계 뒷세계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황룡, 희망국수와 불똥 포차 등등 요즘 이슈가 되는 프랜차이즈 브랜드를 지금처럼 만든 게 그였으니까.
두루 컴퍼니의 표면적인 매출은 오천억 수준.
하지만 제휴나 하청, 유통 같은 외부 요소까지 치면 대략 칠팔천억 정도의 매출이 나온단다.
작은 중국집에서부터 시작해 불과 10년도 안되어 그런 신화를 쓴 사람이니 확실히 평범하진 않겠지.
그걸 증명하듯 한 끼에 두 그릇씩 먹고 갔다.
그럼에도 날렵한 체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오늘은 뭐 드시려고요?”
“라면하고 김치볶음밥이요.”
강주혁은 그렇게 말한 뒤, 바로 수저를 빼들었다. 당장이라도 전투적인 식사를 하려는 듯이 말이다.
김치볶음밥!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음식인데, 조리법은 무척이나 다양했다.
일단 김치+밥이다.
김치를 볶아서 밥과 섞어도 되고, 볶음김치와 함께 비벼도 된다.
중식처럼 달궈진 기름에 김치와 밥을 튀기듯이 볶아도 완성이다.
하지만 강형우의 방식은 달랐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센 불에 김치와 야채, 다진 마늘을 약간 넣는다. 여기에 설탕 반 숟갈, 식초 또르륵 넣고 익을 때까지 볶으면 된다.
그사이 다른 팬에 기름을 달구고 계란을 깬 다음 소금을 살짝 뿌린다. 이건 뚜껑 덮고 불 끄면 끝이었다.
그사이 김치볶음이 다 익었다.
강형우는 특제 가루를 한 티스푼 넣은 뒤, 소주 두 잔 분량의 물을 넣었다.
치이이익.
약간의 수분이 증발하면서, 국물 자작한 김치찜 같은 냄새가 피어올랐다.
거기에 찬밥을 넣고 열심히 볶는다.
그걸 깔끔하게 밥공기에 옮겨 담은 뒤, 꾹꾹 눌러주고 접시에 엎으면 된다.
그사이, 계란프라이도 예쁘게 잘 익었다.
일명 서니 사이드 업.
그걸 밥 위에 올리고 통깨와 파슬리를 뿌리면 끝이었다.
이름 하여 강형우 표 김치 볶음밥이 완성된 것이다.
“라면하고, 김치볶음밥 나왔습니다.”
강형우가 음식을 내려놓자, 강주혁은 빠르게 식사에 돌입했다.
후루룹, 퍼묵퍼묵.
후루루룹, 꿀꺽꿀꺽.
“크아아아~”
먹는 모습이 그렇게 호쾌할 수 없었다.
저 모습 그대로 CF를 찍는다면 매출 상승은 당연할 터.
“얼맙니까?”
“예. 단돈 팔천 원 되겠습니다.”
강형우가 돈을 받고 금고에 넣는데, 강주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저녁에 한잔하실래요?”
“저야, 좋죠!”
“그럼 마칠 때 연락드리겠습니다.”
강주혁은 그렇게 말한 뒤, 웃으며 지성분식을 나섰다.
솔직히 먼저 말하기가 그랬을 뿐, 강형우도 술 한잔 같이해 보고 싶었다.
일단 인간적인 호감이 들었다.
항상 깍듯이 인사를 했고 계산 역시 확실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사장님이 잘 되는 게 자기 회사가 잘 되는 거란다.
게다가 매번 음식이 맛있다고 칭찬하는데, 어떤 사장이 기분 나빠 하겠는가?
무엇보다 강주혁 때문인지 양아치들은 얼씬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해일의 경우 오다 가다 인사하면서 안부까지 묻고 다녔던 것이다.
그러면서 지성분식 음식을 팔아 주는 건 덤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서였다.
“와! 진짜 잘 드시네요?”
강형우는 솔직히 감탄했다.
전화 연락을 받고 왔는데, 정말 대단한 가게였다.
황룡 12호점, 풍광!
수영 교차로 번화가 끝 쪽의 주택가에 있었는데 지대가 높아서 그런지 일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일단 식사부터 하라고 탕수육과 짬뽕이 나왔다.
일전에 먹어 본 적 있어서 감동은 덜했지만 솔직히 아주 맛있는 편이었다.
그러고 나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왜 이렇게 술이 술술 잘 넘어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둘이서 마신 술만 벌써 여덟 병이 넘었던 것이다.
그러다 강주혁이 제안했다.
“강 사장님. 우리 말 놓을래요?”
“예?”
“왜 그런 말 있잖아요. 네 살 차이는 궁합도 안본다고.”
강주혁이 피식 웃자 강형우도 씨익 웃었다.
“예. 그러죠. 이제부터 형님이라 부르면 됩니까?”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오케이?”
“예. 형! 한잔하세요.”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강형우는 많은 걸 들을 수 있었다.
먼저 강주혁이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그러다보니 마음이 열렸고, 서로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대충 둘이서 열두 병 정도를 마셨을 때였다.
강주혁은 후우 하는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그러니까 그 빚이 그래서 생긴 거구나?”
“예. 형. 아! 진짜 친구란 새끼가 그럴 줄은 정말 몰랐어요. 하필이면 사채한테 차용증을 팔다니…….”
“그 덕에 우리가 만난 거지. 그래도 울컥한다고 패진 마라. 사람 죽일지도 몰라.”
“그야 뭐…….”
“대신 나 불러.”
“예?”
“우리 동생이 원하면 깔끔하게 처리해 줄게.”
순간 오한이 살짝 들었다.
강주혁은 적게 잡아도 여섯 병은 넘게 마셨다.
그런데도 눈빛은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놀라운 건, 나도 그렇다는 거다. 그만큼 마셨으면 취해야 하는데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감안하면 강주혁은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아니, 방금까지 들었던 그의 무용담을 떠올리면 사람 하나 바르게 개조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어쩌면 조성기는 정말 착한 새 사람(?)이 될지도 몰랐다.
“물론 내 지론은 이거야. 세상에 공짜는 없다! 하지만 받은 게 있으면 베풀어야 한다 이거지.”
“저도 그런 부분에선 형하고 생각이 비슷하거든요. 그래서 빚도 열심히 일해서 갚을 거고, 무엇보다 친구 일은 제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짜식. 대단하네. 하긴 그래서 내가 널… 근데? 너 안 취하냐?”
“예? 살짝 취기가 올라오기는 하는데 아직 괜찮은데요?”
“그래? 그럼 좀 더 마셔도 되겠지?”
“당연하죠.”
신기한 건, 새벽이 다 되어가는데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래서 묻는 건데 그럼 방법은 찾은 거냐?”
갑자기 강형우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소주를 따르더니 건배 하듯이 툭 쳤다.
“개미에게는 개미만의 방식이 있다면서요?”
“아! 맞다! 정 사장님 밑에서 일했다고 했지?”
“예. 그래서 얼마 전에 그 이야기 들었거든요. 그리고 사실은…….”
돈 문제를 해결하자마자 연구와 고민에 들어갔다.
조성기를 이대로 놔둘 수 없었다.
그랬기에 고민하고 궁리했고, 치졸하지만 발목이라도 잡을 방법을 떠올렸던 것이다.
맞다.
강주혁과 술 한잔 하고 싶었던 건, 그에 대해서 조언을 얻고 싶어서였다.
확실히 말하길 잘한 것 같았다.
***
“야! 그런 일 있었으면 말하지!”
김창주가 버럭 화를 냈다.
동시에 정덕수도 이를 빠드득 갈았다.
이 상황에서 조성기가 눈에 띈다면, 진짜 갈려버릴지도 몰랐다.
강형우는 분위기 식힐 겸 소주를 땄다.
그런 뒤 형님들 잔에 쪼르르 따랐다.
“됐어요. 다 잘 해결된 걸요. 오히려 빚 청산까지 끝냈으니 이제 더는 얼굴 안 봐도 되잖아요. 관계도 깔끔하게 정리된 거고 그래서 더 홀가분하게 진행시킬 수 있죠.”
“새끼, 너만 대인배고 우린 소갈딱지다. 아오! 듣기만 해도 짜증나는데…….”
정덕수가 분통을 터뜨리자 이혁기가 다급히 말렸다.
사채를 싫어하는 이유는, 본인이 그 밑에 있어봐서였다. 목에 풀칠한다고 들어갔다가 온갖 더러운 꼴을 다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손을 씻고자 했다.
이어졌던 건 보복 폭행이었고, 오히려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써야 했다.
무식하고, 배경조차 없으니 실형은 피할 수 없는 일!
그렇게 몇 년을 살다 나온 정덕수는 사람이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바보 소리 들을 정도로 웃고 다녀서 인상만 안 쓰면 불상처럼 인자하게 보였던 것이다.
대신 화나면 사천왕이 된다.
“하여간 성기 새끼. 눈에 띄기만 하면…….”
“아서라, 아서. 돈 많은 놈이 변호사 사면 주먹질 한 방에도 오 년 넘게 살아! 너 같은 경우, 재수 없이 살인미수라도 뜨면 인생 골로 가는 거야.”
폭력 전과자가 살인미수일 경우 최하 7년이라나?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나름 똑똑하다는 이혁기의 말이니 틀리진 않을 거다.
그때 김창주가 손을 들었다.
“일단 그놈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어차피 부동산 삼촌이 어디 멀리 갔을 거라고 했으니까.”
“예? 멀리요?”
“뭐, 자세한 건 모르겠고, 추울 때는 따뜻한 데서 지내야지 하면서 대리인 세워 놓고 여행 갔다더라. 동남아 어디 어쩌고 하는데…….”
부동산 삼촌은 쓸데없는 말은 잘 안 한다.
그러니 사실일 터.
적어도 두어 달은 얼굴 보기 힘들게 분명했다.
강형우는 씨익 웃었다.
“차라리 잘됐네요! 안 그래도 시간이 필요했는데.”
화끈 오뎅 김창주.
형님네 버거 정덕수.
태성 반점 이혁기.
마지막으로 우리 통닭 김현우.
이렇게 네 사람이 우리 동네 사총사였다.
일전 배산회 모임 때도 언급하기는 했고, 도움까지 약속을 받았었다.
그러면서 넌지시 흘린 말이 있었다.
조성기네 건물과 한 번 제대로 붙어볼 생각 없냐고 말이다.
그때 형들이 피식 웃어 넘겼는데, 지금은 진지했다.
오뎅 국물과 맞바꾼 강형우의 레시피.
전설의 고추튀김이 대박이 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