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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23/70)

소통

-이놈 뭔 엄살이 이리 심해?

실레스틴의 말에 셀레아나가 한발 더 나갔다.

-그러게 말이야. 그냥 불로 확 지져 줄까? 정신 바짝 들도록 말이야.

-쯧쯧! 아서라, 아서. 그러다 정말로 구워져 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셀레아나의 과격한 농담에 노에아넨이 혀를 차며 한심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장난들이 심하시네요. 제가 이분을 깨우지요.

치유의 능력이 있는 물의 최상급 정령인 엘레스트라의 말에 실레스틴이 눈을 흘기며 자신이 알마리온을 깨우겠다며 나섰다.

-흥! 또 잘난 체하네. 그럴 것 없어. 이 아인 나와 가장 친화력이 높으니 내가 깨우도록 하겠어.

-하지만…….

실상 지금 알마리온의 상태는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하여 혹시라도 실레스틴이 조심성 없게 알마리온을 다룰까 걱정이 되었다.

차분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아주 먼 실레스틴이 자칫 알마리온을 잘못 다루었다가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들까 걱정되는 것이었다.

-됐어. 나도 잘할 수 있다고! 하니까 넌 나서지 말라고! 알겠어?

엘레스트라에게 다시 한 번 나서지 말라고 한 실레스틴이 알마리온의 몸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기운을 불어 넣어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알마리온의 몸에 자신의 힘을 모조리 불어 넣어 주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알마리온의 수련 정도로는 최상급 바람의 정령인 실레스틴의 기운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태였다.

단지 희생의 주술을 통해 과도하게 빠져나간 마나와 생명력을 복원시켜 줌으로써 알마리온이 정신을 차릴 수 있을 정도로만 힘을 불어 넣어 주었다.

-한데 놀랐어. 이 녀석의 생명력이 이렇게 강할 줄 말이야.

노에아넨의 말에 다른 정령들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마리온의 끈질긴 생명력은 정령의 고향 안에 묶여 있는 이들 네 최상급 정령들조차도 놀라워했을 정도다.

-옛날에 그놈이랑 비슷하지 않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하이엘프의 피를 이어받은 것도 그렇고, 그놈처럼 우리 넷 모두에 대한 친화력을 가진 것도 그렇고 말이야.

-성장 배경도 그런데?

실레스틴이 알마리온에게 조심스레 자신의 기운을 불어 넣어 주는 동안 노에아넨과 셀레아나는 자신들의 마지막 소환자였던 폴랑 대제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떠들었다.

-좀 조용히 못 해! 셀레아나야 그렇다 해도 겉으로는 온갖 무게는 다 잡을 것처럼 생긴 노에아넨 넌 무슨 수다가 그리 많은 거야!

알마리온에게 자신의 기운을 불어 넣던 실레스틴이 하던 일을 끝내고는 버럭 짜증을 부렸다.

실레스틴의 말처럼 근엄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노에아넨은 실상은 엄청난 수다쟁이였다.

“으으…… 시끄러……. 조, 조용히 좀. 요들, 벌써 출동이야?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알마리온은 꿈을 꾸고 있었다. 밤새 동원된 노역 후에 또다시 이른 아침에 출동 명령이 떨어져 피곤함에 지친 몸을 억지로 일으켜야 했던 때의 꿈이었다.

-뭐야. 이 녀석 꿈을 꾸나 보네?

-죽을 것을 살려 줬더니 잠꼬대나 하고 있고 참 나…….

-뭐, 우리가 살려 준 것은 아니지. 다 저 녀석이 가지고 있는 영혼석과 저 녀석의 생명력이 끈질긴 때문이지.

노에아넨과 셀레아나 그리고 실레스틴이 잠꼬대를 하며 몸을 뒤척거리는 알마리온의 모습에 어이없어했다.

-한데 이상하지 않나요?

-이상하다니. 뭐가?

알마리온의 상태에 이상함을 느낀 셀레아나의 말에 실레스틴이 또 뭘 가지고 그러느냐며 눈을 째렸다. 아마도 알마리온을 깨우기 위해 자신의 기운을 불어 넣어 주었던 자신의 행위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이분…… 우리의 대화가 들리나 봐요.

-어? 정말?

-에이 설마…….

-주술사로서의 능력을 자각한 것인가?

-그렇다 해도 이 아이의 능력으로는 아직 우리의 존재를 느낄 정도는…….

“아! 정말 시끄럽네! 좀 자게 좀……!”

계속해서 머리에 들려오는 이런저런 말소리에 짜증을 부리며 벌떡 일어나던 알마리온이나, 그런 알마리온의 모습에 정령의 고향 안에 갇혀 있던 네 최상급 정령들이나 모두 크게 놀랐다.

“누, 누구?”

주변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다는 것만 확인한 알마리온은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은 것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머릿속에서 들려온 시끄러운 소리 외에도 이상한 것은 또 있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인가? 어떻게?”

희생의 주술은 말 그대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서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소멸시켜 버리는 주술사 최후의 주술이었다. 그렇다면 분명 지금 이 순간 자신은 죽어 있어야 했다.

“주술을 잘못 펼친 것인가?”

주술이라는 것 자체가 아직은 낯선 것이었기에 실수로 주술을 잘못 펼칠 가능성도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냐……. 그렇다면 그자가 안 보이는 것도, 그리고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자가 누구인지 몰라도 처음부터 자신을 목표로 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죽음을 확인조차 하지 않고 사라질 리가 없었다. 그 순간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아차! 노임!”

-불렀나?

“내 친구들! 내 친구들은 어떻게 됐지?”

-걱정 말게. 모두 무사하니 말이야.

“아! 다행이야. 하면 내 친구들을 꺼내 줘.”

밤새 땅속에 묻혀(?) 있었던 리처드와 한센 등의 안부가 걱정되어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그들을 먼저 걱정하는 알마리온이었다.

-그러지.

이내 땅속에서 리처드 등이 솟아 나오자 알마리온은 황급히 그들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이들까지도?”

자신을 공격한 정체불명의 주술사에 의해 살아 있는 인형이 된 또 다른 두 명의 인간과 수인족 그리고 드워프도 리처드 등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 네가 저들 모두라고 해서 말이야.

“어쨌든 고마워, 노임.”

-그래. 그럼…….

노임을 돌려보낸 후 알마리온은 꼼꼼히 이들 여덟 명을 살펴보았다.

“다행이네. 일단 이들 모두 특별한 이상은 없어 보이니 말이야.”

다행히 리처드 등은 신체적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다.

하나 이들은 지금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바로 정신이 제압되어 있어 스스로의 의지가 사라져 버린, 정확히는 자신의 내면에 갇혀 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일단은 이들이 다시금 육체의 주인이 되도록 내면에 갇힌 영혼을 다시 깨워 줘야 하는데…….”

정신을 제압하는 주문 또한 매우 위험한 주문이었지만, 그렇게 정신을 제압당한 자를 다시금 일깨우는 주문 또한 매우 위험천만한 주문이었다.

특히 일단 한번 정신을 제압당한 자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정신을 제압할 당시보다 몇 배나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정신을 제압하여 살아 있는 인형을 만든다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 쌓인 원초적인 감정을 자극하여 스스로 그 감정 안에 갇혀 버리게 만드는 초고난도의 작업이다.

문제는 이러한 작업 자체가 가장 취약한 부분을 공격하여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기에 이미 살아 있는 인형이 된 자의 영혼은 심각한 상처를 입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렇게 상처 입은 영혼을 다시금 일깨워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알마리온이 선뜻 이들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주술을 행하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살아 있는 생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 볼 수도 없고…….”

전장에서 적을 상대하는 일이라면 아무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다. 하나 단지 자신이 모르는 자라 해서 살아 있는 자를 상대로 위험한 실험을 할 수는 없었다.

-쳇! 나약하기는 그놈이나 이놈이나 똑같은 놈이네.

-그러게 말이야. 지금 이놈 정도면 정신계 정령들을 사용해서 저놈들을 깨울 수도 있을 텐데 뭘 주저하는 것이지?

“누구?”

-…….

또다시 머릿속에 들려온 말소리에 알마리온은 깜짝 놀라 다시 주변을 날카롭게 살펴보았다.

하나 역시 이번에도 주변에는 아무도 없음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주변에는 역시 아무도 없다. 하면 이 목소리는 대체…….’

분명 환청이 아니었다.

‘혹시 지난밤 내게 빙의된 원혼들이 아직도 내 몸에 남아 있는 것인가?’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주술 자체가 아직은 서투른 때문에 혹시라도 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 싶어 이를 확인하기 위한 또 다른 주술을 펼쳤다.

“진실의 눈!”

세상의 모든 삿된 것과 감춰진 것 그리고 상대의 거짓말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주술이었다.

주문이 끝나자 알마리온의 눈동자에서 밝고 투명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역시 아무것도……. 헉! 뭐, 뭐야! 이게 대체 뭐야!’

진실한 눈으로 주변을 먼저 살펴보고, 그다음 자신을 살펴보던 알마리온은 로엔달이 건네준 정령의 고향이라는 한 쌍의 팔찌에 각각 거대한 힘을 가진 네 정령들이 깃들어 있음을 처음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우리까지 보이기까지 하나 본데?

실레스틴의 말이었다.

-주술을 썼으니 보이겠지.

노에아넨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저 녀석 수준으로는 우리 말을 들을 수도, 우리를 볼 수도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셀레아나가 도대체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짜증 섞인 한마디 불평을 하였다.

불의 최상급 정령인 셀레아나의 말처럼 이제 겨우 중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알마리온의 능력으로는 최상급 정령인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 가지 가능성이 있긴 해.

무엇인가 가능성을 찾았는지 엘레스트라가 심각한 어투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희생의 주문과 영혼석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지도 몰라요.

희생의 주문은 자신의 모든 힘, 생명력까지도 모두 태워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소멸시키는 주문.

한데 알마리온은 그러한 희생의 주문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해답은 이 안에 있었다.

알마리온은 그 하나만으로도 가히 세상에 다시없을 보물을 두 가지나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최상급 정령 넷이 강제로 묶여 있는 정령의 고향이라는 마법 물품과, 또 하나는 푸른하늘로부터 부족의 대족장임을 상징하는 신물이자 역대 대족장들이 자신들이 평생을 쌓은 주술력을 모두 담은 영혼석이라는 것이었다.

실상 이 두 가지 보물에 깃들어 있는 힘은 알마리온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것들이었다.

정령의 고향이라는 마법 물품 안에 깃들어 있는 최상급 정령 하나만으로도 세상의 반은 파괴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었다.

하나 알마리온이 희생의 주술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영혼석으로 만들어진 선택받은 자의 신물이었다.

-저 영혼석이라는 것. 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주술사들의 영혼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주술의 정精.

소나무의 송진과도 같이 메코이족의 역대 대족장들이 자신들의 주술력을 한곳에 만든 것이 바로 영혼석이라는 것이었다.

이름은 비록 영혼석이라 하여 돌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이것은 순수한 정精의 결정체. 마치 소나무의 송진이 모이고 모여 덩어리가 만들어진 것처럼 영혼석이라는 것은 역대 메코이족의 대족장들이 만든 주술의 결정체였다.

-그러니까 네 말은…….

-주술력이 쌓이고 쌓인 저 영혼석이라는 것이 결국 우리와의 소통을 가능케 한 것 같아요.

-그래도 말이 안 되잖아? 저놈이 그 영혼석이라는 것을 받은 지도 좀 됐는데 그동안은 전혀 우리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잖아?

-그건 그래요.

실레스틴의 의문에 엘레스트라가 긍정하였다. 하나 다음에 이어진 엘레스트라의 설명은 결국 모두가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그동안 이분은 그 영혼석의 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러다 어제 희생의 주술을 통해 자신의 생명력을 포함하여 우리 넷의 힘, 거기에 영혼석에 담겨 있던 힘까지 일순간 터트리면서 우리의 힘과, 영혼석에 담긴 주술의 힘이 이분의 몸에 혼재가 되어 남게 되면서 서로 소통이 이루어지게 된 것 아닐까요?

이 땅에 주술사가 존재하였던 그 순간부터 주술사들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주술력을 이용하여 만든 영혼석에 깃든 주술력도 엄청난 것이었지만, 정령의 고향에 깃들어 있는 최상급 정령 넷이라면 이 세상 자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가공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알마리온이 희생의 주술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미처 그의 몸이 이러한 강력한 힘들을 감당하지 못한 채 기절을 하였고, 그것만으로도 제리코가 전장을 전전하면서 끌어 모은 원혼들 모두와 제리코 자신의 육체까지 소멸시켜 버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두 가지의 물건 덕분에 나도 살아날 수 있었고, 그대들과도 이렇게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그래요. 그것 아니고서는 희생의 주술을 사용한 그대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능력이 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넷의 존재를 직접 느낄 수 있는 것은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에요.

-확실히…….

알마리온뿐만 아니라 엘레스트라의 설명을 듣던 다른 세 최상급 정령들 또한 고개를 끄덕여 엘레스트라의 생각에 긍정의 뜻을 나타냈다.

“한데 그대들은……?”

-우리? 우린 이 재수 없는 팔찌에 강제로 갇혀 있는 최상급 정령들이지 뭐.

셀레아나의 투덜거림이었다.

“하면 나도 모르게 간혹 이상한 힘을 전해 주던 것이……?”

-맞아. 우리야. 뭐, 심심해서 그런 것이기도 하고, 또 네가 예전에 우리를 소환하였던 그놈과 비슷한 구석이 많아서 좀 도와준 것이지.

이번에는 노에아넨이 끼어들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최상급 정령인 그대들을……?”

가장 궁금한 일이었다. 이 세상에 누가 있어 최상급 정령들을 하나도 아니고 넷이나 소환할 수 있으며, 또 누가 있어 이들 네 최상급 정령을 모두 이처럼 봉인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같은 이름인데도 모르나?

“그렇다면? 그게 그저 꾸며진 이야기가 아니었단 말입니까?”

그저 몇몇 음유시인들이 지어낸 허황된 이야기 정도로 치부되고 있는 알마리온 폰 폴랑 대제의 이야기가 실재하였던 이야기라는 것을 이들 최상급 정령들로부터 확인을 한 알마리온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알마리온은 이들을 정령의 고향이라는 마법 물품 안에 봉인한 인물이 마법 제국을 건국하였던 가론 폰 로드에릭 대제라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

계속되는 정령들의 하소연(?)을 통해 몰랐던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된 알마리온은 충격이 대단하여 한동안 말을 잊은 채 그저 멍하게 이들이 쏟아 놓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한데 아까 하셨던 말씀들은 무엇이었습니까?”

-뭐?

“정신계 정령들이라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 말입니다.”

-몰라?

“예.”

-모르는 것이 자랑이냐? 아주 당당하게 말하네?

셀레아나가 어이없다는 듯이 타박하였다. 그런 셀레아나의 타박에 머쓱해진 알마리온이었다.

-정령들 중에는 정신계 정령이라는 것들이 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어제 네가 상대했던 원혼들과 비슷한 놈들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노에아넨의 말처럼 정신계 정령은 따지고 보면 원망과 분노, 좌절감 등이 극에 달한 원혼들과 다를 것이 전혀 없었다.

분노의 정령인 란테스와 란시스트, 비애의 정령인 메를로와 멜리스, 공포의 정령인 엔릴과 엘리아덴, 기쁨의 정령인 아리엔과 로이엘, 그리고 이들 모든 정신계 정령의 정령왕인 히애로스까지.

따지고 보면 이들 정신계 정령들이라는 것은 인간의 가장 취약한 감정들이 쌓이고 쌓임으로써 만들어진 영靈이었으니 원혼寃魂과 다른 것 같으면서도 그 맥을 같이하는 정령이었다.

“하지만 전 그러한 정령에 대한 친화력이…….”

-역시 이놈은 확실히 바보네. 바보가 맞아.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너 주술사잖아?

셀레아나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하였다.

“예.”

-여태 뭘 들었어? 정령도 따지고 보면 영이라고 했잖아?

“아! 그러니까 그 말은!”

-이래서 머리 안 돌아가는 것들은 힘들다니까. 쯧쯧쯧!

혀까지 차는 소리를 내며 알마리온을 타박하는 셀레아나였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셀레아나 님.”

셀레아나의 말에 영감을 얻은 알마리온이 막 정신을 잃고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여덟 명을 상대로 정신계 정령들을 소환하여 내면에 갇혀 있는 이들의 영혼을 꺼내려는 주술을 시도하려 할 무렵이었다.

“저기다! 저기 군단장님께서 계신다!”

“군단장님을 찾았다! 군단장님을 찾았다!”

아침이 되어도 최고 지휘관들 중 하얀이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자 이를 이상히 여긴 하얀이리에 의해 제1의용군 병사들 모두가 온 산을 샅샅이 뒤지며 이들을 찾던 중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다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알마리온 등을 찾았다는 소식을 접한 하얀이리 등이 허겁지겁 달려와서는 알마리온과 땅에 뉘어 있는 리처드 등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나중에 설명드리겠습니다, 하얀이리 님. 일단은 군을 물려 숙영지로 돌아가서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이 일대로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여 주십시오.”

“그게 무슨…….”

“나중에 다 설명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알았다. 그렇게 하지.”

“감사합니다.”

“모두 물러난다! 그리고 메코이족과 얄란족 전사들은 이 일대를 봉쇄하고 나머지는 일단 숙영지로 돌아간다!”

“불가합니다! 어찌…….”

“명령에 따르시오, 케인 경.”

직할대를 맡고 있는 케인이 하얀이리의 명령에 반발하려 하자 알마리온이 그러한 케인에게 분명히 자신의 뜻을 밝혔다.

“알겠습니다, 군단장님.”

승복한 케인이 병사들을 이끌고 물러나고, 하인이리의 지휘에 따라 메코이족과 얄란족이 알마리온 등이 위치한 계곡 일대를 멀리서 포위하자 알마리온은 본격적으로 리처드 등을 깨우기 위한 의식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정신을 일깨운다는 것은 매우 섬세한 작업이었다. 알마리온은 주술과 함께 정신계 정령들까지 동원하여 이들의 정신을 다시금 일깨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정신계 정령들은 실상 모두에게 친화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지성체들은 그러한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러한 정신계 정령들과의 소통이 되는 지성체를 두고 보통의 사람들은 이렇게 표현한다. ‘미친놈’이라고 말이다.

알마리온은 이러한 정신계 정령들과도 계약을 맺음으로써 이들을 소환할 수 있었는데, 정신계 정령들 중 하급 정령들이 아닌 상급 정령들과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에 정령의 고향 속에 갇힌 네 최상급 정령들 또한 무척이나 놀랐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닌 것이, 지난밤 그가 감당해야 했던 수만이나 되는 원혼들이 빙의되면서 그에게 남긴 정신적 충격과, 그러한 충격 속에서도 의지를 발휘하여 희생의 주문을 실행했을 정도라면 그의 정신력이 어느 정도라는 것인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쨌든 정신계의 상급 정령들까지 동원된 이 작업은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거의 지날 때가 돼서야 겨우 끝낼 수 있었다.

하나 알마리온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네 잘못이 아니잖아? 하니 이만 털어 버리는 것이 좋겠다.”

“그렇습니다, 주군. 저들이 다시 깨어나지 못한 채 저렇게 죽은 것은 주군의 책임이 전혀 아닙니다.”

내면에 갇혔던 자아가 다시금 깨어나 육체의 주인이 된 리처드와 한센, 요들, 칸이 알마리온을 위로하였다.

정체를 모를 두 명의 인간과 한 명의 수인족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의 드워프는 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그 충격을 견디다 못해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래요. 어쨌든 이들을 장례 지낸 후에 복귀하도록 하지요.”

“예, 주군.”

정신을 차린 리처드 등과 함께 간단하게 끝내 영혼을 잃은 채 이를 되찾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네 명의 살아 있는 인형의 주검을 장사 지낸 이들은 부대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휴식을 취한 후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이동을 하였다. 이미 더글러스 후작이 지휘하는 제3군과의 약속 날짜가 하루나 지나 있는 상태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어 이처럼 늦었단 말인가!”

더글러스 후작의 질책이 강하게 이어졌다.

“죄송합니다, 후작 각하.”

“후에 이 문제로 그대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야!”

“잘 알고 있습니다, 후작 각하.”

묵묵히 더글러스의 비난을 견뎌 내고 있는 알마리온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약속된 날짜에 도착하지 못한 것은 모두 알마리온의 책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바탕 곤욕을 치른 알마리온은 더글러스 후작을 비롯한 제2군 지휘관 회의에 참석하여 적의 1군을 상대하기 위한 작전을 함께 구상하였다.

아니, 그저 듣기만 하였다. 더글러스 후작은 철저하게 알마리온을 무시하였고, 그가 내놓는 어떠한 의견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알마리온과 제1의용군의 역할 또한 자신들이 공적을 세울 동안 철저하게 이들 제3군을 보조하는 역할에만 그치도록 하였다.

“쳇! 뭐 저런 놈들이 다 있어? 아주 대놓고 널 무시하더군. 게다가 무슨 작전이라는 것도 그래? 이건 우리 제1의용군을 써먹기만 실컷 써먹고 공은 모두 제 놈들이 가져가겠다는 식이잖아?”

제1의용군 진영으로 돌아오자마자 참고 참았던 리처드가 결국 분통을 터뜨렸다.

“이제 그만하세요, 형님. 어차피 이런 정도는 각오하고 온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정말 그자가 레드로의 아버지 맞아?”

“…….”

“하긴 그런 옹졸한 자이니 제 자식마저 내쳤겠지!”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형님.”

“뭐가 지나치다는 것이지? 그럼 아니란 말이냐?”

“형님!”

어쨌든 이곳은 군의 지휘관들이 모인 곳, 사사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모습이 아니었기에 불만을 토로하는 것도 모자라 개인적인 비판을 가하는 리처드의 행동은 좋은 모습이 아니었기에 이를 강하게 제지하는 알마리온이었다.

“어쨌든 내일 새벽부터 이동을 시작해야 하니 모두 만전을 기해 주도록 하십시오. 이상으로 회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예, 군단장님.”

하루라도 빨리 포넬 1군을 격파하고 진격하고 싶은 제3군이었기에 제1의용군이 도착을 하자마자 곧바로 포넬 1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공격에서 제1의용군에게 주어진 임무라는 것은 적으로 하여금 제3군 전면에 대한 방어력을 떨어뜨리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험준한 산세를 바탕으로 옛 성터를 다시금 손봐 웅거하고 있던 포넬 1군에 배후에서 치고 들어온 제1의용군의 등장은 확실히 의외의 일이었다.

하나 갑작스러운 제1의용군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이 점령하고 있던 몇 곳의 산성을 포기한 채, 병력을 모아 요충이 되는 두 곳의 성에서 웅거하여 더욱 방어를 견고히 하였다.

이러한 포넬군의 침착한 대응에 제3군은 수차례 이들이 웅거하고 있는 성을 공략하였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속절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성에 들어앉은 채 방어에만 전념하던 포넬군도 계속된 공격에 결국 위기 상황에 빠지게 되었고, 포넬군의 방어력이 크게 떨어지자 더글러스는 그동안 뒤로 빼놓았던 제1의용군까지 전장에 투입하여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훗! 끝까지 너의 제1의용군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심산이군.”

비록 전장에 투입되기는 하였지만 리처드의 말처럼 제1의용군은 예비대로 남아 뒤에 남겨져 있었다.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제1의용군은 병력 충원이 쉽지 않은데 이처럼 전장에 투입되고도 병력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 아닙니까?”

“쳇! 그래도 힘들게 여기까지 와서 전장에 투입되었는데 아무 한 일도 없이 그냥 돌아가는 것은 좀 그렇지 않아?”

“…….”

리처드의 불만 섞인 투정이 이어졌지만 알마리온은 그저 묵묵히 공방을 주고받는 상황만 지켜보고 있었다.

‘이쯤해서 도와주는 것이 좋겠군.’

치열한 공방 끝에 병력에서 우위를 보인 로엔군이 점차 승기를 잡아 가자 알마리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령을 소환하였다.

‘노임, 성벽의 일부를 무너트려 줘.’

-그러지.

오랫동안 방치된 산성을 서둘러 복구하였지만 아무래도 방치된 성터에 급히 쌓아 올린 것이었기에 그 누구도 안전을 장담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결국 계속된 공격에 성벽의 기단 일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성벽이 무너졌다! 저곳으로 진입해!”

“와아!”

성벽의 일부가 결국 무너지고 공방을 주고받던 로엔군과 포넬군이 그곳을 중심으로 다시금 격렬하게 충돌하였지만 결국 아무도 모르는 알마리온의 도움을 받은 로엔군이 무너진 성벽을 통해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끝났군. 하긴 네 도움까지 받았는데 못 끝내면 말이 되지 않지.”

“아셨습니까?”

“그렇게 일을 벌여 놓고 내가 모를 것 같았냐? 멀쩡하던 성벽이 갑자기 왜 무너져 내리겠어?”

“형님도 참…….”

“어쨌든 우린 끝까지 들러리만 서다가 돌아가게 생겼네.”

“전쟁은 아직 많이 남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

이번 전투가 승리로 끝나면서 포넬군은 더욱 큰 궁지에 몰렸지만 아직 전쟁이 끝나려면 얼마나 더 오랜 시간과 병사들의 희생이 있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돌아가자.”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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