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전쟁
밀고 밀리는 전쟁은 4년여를 끌어오고 있었지만, 이제 그 대단원의 막이 얼마 남지 않은 듯 보였다.
총인원 70만이라는 엄청난 병력으로 로엔 왕국을 침공해 들어온 포넬 왕국은 처음 1년 동안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로엔 왕국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할 수 있었지만, 이후 로엔 왕국의 치열한 반격과 각지에서 일어난 민병대의 활동, 그리고 전열을 정비한 해군의 강력한 반격에 휘말리면서 결국 65만이라는 엄청난 인명 손실을 입은 채, 현재는 남동부의 항구도시인 쿠덴베르에서 완전히 고립된 채 최후의 저항을 하고 있었지만 그 병력은 겨우 5만여 정도밖에는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반해 로엔 왕국은 무려 그 여섯 배에 달하는 30만 병력과 제국군 5개 군단 5만의 병력으로 쿠덴베르를 육지와 바다에서 완벽하게 포위를 하여 최후의 저항을 하는 포넬군을 압박하고 있었다.
“충! 남작님, 원수부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원수부에서 전령이 도착했다는 한센의 말에 알마리온은 전령을 들어오게 하였다.
“전령이 말인가요?”
“예, 주군.”
“들여보내세요.”
“예.”
얼마 후.
“충! 원수부 전령인 도란이라고 합니다.”
“수고했다. 원수부에서 보낸 전문을 주게나.”
“예. 여기 있습니다.”
원수부에서 파견한 전령인 도란이 가방에서 밀랍과 마법으로 봉인된 서신을 건네주자 이를 받아 든 알마리온은 자신의 오른손에 끼워져 있는 신분을 나타내는 반지를 봉인된 부분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잠깐 동안 밝은 빛이 봉인된 부분에서 피어오르더니 이내 봉인된 부분이 열렸다.
“수고했네. 웹 경, 전령에게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게.”
“예! 나를 따르도록.”
“예.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충!”
원수부에서 전달된 서신을 모두 읽은 알마리온의 표정이 다소 애매모호한 것이 되자 곁에 있던 한센이 무슨 내용인지를 물어 왔다.
“무슨 내용이기에 그런 표정이 되십니까?”
“나더러 이 서신을 받은 즉시, 부대를 부군단장에게 맡긴 후 곧바로 원수부로 오라고 하는군요.”
“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명령이야? 이제 한두 번만 더 몰아붙이면 적을 무너뜨릴 수 있는 그런 순간에 갑자기 원수부로 소환을 하다니? 이 무슨 엉터리 같은 명령이냐?”
리처드의 말처럼 지금의 상황은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네일 강을 건너 쿠덴베르로 진격할 수 있는 그러한 상황이었다. 한데 이처럼 갑작스러운 소환 명령이 내려오자 모두가 당황한 것이다.
“혹시 널 전장에서 아예 빼려는 것 아닐까?”
“설마?”
리처드의 말에 하얀이리가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식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아니.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얀이리 님.”
한센 또한 리처드의 생각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는 듯이 말하였다.
이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그동안 포넬과의 전쟁에서 알마리온이 세운 공은 모든 로엔군 지휘관들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들이었다.
때문인지 알마리온에 대한 견제는 의외로 상당히 심했다.
심지어는 더 이상 공을 세우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가 지휘하고 있는 제1의용군을 전선에서 빼 버리는 일도 벌써 몇 차례나 있었다.
이는 비단 그뿐만이 아닌, 국왕 파벌에 속하는 군 지휘관들 대부분이 그러했는데 아쉬울 때에는 이들을 다시 전선에 불러들여 상황을 유리하게 만드는 데 사용하고는, 상황이 다시 좋아지면 미련 없이 이들을 뒤로 빼 버렸다.
특히 제1의용군의 경우에는 전체 병력의 절반 가까이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수부에서는 이렇게 손실된 병력마저 충원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있었다.
“만약 제1의용군을 해체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생각해 본 적 없지만 군을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이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 같군.”
알마리온의 말에 하얀이리와 꿈꾸는달 또한 자신들도 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이 단지 원수부의 소환을 받은 것뿐이었는데, 리처드의 갑작스러운 말 한마디에 이들 제1의용군 지휘부는 벌써부터 마치 제1의용군의 해체가 결정된 것처럼 파장 분위기였다.
“어쨌든 원수부에서 최대한 빨리 왕도로 오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내일 출발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칸 경이 나를 대신하여 제1의용군을 잘 맡아 주십시오.”
“예, 군단장님.”
다음 날 알마리온은 리처드와 한센, 요들을 대동한 채 왕도인 소렌토로 향하였다.
알마리온 일행이 소렌토에 도착한 것은 주둔지를 출발한 지 이십여 일 만이었다.
“도르첸 공작 전하를 뵈옵니다.”
알마리온이 입궁하여 안내된 곳은 원수부가 아닌, 도르첸 공작의 집무실이었다.
“어서 오게, 혼테르 남작. 원수부에서 남작을 소환하였는데 이곳으로 오게 돼서 놀란 모양이군?”
“예. 그렇습니다, 공작 전하.”
“하긴 그렇겠지. 하나 자네가 원수부에 가기 전에 내가 할 말이 있어서 자넬 이곳으로 데려오게 한 것이네.”
“그러십니까?”
“그렇네. 자네 혹시 2공주님과 어떤 사이인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갑작스러운 도르첸 공작의 질문에 알마리온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
“공주와 어떤 관계인지를 물었네.”
“왜 그런 질문을 하신 것인지 먼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남작은 모르겠지만 최근 두 분 공주님에 대한 혼인 문제가 은밀히 진행 중이네.”
“그렇습니까?”
두 명의 공주에 대한 혼인이 추진되고 있다는 말에 알마리온은 그것이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그러는가 싶었다.
2공주인 카산느와 두 차례 정도 서신을 개인적으로 주고받은 일이 있었지만 특별하게 무슨 감정이 있는 것도, 그렇다고 해서 둘 사이에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네.”
“한데 그것과 소관을 이처럼 다급히 소환한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정말 모르겠나?”
“솔직히 소관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2공주와 두 차례 개인적으로 주고받은 서신의 내용 또한 지극히 개인적이긴 해도 단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 정도 이상의 내용은 아니었다. 한데 그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소렌토를 수복하고 벌어진 연회에서 헬레나 폰 로엔 왕비는 막내딸인 카산느가 알마리온과 산책을 나가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공주의 이러한 가벼운 행동은 사교계의 입방아에 오르기에 딱 좋은 일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공주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결국 왕비께서 두 분 공주님에 대한 혼담을 적극 추진하게 된 것도 남작의 일도 있고 해서라는 것이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노예 출신 남작인 자신이 공주와 염분이 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실상 일국의 공주가 남작과 연분이 난다는 것도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공작에 준하는 신분을 가진 공주가 귀족 중 말석인 남작과는 격이 맞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한데 알마리온에게는 또 다른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가 더 있지 않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언짢게 들리겠지만 어쨌든 공주와 자네는 어울리지 않는 신분이라네.”
“…….”
도르첸의 말에 알마리온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자신이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일로 인해 전선에서 소환당하였다는 것만큼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기에 잔뜩 굳은 표정이었다.
“해서…… 왕비님의 강력한 요청으로 자네에 대한 인사가 곧 단행될 것이네.”
“어떤 식으로 말씀이십니까?”
“제1의용군은 이번에 해체될 것이네. 그리고 자네 또한 제1의용군 군단장의 자리에서 보직 해임될 것이네. 물론 다른 보직이 주어지지도 않을 것이고 말이야.”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군단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어차피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일이었기에 그다지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그러한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 상당히 기분이 상했지만 그것을 표현할 정도로 어리석지도 않았다.
“알겠습니다. 한데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제1의용군이 해체되면 두 게르혼 부족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들도 할 만큼 했지.”
“하면 그들도 부족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럴 것이네.”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이제 제1의용군에 남은 게르혼족 전사들은 두 부족의 전사들을 모두 합해 6백 명에 조금 못 미칠 정도였다. 한데 이제 이들도 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알마리온이었다.
“감사합니다. 하면 소관은 원수부에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아직 자네에게 알려 줄 것이 하나 더 있네.”
“그렇습니까?”
“다른 것이 아니고, 이번에 자네가 승작을 하게 될 것이네.”
“예? 승작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남작이란 작위를 받은 것이 불과 1년 전이었다. 한데 또다시 승작을 할 것이란 말에 알마리온은 이 또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간 자네가 쌓은 공적만으로도 충분한 일이라네.”
도르첸의 말은 공적도 공적이지만 다른 것이 작용했다는 뜻이었다. 이를테면 공주와의 일에서 앞으로 잘 처신하라는 뜻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알았다니 되었네. 그럼 원수부로 가 보도록 하게.”
“예, 공작 전하.”
도르첸과의 면담을 마친 알마리온은 원수부에서 이미 도르첸에게 이야기를 들었던 제1의용군의 해체와, 자신의 보직 해임, 그리고 게르혼 두 부족 또한 더 이상 군에 머물 필요가 없다는 등의 내용을 전달받고는 원수부를 나왔다.
“혼테르 남작님?”
“그렇소만?”
“소인은 막스밀리언 2왕자 전하를 모시는 시종입니다. 2왕자 전하께서 남작님을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막스밀리언 2왕자는 1왕자인 블리스 왕자가 1군 사령관에서 물러나자 함께 2군 사령관에서 물러나 궁에 복귀한 상태였다.
“알겠소.”
막스밀리언이 반년 만에 만난 알마리온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어서 와라.”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리처드는?”
“함께 왔지만 볼일이 있다며 어디론가 가 버렸습니다.”
“그래? 오랜만에 얼굴 좀 보려 했더니 뭐가 그리 바쁜 거야?”
“후훗! 아마도 지난번 연회 때 만났던 레이디를 만나러 가는 것 같더군요.”
“그 녀석도 참……. 그건 그렇고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라.”
막스밀리언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기에 알마리온은 살짝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닙니다, 형님. 오히려 그런 불민한 소문으로 인해 오히려 공주 전하의 청명에 오점이 생겨 제가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훗! 그러게 기회가 왔을 때 확 채 갔어야지! 네가 미적거리니까 일이 이렇게 된 것 아니냐?”
“예? 원, 형님도 참…… 또 그 이야기십니까?”
막스밀리언은 알마리온과 자신의 막냇동생인 카산느의 관계가 잘되었으면 했었다.
때문에 중간에서 두 젊은 남녀의 관계를 이어 주기 위해 나름대로 많은 노력도 해 주었고, 또한 충고도 해 주었다. 하지만 일이 결국 이렇게 되자 영 서운한 모양이었다.
“넌 딴 것은 다 좋은데, 간혹 너무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문제야.”
-맞아. 넌 딴 것도 별로지만, 그 우유부단한 것이 가장 큰 문제야.
‘셀레아나 님…….’
전장에서의 알마리온의 모습은 우유부단함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이외의 부분에서는 유난히 그러한 모습이 자주 보였다.
“어쨌든 비록 너의 제1의용군이 해체되고 너 또한 다른 보직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은, 어머님께서 아버님께 강력하게 요청을 하셔서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란 것을 알아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도르첸 공작으로부터는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하였지만 알마리온이 본 메르타니온 국왕이라면 그런 이유만으로 자신의 사람을 밀어낼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폐하의 측근들 사이에서도 알력 다툼이 있다는 것이겠지.’
로엔달 백작과 도르첸 공작은 국왕의 최측근들. 도르첸 공작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귀족들이 뭉쳤다면, 로엔달을 중심으로는 국왕을 따르는 군의 인사들이 뭉쳐 있었다.
“전에도 네게 얼핏 말한 적이 있을 것이다. 아버님을 돕고 있는 숙부님과 로엔달 백작과의 관계를 말이다.”
“예, 형님.”
도르첸 공작과 로엔달 백작과의 알력은 유난히 이를 의식하는 도르첸 공작에 의해 끊임없이 소소한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로엔달 백작이 아예 이러한 도르첸 공작의 도발을 아예 무시하고 있지 않았다면, 벌써부터 자중지란이 벌어져도 몇 번이나 벌어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숙부님은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유난히 독점욕이 강한 분이시지.”
“…….”
“이번 일도 결과적으로는 숙부님과 어머님께서 손을 잡으시고 로엔달 백작을 견제하기 위해 벌이신 일이지.”
“…….”
“하지만…… 아니, 이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군.”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 마는 막스밀리언이었지만 알마리온은 구태여 그가 멈춘 말을 듣고자 하진 않았다.
‘아버님이 이번에 너의 작위를 승작시키는 진정한 이유 같은 것은 굳이 설명해 줄 필요가 없겠지.’
원수부에서 전해 들은 자신의 보직 해임과 제1의용군의 해체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북방 국경의 상황이 유동적이라는 이유로 북방 국경 지역에 영지를 가진 그로 하여금 빠르게 영지에 복귀하여 국경 수비에 임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면적인 이유는 카산느 2공주와의 염문설이 나돌자 알마리온의 출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는 왕비와 로엔달 백작을 견제하기 위한 도르첸 공작의 결탁으로 벌어진 결과라고 하지만, 막스밀리언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인 메르타니온이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알마리온을 내치는 것이 아님을.
“내가 한 가지 충고할까?”
“예, 형님.”
“욕심을 가져라. 넌 충분히 욕심을 가져도 좋을 사람이야.”
“원 형님도 참…….”
“참이 아니야. 네가 욕심을 가진다 해서 남에게 해를 끼칠 녀석이 아니란 것을 잘 안다. 그리고 네가 더 많은 것을 가질수록 그만큼 네 그늘 아래 있는 사람들 또한 풍족해진다는 것도 말이다. 그래서 난 네가 더 많은 것을 욕심내 주었으면 한다. 그래야 네 그늘 아래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이고, 그만큼 더 많은 사람들이 너로 인해 더욱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챙겨 주는 알마리온이었다. 그것을 두고 몇 번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충고도 들었던 알마리온이었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 그였다.
막스밀리언 또한 그러한 알마리온의 모습을 보면서 어차피 고치지 못할 일이라면 그것을 장점으로 만들라는 충고였다.
“감사합니다, 형님.”
“어쨌든 앞으로도 나는 네가 계속해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형님.”
“그래.”
그렇게 막스밀리언을 만나고 나온 알마리온은 테일러 상단이 소렌토에 마련한 조그만 주택으로 향했다.
그도 작위를 받던 때에 소렌토에 너른 저택을 하사받긴 하였지만, 포넬군이 퇴각하면서 불을 지르는 바람에 그것을 헐고 다시금 저택을 건축하는 중이었지만, 워낙 한꺼번에 많은 귀족들의 저택을 건축하느라 자재는 물론 인력까지 부족하여 더디기만 할 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군.”
테일러 상단의 단주인 쿠엔토의 장자인 알빈이 알마리온과 한센 그리고 요들을 마중하였다.
“자리에 앉읍시다.”
“감사합니다, 주군.”
“이야긴 들었는데 실제로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죠?”
“예, 주군.”
“고생이 많다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주군. 당연히 소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
단주인 쿠엔토는 영지인 혼테르에 상단 본부를 이전하고 그곳에서 국경무역을 전담하고 있었으며, 셋째 아들인 알베르토의 경우에는 아직도 제1의용군의 사무관으로 군단에 남아 있었지만 장자인 알빈의 경우에는 소렌토와 펜픽을 오가며 두 곳의 지점을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
“조만간 그동안 밀린 대금을 지급할 것이라고 하더군요.”
“아! 그렇습니까?”
제1의용군에 물자를 대던 테일러 상단은 그동안 왕실에서 대금을 제때 지급하지 않아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한데 이렇게 밀린 대금을 곧 지급할 것이란 알마리온의 말에 대번에 화색이 도는 알빈이었다.
“그렇다고 하더군요.”
“다행입니다. 처음 뵙는 주군 앞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죄송한 일이지만, 안 그래도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에 걱정을 하던 차였습니다.”
제1의용군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은 모두 왕실에서 그 자금을 대기로 하였다. 하나 이것이 제때에 지급된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만약 알마리온이 포넬의 제4군의 보급 물자 대부분을 탈취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에게 부여된 게르혼족과의 교역권을 통해 적지 않은 이득을 챙기지 못했다면, 제1의용군은 싸움에 패배해서가 아니라 전쟁에 필요한 물자가 부족해서 진즉에 해체되었을 것이다.
“그랬군요.”
그동안은 군을 지휘하느라, 그리고 군을 지휘해야 하는 특수한 상황이었기에 이들을 테일러 상단의 요하네스 부자들을 믿고 상단의 일을 모두 맡길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상단 또한 직접 챙겨야 했다.
“하면 그동안 모은 물자는 어느 정도나 되는가요?”
“무기류는 제1의용군이 1개월 정도 사용할 수 있는 물량은 확보했습니다. 다만 식량은 여전히 사정이 좋지 않아 그다지 많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영토를 되찾았고, 전쟁 전에 농지였던 곳을 재정비하여 다시금 여러 지역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힘을 쏟고 있었지만, 전쟁으로 인해 노예와 농노까지 강제이다시피 동원되고, 일부는 포넬군이 점령하고, 퇴각하면서 노예로 끌려간 때문에 농사를 지으려 해도 지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때문에 식량 사정은 상당히 좋지 않은 상태였다.
“생각보다 무기류를 많이 확보하였군요.”
“얄란족과 메코이족의 솜씨가 저희가 알던 것과는 달리 매우 뛰어났습니다. 특히 드워프의 피가 흐르는 얄란족은 더욱 그렇고 말입니다.”
“그렇군요. 일단 그 물자들은 더 이상 반출하지 말도록 하세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군?”
다른 대규모 상단 같았다면 정보력 또한 그에 상응할 정도로 뛰어났겠지만 테일러 상단은 아직 그러한 정도의 정보력을 갖추고 있진 못하였기에 제1의용군이 해체되기로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마리온이 직접 전해 줄 때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제1의용군이 해체되었습니다. 하니 더 이상 물건을 반출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병력이 절반 정도로 줄어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지만 그래도 꾸준히 전투를 벌이는 제1의용군에서 소모되는 전쟁 물자의 양은 적지 않은 양이었다.
“다른 상단을 통해서라도 처분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주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영지로 돌아가면 영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무기들은 필요하니 자체적으로 사용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는 양이…….”
“자넨 주군의 말씀에 따르기만 하면 되네.”
곁에 있던 한센이 자꾸만 토를 다는 알빈에게 주의를 주었다.
“죄송합니다, 주군.”
“그대도 상단을 위해 내게 충언을 한 것이니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알빈이 사죄하자 알마리온 또한 적당히 이를 받아 주는 것으로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이후에도 몇 가지 더 상단에 관계된 일들을 보고받고, 필요한 지시를 내린 알마리온은 미리 준비된 방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은 북부의 혼테르 영지의 영주인 알마리온 폰 혼테르 자작이 영지로 떠나기 전에 폐하께 인사를 올린다며 면담을 신청하였습니다.”
알마리온의 승작을 위한 의식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조촐하게 치러졌다. 아니, 의식이라고 하기에도 뭐할 정도인 것이 국왕을 대신하여 도르첸 공작이 승작을 확인해 주는 몇 가지 증명서만을 건네준 것과, 막스밀리언 2왕자와 쿤테르만이 증인으로 예식에 참석하였을 뿐, 다른 하객들은 전혀 없었다.
의식이 끝난 후에도 테일러 상단이 마련한 저택에서 있은 축하 연회에도 쿤테르와 그의 제자인 안톤을 제외한 그 어느 누구도 참석하지 않아 비참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덕분에 알마리온이 자신의 영지로 출발하는 시간이 더욱 빨라졌다.
“위대한 로엔 왕국의…….”
“됐소. 거추장스럽기만 한 그러한 인사는 그만해도 좋소.”
메르타니온 폰 로엔 국왕은 알마리온이 궁정 예법에 맞게 인사를 하려고 하였지만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저 귀찮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예를 거두라 명하자 접견실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국왕 폐하…….”
함께 배석해 있던 도르첸 공작이 갑작스러운 국왕의 행동에 놀라 끼어들려 했다.
설사 아무리 죽이고 싶은 자라 하더라도 상대가 귀족인 이상 이처럼 무시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그가 아무리 국왕이라 하더라도 예법상 전혀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특히 알마리온은 어찌 되었든 자신의 사람이 아닌가.
도르첸 공작은 메르타니온이 왜 이런 식으로 행동을 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는 조금은 지나친 행동이었기에 이를 만류하려 하였다.
“공작도 그만하시오.”
“하오나…….”
“그만하라지 않소!”
“예, 국왕 폐하.”
“그래 어쩐 일이오?”
여전히 짜증스러운 말투로 퉁명스레 묻는 국왕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이 나라의 국왕인 존재였기에 감히 국왕의 이러한 모습에도 알마리온은 그저 묵묵히 그 물음에 대답을 해야만 했다.
“이번에 군단장직에서 물러나 영지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하여 폐하께 인사를 드리러 입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소? 그간 수고 많았소.”
하다못해 입에 발린 칭찬이라도 한두 마디 할 수도 있거늘 메르타니온 국왕은 그저 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여전히 퉁명스러울 뿐이었다.
“황공하옵니다, 국왕 폐하. 하오면 소관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사옵니다.”
“…….”
알마리온이 물러날 때까지도 메르타니온은 그를 제대로 일별하지도 않았다.
“결국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여 앞으로 제1의용군은 해체를 위한 작업에 들어갈 것입니다.”
“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이지?”
하얀이리가 자신들의 거취 문제가 걱정이 되었는지 가장 먼저 물었다.
“얄란족과 메코이족 또한 모두 부족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 잘됐네. 안 그래도 부족을 떠난 지 오래돼서 걱정이 되었는데 말이야.”
“저와 함께 이동하시면 될 것입니다.”
“하하. 그러지 뭐.”
“다른 병사들은 어떻게 하기로 되었습니까?”
부군단장인 칸이 다른 병사들의 처리 문제에 대해서 질문하였다.
“다른 병사들은 모두 돌려보내도록 결정되었습니다. 하나 죄수들과 도망자 출신들은 모두 나의 영지로 데려가도록 결정되었습니다.”
“알겠습니다. 하면 곧 군단 해체를 위한 작업을 서두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정리되고 남은 병사들은 메코이, 얄란 두 부족의 전사들이 6백여 명, 그리고 처음 제1의용군에 속했던 병사들이 3백여 명 정도였다.
이들 중 두 게르혼족의 전사들을 제외한 3백여 병사들은 그대로 알마리온의 영지병으로 흡수되었다.
막바지이긴 하지만 여전히 포넬과의 전쟁은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알마리온에게 있어서 포넬과의 전쟁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열여섯 살의 나이에 노예 신분을 면하게 해 준다는 조건으로 군에 들어오게 된 알마리온이었다.
그곳에서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는 한센과 요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숨겼던 힘을 드러내면서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로엔달과 쿤테르와의 인연 또한 그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인연이었다. 지금도 로엔달이 왜 자신을 그처럼 보호하고 기회까지 준 것인지 명확하게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와 쿤테르와의 인연으로 인해 알마리온은 자신의 능력을 처음으로 마음 놓고 발휘할 수 있었다.
행복했다. 사내로 태어나 가슴과 머리에 담은 것들을 마음껏 펼쳐 볼 수 있다는 것이 이토록 가슴 떨리게 만드는, 성취감과 희열을 느끼게 만드는 것인지 처음으로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운명의 라이벌이라는 느낌을 처음으로 갖게 해 준 레드로와의 만남, 필립 폰 아르몬이라는 마법사와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중급 익스퍼트인 포넬 4군 사령관인 카즈모 백작과의 대결을 통해서 자신의 실력을 가다듬을 수 있었던 것도, 이후 서머셋 백작이 지휘하는 제7군과의 전투에서 지휘관으로서의 계략을 겨누었던 일도, 자신의 운명을 시험하겠다며 찾아온 리처드와의 대결과 그와 의형제를 맺게 된 것도, 푸른하늘이 억지로 떠맡긴 일이긴 하지만 메코이족의 대족장이 된 것도, 모두가 지난 4년 동안 벌어진 일들이었다.
‘훗! 남들은 평생을 걸쳐도 만나기 힘든 인연들이 그 짧은 시간 동안 다 만나지다니…….’
돌이켜 보면 지난 4년 동안의 일들이 모두 꿈만 같을 뿐이었다.
‘알미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자작이라…….’
여전히 남의 이름 같았다. 자신의 주인인 지크 폰 로뎀이 장난삼아 붙여 준 이름이었지만 이제는 로엔 왕국 내에서 가장 유명해진 사람들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도 여전히 완전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좋아. 형님의 말씀처럼 욕심을 내 주지. 그리고 세상에 알려 주겠어. 나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가 나만의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를!”
여전히 포넬과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으로 알마리온의 전쟁은 완전히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