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렌토에서
5개 군단이 소렌토를 거쳐 남쪽으로 진출하고 카빌란 제국에서 온 5개 군단이 소렌토 북부의 롬 평원에 도착을 하자 비로소 왕실 가족들이 소렌토에 입성을 하였다. 이는 소렌토를 적으로부터 탈환한 지 두 달이나 지나서였다.
하나 소렌토에 입성한 왕실 가족들의 표정은 침울하다 못해 암울하기까지 하였으며, 일부 왕실의 가족들은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한 채 소리 죽여 울음을 터뜨렸다.
“…….”
“흑흑…….”
전쟁이 터지기 직전 소렌토의 거주민은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대략 50만이나 되는 백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나 지난 2년간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되찾은 소렌토는,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면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전란 중에 피난을 떠나거나, 포넬군에 의해 노예로 잡혀갔거나 희생된 백성들의 수가 워낙 많았기에, 이처럼 소렌토 전체가 텅 비어 버린 유령도시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포넬군은 퇴각을 하면서 왕궁을 비롯하여 소렌토 전역에 불을 지르는 등 의도적으로 도시를 파괴하며 퇴각하였기에 과거의 그 아름다웠던 도시는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는, 보이는 곳 모두가 폐허뿐인 곳으로 변해 버려 있었다.
특히 왕궁에 대한 파괴 행위는 다른 그 어느 곳보다 철저하여 마지막으로 소렌토를 퇴각한 포넬 제3군단은 가지고 있는 마법 아이템을 모두 사용하여 왕궁 전체를 완전하게 파괴시켜 버렸고, 이로 인해 왕궁이 있던 곳은 거대한 돌무더기만 잔뜩 쌓여 있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때문에 소렌토로 돌아온 왕실 가족들은 왕궁이 아닌,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 있는 도르첸 공작가의 저택을 임시로 행궁으로 삼아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지금 뭐라고 하였소, 재상?”
메르타니온은 조금 전 자신이 들은 말이 제정신에서 나온 말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소렌토를 되찾은 것과, 아국을 위해 먼 길을 달려온 제국군을 환영하기 위해 그리고 이번에 폐하께서 직접 포상을 지시하신 공훈자들에 대한 위무 차원에서 대대적인 연회를 여심이 어떨까 하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끌어내다 목을 쳐 버리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은 전란 중이라는 것을 잊으셨소, 재상? 더욱이 재상도 눈이 있으니 보았을 것이오! 지금 왕궁뿐만이 아니라 왕도 전체가 극악한 적도들에 의해 모두 파괴된 상황에서 연회를 열자는 소리가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오!”
상처 입은 맹수의 으르렁거림 같은 메르타니온의 목소리가 대전에 낮게 울려 퍼졌다. 하나 프리모는 그런 메르타니온의 행동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였다.
“어찌 모를 수가 있겠사옵니까. 하오나 폐하, 이럴 때일수록 모두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한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이 소신의 생각이옵니다.”
프리모의 주장 또한 아주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 2년간 왕국이 전란에 빠지면서 모두가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뭐, 귀족들이야 그 와중에도 자신들이 챙길 수 있는 것은 결코 손해 보지 않고 모두 챙겼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지난 2년 동안의 전란으로 인해 많은 것들을 참아야 했다.
또한 지난 2년간 적의 수중에 있던 왕도를 되찾았다는 것도 축하할 만한 일이기는 하였으며, 로엔을 돕기 위해 온 제국군에 감사를 표시하는 자리도 분명 한 번 정도는 가져야 했다.
아울러 갑작스럽게 발표된 때문에 모두가 당황한 포상 문제에 있어서도 결국 한 번은 이를 위한 적당한 행사는 필요했다.
메르타니온 또한 이러한 행사가 언젠가는 한 번은 해야 할 일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프리모의 생각처럼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다른 구차한 이유는 대지 않겠소.”
연회를 당장 열기에 적당치 않은 때라는 이유를 대려면 수십, 수백 가지를 댈 수 있었지만 그런 이유를 프리모가 몰라서 연회를 열자고 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입 아프게 구구절절 이유를 열거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지금 왕실은 연회를 열 만큼의 재정이 없소.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재상이 말한 연회는 다음으로 미뤄야겠소.”
“하오나 폐하, 제국에서 이미 1천만 골드라는 막대한 자금을 지원키로 하지 않았사옵니까?”
프리모의 말에 메르타니온은 다시 한 번 화를 가라앉히려는 듯 숨을 내쉬었다.
“후! 그렇소. 제국으로부터 1천만 골드를 지원받기로 약속만 받았소.”
실상 로엔을 돕겠다며 달려온 제국의 5개 군단은 온 지 얼마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왕실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들 제국군은 워낙 급하게 오느라 그랬다며 심지어는 병사들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무장조차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하니 그밖에 다른 물품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약속한 자금을 함께 보낸 것도 아니라 단지 약속만 했을 뿐, 그것을 언제 보내 준다는 것은 아예 약속 내용에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골치를 썩고 있는 판에 이들 제국군은 전혀 통제가 되지 않고 있었다.
이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약탈, 강간, 살인 등의 범죄로 인해 이들이 주둔한 곳에는 오히려 백성들의 피해가 더욱 크게 발생하고 있었다.
“흠! 흠! 그렇기는 하오나 설마 제국이 약속을 어기기라도 하겠사옵니까?”
“…….”
언젠가 받게 될 것 미리 조금 쓴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뭐 있겠냐는 식으로 말하는 프리모의 말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메르타니온이었다.
결국 프리모를 비롯한 귀족들의 강력하고도 끈질긴 요청에 메르타니온은 더 이상 반대하는 것마저 귀찮아지자 그들의 요청대로 연회를 준비하도록 명령하고는 이내 대전을 나가 버렸다.
소렌토에서 도착한 소식으로 인해 제1의용군 전체가 잔치판을 벌이고 있었다.
군단장인 알마리온이 영지를 받게 된 것을 비롯하여 그와 함께 공을 세운 모두에게도 그에 따른 포상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제1의용군의 메코이족과 얄란족에까지도 내려진 보상에 이들 두 부족 또한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뭐 그런 명령이 다 있어? 이런 전란 중에 대규모 연회를 열고, 그것도 모자라 전장에 있는 지휘관들 모두를 불러들이다니? 미친 것 아냐?”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형님.”
알마리온뿐만이 아니라 회의실에 모인 모두가 리처드의 너무나도 원색적인 비난에 일순 화난 표정들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 또한 그의 말처럼 내심 이번에 내려온 명령만큼은 이해할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리처드의 말처럼 다른 소식과 함께 전해진, 왕실에서 개최하는 연회와 함께 열리기로 되어 있는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 반드시 참석하라는, 불참 자체를 왕명을 거역하는 것으로 판단, 반역의 죄로 엄중히 다스리겠다는 명령은 그 누구라도 상식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그러한 명령이었다.
“쳇! 이상한 것을 이상하다고 그러는데 뭘 그래?”
“제가 뵌 폐하께서는 이런 식의 명령을 내리실 분이 아니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럼?”
제 입으로 로엔의 귀족들을 욕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알마리온은 이내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이런 명령이 내려왔으니 따라야겠지요. 칸 경.”
“예, 군단장님.”
“경이 나를 대신하여 군단을 지휘토록 하세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소렌토행은 나와 형님 단둘만 가도록 하지요.”
“수행할 병사라도 몇 대동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 됐어요. 차라리 우리 둘만 이동하는 것이 더 빠르게 오갈 수 있습니다.”
실상 지금 제1의용군에서 리처드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을 빼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칸과 한센은 제1의용군의 핵심 지휘관으로 자리를 비울 입장이 아니었으며 알마리온이 부재일 경우 직할대를 지휘하기 위해서 요들 또한 군에 남아 있어야 했다.
알베르토 또한 조만간 소렌토에서 모집된 후 곧 출발할 것이라고 하는 2개 천인대 규모의 병력을 맞이할 준비와 지난 전투에서 포획한 포넬군 포로들을 소렌토로 호송할 때까지 그들을 관리해야 하는 책임을 맡고 있기에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결국 알마리온과 함께 소렌토로 갈 수 있는 사람은 리처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사정도 있지만 알마리온이 구태여 수행할 병사들마저 대동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소렌토로 가는 도중 그와 다시 한 번 대련을 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알마리온의 내심을 짐작하였는지 리처드의 입가에도 묘한 웃음이 지어졌다.
이렇게 하여 결국 알마리온과 리처드 단 두 사람만이 수행원 없이 소렌토로 향하였고 두 사람은 인적이 없는 곳으로만 이동하면서 하루에 한차례씩 대련을 하였다.
“음…….”
소렌토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몬 산에서 잿더미로 변해 있는 소렌토의 모습을 바라보며 알마리온과 리처드의 표정은 한없이 굳어졌다.
두 사람 모두 소렌토를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잿더미만 보아도 능히 과거의 소렌토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할 수 있었고, 그런 거대도시가 이처럼 잿더미로 변했다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
“미안하군.”
“형님이 사과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괜히 미안해지네.”
포넬의 왕자인 리처드였기에 포넬과의 전쟁으로 인해 이렇게 로엔의 도시들이 폐허가 되고 또한 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끌려가고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이 미안해진 것이다.
“원 형님도 참……. 그보다는 이제 그만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조만간 날이 어두워질 것 같습니다.”
“그러지.”
완전하게 파괴된 왕도 소렌토의 모습에 착잡해진 두 사람은 천천히 말을 몰아 산을 내려갔다.
“잠시 멈추십시오! 어디서 오신 어느 분인지 신분을 밝혀 주십시오!”
물어물어 행궁인 도르첸 공작가의 저택을 찾아온 두 사람을 제지하는 근위군 기사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에 의해 제지당했다.
“제1의용군의 기사 리처드 레오폴트요. 그리고 이분은 군단장님이시자, 혼테르의 로드이신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남작님이시오.”
자신이 스스로를 소개하려던 알마리온을 제지하고 리처드가 자신과 알마리온을 소개하였다. 수행 기사의 신분이었기에 그의 이러한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다.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남작님을 뵈옵니다. 잠시 이곳에 계시면 병사로 하여금 묵으실 숙소로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한데 수행 인원은 없으십니까?”
“우리 둘뿐이오. 전선의 상황이 그다지 여유가 있지 않아서 말이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겠소.”
얼마 후, 근위군 병사 복장을 한 병사가 두 사람을 안내하였다.
한데 이들 두 사람이 배정된 방에 도착하자마자 누군가 이들을 찾아왔다.
똑똑.
“들어오시오.”
“남작님, 손님이…….”
시종이 미처 손님이 왔다는 말도 다 끝내기 전에 그를 밀치다시피 하고 들어온 이는 바로 레드로였다.
“하하! 알! 그간 잘 지냈나? 자네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려왔지!”
“하하하! 레드, 그간 잘 지냈나?”
알마리온을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레드로였다. 이틀 후면 제국군을 포함한 전군 지휘관 회의와 연회가 시작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알마리온이 도착하지 않아 이제나저제나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도착했다는 말에 이처럼 곧바로 달려온 것이다.
“자네 아주 대단한 공들을 세웠더군?”
“훗! 그러는 자네는 어떻고? 롬 강 도하 때와 소렌토 수복에 자네가 앞장서서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고 하던데?”
“음? 한데 얼굴은 왜 그래? 어떤 놈이 감히 내 친구 얼굴에 이런 짓을 해 놓은 것이야?”
“흠! 흠!”
레드로의 말에 리처드가 헛기침을 하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누구……?”
“후훗! 저분이 바로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드신 분이시네. 인사드리게. 내가 얼마 전부터 형님으로 모시고 있는 리처드 레오폴트라는 분이시네. 지금은 내 제1의용군의 객원 기사로 계시는 분이시네. 형님, 이쪽은 제 친구인 6군단 부군단장인 레드로 폰 이그나티우스 남작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우리 제1의용군이 주둔하고 있는 조른의 영주가 된 친구입니다.”
“흠! 흠! 반갑소. 조금 전 그대가 말한 그놈이 바로 이놈이오.”
“하하, 소개받은 레드로 폰 이그나티우스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형님.”
이놈 그놈 찾는 리처드나, 오늘 처음 보면서 대놓고 형님이라며 넉살을 떠는 두 사람을 보면서 알마리온은 이들 두 사람의 성격이 참으로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하하.”
“하하.”
‘흣! 때로는 이런 성격이 참 부럽구나.’
단지 인사만 하였을 뿐인데도 벌써부터 마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처럼 서로를 편하게 대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저 부럽기만 한 알마리온이었다.
그렇게 이들 세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거의 지새웠다.
“모두 자리에 앉게.”
1왕자인 블리스 폰 로엔과 2왕자인 막스밀리언 폰 로엔 그리고 도르첸 공작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선 메르타니온이 자리에 앉자 모두 정해진 자리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폐하.”
국왕인 메르타니온이 자신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 조찬을 함께하자며 부른 자들의 면면은 숫자는 많지 않아도 그 위용이 대단했다.
통칭 제2군의 사령관이자 부원수이기도 한 로이드 폰 나르담 후작, 왕국 해군 사령관 아몬 폰 폰티악 후작, 6군단장으로 얼마 전 승작한 맬버트 폰 갈리 백작, 마찬가지로 얼마 전 승작한 25군단장 로뎀 폰 로엔달 백작, 로엔의 동북 지역의 게르혼족들에게는 전설 속의 맹수인 샤벨 타이거라는 별명을 불리고 있는 11군단장인 아델리오 폰 윈스톰 자작, 그리고 6군단 부군단장인 레드로와 제1의용군 군단장인 알마리온이었다.
비록 숫자는 채 열 손가락도 다 채우지 못할 정도이지만 이들은 포른과의 전쟁에서 가장 큰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전쟁의 영웅들이었다.
메르타니온은 이들의 대단한 활약 덕분에 최근 군에서의 입지를 빠르게, 그리고 확실하게 굳혀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면 마지막으로 혼테르 남작은 우리 군이 어떻게 해야 보다 효과적으로 적을 상대할 수 있다고 보는가?”
앞서 여러 사람들에게 군이 보다 효과적으로 이번 전쟁에서 대처하기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는 것을 물은 메르타니온은 마지막 순서로 알마리온에게 물었다.
“앞서 여러분이 워낙 좋은 말을 많이 하여서 소관은 별다른 것은 말씀드릴 것이 없사옵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아국의 군 또한 군단 중심으로 개별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것보다는 포넬의 경우처럼 집단군으로 무리 지어 일관되게 활동한다면 적은 병력이나마 보다 효율적으로 적을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사옵니다.”
로엔의 군은 통칭 제2군에 속한 6개 군단과 해군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각 영지의 영지병들로 구성된다.
평시에는 이들 각 영지병들은 각각의 영지의 안전을 지키다가 지금과 같은 전란이 발생하게 되면 몇 개의 영지가 병력을 합쳐 하나의 군단을 형성하고 그중 가장 작위가 높은 자가 군단장 자리에 앉게 된다.
이런 식이다 보니 많은 문제를 자체적으로 안고 있는 로엔의 군이었다.
우선 반정을 제외한 전란이 거의 없었던 때문에 각 영지는 규정된 수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단 한 곳도 없었다.
그 이유는 당연히 한 명의 병사를 육성하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이 많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는 전란 초반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던 한 원인이기도 하였는데, 적을 막고 싶어도 막을 병력이 없었던 것이다.
하나 이러한 형태의 군 조직은 다른 대부분의 왕국들도 그러한 것이기에 특별한 문제가 있다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다른 이들도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던 것이, 이러한 군 조직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한데 알마리온이 처음으로 이러한 문제를 거론한 것이다.
리처드가 그와 함께하기 시작한 이후 알마리온은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었는데, 특히 포넬의 군 조직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는데 그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바로 집단군 형태의 지휘였다.
이러한 집단군 형태는 보다 일관적인 군 지휘 체계를 갖추고 전력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혼테르 남작의 그 말은 포넬의 군 조직을 그대로 답습하자는 것인가?”
나르담 후작이 썩 마음에 내켜 하지 않는 듯이 반문하였다. 하긴 당장 전란을 일으킨 주범인 적의 군 체계를 모방하자는 말에 거부감이 들 만도 하였다.
“예. 그렇습니다, 나르담 후작님. 비록 적이긴 하지만 포넬은 잦은 내란으로 인해 군에 있어서는 아국보다 보다 체계화된 군 조직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소관의 생각입니다.”
“혼테르 남작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폐하.”
나르담 후작이 다시 반문하려는 듯 나서려 하자 2왕자인 막스밀리언이 먼저 끼어들었다.
“흠…….”
“따지고 본다면 나르담 후작님의 지휘하에 있는 제2군도 혼테르 남작이 말한 집단군 형태가 아닙니까?”
따지고 본다면 아주 느슨한 형태이긴 해도 제2군에 속한 6개 군단은 부원수인 나르담 후작이 지휘하는 하나의 집단군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건 다릅니다, 2왕자님.”
“어떻게 다르다는 것이지요?”
“제2군이 소관의 지휘하에 묶여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사권에 한해서입니다. 실질적인 지휘는 각 군단의 군단장에게 전적으로 위임된 상태입니다.”
나르담의 말처럼 제2군 소속 6개 군단의 군단장을 비롯한 군 지휘부에 대한 인사 권한은 가지고 있어도 그들을 직접 지휘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된 것도 국왕이 강력한 힘을 갖지 못하게 하겠다는 귀족들이 술수를 부려 그렇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에 말입니다, 나르담 후작님. 후작님에게 제2군 소속 6개 군단의 지휘권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건…….”
막스밀리언의 질문에 나르담은 쉽게 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도 한때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명목상이긴 하지만 자신 휘하의 6개 군단만 모두 자신이 직접 지휘할 수 있어도 북방의 게르혼족들을 상대로 보다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생각을 말이다.
하나 그런 그도 상황에 오랫동안 익숙해지다 보니 어느새 젊은 패기를 잃고 현실에 안주해 버린 것이다.
이후에 이들은 알마리온이 제안한 집단군 체제에 대하여 보다 심도 있는 난상 토론을 벌였다.
“모두의 생각은 잘 들었소. 경들이 이렇듯 왕국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참으로 든든하오.”
생각보다 너무 길어진 조찬은 이미 오찬 시간이 가까워질 때까지 계속되고 있었기에 이쯤해서 결론을 내고 마무리를 지으려는 메르타니온이 나섰다.
“경들의 충심 어린 조언들은 참으로 잘 들었소. 그럼 오늘 조찬 모임은 이만 줄이도록 하겠소. 왕세자와 공작과 후작은 나와 함께 가도록 하십시다. 그럼 이만 일어들 나십시다.”
“예, 폐하.”
메르타니온과 도르첸, 나르담이 식당을 나가자 폰티악이 알마리온과 레드로에게 다가왔다.
“하하, 이렇게 두 젊은 영웅들을 보게 되어 반갑네.”
조찬이 시작되기 직전에 왕궁에 도착한 때문에 미처 인사를 나눌 틈이 없었다가 조찬이 끝나자 이렇게 알마리온과 레드로에게 먼저 다가와 인사를 나눈 것이다.
한데 적군인 포넬에서조차 존경의 대상이 되어 버린 폰티악 후작의 모습은 확실히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160센티미터가 조금 넘을까 말까 한 조그맣고 깡마른 체구에 처진 눈매는 적군에게서까지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칭송과 함께 존경을 받고 있는 대영웅이라기보다는 글 선생이 더욱 어울려 보이는 그러한 외모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남작입니다.”
적당한 미사여구를 섞어 폰티악을 치켜세운 레드로의 인사와는 달리 알마리온은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하였다.
“하하, 내 그대들 두 사람을 꽤나 만나 보고 싶었다네. 자네들 같은 젊은 영웅들이 이러한 때에 등장한 것이 왕국을 위해, 그리고 왕실과 폐하를 위해 크나큰 행운이네.”
“과찬이십니다, 후작 각하.”
“아냐, 아냐. 자!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아니 낮부터 술을 마시긴 좀 그렇고…… 그렇다고 차는 영 그렇고……. 하면 어떤가? 오늘 저녁때 내 두 사람을 초대할 테니 올 텐가?”
“하하, 초대해 주시면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후작 각하.”
“소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하, 좋아! 좋아! 자네들 두 사람도 내 초대할 것이니 오도록 하게. 오랜만에 술이라도 같이하세. 어떤가?”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후작 각하.”
로엔달과 갈리 또한 기꺼이 폰티악의 초대에 응하였다.
하나 이러한 폰티악의 초대는 결국 무산되었다. 알마리온이 내놓은 의견을 내일 있을 전군 지휘관 회의에 상정하기로 마음먹은 메르타니온 국왕이 다시 한 번 조찬에 참석했던 자들과 함께 밤이 깊은 시각까지 논의를 하였기 때문이다.
조금은 허무했다. 집단군 형태로 군 지휘 체계를 개혁하려고 밤을 새우다시피 하여 논의하였던 일은 전군 지휘관 회의에서 너무나도 간단하게 통과되었다.
실상 집단군 형태는 군의 대부분 요직을 장악하고 있는 귀족 파벌 측에도 결코 나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금까지 각 군단별로 움직이던 지휘 체계가 집단군 형태로 바뀌면서 그 후속 조치에 대해서는 조만간 발표하기로 결정된 것을 제외하고는 제국군과 로엔군 지휘관들이 참석한 지휘관 회의는 사실 하나 마나 한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그나마 거둘 수 있었던 성과는 제국군 지휘관들과 로엔군 지휘관들이 서로 안면을 익혔다는 것 정도?
회의가 종료되고 곧바로 이어진 연회에서는 이번에 공을 세운 공훈자들에 대한 국왕의 치하가 있었고, 국왕의 치하가 끝나자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었다.
국왕과 왕비 그리고 두 명의 왕자와 두 명의 공주까지 참석을 한 연회는 전란 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였다.
연회가 시작되자 폰티악 후작과 로엔달 그리고 갈리를 비롯한 국왕파에 속하는 귀족들 틈에 알마리온과 레드로 등도 섞여 있었다.
그러다 이들이 따로 떨어져 나온 것은, 2왕자인 막스밀리언이 두 명의 공주를 대동한 채 나타나면서였다.
“우리도 좀 낄 수 있겠소?”
“2왕자 전하와 두 분 공주님을 뵈옵니다.”
세 명의 왕실 가족의 등장으로 조금 전까지는 전쟁과 지휘관으로서의 자질, 검술 등등 주로 군에 관계된 것들이 주된 주제였으나 두 명의 공주로 인해 더 이상 그러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없게 되자 가장 연장자인 폰티악 후작이 슬쩍 일행을 나누었다.
“2왕자 전하와 두 분 공주 전하께서 오셨으니 이제 우리 나이 든 사람들은 빠지는 것이 어떻겠소? 혹시 누가 알겠소? 나중에 이날의 인연이 더욱 발전하여 좋은 소식이 전해질지 말이오. 안 그렇소?”
“하하하.”
“하하.”
장난기 가득한 폰티악의 농담에 농담의 대상이 된 네 명의 젊은 남녀를 제외한 모여 있던 모두가 큰 웃음을 지었다.
결국 막스밀리언 2왕자와 언니인 엘리자베스와 왕실의 막내인 카산느 공주, 그리고 알마리온과 레드로, 리처드와 레드로의 기사인 알렉만이 따로 자리를 함께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두 분 공주님.”
알마리온과 레드로 그리고 1공주인 엘리자베스와 2공주인 카산느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알마리온과 레드로가 같은 날 남작의 작위를 수여받던 날 두 사람의 어깨에 망토를 입혀 준 인연이 있었다.
당시 언니인 엘리자베스는 레드로에게, 그리고 동생인 카산느는 알마리온에게 망토를 입혀 줬었다.
“예. 두 분 남작님께서도……. 어머? 혼테르 남작님은 얼굴이 왜……?”
“아! 약간의 부상이 있었습니다, 공주님.”
리처드와의 대결에서 오른쪽 뺨에 제법 큰 흉터가 생긴 알마리온의 모습을 보고는 엘리자베스 공주가 걱정하며 물었다.
한데 그녀의 다음 행동으로 인해 모두가 난처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어머. 얘, 어떻게 하니? 네가 사모하는 혼테르 남작님의 저 아름다운 얼굴에 흉터가 생겼으니 말이야.”
“어, 언니…….”
“……!”
“흠! 흠!”
“큭큭! 하하하! 하하하하!”
엘리자베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무안해진 알마리온과 카산느가 얼굴이 새빨개져 당황하는 동안 막스밀리언과 레드로 그리고 리처드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고, 웃음을 참기는 하였지만 알렉 또한 터지려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만약 이때 이들에게 다가온 다른 이들이 없었다면 카산느는 울먹이며 자리를 벗어났을 것이 분명했을 것이다.
“분위기가 참으로 좋습니다, 2왕자 전하.”
“음? 어서 오시오, 프리모 백작 그리고 더글러스 자작. 다른 분들도 오랜만에 뵙는군요.”
귀족 파벌의 중심인물인 프리모 공작의 장자와 더글러스 후작의 장자인 하알란, 이밖에도 다른 귀족 가문들의 후계자들과 여식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들었다.
한데 이들 일행 중에는 한때 레드로의 연인이었다가 이제는 하알란의 아내가 되어 버린 베라 폰 오드란, 아니 베라 폰 더글러스 자작 부인이 함께하고 있었고, 그녀의 등장으로 인해 그동안 웃는 표정을 잃지 않았던 레드로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변하였다.
“훗! 오랜만이구나. 그렇지 않으냐?”
눈에는 가득 경멸의 눈빛을 담고, 입가에 잔뜩 비틀린 비웃음을 짓고 있는 하알란이 짐짓 다정한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것인지 팔짱을 끼고 있는 아내 베라의 손을 다정스럽게 잡으며 레드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저도 모르게 손을 빼려는 베라의 행동을 막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로드 더글러스. 그리고 레이디…… 더글러스.”
“죄송해요. 전 피곤해서 이만 돌아가 봐야겠어요.”
레드로와는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던 베라가 몸이 불편하다며 이내 자리를 뜨려 하였다.
“이런, 이런. 마침 깜빡하였군. 아내가 임신을 해서 말이야. 넌 축하하지 않을 생각이냐? 어쨌든 네 형수님이신데 말이다. 후후후.”
베라의 임신 소식을 말하는 하알란의 행동에 베라는 물론 레드로 또한 크게 당황하였다.
“여, 여보…….”
“축하드립니다, 더글러스 자작님 그리고 레이디 더글러스.”
하알란의 비뚤어진 행동과 당황해하는 베라의 모습을 어금니를 깨물며 참아 내고 있는 레드로를 대신하여 알마리온이 먼저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곁에 있던 다른 사람들 또한 모두 하알란과 베라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분위기가 조금은 바뀌었다.
여기에 확실하게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계기를 리처드가 제공해 주었다.
“마침 음악이 시작되는군요. 아름다우신 레이디, 감히 저의 춤 신청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포넬의 왕자로서 왕실에서 개최하는 연회에서 사내다운 강렬한 인상과 세련된 매너 그리고 뛰어난 춤 실력으로 사교계의 기린아로 평가받던 리처드였다.
그가 명목상의 왕가의 혈통이 아닌 다른 평범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면 당연 뭇 귀족 가문의 여성들의 구애를 받느라 아마도 다른 일은 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예? 예…….”
리처드의 사내다운 외모에 처음부터 힐끗힐끗 눈길을 주던 사뮤엘 후작가의 여식이 조신한 체하며 그의 춤 신청을 기꺼이 받아들여 함께 무대로 나갔다.
“하하, 나도 오랜만에 열린 연회이니 빠질 수가 없겠군. 레이디, 부디 제게 레이디와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예, 왕자님.”
“아! 그리고 거기 두 사람, 지금 이 시간부터 내 두 여동생을 연회가 끝날 때까지 책임지도록 하시오. 엘리자베스도 그리고 카산느도 이번이 처음으로 참석하는 연회이니 두 남작이 잘해야 할 것이오. 알겠소?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오. 알겠소?”
엘리자베스와 카산느에게 살짝 윙크를 날린 막스밀리언도 무대로 나가 버리자 잠시 머뭇거리던 레드로가 엘리자베스에게 다가가더니 정중하게 그녀에게 춤 신청을 하였다.
“기꺼이 응하겠어요, 이그나티우스 남작님.”
그렇게 한 사람씩 자리를 벗어나자 혼자 남게 된 알마리온은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춤은 배워 본 적도, 춰 본 적도 없었기에 춤을 신청하기에도 난감했다.
혼자 남게 된 카산느 또한 기대감으로 잔뜩 긴장한 채 알마리온의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그가 좀처럼 다른 사람들처럼 춤 신청을 해 오지 않자 내심 그가 자신을 내켜 하지 않는 것이라는 오해로 이내 슬픈 표정이 되어 몸을 돌리려 하였다.
“공주님, 죄송하지만 소관은 춤을 출 줄 모릅니다. 대신 실내가 좀 답답해서 그런데 산책은 어떠십니까?”
“훗! 하긴 노예 출신이니 귀족들의 춤을 알 리가 없겠지. 안 그렇습니까? 후후후!”
“하하하, 그건 그러네요.”
“호호호!”
레드로를 괴롭히던 하알란이 그가 엘리자베스와 춤을 춘다는 명분으로 사라지자 이번에는 남아 있던 알마리온에게 시비를 걸었다.
하나 알마리온은 그런 하알란과 그의 비틀린 농담에 웃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빙긋 웃는 모습으로 카산느를 바라보았다.
“조, 좋아요. 저도 여기가 너무 답답하네요, 혼테르 남작님.”
“그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더 이상 알마리온이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기 싫은 카산느가 동행을 허락을 하자 알마리온은 그녀에게 팔을 내밀어 팔짱을 끼게 하였다. 그리고 막 연회장을 빠져나가려 할 때였다.
“훗! 노예 놈 주제에 얼굴이 반반하니 공주께서 혹하셨나 보군. 후후후!”
하알란의 말에 순간 주변 모두가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알마리온을 모욕하는 것이야 자신들의 배경만으로도 충분히 무마시킬 수 있는 일이었지만 왕실 가족을 상대로 모욕적인 말을 한 것만큼은 아무리 자신들의 배경이 왕국을 좌지우지하는 최고의 것이라 해도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기에 알마리온만을 모욕할 때와는 달리 서로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 쳐 하알란과 거리를 두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나, 남작님…….”
카산느는 알마리온이 그냥 모르는 체하고 나가 주기를 바랐다. 혹시라도 그에게 부당한 일이 생길 것이 걱정이 되어서였다.
“걱정 마십시오, 공주님.”
팔짱을 끼고 있던 공주의 손을 잡아 팔짱을 풀게 하고는 하알란 앞으로 걸어간 알마리온은 차분한, 하지만 단호한 어투로 말하였다.
“공주님을 모욕하는 발언을 하신 것을 직접 사죄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결투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뭐라고! 노예 놈인 주제에 어디서 감히!”
공주에게 사과하거나 결투를 받아들이라는 알마리온의 말에 하알란은 오히려 더욱 화를 내며 막나가는 행동을 하였다.
“이보게, 더글러스 자작! 이번 일은 자네가 지나쳤네! 어서 공주님께 사죄드리도록 하게!”
곁에 있던 아놀드가 이 이상 일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나섰지만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난 공주님을 모욕한 것이 아니라 이 비천한 노예 놈이 제 주제도 모른 채 행동하는 것을 나무랐을 뿐입니다!”
여전히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으면서, 자신도 아차 싶었는지, 후에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한 카산느 공주를 모욕한 것만큼은 살짝 회피하는 하알란이었다.
그런 남자답지 못한 행동에 그와 함께하였던 다른 이들도 살짝 눈을 찌푸렸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죠. 공주님께…….”
“무슨 일들인가? 어째 분위기가 조금 어색한 것 같은데?”
만약 이때 폰티악 후작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날의 일은 하나의 작은 해프닝이 아닌 두 사람의 결투로 이어졌을 것이다.
“아! 폰티악 후작 각하를 뵈옵니다.”
“뭔가? 무슨 일들이 있었는가?”
폰티악이 의문스럽다며 주변을 둘러보며 묻자 아놀드가 급히 사태를 무마시키려 하였다.
“아, 아닙니다, 후작 각하. 다들 그렇지 않소? 하하하.”
“그, 그렇습니다, 후작 각하.”
“그럼 저희는 이만……. 나중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후작 각하.”
“그러게.”
몇몇 이들은 폰티악이 나타나자 이때다 싶어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고 그들 중에는 문제를 일으킨 하알란 또한 끼어 있었다.
그렇게 문제를 일으킨 일행이 모두 떠나자 폰티악이 알마리온에게 조용히 말하였다.
“자네…… 참게나. 저들은 제 부모 잘난 것만 믿는 멍청한 것들이네. 그런 자들을 상대로 자네의 이름을 더럽힐 필요가 없다네.”
어지간하면 남들을 이런 식으로 평가하지 않는 폰티악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모처럼 마음에 든 젊은 알마리온이 혹시라도 이 일을 계기로 후에 두고두고 시달리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도 더글러스 후작의 장자인 하알란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심한 것인지 들어서, 또한 보아서 알고 있었다.
“들으신 것입니까?”
“그렇네. 마침 자네에게 작별 인사라도 할까 해서 오다 들었다네. 같은 귀족으로서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저런 아이는 상대할 가치조차 없네. 그런 일에 괜히 자네의 손을 더럽힐 이유가 없는 일이네.”
“그래요, 남작님. 전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 화를 푸세요, 예?”
“두 분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한데 벌써 떠나시는 것입니까?”
“그렇네. 아무래도 자릴 오래 비울 수가 없어서 말이야. 뭐, 인사드릴 분들에게 모두 인사도 드렸으니 이제 여기 더 있을 이유가 없지.”
“그러셨군요. 하면 다음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후작 각하의 무운을 빌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고맙네. 나 또한 자네의 무운을 빌도록 하지. 그리고 기대하겠네. 혹시 아는가? 자네 덕분에 내가 이번에 받게 된 영지를 되찾을지 말이야. 안 그런가? 하하하!”
이번에 쿠덴베르를 영지로 받았는데,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로엔군은 바로 알마리온의 제1의용군이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기회가 닿는다면 꼭 그러겠습니다, 후작 각하.”
“하하. 기대하겠네, 그럼. 그리고 소관은 이만 임지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공주 전하.”
“예. 건강하시고, 저 또한 폰티악 후작님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주 전하. 하면 이만.”
그렇게 폰티악이 연회장을 떠나가자 알마리온은 다시금 카산느에게 산책을 권했고 카산느 또한 기꺼이 그에 응했다.
“잘 참으셨어요.”
밖으로 나오자 카산느가 먼저 알마리온을 위로하였다.
“공주님을 보호해 드리지 못하여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전 정말 괜찮아요. 그자에 대한 소문은 좋지 않은 소문이 워낙 많아서 다들 그를 쉬쉬하고 있답니다.”
“그렇군요.”
“예.”
산책을 하면서 잠시 하알란의 일로 대화를 나누긴 하였지만 이후에는 이렇다 할 대화가 없었다.
여자를 처음 이렇게 가까이해 본 알마리온이었고, 카산느 또한 처음 알마리온을 본 그날부터 방심이 흔들린 때문에 단지 그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얼굴이 붉어지고 숨이 가빠지니 대화가 제대로 이뤄질 리가 없었다.
비록 대화는 없었지만 연모하는 알마리온과 함께 산책을 하면서 그를 힐끗힐끗 곁눈질로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마냥 행복한 카산느였다.
“날씨가 쌀쌀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만 들어가심이 어떻겠습니까?”
“예? 예…….”
그럴 수만 있다면 이 밤이 다 새도록 걷고 싶은 카산느였지만 날씨가 쌀쌀해진다며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자는 말에 그만 실망하여 힘없이 대답하며 그를 따라 연회장으로 향했다.
“저…….”
“예, 공주님.”
막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걸음을 멈춘 카산느가 알마리온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이제 곧 남작님께서도 전장으로 돌아가시겠죠?”
“예. 내일 오전에 몇몇 분들께 인사를 드린 후 오후에 출발할 생각입니다.”
“예. 그럼…….”
“…….”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머뭇거리는 카산느는 끝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공주님, 여기 계셨군요.”
“키라 부인?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요?”
키라 남작 부인은 카산느 공주의 하녀장인 여인이었다.
“예. 왕비님께서 공주님을 찾으시옵니다.”
“어머님께서요?”
“예, 공주님.”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요?”
“그것이…….”
키라는 잠시 알마리온의 눈치를 보더니 이내 카산느에게 왕비가 왜 공주를 찾는 것인지를 말해 주었다.
“왕비님께서 공주님께 소개할 분이 있으시다며 속히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소개요?”
“예, 공주님. 왕비님께서 찾으신 지 꽤 되셨으니 속히 가시지요.”
“…….”
카산느가 알마리온의 눈치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비님께서 찾으신다면 속히 가 보셔야 할 것입니다.”
“예? 예……. 하면 소녀는 이만.”
“예, 공주님.”
가기 싫은 것을 억지로 끌려가면서 뒤를 돌아다본 카산느였다. 하나 그곳에는 이미 알마리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혼테르 남작님…….’
다음 날 알마리온은 밤새 무엇을 하다 왔는지 새벽이 다 되어서야 들어온 리처드와 함께 나르담 후작 등에게 복귀를 위해 떠난다는 인사를 하러 다니기 시작하였다.
“아, 오늘 돌아간다고?”
“예, 후작 각하.”
마침 나르담의 집무실에는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로엔달과 갈리가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알겠네. 하긴 자네가 맡고 있는 제1의용군도 당장 해야 할 일이 많겠지. 그럼 그렇게 하게나.”
“예, 후작 각하.”
“앞으로도 자네의 눈부신 활약 기대하겠네, 혼테르 남작.”
“감사합니다. 갈리 백작님의 무운을 빌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고맙네.”
“…….”
상투적인 인사말이라 하더라도 나름 인사말을 건네준 나르담과 갈리에 비해 로엔달은 그저 눈길 한번 준 것만이 전부였다.
“로엔달 백작님께서도 건승하십시오. 그럼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
다음으로 찾아간 것은 쿤테르였다.
“오랜만이군, 혼테르 남작.”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체임버스 남작님. 어제는 연회에 참석지 않으셔서 뵐 수가 없었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 말이네.”
마법 아이템 제조에 꼭 필요한 단단한머리, 아니 로한 폰 메이슨 남작을 제국으로 보낸 이후 메르타니온의 명령으로 마법 아이템 제작을 반드시 성공시키라는 명령을 받은 쿤테르는 연구실에 처박힌 채, 마법 아이템 제작을 위한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제국과의 거래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알마리온도 들은 상태였다.
“후! 그나저나 자네 마법 아이템 좀 몇 개 더 구해 줄 수 있겠나?”
“마법 아이템을 말입니까?”
“그렇네. 당시 남작이 획득했던 것들과 메이슨 남작이 만든 것들을 소렌토 수복 때에 대부분 사용했고, 또 제국에서 나머지 것들을 모두 가져가는 바람에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없다네.”
그래도 견본품이 있어 그것을 보고 답습해 나가면 되겠지만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어 무척이나 고생을 하고 있는 쿤테르였다.
“구할 수 있으면 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꼭 부탁하겠네.”
“예. 가급적이면 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도 그의 품속에는 수십 개의 마법 아이템이 아예 책으로 묶여 있었지만 그것을 내주지 않았다.
“그럼 전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남작님.”
“꼭 좀 부탁하겠네. 내 그 대가는 무엇으로든 갚겠네.”
“예.”
쿤테르를 만난 후 알마리온이 마지막으로 찾은 사람은 레드로였다.
“내 배웅하도록 하겠네.”
“하하, 그것 좋지.”
알마리온과 리처드 그리고 레드로는 말을 천천히 몰며 어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들었네.”
“무엇을 말인가?”
“그자가 자네와 공주님께 무례한 행동을 하였다고 말이네.”
“훗! 참 무섭군. 어제 그 일이 벌써 소문으로 돌다니 말이야.”
“왕궁이란 그런 곳이라네. 아무리 은밀한 일이라도 자고 일어나면 모두가 알게 되는.”
“그런가?”
“훗! 그렇다네. 어쨌든 자네에게도 그리고 공주님께도 미안하네.”
“그게 어디 친구인 자네 잘못인가? 그보다 그자, 영혼이 병들어 있더군.”
어젯밤 연회장에서 하알란을 마주하였을 때 알마리온은 그의 영혼이 그 누구도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병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치 환영처럼 문득문득 떠오르는 장면에 따르면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 모두가 파멸의 길을 걷게 되리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알마리온과 레드로는 모르고 있었지만 어젯밤 연회장에 있었던 일이 소문이 되어 급격히 퍼지면서 이러한 사실을 안 더글러스 후작은 하알란의 일을 사죄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메르타니온 국왕과 헬레나 왕비 그리고 당사자인 카산느 공주를 차례로 찾아가 사죄의 말과 함께 이를 문제 삼지 않는 조건으로 많은 예물을 바쳤다.
“가능하면 그를 멀리하게.”
“그러지.”
이유야 어쨌든, 그리고 상황이야 어떻게 변했든 형에 대해 좋지 않은 소리와 이런 경고를 듣는 것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젠 됐네. 자네도 할 일이 많을 텐데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게.”
“그러지. 그럼 잘 가게. 그리고 형님도 안녕히 가십시오. 아!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하하, 그래. 그럼 또 보세.”
그렇게 레드로의 배웅을 받은 두 사람은 올 때처럼 인적이 없는 곳을 찾아 대결을 하며 부대로 복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