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미안하다.”
“쳇! 됐소! 우리 같은 것이 뭘 기대하겠소! 안 그러냐?”
“축하합니다, 대장. 이제 백인대장이 되셨네요.”
타론 성을 점령한 일로 인해 한센은 그 공을 인정받아 결국 십인대 대장에서 백인대 대장으로 승진을 하였다.
기실 그동안 세웠던 공만으로도 충분히 백인대 대장이 될 수 있었던 그이지만, 가진 것도 연줄도 없는, 그렇다고 해서 남에게 아부를 하는 성격도 아니었기에, 공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였다가 이번에 너무나도 뚜렷한 공을 세운 때문에 승진이 된 것이다.
반면 알마리온과 요들은 그 어떠한 포상도 받지 못하였는데, 이미 이번 전쟁이 끝나게 되면 면천을 시켜 주겠다는 확실한 혜택이 주어진 이상 아무리 뚜렷한 공을 세운다 하더라도 더 이상의 포상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그래, 고맙다. 그리고 너무 그렇게 툴툴거리지 마라. 내 너희에게 줄 것은 따로 좀 챙겼으니 말이다.”
“하하! 그럼 그렇지! 우리가 괜히 대장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니까!”
따로 준비한 것이 있다는 말에 한센의 곁에 찰싹 달라붙는 요들의 행동에 한센도, 알마리온도 그저 피식 웃음 지었다.
“훗! 이거 받아라.”
재촉하는 요들의 행동에 미소를 짓던 한센이 새로 지급받은 군복의 주머니에서 가죽 주머니 2개를 꺼내 알마리온과 요들에게 하나씩 던져 주었다.
“뭡니까?”
“상금으로 받은 거다. 공평하게 세 몫으로 나눴다.”
“애계? 달랑 금화 하나?”
잔뜩 기대를 했건만 들어 있는 것이라고는 달랑 금화 한 닢이라는 것을 알게 된 요들이 툴툴거렸다.
“포상금으로 금화 3개를 주더라. 그래서 똑같이 나눴다.”
“쳇! 쪼잔한 놈들! 어쨌든 고마워요, 대장!”
달랑 금화 한 닢뿐이었지만 어쨌든 이들 세 사람에게는 엄청나게 큰돈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감사합니다, 대장님.”
“아! 그리고 곧 신병들이 온다고 하더라. 해서 말인데, 너희가 날 도와줘야겠다.”
“돕다니 뭘 말이오?”
“미리 좀 굴려 놔야 그나마라도 쓸 만하게 만들 것 아니냐.”
“아! 난 또 뭐라고. 알겠수. 내 확실히 굴려 줘서 쓸 만한 놈들로 만들어 주리다!”
“너나 잘하면 좋겠다, 이 녀석아.”
“다들 나만큼만 잘해 보라고 하시오. 쳇!”
포넬 왕국과의 전쟁이 점차 길어져 알마리온이 군에 입대한 지도 어느덧 1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그동안 밀고 밀리는 치열함은 더해 갔지만, 쌍방 모두 전쟁을 주도할 결정적인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로엔 왕국은 그동안 몇 차례 좋은 기회가 있었다. 아몬 폰 폰티악 백작이라는 한 걸출한 해군 제독이 포넬 해군을 상대로 몇 차례 대승을 거둠으로써 포넬군은 병력과 물자의 지원에 차질이 빚어졌고, 이를 틈타 전쟁 초반 단 한 달 만에 빼앗긴 왕도 소렌토를 1년 만에 되찾을 기회를 잡기도 하였다.
하나 폰티악 백작의 승승장구를 질투한 정적들에 의해 백작이 탄핵당하면서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고 투옥되자 상황은 급변했다. 다시금 바닷길이 열리면서 상황은 원상태로 돌아간 것도 모자라 포넬 측이 마법 아이템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자 이에 대응이 어려운 로엔은 모든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에 당황한 메르타니온 국왕은 귀족 파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감금당해 있던 폰티악 백작을 복직시켰다.
하지만 이미 거의 소멸해 버린 해군으로 한 번에 수백 척씩 움직이는 포넬 왕국 해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아무리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폰티악 백작이라 하더라도 당장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알마리온이 속해 있던 제12군단 또한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전임 12군단장이었던 칼 폰 몬테른 자작의 경우에는 이미 4개월 전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를 하였고 현재는 그 후임으로 로뎀 폰 로엔달 자작이 군단장직을 맡고 있었다.
또한 지난 타론 성 전투에서 괴멸된 부대를 각처에서 끌어들인 노예 병사들로 충원시킨 후에 다시금 전장에 내몰았다.
“흩어지지 마라! 반드시 짝을 이루어 함께 움직인다. 알았나!”
“예!”
잔뜩 겁에 질려 있는 병사들을 다독거리며 공격 신호가 내려지기를 기다리는 알마리온이었다.
“좋아! 그럼 진군 신호가 떨어지면 모두 발을 맞춰 함께 움직인다! 명심하라! 내가 명령하기 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대열을 이탈하지 마라! 알겠나!”
“예!”
아직 채 1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그동안의 경험은 어리기만 하였던 알마리온을 노련한 병사로 만들어 놓았다.
마음을 다지고 또 다져 보았지만 막상 이렇게 적을 눈앞에 두게 되면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게다가 현재의 상황은 알마리온이 속해 있는 12군단에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평원 지역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전투의 승패가 분명해질 때까지 어느 쪽도 피할 수 없는, 오직 힘 대 힘이 맞부딪쳐 승패를 가르는 회전會戰이었다. 그렇다면 상대보다 병사의 수가 많거나, 무장이 잘되어 있거나, 훈련이 잘되어 있거나 하는 식으로 무엇 하나라도 상대보다 뛰어난 점을 가지지 않고서는 승리를 쟁취할 수 없는 전투가 바로 회전이었다.
이런 점에서 12군단은 포넬군에 비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상대는 오랜 내전을 겪으면서 정예화되어 있는 정규군단인 데 반해 이를 상대해야 할 12군단은 노예나 도망병들, 그리고 피난민들 중에서 창을 들 힘만 있다면 무조건 끌려온 자들로 구성된, 훈련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말 그대로 오합지졸들이었다.
무장 또한 적은 일반 병사들까지도 비록 가죽으로 만든 것이긴 하여도 아머를 착용하고 있었지만 12군단 병사들 중 제대로 된 방어구를 착용한 자들은 눈을 씻고 찾아보려 해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으며, 심지어는 창날을 만들 철이 부족하여 그저 나무 끝을 날카롭게 깎아 만든 목창 하나만을 달랑 들고 서 있는 병사들이 태반을 넘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앞서 이미 두 차례 벌어졌던 전투에서 12군단은 전체 병력의 절반 가까이를 잃었다.
이 정도라면 이미 퇴각을 결정하거나, 아니면 다른 지원군을 보내거나 하여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지휘부는 마치 이 자리에서 사생결단이라도 내려는 듯 퇴각을 명령하지도, 그렇다고 지원 병력을 보내지도 않았다.
“준비는?”
냉정한 눈빛으로 전면을 주시한 채, 메마른 목소리로 로엔달 자작이 부관에게 물었다.
“모두 마친 상태입니다.”
“진군 명령을 내리게.”
“예, 자작님. 진군 명령을 내린다!”
진군을 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진 한가운데 높게 서 있는 깃대에 진군을 알리는 깃발이 내걸렸고, 동시에 진군을 알리는 북소리가 대지 위에 울리기 시작했다.
둥! 둥! 둥! 둥! 둥!
척! 척! 척! 척! 척!
진군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자 도열해 있던 병사들이 발 맞춰 앞으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잠시 동안 병사들이 진군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로엔달 자작이 부관을 비롯한 군 지휘부에는 전혀 다른 명령을 내렸다.
“그럼 먼저 떠나도록 하게.”
로엔군을 지휘하는 원수부에서는 사전에 이들에게는 서로 상반되는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병사들에게는 절대 퇴각을 허락하지 않으며, 최후의 순간까지 적을 맞서 싸우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군단장을 비롯한 지휘부는 모두 살아서 귀환하라는,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명령이 이들 12군단에 내려져 있었다.
이에 따라 로엔달 자작은 오늘의 전투를 끝으로 더 이상 12군단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자신을 제외한 두세 명의 호위 기사들과 평민 출신 하급 군관들을 제외한 모든 주요 지휘관들에게 전투가 시작되면 곧바로 퇴각을 하라는 명령을 내려 놓은 상태였다.
“예, 군단장님.”
현재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롬 평야는 로엔 왕국 최대의 평야 지대이자 곡창지대였다. 이런 롬 평야 지대의 북쪽 끝에는 롬 평야 지대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롬 강이 위치해 있었는데, 이 롬 강이 로엔군 원수부가 설정한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롬 강 건너인 팬픽은 현재 임시로 왕국의 수도 역할을 하고 있는 곳으로 이곳마저 빼앗긴다면 로엔 왕국의 왕실은 더 이상 피난을 갈 곳도 남지 않게 되어 타국으로 망명을 하거나, 아니면 항복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쌍방 간에 반드시 빼앗고, 지켜야 할 요충이 되어 버린 롬 강이었기에 양쪽 모두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로엔의 경우 아직 북방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정예군단이 모두 남하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이들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고, 그 시간을 벌기 위해 투입된 군단이 바로 12군단이었다.
그렇게 뒤에 남아 있던 12군단 지휘부가 전장을 이탈할 때쯤 양측 부대가 한데 뒤엉켜 난전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떨어지지 마! 뭉쳐라! 뭉쳐야 살 수 있다!”
한센의 목소리가 아비규환의 혼란 속에서도 뚜렷하게 울려 퍼졌다.
“부하들을 통제하라! 절대 이탈하지 못하게 통제하라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한센이 지휘하는 백인대만이 유일하게 적을 상대로 제 몫을 다 하고 있을 뿐, 주변의 다른 백인대들은 이미 완전히 밀리고 있었다.
실상 한센이 지휘하는 백인대가 잘하고 있기보다는 곁에 있던 다른 백인대들이 적과 조우하자마자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면서 마치 한센이 지휘하는 백인대만 유난히 잘해 보인 것처럼 돌출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젠장! 알! 네가 전면을 맡아라! 요들! 칸! 너희는 왼쪽과 오른쪽을! 천천히 뒤로 물러난다!”
“예!”
“알았수!”
이미 다른 백인대들과는 제법 거리가 벌어진 상황이었다. 이 상태라면 설사 퇴각 명령이 내려진다 하더라도 전장을 이탈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전멸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한센은 필사적으로 병사들을 지휘하여 연방 뒤로 물러나고 있는 다른 백인대와 보조를 맞추려 하였다.
“대장! 더 이상 안 되겠소!”
“으악!”
“컥!”
다른 백인대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이들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 다른 백인대들은 이미 열 걸음, 아니 스무 걸음이나 뒤로 밀려 버린 상태였기에 도저히 균형을 맞출 수가 없었다.
결국 한센이 지휘하는 백인대는 적군이라는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외딴 섬처럼 완전히 고립되어 버렸다.
“간격을 좁혀! 퇴로를 열겠다! 알! 퇴로를 열어라! 여긴 내가 맡겠다.”
“예, 대장!”
‘나의 절친한 벗이여! 자유로운 바람이여! 그대의 절친한 벗이 그대를 부르나니 현신하라!’
-…….
‘실프! 내 검과 함께해 줘!’
-…….
정령 마법의 한 가지인 바람의 칼날이었다.
원래는 실프만으로 충분히 펼칠 수 있는 마법이었지만, 정령 마법이라는 것이 이미 오래전에 이 땅에서 사라진 이후, 제대로 된 정령 마법이 전해지지 않았기에 실프만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인 마법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알마리온은 경험을 통해 체득한 방법으로 바람의 칼날을 흉내 내고 있었다. 실상 이러한 바람의 칼날은 그가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공격적인 정령 마법이었다.
“이얍!”
“으악!”
퇴로를 열기 위해 작정을 하고 정령까지 소환하여 정령 마법을 펼치는 알마리온을 막을 만한 실력을 가진 적군은 없었다. 아니, 비단 정령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알마리온이 펼치는 실전적인 검술은 앞을 가로막는 적병을 쓰러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한센과 인연을 맺게 된 이후, 알마리온과 요들은 한센으로부터 로엔의 정규군이 배우는 검술과 창술을 배울 수 있었다. 이를테면 그를 살려 준 목숨값으로 검술과 창술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정규군이라면 누구나 배우는 검술과 창술이었으니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기보다는 지금과 같은 전장에서 가장 실용적으로 쓰일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동작들로 이루어진 검술과 창술이긴 하였지만 전투가 없거나, 작업이 없는 시간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하였고 또한 실전을 통해서 이를 활용하다 보니 어느덧 제법 위력적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여기에 우연하게 발견한 바람의 칼날이란 정령 마법까지 더해지니 알마리온이 사용하는 검술의 위력은 십수년을 이 검술을 익히고 사용해 온 한센조차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위력적인 검술이 되어 버렸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포넬군의 기사인 다니엘 핸드릭은 전장을 살펴보다 유난히 두드러지는 한 인물을 발견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핸드릭 기사님?”
곁에 있던 도노반이 무슨 일인가 싶어 물었다.
“저들은 노예 출신 병사들이 아니었나?”
적에 대해 아는 것도 중요한 전술이다. 특히 이처럼 직접적으로 전투를 벌여야 할 적이라면 더더욱 그러했기에 자신들이 상대하고 있는 로엔의 12군단이 어떤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는지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맞습니다. 저들이 노예 병사들인 것은 확실합니다. 한데 왜 그러십니까?”
“저길 보게. 자네 눈에는 저 움직임이 노예가 보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는가?”
핸드릭이 가리키는 곳을 살펴본 도노반도 확실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으음. 확실히 노예 출신 병사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저 병사가 사용하는 검술은 분명 로엔의 정규군에서 가르치는 검술인 것 같은데…….”
“그렇지? 내가 알기에도 저 검술은 분명 로엔의 정규군에서 교육받는 바로 그 검술이야. 한데 어떻게 저렇게 위력적일 수 있는 것이지? 솔직히 저 정도라면 자네와도 막상막하겠어.”
“흠! 흠! 말씀이 좀 지나치십니다, 핸드릭 기사님. 그래도 유저 중급인 소관을 저런 노예와 비교하신다는 것은…….”
이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도 알마리온은 거침없이 포넬의 병사들을 쓰러뜨리며 퇴로를 열어 나갔다.
“어리석은! 자네 눈에는 저 노예 병사의 검이 아군 병사들의 몸에 닿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아군 병사들이 당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면 저 노예 놈이 유저 최상급의 수준이라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검이 몸에 닿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살상을 할 수 있는 수준은 유저 최상급부터나 가능한 일이었다.
“글쎄. 저놈이 어떤 놈이든 이대로 더 이상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것 같군. 저놈으로 인해 아군 병사들의 피해가 너무 커. 이랴!”
“핸드릭 기사님! 그렇다고 그렇게 나가시면 위험하십니다!”
‘이런! 벌써!’
복부에서 전해지기 시작하는 따끔거리는 통증에 알마리온은 마나가 부족해지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큰일이다. 최대한 아낀다고 하면서 사용했거늘.’
자주 정령을 사용하다 보니 나름 요령이 생겨 이제는 제법 오랜 시간 정령을 소환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격전을 벌이다 보면 아무리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마나의 소모가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마나의 소모가 많아지게 되면서 그의 움직임이 둔화되자 그의 곁에서 적을 상대하던 전우들의 피해가 커졌다.
백인대 병력 중 이미 팔십여 명 정도가 쓰러졌고, 남아 있는 스무 명 정도도 이제는 한두 군데 이상 부상을 입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적들 사이에 포위된 상태 그대로였다.
“죽어!”
“큭!”
결국 마나가 거의 고갈되어 가고 체력 또한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하자, 알마리온 또한 몸에 상처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비록 달려드는 적병을 쓰러트리고 있긴 하였지만 자신의 몸에도 상처가 늘어나면서 침착하기만 하였던 그조차도 이제는 살아남겠다는 본능과 악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달려드는 적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한데 어느 순간이었다.
‘이건?’
마치 추운 겨울날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강한 기운이 느껴지자 적이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보았다.
“큭!”
순간 화끈한 느낌이 그의 옆구리에서 느껴지자 다시금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본 알마리온은 자신의 옆구리를 꿰뚫고 지나간 창과 그 창을 붙잡은 채 오히려 더 놀라고 있는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소년의 당황스러워하는 어이없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으으. 사, 살려 줘…….”
아예 몸을 관통하고 지나간 창이 빠지지 않자 당황한 적병이 창에서 손을 뗀 채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그런 적병을 보며 알마리온은 잠시 멈칫하다가 결국 눈을 질끈 감고는 검을 휘둘렀다.
“으악!”
그렇게 이를 악문 채 살려 달라며 애원하는 적병을 냉정하게 처리한 알마리온은 다시금 검을 들어 몸을 관통해 있는 창대를 잘라 버렸다.
그리고 온몸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기운을 내뿜으며 자신에게 달려오는 한 장본인을 향해 마주 섰다.
“이놈!”
“우아아!”
랜스를 겨눈 채 말을 달려오는 기사를 마주하고 선 알마리온의 입에서 마치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아! 아니!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이대로는! 절대 이대로 죽지 않겠어!’
“난 죽지 않아! 죽지 않는다고! 우아아!”
이미 피할 시간이 없었다. 죽지 않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마주 달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두두두두!
“우와아아!”
비록 당당하게 맞서는 모습의 알마리온이었지만 누가 보아도 상대가 되지 않아 보였다.
“아!”
차마 알마리온이 당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는지 질끈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돌려 버리는 동료들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간혹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지곤 하였다.
“이얍!”
피융!
비장함이 담긴 기합과 함께 대기를 찢는 날카로운 파공성이 주변에 울려 퍼졌다.
쿵! 쿠당탕! 쿵!
고개를 돌려 외면했던 알마리온의 동료들이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자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살피기 위해 감았던 눈을 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아야만 했다.
“……!”
지금 이 순간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주변의 모든 이들이 적아 구분 없이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알마리온이 내뱉는 거친 호흡 소리와, 동강 난 채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말과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역겨운 피 냄새만이 조금 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려 주는 증거들이었다.
“훅! 후욱! 훅!”
“…….”
물끄러미 허공을 바라보는 알마리온의 모습은 마치 넋을 잃은 사람처럼 보였다. 하나 만약 이 자리에 마법사나 익스퍼트의 기사가 있었다면, 비록 눈으로는 확인할 수는 없었겠지만 거대한 기운을 지닌 초자연적인 존재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넘은 것인가? 내가 한계를 뛰어넘은 것인가?’
보였다. 짓궂은 표정과 미소를 띤 채 장난치듯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는, 아름다우면서도 개구쟁이 같은 느낌을 주는 바람의 중급 정령인 실라페의 모습이.
적의 기사가 자신을 목표로 말을 달려오는 모습을 보았을 때, 알마리온은 이미 거의 한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삶을 스스로 포기한 자가 아니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죽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위기의 순간,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바로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철저하게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절대적인 침착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알마리온은 확실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적의 기사가 뿜어내는 강렬한 죽음의 기운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가 창으로 옆구리를 찌른 적병 덕분에 한 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침착함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물론 마지막 순간까지도 침착함을 유지한다고 해서 모두가 위기의 순간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침착함과 함께 위기의 순간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또 한 가지는 강렬한 의지였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강렬한 의지는 위기의 순간에서도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케 했다.
‘마지막 그 순간 살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가 이러한 힘을 허락한 것이야.’
알마리온은 다시 한 번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실라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숨이 막힐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장난스러운 표정과 짓궂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중급 정령인 실라페에게서 느껴지는 거대한 힘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쳇! 8백 년 만에 세상에 나왔는데 하필이면 너 같은 비실이라니.
‘…….’
짐짓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신의 나약함을 나무라는 실라페의 행동은 알마리온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실상 지금 알마리온의 상태는 바람의 중급 정령인 실라페를 유지하기에는 무리였다.
-너 벙어리야? 왜 아무 말도 없어?
‘아! 미, 미안. 너무 놀라워서…….’
-질 떨어지기는. 지금까지 날 이곳에 불러낸 자들 중 너처럼 질 떨어지는 소환자는 처음이네.
‘흠! 흠!’
-노력 좀 해야겠어. 앞으로 내 이 아름다운 모습을 계속 보고 싶다면 말이야. 알았지?
‘어? 그, 그래. 노, 노력할게.’
-좋아! 그럼 난 간다!
‘어? 어, 그래. 또…….’
미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정령계로 돌아가 버리는 실라페였다.
‘훗! 중급 정령은 확실히 다르구나. 말을 하는 것도 그렇고, 스스로의 의지로 판단을 내리고 행동도 할 수 있으니 말이야.’
제 할 말만 하고는 그대로 정령계로 돌아가 버린 실라페의 행동이 실상은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된 알마리온은 하급 정령과 중급 정령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알마리온이 하급 정령을 처음으로 소환했을 때, 정령이라는 것이 마냥 신기하기도 했지만 소환한 정령을 돌려보내는 방법을 몰라 자칫 마나가 고갈되어 죽을 고비를 맞기도 하였다. 하급 정령 또한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고 또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었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알마리온이 정령을 유지하느라 마나가 고갈되어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의 상황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장?”
“어? 어…….”
적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상황이라는 것도 잊은 채, 알마리온이 벌여 놓은 일로 인해 넋을 놓고 있던 한센이 여전히 반쯤 정신을 놓은 채 몽롱한 눈빛으로 알마리온의 부름에 고개를 돌려 답하였다.
경험 많은 한센이었지만 그도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진 믿기 힘든 광경에 다른 병사들처럼 넋을 놓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넋을 놓고 있을 거예요?”
“어? 아!”
알마리온의 지적을 받은 후에야 한센은 자신의 추태를 깨닫고는 정신을 차렸다.
“뭐, 뭣들 하는 거야! 다들 여기서 죽고 싶어! 어서 적진을 벗어나지 않고 무엇하는 거야!”
“아!”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아군도, 적군도 모두 믿기 힘든 광경에 넋을 놓고 있다가 한센의 고함에 모두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이들이 보인 반응은 천양지차였다. 한센을 비롯한 로엔의 병사들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정도로 기진맥진해 있던 상태에서 알마리온이 보인 대단한 모습에 사기가 충천하여 다시금 기운을 차린 반면, 똑같은 모습을 본 포넬의 병사들은 두려움에 빠져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알! 네가 앞쪽을 맡아! 내가 뒤를 맡는다!”
“예! 대장!”
“모두 최대한 빠른 속도로 빠져나간다! 우와앗!”
“우와아!”
“와아!”
사기충천한 병사들이 저마다 힘찬 기합 소리와 함께 선두에 선 알마리온의 뒤를 따라 적진을 탈출하기 시작하였지만 그 누구도 이들 앞을 막아서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예상치 못한 알마리온의 모습에 별다른 저항 없이 적진을 탈출하면서 한센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 이야기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설마 내가 직접 보다니.’
군에서 병사에게 가르치는 검술을 수련하던 병사가 어느 순간, 어떤 알 수 없는 계기를 통해 나이트 오브 나이트knight of knight, 즉 익스퍼트가 되었다는 옛날이야기 같은 이야기는 어느 부대건 모두 있었다.
심지어 매년 들어오는 신병들에게 검술과 창술을 가르치는 교관들은 신병들의 분발을 유도하기 위해 아예 이런 이야기를 사실인 것처럼 해 주기도 하였다.
그럴듯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어디까지나 상상에서나 가능할 뿐, 실제로 이런 일이 확인되었던 적은 없었다.
한센 또한 이러한 교관들의 말에 혹해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이고 다시 그 굳은살이 갈라지는 일을 수십 번이나 반복하여 더 이상 굳은살이 갈라지지 않게 되었을 정도가 되었을 때에야 교관들이 한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더 이상 검술을 수련하는 것을 포기해 버린 일이 있었다.
한데 이렇게 자신의 눈앞에서 과거 교관들이 말해 주었던 거짓말이 현실이 되어 나타나리라고는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쳇! 대단한 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은 10여 년을 수련하였어도 그저 검을 제법 잘 쓴다는 정도의 평을 들을 정도인데, 이제 검을 잡은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알마리온은 선택받은 자들만이 들 수 있다는 나이트 오브 나이트의 경지에 올랐다는 믿기 힘든 현실에 한센은 내심 질투심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이, 이놈!”
꿈이 아닌가 싶었지만 결코 꿈이 아니었다. 눈앞에서 가장 존경하는 선배 기사인 핸드릭이 한낱 노예 출신 병사의 검에 두 동강이 나서 아무렇게나 땅바닥에 버려진 모습을 본 도노반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랴!”
두두두. 두두두두. 두두두!
“이런! 대장님! 대장님!”
미처 말리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말을 몰아 달려가는 도노반의 돌발 행동에 크게 놀란 11기병대의 부대장인 제모슨이 다급히 그를 제지하려 하였지만 분노에 휩싸인 도노반의 귀에 그런 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다.
“젠장! 모두 대장님의 뒤를 따른다! 이랴!”
결국 제모슨과 나머지 11기병대 소속 대원들 또한 앞서 나간 도노반의 뒤를 따르기 위해 말에 박차를 가했다.
두두두! 두두두두! 두두두두!
또다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자 알마리온과 자리를 바꾼 한센의 입에서는 다급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젠장! 모두 달려! 적의 기병들이 몰려온다! 어서 달려!”
한센의 말에 힐끔 뒤를 돌아본 병사들의 얼굴이 이내 잔뜩 굳어졌다. 그리고 모두 다시 한 번 기적 같은 일을 벌여 주기를 기대하며 알마리온을 바라보았다.
“달려! 이 새끼들아! 무조건 달리지 않고 뭘 쳐다보고 서 있는 거야!”
멀뚱히 알마리온만 바라보는 병사들의 모습에 한센이 버럭 성질을 부렸다. 비록 그 자신은 익스퍼트의 경지가 어떤 것인지는 몰랐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알마리온이 상당히 지쳐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익스퍼트가 아니라 그 할아버지라 해도 부상은 물론 체력까지 떨어져 지친 상태에서는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
아무리 실력이 높아도 결국 체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잘 아는 한센은 더 이상 알마리온에게 무리해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달려! 어서 달리지 못해!”
“대장! 내가 뒤를 맡겠어요!”
30기나 되는 기병들이 떼로 몰려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알마리온이 스스로 뒤를 차단하겠다고 나섰다.
“시끄러! 넌 이미 부상도 당했고, 많이 지쳤어! 어서 앞만 보고 달려!”
“하지만 대장!”
“시끄럽다고 했다! 다들 죽어라고 앞만 보고 달리지 않고 뭐해!”
한센의 재촉이 이어지자 다시 한 번 기적을 바라던 병사들도 죽기 살기로 앞만 보며 달리기 시작하였다. 하나 이들이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하더라도 탄력이 붙은 말의 속도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분명 살아남게 되어도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철없던 시절, 절대로 비교의 대상이 되지 말았어야 하는 존재와 비교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자칫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경험 이후 두 번 다시 그렇게 위험을 자초하는 일 같은 것은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던 그다.
‘됐어. 어차피 벌어진 일. 이제 와서 감출 수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때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르다. 그때는 힘이 없어 당했지만, 이제는 최소한 나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이 있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자신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제 한목숨 정도는 충분히 지킬 수 있었다. 이런 자신감은 그로 하여금 인생의 전환점을 돌게 만드는 결단을 내리게 만든다.
‘그래! 차라리 당당해지자! 이 일로 인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차라리 모두가 날 필요로 하게 만들자.’
단지 결심을 굳힌 것뿐이었지만 결심을 하기 이전과 이후의 그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뭐, 뭐 해!”
옆에서 달리던 알마리온이 갑자기 멈춰 서자 한센 또한 덩달아 달리기를 멈췄다.
“먼저 가요, 대장! 뒤는 내가 맡겠어요!”
“이런 미친…….”
“어서 가요! 여기 있다가는 모두 죽어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한센을 상대하기 싫다는 듯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빠르게 다가오는 적의 기병들 앞을 가로막아 서는 알마리온이었다.
그런 알마리온의 행동에 한센이 억지로라도 끌고 가려고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에 요들이 한센을 만류하였다.
“이것 놓지 못해!”
“대장! 이러다가 나머지도 모두 죽어! 죽는다고!”
“하지만…….”
“알 걱정은 하지 말라고. 저놈이 얼마나 명줄이 질긴 놈인지 대장도 잘 알잖아! 알은 분명 살아 돌아올 거야. 안 그래, 알?”
“하하. 맞아요, 대장. 난 절대 안 죽어요. 하니 먼저 가도록 해요.”
“이익!”
잠시 망설이던 한센도 결국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지체하였다가는 아무리 알마리온이 익스퍼트의 실력을 그대로 보여 준다 하더라도 전멸을 면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꼭 살아 돌아와라. 꼭! 그리고 이것 받아라.”
알마리온의 곁으로 다가간 한센이 그의 손을 잡으며 반드시 살아 돌아오라는 말과 함께 무엇인가를 그의 손에 건네주었다.
“이것은?”
“지금 네게 가장 필요한 것이니 가져라. 그럼 우리 먼저 가마.”
한센이 건네준 것은 바로 포션이었다.
타론 성을 점령(?)한 공로로 한센이 받았던 포상금을 똑같이 나눈 후 그 돈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세 사람은 한참을 의논한 끝에 포션을 사기로 결정하였다.
돈이 모자랐기는 하였지만 그동안 한센이 모아 놓은 돈까지 톡톡 털어서 두 병의 포션을 사서는 한 병은 한센이, 그리고 한 병은 요들이 보관하고 있었는데 옆구리에 큰 부상을 입은 알마리온을 위해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포션을 건네준 것이었다.
“고마워요, 대장.”
“…….”
밝게 웃는 모습을 보여 주는 알마리온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센이 몸을 돌렸다.
“간다! 모두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앞만 보고 달린다! 가자!”
그렇게 먼저 동료들을 떠나보낸 알마리온은 한센이 건네준 포션 병을 열고는 상처 부위에 포션을 바르고는 나머지를 입에 털어 넣었다.
“크으…….”
상처 부위에 포션이 닿자 부글부글 거품이 일어나며 따끔거려 오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리던 알마리온이 검을 고쳐 잡고는 말을 달려 빠르게 다가오는 적의 기사를 마주하고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는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당당함이 느껴졌다.
‘놈, 내가 신호를 보내면 저들 중 가장 앞서 달려오는 자를 제외한 나머지를 네가 맡아 줘.’
-…….
정령을 활용한다면 미친 듯이 달려오는 적의 기병대 모두를 순식간에 무력하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는 극적인 효과를 노릴 수가 없었다.
‘이왕 판을 벌인다면 확실하게!’
판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줄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에게는 오히려 유리한 일이었다.
“오라!”
‘지금!’
숨을 고르며 적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던 알마리온에게서 단호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도노반의 뒤를 따르던 11기병대 전원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말과 함께 거칠게 땅바닥을 나뒹굴기 시작하였다.
“으악!”
히히힝! 히힝!
“으아악!”
뒤따르고 있는 부하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말과 함께 비명을 내지르며 땅바닥을 나뒹굴었지만 도노반의 귀에는 그 어떠한 것도 들리지 않았다.
“죽어!”
“……!”
핸드릭이 그러했던 것처럼 도노반 또한 기합을 내지르며 창을 늘어뜨린 채, 단숨에 알마리온을 꿰뚫어 버리려 하였다.
피융!
앞서와 다를 것이 전혀 없었다. 막 도노반의 창이 알마리온의 몸을 꿰뚫고 지나가는가 싶은 순간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성이 주위에 울려 퍼졌다.
쿠당탕! 쿠당!
다시 한 번 죽음과 같은 깊은 침묵이 주변을 감쌌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자신들로서는 감히 바라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기사들이 두 동강 난 채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은 확실히 감당하기 힘든 충격적인 일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뛰어가는 것도 아닌,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천천히 걸어가는 알마리온의 앞에 서 있던 포넬의 병사들은 마치 항복하는 병사들처럼 저도 모르게 손에 쥐고 있던 무기를 버리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놈들을! 그놈들을 찾아라!”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롬 평원에는 때아니게 이곳저곳 횃불이 밝혀져 마치 축제의 밤 등불을 켜 놓은 것처럼 평원 전체가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도망친 로엔의 병사들을 색출하기 위한 수색 작전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짙은 어둠과, 성인 허리 정도까지 웃자란 밀밭 속에 숨은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바로 전장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 로엔의 병사들이었다. 처음에는 한센이 지휘하던 백인대 소속의 병사들뿐이었지만 낙오된 병사들이 합류하면서 다시금 백인대 규모의 병력이 모이게 되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북쪽으로 가면 습지대가 있습니다. 그곳이라면 몸을 숨기기에 적당할 것입니다.”
“확실하지?”
“물론입니다, 대장! 이곳 지리라면 눈 감고도 환합니다.”
“좋아! 어차피 달리 방법도 없으니 네 말대로 하지. 알! 네가 칸과 함께 선두에 서라. 그리고 나와 요들이 후미를 맡겠다. 모두 이동한다.”
“예!”
밀밭이 끝나고 억새풀 자라난 곳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워낙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기에 무사히 억새풀 사이로 숨어들 수 있었다. 확실히 사람의 선키만큼 높이 자란 억새풀로 인해 몸을 숨기기 좋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습지라는 특성으로 인해 이동이 무척이나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이들 중 일부는 부상을 당해 부축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여서 이동이 더욱 힘들었다.
“이 새끼! 이곳은 눈 감고도 다닐 수 있다며! 한데 이게 뭐야, 이 새끼야!”
“뭐야, 이 새끼야!”
“입 다물지 못해, 이 개새끼들아! 아예 여기 우리 있으니 잡아가라고 소리치지 그래!”
서로 오가는 말들이 거칠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간신히 사지를 빠져나오긴 하였지만 강을 건너기 전까지는 완전히 위험을 벗어난 것이 아니었기에 다들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곳 지리라면 눈 감고도 다닐 수 있다고 자신하던 칼이 그만 이들을 엉뚱한 곳으로 안내하는 바람에 습지 한가운데에 발이 묶여 오도 가도 힘들게 되어 버렸으니 오죽하겠는가.
“한 번만 더 떠들면 네놈들 입을 그냥 찢어 버리겠다. 하니 아가리 닥치고들 있어라. 알았냐?”
“쳇! 괜히 나한테 신경질이야.”
혼잣말로 투덜거리던 칼이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자신을 째려보는 한센의 눈과 마주치자 슬쩍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나저나 이를 어쩐다? 앞으로 나아가자니 발도 딛기 힘든 진창이고, 뒤로 되돌아가자니 우리를 찾기 위해 눈이 벌겋게 된 적들이 우글거리니. 젠장!”
이곳을 벗어날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하자 난감해진 한센이 저도 모르게 투덜거릴 때였다.
“대장, 잠시 이쪽으로 와 보세요. 이 정도면 발을 디딜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발을 디뎌도 빠지지 않을 만한 곳을 찾아냈다는 알마리온의 말에 한센은 냉큼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뭐? 어디?”
확실히 알마리온이 찾아낸 곳은 조금 불안해 보이긴 하여도 조심만 한다면 발이 빠지거나 할 정도는 아닐 정도는 되어 보였다.
물론 조금 전까지도 발을 디딜 곳을 전혀 찾지 못했던 상황에서 갑자기 발을 디뎌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굳은 곳을 발견한 것은 모두 알마리온이 대지의 정령인 놈을 소환하여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하! 역시 하늘이 아직 우릴 죽게 하진 않을 모양이다. 좋아! 다들 이곳을 통해 이동한다. 알, 다시 한 번 부탁한다. 네가 앞장서라.”
“예, 대장.”
놈을 소환하여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뻘을 굳게 만든 알마리온의 뒤를 따라 병사들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령이 만들어 준 길을 따라 거의 강가에 도착하였을 무렵 이들에게 다시 한 번 위기가 찾아왔다.
“이쪽이다! 이쪽으로, 적이 여기에 있다!”
쪽배를 타고 강을 따라 탐색하던 포넬의 병사들에게 결국 들키고 만 것이다.
삐이익! 삐익! 삐익!
“이쪽이다! 여기에 적이 있다!”
호각 소리와 함께 고함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젠장! 발각됐다! 일단 저놈들부터 처치한 후 헤엄쳐서 강을 건넌다!”
일단 위치가 발각된 이상 더 이상 조심스럽게 움직이기보다는 최대한 빨리 움직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예!”
병사들 중 일부는 석궁을 가지고 있었기에 쪽배를 타고 자신들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호각을 불며 소리를 질러 대는 적병을 향해 석궁을 쏘아 대기 시작하였다.
“으, 으악!”
갑작스러운 공격에 쪽배에 타고 있던 포넬 병사들이 몸을 크게 움직이자 배가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결국 중심을 잃고 배가 뒤집혀 버렸다.
“됐어! 가자!”
배가 뒤집히면서 포넬 병사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한센은 자리에서 일어나 걸치고 있던 아머를 벗어 던지고는 그대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뒤를 따라 다른 이들도 속속 강에 뛰어들었다.
알마리온 또한 막 걸치고 있던 아머를 벗어 던지고 물에 뛰어들려고 할 찰나였다. 다른 때 같았다면 가장 먼저 행동했을 요들이 이상하게도 우물쭈물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뭐 해? 어서 강을 건너야 한다고!”
“나, 난 수영할 줄 몰라. 수영할 줄 모른다고!”
“…….”
수영을 할 줄 모른다는 요들의 말에 잠시 어이가 없어진 알마리온이 주변을 둘러보니 비단 요들만이 그런 것이 아닌 듯 제법 많은 이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상태로는…….
“잠깐만 기다려!”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거침없이 물에 뛰어든 알마리온이 어설퍼 보이는 수영으로 포넬 병사들이 타고 있다 뒤집혀 버린 채 강물을 타고 흘러내려 가는 쪽배를 붙잡아 힘겹게 강변으로 되돌아왔다.
“뭐 해! 어서 배에 올라타!”
“어? 아, 알았어!”
불과 대여섯 명 정도 타면 꽉 차서 더 이상 오를 자리조차 없었지만 마음이 다급해진 병사들은 저 먼저 올라타기 위해 버둥거렸다.
“다들 침착 해요! 어차피 적은 이곳까지 쉽게 오지 못해요! 하니 침착하게 두 번에 나눠 타도록 해요!”
하나 그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결국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물에서 나온 알마리온이 아무렇게나 버린 검을 집어 들고 윽박을 질러서야 상황이 진정되었다.
“모두 내려! 만약 내리지 않으면 이 배를 부숴 버리겠어!”
파랗게 빛나는 알마리온의 눈빛에 찔끔해진 병사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멈칫거리며 배에서 내렸다.
“먼저 나이 든 사람과 부상당한 사람부터. 혹시 노를 저어 본 사람 있나?”
“저어 본 적은 없지만 본 적은…….”
“그래? 그럼 당신이 노를 젓도록 해. 시간은 충분하니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노를 저어 강을 건너도록 하고. 알겠나?”
“예.”
서로 비슷한 처지였지만 낮에 보았던 알마리온의 모습에 기가 눌려 있던 터라 그 누구도 그의 말에 토를 달거나 거부하는 행동을 보이지 않은 채 순응하였다.
그렇게 나이 든 병사와 부상을 당한 병사들을 실은 쪽배가 강을 가로질러 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요들이 문득 생각이 났는지 물었다.
“한데 너 부상당한 곳은 어때?”
“참 빨리도 물어본다. 벌써 포션으로 치료했어.”
“미, 미안해. 하도 경황이 없어서 말이야.”
한껏 미안한 표정으로 변명하듯 말하는 요들이었다.
“후훗. 됐어. 그래도 이렇게 잊지 않고 기억해 줘서 고마워, 요들.”
“고맙기는 무슨……. 우리야말로 네 덕분에 그 사지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는걸.”
요들의 말에 남아 있던 병사들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자신들을 구해 준 알마리온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건 그렇고 혹시 부싯돌 가지고 있는 것 있어?”
“부싯돌? 그건 갑자기 왜?”
“불장난 좀 하려고 말이야.”
“불장난?”
“응. 아무래도 여기 있는 이것들을 모두 태워 버리려고.”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지만 갑작스럽게 강변을 따라 핀 억새풀들을 모두 태워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이걸? 한데 이게 잘 탈까?”
늘 생각이 깊은 알마리온이었기에 이번 행동도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 싶었다.
“그거야 모르지. 그냥 해 보는 거지, 뭐.”
“내 생각에는 잘 탈 것 같진 않지만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야 뭐. 자! 여기 있어.”
“고마워. 그럼 나 잠시 다녀올게.”
요들로부터 부싯돌을 건네받은 알마리온이 억새풀 사이로 사라졌다.
“저러다 잘못해서 이쪽으로 바람이라도 불면 어쩌려고…….”
불을 내기 위해 사라지는 알마리온의 모습에 남아 있던 병사들 중 한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뭐, 그땐 물속으로 뛰어들면 되겠지.”
그리고 얼마 후 곳곳에서 매캐한 냄새와 함께 거대한 불길이 억새풀 밭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때마침 북쪽에서 남쪽으로 불기 시작한 바람을 타고 억새풀 밭 전체가 거대한 화염에 휩싸이기 시작할 무렵, 알마리온이 돌아왔다.
“마침 배가 돌아오네.”
“그러네.”
다시 한 번 몇 명의 병사들을 태운 배가 롬 강을 건너갔다 돌아오자 끝까지 남아 있었던 알마리온과 요들도 강을 건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