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평범함 속에 묻혀 있던 재능 (1/70)

평범함 속에 묻혀 있던 재능

“너! 너! 그리고 너희 둘! 이렇게 넷은 제5천인대 10백인대 소속이다.”

“……예.”

눈치를 보면서 대답을 하는 이라고는 알마리온 단 한 사람뿐, 다른 사람들은 그런 알마리온을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아니면 짜증 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동대륙에서도 동쪽 끝에 위치한 로엔 왕국은 바다 건너에 있는 포넬 왕국의 침공을 받아 힘든 전쟁을, 아니 최악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포넬 왕국의 침공을 받은 지 불과 5개월 만에 로엔 왕국은 이제 왕국 영토의 3분의 2를 빼앗긴 상태였다.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되자, 국왕은 다른 귀족들의 동의를 얻어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바로 면천을 조건으로 노예들을 병사로 모집한 것이다.

알마리온 또한 이러한 특단의 조치를 통해 병사가 되었다.

처음 이러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을 때, 알마리온은 내심 주인에게 간청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는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한번 노예라는 굴레를 쓰게 되면 죽었다 깨어난다 하더라도 그러한 신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단지 병사로 복무하다 전쟁이 끝나면 면천을 시켜 준다는 조건은, 분명 신분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태여 고민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알마리온의 주인인 로뎀 자작 또한 영지가 포넬군에 점령당하고 피난 생활을 하면서 겪기 시작한 자금난으로 인해 데리고 있던 노예들 중 여성을 제외한 모든 노예를, 나이까지 속여 가면서 노예 병사로 넘겨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비단 알마리온의 주인인 로뎀 자작뿐만이 아닌, 거래에 응한 거의 모든 귀족들이 공통적으로 행한 일이었다.

피난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기존의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귀족들이었기에 부족한 자금을 만들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노예들을 처분하였다.

제10백인대에 속한 노예 출신 병사들이 백인대장의 인솔을 받으며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데 정말 살아남으면 노예로 살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이동하는 노예 병사들 중 알마리온 또래의 소년이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곁에 있던 중년의 사내에게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소년의 질문을 받은 중년의 사내는 잠시 어이없다는 듯이 소년을 보더니 이내 시니컬한 말투로 소년의 순진함을 비웃었다.

“훗! 어이! 여기들 보라고. 여기 이 순진한 어린놈이 전쟁에서 살아남으면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냐고 물어보는데 뭐라고 대답해 줄까?”

“하하하.”

“크크크!”

중년 사내의 말에 의해 소년은 이내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노예들 대부분은 농사를 짓던 노예들이 아니었다.

왕국의 영토 3분의 2가 포넬군에 점령당하면서 북부 지역 출신 노예들이 아닌 자들은 귀족 가문이 왕도인 소렌토에 머무는 동안 그들을 모시는 일을 하던 노예들로, 이들 중 일부는 글을 읽거나 쓸 수 있을 정도로 교육을 받은 자들도 있으니 농사나 짓던 노예들과는 확실히 다른 자들이었다.

그렇게 평생을 귀족들을 시중을 들어 온 이들은 귀족들의 행태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자신들의 경험상 이번 약속 또한 지켜지지 않을 것이라며 아예 기대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조금 전의 소년처럼 이들 노예 병사들 중에는 국왕의 약속을 믿는, 아니 믿고 싶어 하는 자들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훗! 꼬마야, 노예에서 벗어나고 싶으냐?”

“예? 예……. 주, 주인님께서 그러셨단 말이에요! 분명 이번 전쟁이 끝나면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이에요!”

“크크크, 그 말을 믿는 놈이 있긴 있네.”

다시 한 번 주변에서 커다란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부, 분명히 그, 그러셨단 말이에요!”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소년이 항변하듯 소리쳤다.

소년은 지금도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쪽에는 커다란 돼지가 통째로 구워지면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구수한 냄새를 풍기고, 마당에 차려진 식탁 위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온갖 종류의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상단에 속한 열다섯 살에서 마흔 살 정도에 속하는 모든 남자 노예들을 불러 놓고 주인은 분명하게 말했다.

국왕 폐하의 명령에 따라 병사가 되어 전쟁에 나가면 노예의 신분을 면하게 해 준다고.

처음에는 다들 믿지 않았다. 노예로 태어난 이들은 죽을 때까지 노예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노예인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주인의 곁에 서 있던,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두려움과 용맹함이 느껴지는, 멋들어진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가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자신들 앞에 나서서 주인의 말은 모두 사실이며 이것은 국왕 폐하의 명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자가 없었다.

노예는 자의가 있어서는 안 될 존재들, 그 누구도 제 뜻으로 앞으로 나서는 이가 없었지만, 모두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모두 병사가 되어 전쟁터로 가야 한다는 것을.

그날 밤. 난생처음으로 배가 터지게 먹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믿고 싶었다. 아니, 최소한 소년만큼은 믿었다.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배가 터지게 먹었던 음식들과 그로 인해 몇 날 며칠을 고생하였던 그 기억이 생생히 남아 있는 것만큼 전쟁이 끝나는 그 순간, 자신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닐 것임을.

“크큭! 꼬맹아, 넌 그렇게 귀족들에게 당해 왔으면서도 아직도 귀족의 말을 믿는 것이냐? 귀족들이 언제 우리 같은 것들을 사람 취급이라도 하더냐?”

“하지만 국왕 폐하의 명이라며…….”

“오! 그렇지! 그래, 국왕 폐하의 명이었지. 큭큭. 분명 국왕 폐하가 그런 명령을 내렸겠지. 하지만 나중에 또 어떤 명령을 내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니겠어? 안 그래?”

“…….”

이번에는 중년 사내의 냉소에 호응하는 이들이 아무도 없었다. 내심 이번 약속도 지켜지지 않을 것이라고 이미 기대조차 하지 않으면서도, 이들 모두 마음 한구석에는 소년의 철석같은 믿음처럼 이번 전쟁이 끝나고 면천의 약속이 반드시 지켜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꼬마야, 살아남아라. 끝까지 살아남아라. 멀쩡히 살아남든 병신이 되어 살아남든, 살아남아라. 그래야 네놈 말처럼 노예 신세에서 벗어나든 말든 할 것이니 말이다.”

중년 사내의 말에 다들 고개가 숙여졌다. 그의 말처럼 살아남아야 부귀를 누리든 영화를 누리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야, 넌 이름이 뭐야? 그리고 어디서 왔냐?”

모두 입을 꾹 다문 채, 눈길을 땅바닥에 둔 채, 묵묵히 인솔자를 따라 걷기를 한참. 곁에 있던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 말을 걸어왔다.

“나? 난 알마리온이라고 해. 그리고 로뎀 자작 영지에서 왔어.”

“알마리온? 정말 네 이름이 알마리온이야?”

이름을 물었던 소년이 알마리온의 이름을 듣자 꽤나 놀라는 눈치를 보였다.

‘훗! 이 아이도 내 외모와 이름이 내 신분과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아서 꽤나 놀라운가 보네.’

한두 번 겪어 본 일이 아니었기에 이젠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알마리온이었다.

“응.”

“혹시…… 전에 귀족……?”

듣는 것만으로도 딱 귀족스러워 보이는 이름이기에 요들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요들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알마리온을 처음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었다. 남자인 자신이 보아도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빼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알마리온에게서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기품 같은 것이 느껴졌기에, 다들 그러한 알마리온을 보고 무엇인가 사정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며 수군거렸다.

이런 상태에서 크게 용기를 내어 이름을 물었더니 누가 들어도 귀족스러워 보이는 이름까지 가지고 있으니 오해받기에 딱 좋았다.

“그건 아냐. 나도 너처럼 노예가 맞아.”

“저, 정말로……?”

“응.”

“하지만 네 모습이나, 이름은…….”

“뭐, 노예라고 해서 다 험악하게 생기진 않잖아? 그리고 내 이름도 도련님이 지어 주신 이름이야.”

“도련님이?”

“응.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 우연히 자작가에 초빙된 음유시인이 들려 준 성웅聖雄 알마리온 폰 폴랑 대제의 이름이 멋있다며 도련님께서 붙여 준 이름이야.”

성웅 알마리온 폰 폴랑 대제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였다. 하지만 성웅 알마리온 폰 폴랑 대제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 음유시인들이 창작해 낸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아! 그랬구나. 깜짝 놀랐네. 어쨌든 반갑다. 나는 요들이라고 해. 난 부르크렌에서 왔다. 그리고 난 노예가 아냐.”

“노예가 아니라고?”

“훗! 하긴 노예나 거지나 별반 다를 것 없지, 뭐.”

“거지? 그러면…….”

거지였다는 말에 알마리온은 잠시 멈칫거렸다. 아무리 거지였다고는 해도 노예보다는 신분이 높기 때문이었다.

“쳇! 그만해. 거지나 노예나 거기서 거긴데 뭘 따지냐? 게다가 내가 아무리 거지라고 우긴들 여기 있으면 나나 너나 저치들이나 다를 것이 뭐가 있겠어. 안 그래?”

“그래도…….”

“괜찮다니까. 어쨌든 앞으로 잘 부탁한다. 우리 끝까지 살아남자. 아직 혼인도 못 해 봤는데 이대로 죽긴 아깝잖아? 안 그래? 히힛!”

“훗! 그래.”

거친 행동과 말투였지만 묘하게도 그러한 요들의 성격이 무척이나 편하게 느껴졌다.

“뭔 잡담이 그렇게 많아! 어서 서둘러라! 곧 해가 떨어질 것 같으니 말이야! 해가 떨어지기 전에 부대로 돌아가야 한단 말이다. 젠장! 이런 놈들을 데리고 전장으로 나가라고 하다니…….”

인솔하던 장교의 입에서 거친 욕지거리가 끊이지 않고 쏟아졌다.

“쳇! 괜히 짜증이야…….”

초반 노도처럼 로엔 왕국을 점령해 나가던 포넬군의 공세는 처음보다는 많이 주춤해져 있었다.

이처럼 포넬의 공세가 주춤해진 데에는 로엔의 해군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바다 건너에 위치한 포넬이 로엔에 병력과 물자를 보내기 위해서는 바다를 통한 대규모의 수송이 필요했다. 따라서 바다에서 이들 포넬의 수송 선단을 차단하게 되면 자연 로엔에 상륙해 있는 포넬의 군사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전쟁 초반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로엔은 포넬의 수송 선단을 저지하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아몬 폰 폰티악 백작이라는 걸출한 해군 제독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되어 몇 차례 해전에서 믿기 힘든 대승을 거두었고, 이로 인해 군사력이 떨어진 포넬의 공세가 한풀 꺾이게 된 것이다.

여기에 각처에서 일기 시작한 의용군의 적극적인 저항도 크게 한몫을 하고 있었다.

최단 시간 내에 로엔을 점령하여 적절한 대가를 받고 물러날 계획이었던 포넬은 점령 지역을 방치한 채 전선으로 모든 병력을 투입했다가 각처에서 일어난 의용군의 활동에 또다시 보급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에 다급해진 포넬군은 모든 점령 지역에 병력의 일부를 남겨 두어 더 이상 보급에 차질이 빚어지는 일을 방지하고자 하였는데, 이로 인해 병력을 집중시키지 못하게 된 것도 포넬의 진격을 더디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이렇듯 여러 악재로 포넬의 진격이 주춤해진 상황에서 로엔은 노예까지 총동원하여 포넬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에 돌입하였다. 하지만 전쟁은 이제야 비로소 본격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오늘도 잘 부탁해, 알.”

“나도 잘 부탁해, 요들.”

“그래. 우리 오늘도 살아남자고!”

“물론이지!”

전장을 떠돈 지 벌써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지난 반년 동안 함께 사선을 넘나들었던 알마리온과 요들은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곁에 서 있는 동료뿐이었다.

“어이! 너희 둘만 살겠다고 날 버리지는 않겠지? 나도 잘 부탁한다고! 너희 둘 다 절대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알았냐?”

지난 반년 동안 수십 차례 전투에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간단한 상처를 제외하고는 부상을 당하지 않은 알마리온과 요들은 부대 내에서 부적으로 통하고 있었다.

‘살고 싶다면 알마리온 곁에 있어라.’라는 말은 이제 알마리온이 속한 부대 내에서는 마치 신의 복음처럼 돼 버린 상태였다. 이로 인해 알마리온이 속한 백인대에 속하기 위해 은밀히 뒷거래가 이루어지는가 하면 심지어는 장교와 같은 지휘관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소문을 접하고는 은근슬쩍 끼어드는 이가 생겨났을 정도였다.

이는 십인대를 이끄는 사전트인 한센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도 처음에는 타 백인대에 속해 있다 소문을 듣고 고참 짬밥으로 밀어붙여 알마리온이 속한 백인대로 자리를 옮긴 인물이었다.

“쳇! 이럴 때만 그러지 마시고 먹을 거라도 좀 챙겨 주시면서 그러면 어디 덧납니까?”

“인마, 안 그래도 너희 둘 챙겨 주느라 허리가 다 휘청거릴 정도다. 네놈들이 걸치고 있는 그 레더 아머도 어디 가당키나 한 것인 줄 알아? 그것도 다 내가 백인대장에게 싹싹 빌었으니까 가능한 것이라고!”

한센의 말처럼 노예병인 이들에게는 나무로 만든 창 한 자루를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보급품도 주어지지 않았다.

일반 병사들은 전투가 끝난 후 버려진 무기나 아머 같은 것을 습득할 경우 이를 전리품으로 인정해 주어 절반 정도는 자신이 가질 수 있었지만, 노예병들에게는 그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지금도 백인대장들과 십인대장들을 제외한 병사들 중 얼기설기 기운 것이긴 해도 아머를 걸치고 있는 이는 알마리온과 요들 단둘뿐이었다.

“아! 그건 그거고요. 쳇! 지난번에도 한센 대장님이 누구 덕에 살았는데요!”

“얼레? 그게 네가 살려 준 거냐? 네가 살려 준 거야? 정작 날 살려 준 놈은 가만있는데 네가 왜 생색이야?”

“생색을 내자는 것이 아니라……. 아무튼 그러지 말고 먹을 것 좀 있음 좀 챙겨 달라니까요. 배가 고파서 서 있을 힘조차 없단 말입니다!”

엄살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렇게 떼를 써서 구한 식량을 주변 동료들과 함께 나누고 있다는 것 또한 알기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하고, 다들 출동 준비 마쳤으면 집합! 집합하란 말이야, 이 자식들아! 어서 빨리빨리 움직이지 못해!”

한센이 출동 준비를 하느라 부산을 떨고 있을 때 백인대장인 죠셉이 다가와 준비 상황에 대해 물었다.

“준비 다 되었는가?”

“예! 백인대장님!”

“좋아! 그럼 각 십인대 대장들의 인솔로 이동한다. 사전트 한센! 자네 십인대가 선두다.”

“예, 대장님.”

또다시 선두에 서라는 것이 불만스러운 한센이었지만 명령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쳇! 또 선두입니까?”

이동 중에 선두나 양 측면, 최후방에 선다는 것은 그만큼 갑작스러운 기습 공격에 당할 확률이 높기에 모든 병사들이 꺼리는 위치였다.

“명령이다. 모두 주목! 이동 중에는 주변을 철저히 경계하라. 알겠지?”

“예.”

또다시 선두라는 말에 다들 불퉁거리며 마지못해 대답을 하였다.

“좋아. 그럼 이동한다. 알마리온, 요들, 너희 둘이 선두에 서라.”

“쳇! 알았소!”

“저 녀석이!”

선두 중에서도 선두에 서라는 한센의 명령에 요들이 심드렁히 대꾸하면서 대충 맞먹으려 하자 한센이 짐짓 종주먹을 쥐어 보였다.

‘오늘도 잘 부탁해, 실프.’

푸른 가을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바람의 하급 정령인 실프가 다가와서는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을 불어 알마리온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런 실프의 장난에 알마리온의 얼굴에도 푸근한 미소가 어렸다.

그랬다. 지난 반년 동안 이처럼 단 한 번의 부상도 없이 치열한 격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 그것은 바로 그가 정령을 다룰 수 있는 정령술사였기 때문이다.

정령이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임을 알게 되고, 그러한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정령술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었다.

그가 처음 자신이 정령술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 가지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되면서부터였다.

알마리온은 로뎀 자작가의 공자인 지크 폰 로뎀의 놀이 친구 겸 시동 겸 지크 폰 로뎀이 혼이 나야 할 일이 생기면 대신 매를 맞는 아이였다.

어릴 때에야 다른 노예들처럼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또 다른 노예들은 꿈에서도 맛볼 수 없는 음식들 그리고 좋은 옷을 입고 심지어는 잠도 같은 침대는 아니라 하더라도 도련님과 함께 자는 것만으로도, 도련님이 혼이 나야 할 일이 있을 때 도련님을 대신하여 매를 맞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주위가 산만하여 잘 집중하지 못하는 데다가 아주 작은 일에도 신경질을 부리는 성격인 지크는,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학습 능력이 무척이나 떨어졌다.

그에 반해 알마리온은 모든 면에서 자작가의 장자인 지크를 능가했다. 학습 능력은 물론 행동하는 것, 성격, 심지어는 외모에서조차 뛰어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알마리온이 로뎀 가문의 혈통이고 지크를 매 맞는 아이로 착각할 정도였다.

본래 이름은 톰인 알마리온에게 그 이름이 너무 흔하다며 언젠가 자작가에서 초대한 음유시인에게서 들은 성웅 알마리온 폰 폴랑 대제의 이름을 붙여 준 것도 지크였다. 이렇게 알마리온의 이름까지 바꿔 줄 정도로 지크는 알마리온을 무척이나 아꼈다.

그런 지크가 알마리온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게 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괴롭히기 시작한 것은, 저택에서 일을 하는 하녀들의 입방아를 듣고 난 이후부터였다.

아무리 마음씨가 좋고 함께하고 있는 알마리온을 많이 좋아한다고 해도 자존심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나이가 어렸어도 지크 또한 알마리온이 자신보다 신분의 우월함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아는 만큼 마음 한구석에는 알마리온에 대한 질투심과 열등감이 담겨 있었다.

그날도 학습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며 아버지인 로뎀 자작에게 크게 꾸중을 듣고 나오던 지크는 하인들과 하녀들까지 자신을 알마리온과 비교하는 말을 듣고는 그만 이성을 잃고 곁에 서 있던 알마리온을 계단에서 밀었고, 갑작스레 당한 일에 알마리온이 미처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한 채 계단을 구르면서 머리를 크게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알마리온은 두 달을 침대에서 누워 지내야만 했다.

그렇게 병상에 누워 지내던 어느 날 알마리온은 자신이 정령이라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리고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정령술사로서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것도 정령술사들 중 최고로 꼽히는 퍼펙트 스피릿 에이전트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통 한 가지의 정령에 대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싱글 스피릿 에이전트 등급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두 가지의 정령에 대한 친화력을 가진 경우에는 더블 스피릿 에이전트라고 하며, 세 가지의 정령에 대한 친화력을 가진 경우에는 트리플 스피릿 에이전트, 4대 정령 모두와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 이를 완벽한 존재라고 하여 퍼펙트 스피릿 에이전트라고 구분한다.

이러한 퍼펙트 스피릿 에이전트는 과거 단 한 명만 존재하였는데, 바로 성웅 알마리온 폰 폴랑 대제로, 치기 어린 아이들이 장난삼아 붙인 이름이지만 동일한 이름을 가지게 된 것 또한 운명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마리온은 이러한 자신의 재능을 철저하게 비밀로 하였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 채 전적으로 타인의 자비심에 의해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노예의 신분으로 남아 있는 이상, 지금까지 보여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미움 받는 정도가 아니라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깨달음을 얻은 때가 그의 나이 열한 살 때의 일이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타론 성을 탈환해야 한다.”

에두아르 폰 나빌 백작의 결연한 목소리가 군막을 뒤흔들었다.

3군단과 12군단을 지휘하여 벌써 한 달째 계속되고 있는 타론 성에 대한 공략은 오늘 전투의 결과에 따라서 중대한 고비를 맞게 되어 있었다.

“모두 이미 알고 있듯이 오늘의 전투에서도 성을 점령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곳을 포기해야 한다.”

타론 성은 로엔 왕국의 동북 지방에서 왕도인 소렌토로 진출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곳으로, 이곳을 점령하지 못하면 소렌토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먼 길을 돌아가야 했다. 이는 현재 로엔 왕국에서 그나마 모든 것이 최고의 정예 병력이라 할 수 있는 동북 지역 병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일이었기에 그만큼 손해가 나는 일이었다.

“차라리 정규군단인 3군단을 전위에 내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노예 병사들만으로는 성벽에 의지한 채 저항하는 적군을 제대로 제압한다는 것은…….”

“불가하다. 정규군단은 차후의 반격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잊었는가? 최대한 전력을 확보해야 하는 이 시점에서 그들을 투입할 수는 없다.”

대륙과 접해 있는 국경 지역에는 로엔 왕국 최강의 군단들이 존재했다.

그동안 북쪽 국경을 방비하던 이 군단들은 이번 포넬 왕국과의 전쟁에 투입되지 않은 채 전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을 투입할 시간적 여유가 없기도 했고, 이들마저 소모해 버리면 반격을 취할 제대로 된 병력이 아예 남지 않기 때문에 이들 군단들을 최대한 아껴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북부 국경 지역에 주둔하던 정규군단들이 타론 성 공략에 투입되었지만, 에두아르 백작은 앞으로의 상황을 생각하여 정규군단을 전위에 내세우지 않고 노예 병사들과 강제로 징집한 징집병으로 구성된 군단을 전위에 내세워 성을 공략하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제대로 된 공세가 이루어지기 힘들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피해만 속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신 오늘 전투에는 궁병들을 지원해 주도록 하지.”

로엔 왕국의 궁병은 예부터 주변 왕국들의 두려움을 살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오죽하면 이들을 ‘엘프의 후예’라고 할 정도였겠는가.

엘프란 종족은 마법을 위해 태어난 종족이라 할 정도로 마법에 대한 자질이 뛰어난 종족이지만 모든 엘프가 마법사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전사로서의 자질이 뛰어났는데 특히 ‘신궁神弓’이라고 할 정도로 활을 잘 다루는 종족이었다.

이에 버금갈 정도로 활을 잘 다룬다 해서 로엔 왕국의 궁병들을 엘프의 후예라고들 부르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군단장님.”

그것만으로도 현장 지휘관들은 감지덕지해야 하였다.

“오늘 전투에서 노예병들과 징집병 모두를 희생시킨다 하더라도 반드시 타론 성을 탈환하여야 한다. 알겠나?”

“예! 군단장님!”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로엔 왕국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부대 전진!”

척! 척! 척! 척!

2만이나 되는 군세가 발을 맞춰 전진을 하기 시작하자 가뜩이나 지난 한 달여 동안 비라고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은 탓에 잔뜩 말라 있는 대지에서 뿌연 먼지가 하늘조차 가릴 듯 피어올랐다.

쉭! 쉭! 쉭! 쉭!

로엔의 병사들이 성에 접근하자 빗발치듯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포넬의 활은 로엔이나 로엔 북방 지역의 게르혼족이 사용하는 활과는 많이 달랐다. 포넬의 활은 크기는 로엔의 것보다는 큰 장궁이지만 사거리는 반밖에 되지 않았다. 하여 이처럼 성곽과 같은 지리적 이점이 있지 않고서는 야전에서는 포넬군은 활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니, 사용하기가 불편해서 활보다는 석궁을 주로 사용했다.

“방패로 막아! 방패로 막으면서 계속 전진하라! 전진해!”

“으악!”

“크헉!”

“악!”

방패를 들어 빗줄기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화살을 막아 보았지만, 높은 곳에서 쏘아진 화살은 겨우 얇은 나무판으로 대충 만든 방패를 그대로 뚫고 들어왔다.

화살 공격이 시작되면서 피해가 속출하기 시작했지만 결코 멈출 수는 없었다. 도망치고 싶다 해도 뒤에서 밀어 대는 통에 의지와는 관계없이 계속해서 앞으로 떠밀려 갈 뿐이었다.

그렇게 자의든 타의든, 병사들은 착실히 성에 접근하였다.

“전속력으로! 전속력으로!”

“와아!”

“와!”

성으로 접근할수록 성벽 위에서의 반격 또한 더욱 거칠고 거세졌다.

화살뿐만 아니라 돌과 뜨겁게 끓인 물 그리고 기름 등이 성벽에 접근한 노예 병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다리를 걸쳐! 갈고리를 걸어!”

“성문을 부숴라! 충차병들 뭐 해! 어서 충차를 움직여 성문을 깨란 말이다!”

한쪽에서는 성벽을 오르기 위해 사다리를 걸치거나 갈고리를 던져 거느라 부산했고, 그리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성문을 부수기 위해 충차를 동원하여 성문을 깨뜨리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으악!”

성벽 위에서 쏟아지는 바위와 뜨거운 물과 기름 등의 공격으로 성벽 아래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참혹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어서 기어 올라가! 살고 싶으면 어서 올라가란 말이다!”

“왜 충차가 멈춰 있는 것이냐!”

“충차 바퀴가 망가진 모양입니다!”

“이 새끼!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가! 그럼 들어서라도 성문을 부수란 말이다! 이 병신 새끼야!”

“예? 예!”

“궁병! 궁병들은 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야! 여기 있는 놈들 죄다 죽은 후에야 나타날 것인가!”

지원을 하기로 약속된 궁병들이 도착하지 않자 지휘관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궁병들이 도착했습니다! 궁병이 도착했습니다!”

노예병들 뒤로 궁병들이 활을 쏠 수 있는 사정거리 안에 도착하여 성벽 위로 활을 쏘기 시작하자 격렬하던 반격이 주춤해지기 시작했다.

“사다리와 갈고리를 더 걸쳐! 이 틈에 최대한 성벽 위로 올려 보내!”

“와아!”

“알! 네가 선두다. 요들, 네가 그 뒤를 따라라!”

“예!”

사다리가 성벽에 걸쳐지자 한센은 알마리온으로 하여금 가장 먼저 사다리를 오르게 하였다.

지난 반년 동안 수많은 전투에서도 별다른 부상조차 입지 않았던, 때문에 생명을 구해 주는 부적 같은 그에게 선두를 맡기는 것은 이젠 당연한 일처럼 되어 버렸다. 덩달아 그와 함께하는 요들 또한 항상 선두에서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아야만 했다.

“젠장! 왜 만날 우리 둘만 앞에 서는 거야!”

욕지거리가 절로 쏟아져 나왔다. 하긴 매번 이처럼 힘든 상황에서 앞장서라고 하니 그럴 만도 하였다.

“불평은 나중에 하고 가자!”

“알았어! 알았다고!”

“아무래도 이제 적당히 물러날 때가 된 것 같군.”

포넬 왕국의 6군단장인 이즈마엘 폰 반데지 자작은 성루에 올라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자작님.”

6군단 부군단장인 카몬 남작 또한 반데지 자작의 판단과 같은 생각이었다.

“후후! 어리석은 놈들. 제 놈들끼리 저렇게 죽자 살자 싸우는 꼴이라니. 후후후!”

이즈마엘의 입에는 비릿한 조소가 짙게 어려 있었다.

지금 성벽 위에서 로엔군을 상대하고 있는 포넬군은 실상 포넬군이 아니라 강제로 동원된 로엔의 백성들이었다.

이즈마엘은 밥 먹을 힘만 있다면 애건 노인이건 가리지 않고 강제로 동원하여 포넬 병사들의 옷을 입혀서는 로엔군을 상대케 하고 있었다.

당연히 강제로 끌려온 로엔의 백성들은 반발하였지만 이들의 반발은, 함께 끌려온 가족들 앞에서 주동자 몇의 목을 친 후, 명령에 따라 로엔군을 상대하지 않을 경우 끌려온 가족들 모두 목을 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저렇듯 제 놈들끼리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실상 지난 한 달여 동안 포넬 왕국의 6군단은 거의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채 전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물러날 땐 물러나더라도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지.”

이즈마엘의 입가에는 잔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준비는 되었나?”

“명령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6군단에 소속된 마법사들 중 가장 선임인 바론 남작의 입가에도 비릿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지루하게 기다리던 때가 왔기 때문이다.

포넬 내전에서는 폭넓게 활약한 마법사이지만, 이번 전쟁에 마법사가 투입된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면 카몬 남작, 마지막 명령은 그대가 상황을 보고 내리도록 하라. 난 기병대와 함께하겠다.”

“예, 자작 각하!”

궁병들의 지원으로 성벽 위의 포넬군의 반격이 다소나마 줄어들자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노예 병사들의 수가 더욱 많아졌다. 하나 이들이 막 성벽 위에 오를 때쯤 궁병들의 지원이 끝나자 다시금 포넬군의 거센 반격이 이어졌다.

단 한 명의 로엔의 병사라도 성벽 위에 오르면 가족들 모두를 몰살시켜 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은 상태였기에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 따위는 도외시한 채 눈을 까뒤집고 극렬하게 저항하였다.

당연히 성벽을 오르던 로엔의 병사들은 다시금 큰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성벽 위에 오른 로엔군이 있었다. 바로 알마리온과 요들이었다. 아무리 거친 공격을 받아도 정령의 도움을 받는 알마리온의 발걸음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최소한 이 자리에서만큼은 아무도 없었다.

“요들! 뒤를 맡아 줘!”

“알았어!”

“막아! 적이 성벽에 오르지 못하게 막아!”

알마리온과 요들이 성벽 위에 오르고 몰려드는 적들을 상대하는 사이 또 다른 로엔의 병사들이 속속 성벽 위에 올라섰다.

“네놈들 가족들을 생각해라! 어차피 저놈들에게 포로가 된다 한들 네놈들은 물론 네놈들 가족들까지도 모두 반역죄로 죽게 될 것이다. 네놈들이 살 수 있는 길은 놈들을 죽이고 승리를 쟁취하는 것뿐이다! 막아라! 놈들을 죽여라!”

강제로 끌려왔고 원해서 적군을 도운 것은 아니었지만 적군을 돕는 행위, 즉 이적 행위를 한 이들에게 주어진 길은 단 하나, 독전관의 말처럼 성벽 위를 오르는 로엔군을 상대로 죽기 살기로 싸워 승리를 쟁취하는 일뿐이었다.

독전관의 이러한 설득은 확실한 효과를 발휘했다. 로엔의 병사들이 성벽에 오르자 잠시 우왕좌왕하던 이들이 다시금 독한 눈빛을 띠고 악에 받쳐 달려들었다.

“후후! 그래, 그렇게 악에 받쳐 싸워라. 조만간 네놈들 모두 나란히 황천길로 갈 것이지만, 그동안 그렇게 악에 받쳐 서로 죽고 죽여라. 후후후!”

“대장님, 퇴각하라는 깃발이 올랐습니다.”

“그래? 알았다. 그럼 다들 퇴각한다.”

“예!”

중간 중간 끼어서 로엔 왕국의 백성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던 포넬군은, 사전에 미리 명령을 받은 대로 퇴각을 하라는 깃발이 오르자 끝까지 강제로 끌고 온 로엔의 백성들을 독전하면서도 자신들은 슬슬 뒤로 물러나더니 어느 순간 성벽 위에서 모두 자취를 감춰 버리고 말았다.

이때부터 성벽 위의 사정은 일방적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독전관의 수는 처음부터 많지 않았다. 문제는 이들이 단지 독전만 한 것이 아니라 전투 지휘를 함께 하고 있던 자들이라는 것이다.

전장에서의 지휘관의 역할은 단지 지휘만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병사들에게 있어서 지휘관이란 지시를 내리는 자이기도 했지만 아울러 자신들을 뭉칠 수 있게 해 주는 구심점이기도 하였다. 아무리 용맹한 병사들이라 해도 장수가 쓰러지게 되면 순식간에 오합지졸이 되는 일이 전장에서는 곧잘 벌어지곤 하였는데, 그 모든 것이 구심점 역할을 하는 지휘관의 부재 때문이었다.

이처럼 훈련을 받은 병사들조차 지휘관의 존재 여부에 따라 전력이 극단적으로 달라지는 전장에서 하물며 강제로 끌어다 놓은 로엔의 백성들이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상하다!’

정신없이 달려드는 적병(?)을 상대하던 알마리온은 어느 순간부터 분위기가 급변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잘 훈련된 병사들만큼은 아니어도 오히려 악에 받쳐 달려드는 적병들은 충분히 무서운 상대였다. 그런 적병들이 어느 순간부터 허둥거리고 슬슬 꽁무니를 빼기 시작한 것이다.

‘지휘관들이 보이지 않는다!’

병사들을 지휘하는 지휘관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지만 어쨌든 조금 전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적병들은 그만큼 상대하기 쉬웠다.

“적의 지휘관들이 보이지 않는다! 적의 지휘관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전투 중에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을 동료에게 알리는 한편, 동시에 적으로 하여금 혼란을 가중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행동이었다.

“적의 지휘관들이 도망갔다! 적의 지휘관들이 모두 도망갔다!”

효과는 확실했다. 포넬의 병사들은 적을 상대하기보다는 오히려 고개를 돌려 지휘관을 찾았고, 자신들을 지휘하던 지휘관들이 모두 없어졌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는 조금 전까지 보여 주었던 악착같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으악!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우린 포넬의 병사들이 아닌 로엔의 백성들입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저흰…… 으악!”

독전관들이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성벽 위에 올라서 있던 강제로 끌려온 로엔의 백성들은 자신들이 포넬의 병사가 아닌 로엔의 백성들이라는 것을 밝히기 시작했다.

하나 이미 반쯤은 정신이 나가 있기는 로엔의 병사들도 다를 것이 없었다.

성벽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 바위, 끓는 물과 기름. 그것을 뚫고 간신히 성벽 위에 오르면 악착같이 달려드는 포넬의 병사들로 인해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 이곳까지 왔으니 제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놈이 더 비정상적인 놈일 것이다. 결국 무기를 버리고 투항을 하는, 포넬 병사들의 옷을 입고 있는 로엔의 백성들은 이들 병사들에 의해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갔다.

“요들! 대장! 날 따라와요!”

“알았어!”

“그래!”

뭔가 함정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 알마리온은 한센과 요들을 뒤따르게 하고는 성벽을 빠져나가기 위해 이동하였다.

“드디어 성벽을 장악한 것 같습니다!”

“아직 속단하긴 이르네. 속히 지원부대를 투입하도록 하게.”

“예, 백작 각하!”

멀리서 전투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로엔 왕국군의 지휘부는 지난 한 달여 동안 골치를 썩여 오던 타론 성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자 다들 크게 고무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한껏 치솟은 사기는 얼마 가지 않았다.

쾅! 쾅!

갑자기 거대한 폭음과 함께 성벽 위에서 거대한 화염이 치솟았다.

“으악!”

“으악!”

멀리서도 갑작스러운 화염에 놀란 병사들이 내지른 공포에 가득 찬 비명이 지휘부가 있는 곳까지 뚜렷하게 들려왔다.

“뭐, 뭐야!”

“마, 마법! 마법인 것 같습니다!”

“마법? 하면 적에게 마법사들이 존재하였단 말인가!”

나빌 백작을 비롯한 지휘부에 남아 있던 모두는 적에게 마법사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아무래도 그것이 사용된 것 같습니다.”

“그것이라니? 자네 뭐 아는 것이라도 있는 것인가?”

수백 년을 내전을 겪은 포넬은 궁극의 파괴적인 힘인 마법을 전장에서 활용할 방법을 찾기 위해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러한 노력은 오랜 동안 계속되었던 포넬의 내전을 종식시키면서 일약 포넬 최고의 권력자가 된 필리프 폰 고메즈 대공에 의해 일대 변혁이라 해도 좋을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필리프 폰 고메즈 대공은 인간과 드워프 사이에 태어난 하프 드워프였다.

인간이 세상의 주역이 되면서 유사 인종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인간들의 노예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다. 마법과 뛰어난 궁술까지 겸비한 엘프들의 경우야 그 힘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확실히 지켜 오고 있지만, 그 외의 유사 인종들의 운명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중에서 노예로서 가장 인기 있는 유사 인종이 바로 드워프들이었다. 타고난 장인들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고, 만들었다 하면 예술품이 아닌 것이 없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드워프들의 손재주는 뛰어났다.

그런 드워프의 피를 받고 태어난 고메즈 대공 또한 어려서부터 뛰어난 손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마법사의 눈에 띄었고 마법사가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만들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그가 획기적인 물건, 그러니까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을 만들게 된 것은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때로, 실로 우연히 발견한 이 방법으로 인해 그는 노예 신분에서 벗어났고 결국은 포넬 왕국을 평정할 수 있었다.

“하면 그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은 마법사이기만 하면 서클에 상관없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예. 소관도 친척의 말을 듣고 그런 물건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는데, 오늘 보니 소관의 친척의 말이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럴 수가……. 그렇다면 큰일 아닌가! 앞으로 전투 때마다 그런 가공할 물건을 사용한다면…….”

“아마 그러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장인으로 알려진 드워프들이라도 10개를 만들면 1개 정도만 제대로 작동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말이긴 했지만 마법 아이템으로 인해 앞으로의 행보에 큰 지장을 받게 될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이들이 막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또다시 몇 차례의 거대한 폭음과 함께 성벽 위에 이어 성벽 아래쪽에서도 거대한 화염이 솟구쳐 올랐다.

연이어 터진 강력한 화염에, 어렵사리 점령하는 데 성공한 성벽 위와 성벽을 기어오르기 위해 잔뜩 성벽 가까이에 몰려 있던 노예병들과 징집병들 거의 모두가 삽시간에 화염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화염이 가라앉기 시작할 때 두껍게 닫혀 있던 성문이 활짝 열리더니 안에서 포넬 왕국의 기병대가 줄줄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지, 진을 갖춰라! 진을 갖추란 말이다. 퇴각하지 마라! 누가 퇴각하라고 했나!”

“물러서는 놈들은 내 칼에 죽을 것이다! 물러서지 마라!”

두 번의 강력한 화염 속에서도 살아남은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성안에서 적의 기병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자 그에 대항하기 위해 진을 갖추려 했지만, 이러한 외침과 몸부림은 헛된 것들이었다. 이미 공포에 휩싸여 넋을 놓거나 정신이 반쯤 나가 버린 병사들에게 이러한 외침이 먹힐 리가 없었다.

그나마 정신이 조금이라도 남은 병사들은 살고 싶다는 절박함에 눈을 까뒤집고 무기를 버린 채 무작정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하나 수만 명이 투입된 전투에서 도망을 간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헉! 미, 밀지 말란 말이야!”

“으악! 사, 살려 줘! 으악!”

전장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상황은 의외로 전투가 치열한 순간이 아니라 전투에서 패배한 쪽이 퇴각을 하는 과정에서 벌어진다. 때문에 군을 지휘하는 모든 지휘관이 가장 어렵게 여기는 일이 바로 퇴각이었다.

피해를 최소화하여 퇴각을 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질서였다.

희생을 전제로 하여 일부가 적을 가로막는 동안 나머지 병력은 질서 정연하고 빠르게 물러서면서도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 적에게 일격을 가하는 반격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 바로 퇴각이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로엔군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성을 잃은 채 오직 자신만 살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도망치는 병사들을 통제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병신 같은 것들! 병사들을 통제하란 말이야!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것들의 목을 쳐서라도 병사들을 통제해!”

노예병들과 징집병들 1만으로 구성된 12군단 군단장인 칼 폰 몬테른 자작의 입에서 거친 욕지거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군단장님! 이젠 어쩔 수가 없습니다! 군단장님께서도 퇴각을 하셔야 합니다! 자칫 아군에 휩쓸릴 수도 있습니다!”

부관이자 가문의 기사이기도 한 쟝이 퇴각을 권고해 왔다.

“퇴각한다! 먼저 기병대와 기사단 그리고 남겨 둔 예비 병력으로 하여금 방어진을 구축하여 본진이 퇴각할 시간을 벌도록 하라! 그리고 수습할 수 있는 병사들도 수습하고 말이야.”

“예!”

노예와 징집병으로 구성된 12군단이라고 하지만 기사와 기병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몬테른 자작은 이들 기사와 기병들, 그리고 예비로 남겨 놓았던 1개 천인대로 하여금 아군의 퇴각을 돕고 적의 진격을 가로막을 방어진을 구축하는 한편 눈이 뒤집힌 채 도망치고 있는 병사들을 수습하라고 하였지만, 그 수습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지휘관은 없었다.

통제되지 않는 병사들은 오히려 적보다 더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다. 결국 몬테른 자작의 명령은 통제에 따르지 않는 병사들이라면 가차 없이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냉정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필요한 명령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상황에 따라 자신의 팔다리조차도 끊어 내 버려야 하는 냉철함을 갖춰야 하는 것이 바로 전장에서의 지휘관의 자질이었다.

“서둘러라!”

“예! 군단장님!”

“요들? 대장?”

화염이 가라앉자 알마리온은 서둘러 요들과 한센을 챙겼다.

“…….”

“지, 지금 그게 뭐였지?”

완전히 얼이 빠져 있는 요들과는 달리, 전장에서 수년을 굴러 온 한센은 그래도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마법 같아요.”

“마법?”

“예. 전에 주인님 댁을 방문하셨던 마법사님들이 마법을 보여 주신 적이 있는데, 그때도 이런 현상을 본 적이 있어요.”

“마, 마법이라면?”

마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해도,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다들 알고 있었다.

물론 말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거짓도, 허풍도, 부풀림도 있었지만 마법이 공포의 대상이라는 것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살아남은 것은 우리뿐이야?”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요들이 물었다. 성벽 위를 돌아다보았지만 그곳에는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데 뒤엉켜 싸우던 아군의 모습도, 그리고 적군의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발생한 엄청난 화염에 모두가 단번에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으으.”

“…….”

겁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 요들이었지만 성벽 위를 가득 메우고 있던 아군과 적군이 순식간에 모두 재로 변해 사라져 버리자 저도 모르게 바지에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아니, 비단 요들뿐만이 아니라 경험 많은 한센조차도 지금의 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는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한센과 요들이 그 엄청난 화염 속에서도 몸에 단 하나의 상처도 없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정령술사인 알마리온이 무리에 무리를 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아무리 퍼펙트 스피릿 에이전트라는 대단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하급 정령만을 다룰 수 있는 하급 정령술사.

그런 그가 살아 있는 사람을 단번에 한 줌 재로 만들어 버릴 정도의 화염 속에서 자신 말고도 또 다른 사람을 구해 낸다는 것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실상 지금 알마리온의 상태는 겉보기와는 달리 상당히 좋지 않은 상황으로, 무리를 해서 정령을 소환한 때문에 몸 안의 마나가 잔뜩 뒤틀려 있었고 이로 인해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온몸을 엄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억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성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엄청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함성 소리가 성을 뒤흔들었다.

이 소란에 한센이 정신을 차렸는지 여전히 떨리는 몸이긴 해도 고개를 슬쩍 내밀어 성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비록 배운 것은 많지 않았지만 풍부한 군 경험을 통해 쌓아 온 살아 있는 지식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려 주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가 주어졌다면 어쩌면 그도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젠장!”

성의 안팎을 살피던 한센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왜 그래요, 대장?”

“당했어! 그것도 철저하게!”

“……!”

비록 밖을 살펴보진 않았지만 지난 반년을 전장에서 굴러 온 알마리온과 요들 또한 한센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내 알아들었다.

“어, 어떻게 할 겁니까, 대장?”

“뭘? 뭘 어떻게 해?”

“여기 계속 이렇게 있다가는…….”

요들의 말처럼 로엔군이 포넬군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진 것이라면 분명 이곳에 남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우리 셋이서 이곳을 탈출하는 것도 불가능해. 젠장!”

“그, 그럼 어쩌란 말이에요! 여기 앉아 있다 포로로 잡혀 죽잔 말입니까? 대장도 저놈들 포로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지 않습니까!”

포넬군의 잔인함은 이미 치가 떨릴 정도로 경험한 이들이었다. 전쟁 중에 포로가 되면 경우에 따라서는 처형을 당하긴 하지만 대부분 별도의 장소에 모아 두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 노예로 처분하는 것이 상례였다.

전쟁이라는 것은 늘 많은 재물이 소모되는 일이었고, 때문에 전쟁 중에 획득한 포로는 전쟁을 벌임으로써 소모된 재물을 충당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하나 포넬군은 대부분의 로엔군의 포로를 잡는 족족 귀나 코를 베어 낸 후 목을 치거나, 아니면 목을 매달아 처형하였다. 이처럼 포넬군이 포로들을 잔인하게 대하는 것은 로엔군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만들기 위한 일이었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특별한 재주가 있는 포로들로, 이들의 경우에는 모두 포넬로 강제로 끌려갔다.

상황이 이러하니 포로가 될 처지에 놓이게 된 요들이 치를 떠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지금 이 상황에서 나보고 어쩌라고!”

“아 씨! 대장이잖아! 대장이면 이런 상황에서도 뭔가 방법이 있을 것 아냐!”

“아니, 그런데 이놈이.”

“그만! 두 사람 다 진정해요!”

바락바락 대드는 요들의 행동에 화가 치민 한센이 요들의 멱살을 틀어쥐려고 할 때였다.

“대장! 이런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한 것은 대장 아니었나요? 그리고 요들 너도 대장한테 그러면 어떻게 해!”

“그거야…….”

“쳇! 왜 나한테 화를 내고 그래! 그럼 대장이란 작자가…….”

“아니, 그런데 정말 이놈이.”

“그만! 두 사람 다 그만둬요! 그럴 힘이 남았다면 이곳을 탈출할 때나 쓰라고요!”

평소에 화라는 것을 내는 일이 없던 알마리온이 정색을 하며 화를 내자 한센과 요들은 그만 찔끔했다.

“한데 너 괜찮은 거냐? 어째 안색이 너무 창백하다. 게다가 식은땀까지.”

그제야 알마리온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는지 한센이 걱정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모르겠어요. 아까 그때 어딘가 다쳤나 봐요.”

“어디? 어디!”

요들 또한 알마리온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는지 그의 몸 곳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피가 나는 곳은 없는데…….”

“속을 다친 거다.”

“속을 다쳐요?”

“그래. 아무래도 알 이 녀석이 우리를 구하기 위해 자기 몸으로 우릴 감쌌을 때 그 충격으로 속을 다친 것이 분명해.”

성벽 곳곳에 설치하여 놓은 마법 아이템이 폭발하면서 발생한 화염과 충격은 하급 정령술사인 알마리온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강력한 것이었다.

그나마 폭발 당시 이들의 위치가 성벽에서 성안으로 내려갈 수 있는 통로 근처였기에 조금이라도 화염과 충격에 노출되는 시간을 줄여 주었고, 한센과 요들의 뒤를 알마리온이 정령을 동원하여 막아 준 때문에 두 사람은 무사할 수 있었지만 그 충격과 무리한 정령의 소환으로 인해 알마리온은 제법 심각한 내상을 입게 된 것이다.

“알…….”

“난 괜찮아. 조금만 이렇게 쉬면 괜찮아질 거야. 그보다 대장, 어서 이곳을 빠져나갈 계획부터 세워야 하지 않겠어요?”

자신이 걱정되는지 눈에 그렁그렁 눈물까지 맺힌 요들의 손을 맞잡으면서 힘들게 웃어 보인 알마리온이 한센을 돌아보며 탈출할 계획을 세워 보라 재촉하였다.

“알았다. 좀 더 살펴보도록 하마.”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최악의 상황이라고 해도 냉정하게 상황을 직시하다 보면 빈틈을 발견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상한데?”

“이상하다니 뭐가요?”

다시 한 번 몸을 움직여 성의 안팎을 살펴보던 한센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잘 이해가 안 되는 것인지 연방 고개를 갸웃거렸다.

“맞아! 저놈들, 이 성을 버리고 탈출하는 것이야!”

“그게 무슨 소리요, 대장?”

자신들을 구하느라 몸을 다쳐 힘들어하는 알마리온을 부축하고 있느라 성 안팎의 사정을 전혀 보지 못한 요들이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 물었다.

“확실해! 저놈들은 성을 버리고 도망을 가기 위해 이런 짓을 벌인 것이야!”

“저놈들이 뭐가 아쉬워 성을 버린단 말입니까?”

당연한 반박이었다. 지금까지 계속된 공격 속에서도 굳건히 성을 지켜 온 적들이었다. 게다가 조금 전 자신들도 당했듯이 소문으로만 듣던 무시무시한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까지 있는 적이 무엇이 아쉬워서 성을 버리고 도망을 간단 말인가.

“그거야 내가 어찌 알아! 다만 저놈들, 이 성을 버리고 퇴각하기 위해 이 짓거리를 벌인 것은 분명해! 성안을 보라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조금 전 당했던 그 엄청난 마법 공격에 한센이 반쯤 미쳐 버린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요들은 부축하고 있던 알마리온을 조심스럽게 벽에 기대게 한 채 창문을 통해 성 안쪽을 살펴보았다.

“어? 저, 저것은?”

“어때? 그래도 내 말을 안 믿겠냐?”

“그, 그것이…….”

성 안쪽을 살펴보던 요들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인지 어리벙벙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왜? 무슨 일인데 그래?”

“그게 말이지…….”

“아직 성을 빠져나가지 못한 놈들 중에 수레 하나 가득 물자를 실은 수송대 놈들이 잔뜩 있다.”

“예? 그게 정말인가요?”

“맞아. 대장 말처럼 수레 하나 가득 물자를 실은 수송대 놈들이 아직 남아 있어.”

‘그렇다면 아까 우리가 성벽 위에 올라왔을 때, 적병들이 했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단 말인가?’

한센과 요들의 말을 듣고 있던 알마리온은 그제야 자신들이 성벽 위에 올라왔을 때, 적병들 사이에서 자신들은 포넬의 병사들이 아니라 억지로 끌려온 로엔의 백성들이라 하던 말이 떠올랐다.

‘맞아! 어느 순간 적의 지휘관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어. 그러한 때에 지휘관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야.’

성벽을 빼앗기면 성 전체의 방어력이 크게 취약해지게 된다. 아니, 성벽을 빼앗긴다는 것은 이미 성을 빼앗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일이었다. 때문에 성을 빼앗으려는 쪽도, 이를 지키려는 쪽도 절대 물러설 수 없는 곳이 바로 성벽이었다. 그런 중요한 상황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이 없다?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막 성벽 위를 점령해 나갈 때 바로 그 엄청난 폭발이 있었어. 때문에 아군의 대부분이 날아가 버렸지만 반대로 적군도 많은 피해를 입었어. 설사 그것을 각오하고 벌인 일이라 해도 지금쯤이면 다시금 병사들을 성벽 위로 올려 보내야 정상이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대장.”

“왜?”

“아까 성벽 위에 올랐을 때, 적병들 중에서 자신들은 포넬의 병사가 아니라 로엔의 백성들이라고 떠들던 자들이 있었던 것 기억해요?”

“그런 일이 있었나?”

“맞아! 나도 들었어! 분명 나도 들었어!”

한센은 잘 듣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요들은 분명 자신도 그런 말을 들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확실해?”

“분명하다니까요! 나도 분명 그런 말을 들었어요! 그때야 정신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분명 나도 그런 말을 들은 것 같다고요.”

“게다가 폭발이 있기 직전에 성벽 위에는 적병을 지휘하던 지휘관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맞아! 맞아!”

“흠……. 그렇다면…… 확실히 놈들이 파 놓은 함정에 아군이 크게 당한 것이 맞는 것 같다.”

“이런 처죽일 놈들!”

쾅!

함정에 빠져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생사고락을 함께하던 전우들 모두를 잃게 되었다는 사실에 요들은 주먹으로 벽을 치며 분해하였다.

“그럼 이젠 어떻게 해야 하는 거요, 대장!”

요들이 한센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물었지만 한센은 대답 대신 알마리온을 바라보았다.

경험은 물론, 전장의 상황을 판단하는 것에는 한센을 따를 자가 없었지만, 막상 중요한 순간에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은 대부분 알마리온이었다.

“일단은 이곳에서 상황을 지켜보도록 해요. 대충 저들이 성을 모두 빠져나가려면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 것 같아요?”

섣부른 움직임은 금물이었다. 게다가 지금 자신의 몸 상태로는 걷는 것조차 힘이 든 상태. 조금이라도 몸을 회복하지 않으면 이들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짐만 될 뿐이었다.

‘우선은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해 지나치게 많이 써 버린 마나를 보충해야 해.’

마나 수련법을 알고 있었다면 이런 순간에도 빠르게 몸을 돌보고 지나치게 많이 써 버린 마나를 보충할 수 있었겠지만, 알마리온은 마나 수련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때문에 무작정 휴식을 취해 부족해진 마나가 다시금 채워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동안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꾸준히 정령을 사용하면서 전보다는 마나의 양도 많이 늘었고, 또 사용한 마나가 복구되는 시간도 짧아져서 다행이다.’

지난 반년 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전장에 동원된 때문에 그만큼 정령을 소환하여 사용하는 일도 잦아졌다. 덕분에 지금은 자작가에 있었을 당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령을 소환하는 일이 수월해졌고 또한 정령을 소환하느라 소모되는 마나의 회복에 걸리는 시간 또한 많이 짧아져 있었다.

“대략 1∼2시간 정도는 더 걸릴 것 같다.”

다시 한 번 성의 안팎을 살펴보던 한센이 대답했다.

“그럼 적이 성을 버리고 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네?”

어차피 적들이 성을 버리려고 한 이상, 적이 모두 떠나갈 동안 그냥 죽치고 기다렸다가 성을 빠져나가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 요들의 표정이 순간 밝아졌다. 하나 알마리온의 생각은 달랐다.

“그냥 버리고 간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

“아니라니! 하면 또 다른 함정이 남아 있다는 거야? 그걸 알 네가 어떻게 아는 거지?”

“마법사까지 있는 적이 그냥 성을 포기하고 가겠어? 게다가 여긴 소렌토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중요한 성인데?”

“그건 알의 말이 맞다. 이곳 타론 성은 아군이나 적군에게 매우 중요한 성이야. 그런 곳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진 않아. 무엇보다 적들은 여전히 군단급 전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뭐야? 그렇다면!”

“알의 말처럼 함정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

“문제는 적들이 어떤 함정을 만들어 놓았냐는 것이지.”

“맞아! 마법! 마법일 거야! 조금 전 우리가 당했던 그런 마법이라면…….”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지, 말하는 도중에도 온몸을 부르르 떠는 요들이었다. 만약 정말로 함정이 만들어져 있다면 요들의 말처럼 가능성이 가장 높은 함정은 조금 전 보여 주었던 한순간에 살아 있는 사람을 재로 만들어 버린 그 가공할 마법을 사용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아냐. 마법사만 이곳에 남겨 놓고 떠날 리가 없어. 마법사는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존재가 절대 아냐.’

마법사란 존재는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 세상은 온통 마법사들로 득시글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예전에 주인님 댁에서 보았던 그 마법사는 60이 다 된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1서클 마법사였다. 당시 주인님께서도 마법사라는 존재는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라고 할 정도로 되기 어렵지만, 설사 마법사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 해도 평생을 노력해야만 높은 수준의 마법사가 될 수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한데 오늘 본 정도의 화염을 일으키려면…….’

어림짐작하기에도 예전에 보았던 1서클 마법사가 보여 주었던 마법과 오늘 경험한 마법의 수준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그런 엄청난 마법을 발휘하는 마법사를 전장에 남겨두고 모두 떠나간다는 것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었다.

‘뭘까? 분명 뭔가 냄새가 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적이 남겨 놓은 함정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질 않자 마음이 답답해졌다.

“함정이 있든 없든, 그것은 나중 문제다.”

한센의 말이 정답일 수도 있었다. 설사 이곳에 또 다른 함정이 만들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들처럼 최하급 군관이나 노예 출신 병사들이 걱정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자신들은 그저 적들이 모두 떠나갈 때를 기다렸다가 성을 빠져나가면 그만인 일이었다.

“지금은 우선 네 몸부터 챙겨라. 젠장! 이럴 때 포션 한 병만 있어도 금방 네 몸이 나을 수 있게 할 텐데.”

“쳇! 그러게 그동안 모은 재물로 그런 것 하나 사 놓지 않고 뭐 하셨소? 그랬다면 단번에 알의 몸을 낫게 할 수 있잖아요!”

“인마! 너 포션 한 병 값이 얼마인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

아무리 엉터리로 만든 포션이라 하더라도 한 병에 무려 2골드나 하는 포션이었다.

“훗! 두 사람 다 그만해요.”

눈만 마주치면 툭탁거리는 두 사람이었다. 나이로만 따지면 한센이 조금만 일찍 혼인을 했어도 알마리온이나 요들 또래의 자식이 있을지도 모를 나이였지만 두 사람은 마치 또래의 친구처럼 눈만 마주치면 툭탁거려 주변 사람들을 웃게 만들곤 하였다.

“그리고 난 조금 쉬면 괜찮아져요. 지금도 아까보다는 많이 좋아졌잖아요?”

확실히 휴식을 취하자 사용했던 마나가 보충되기 시작하면서 알마리온의 안색이 전보다는 조금은 안정되어 보였다. 하나 여전히 그의 상태는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듣고 보니 그렇게 보이기도 하지만…….”

“뭐가 그렇게 보인다는 거요? 아직도 식은땀 흘리는 것 안 보이쇼?”

“어휴! 내가 정말 이놈을 다른 백인대로 내쫓든지 해야지 원. 사사건건 시비야. 시비가!”

“후훗!”

하는 말마다 딴죽을 걸어 대는 요들의 행동에 화가 치미는지 제 손으로 가슴을 치며 벌떡 몸을 일으킨 한센이 성 밖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제대로 당했어. 이러다가 12군단은 완전히 괴멸되겠어.”

노예 병사들과 중간 중간에 충원된 훈련도 되지 않은 징집병들로 구성된 12군단의 전투력이라는 것은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나마 오늘 전투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적의 마법 공격에 태반의 병사를 잃게 된 12군단으로서는 마법 공격에 당한 충격으로부터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곧바로 이어진 포넬군의 반격에 사실상 적의 전과를 올려 주는 이상의 역할을 기대하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나마 12군단장인 칼 폰 몬테른 자작이 남은 병력으로 물밀듯이 성을 박차고 나온 포넬군을 저지하기 위해 용전분투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12군단은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빠져 있었다.

“쳇! 마음 아프게 뭐하러 그런 걸 지켜보는 거요?”

“인마. 그래도 봐 둬야 나중에 도망갈 곳을 찾을 수 있지 않느냐.”

한센도, 요들도 잔뜩 우울해진 목소리였다.

“3군단은 어떤가요?”

정예 병력인 3군단의 상황이 궁금해진 알마리온이 성 밖의 살풍경을 지켜보고 있는 한센에게 물었다.

“그놈들은 대충 살아남을 것 같다. 우리 군단장이 몸으로 때우는 동안 부리나케 도망가고 있으니 말이다.”

“다행이네요.”

“다행은 뭐가 다행이야! 나쁜 놈들 같으니라고! 지들만 살겠다고 꽁지 빠져라 도망가고 있는데!”

투덜거리는 요들도 자신의 말이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나 알면서도 인간 취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예들로 구성된 12군단을 이처럼 방패막이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이성보다 더 강했기에 원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슬슬 뒤에 남은 놈들도 성을 빠져나가기 시작하는군.”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는지 성안에 남아 있던 적의 보급 부대가 하나씩 둘씩 성을 빠져나가기 시작하였다.

“힘들게 더 지켜봐서 뭐해요? 그냥 앉아서 죽치다가 아무 소리 안 나면 조용히 빠져나가자고요.”

“그래. 그러자.”

성 밖의 상황을 지켜보던 한센도 아군이 맹수에게 쫓기는 사냥감처럼 이리저리 도망가는 모습에 맥이 빠져 버렸는지 그 자리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성의 안팎에서는 함성 소리와 수레가 움직이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지만 이들 세 사람 사이에는 죽음과도 같은 침묵만이 감돌았다.

한센과 요들이 완전히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동안에도 알마리온은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이냐. 내가 적의 장수라면 설사 어떤 이유가 있어 이곳을 버려야 한다고 해도 이대로 이곳 타론 성을 이렇게 쉽게 버리진 않을 것이다.’

군사 요충지인 타론 성에서 버티면 버틸수록 자신들에게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버렸다는 것은 확실히 이곳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 그렇기 때문에라도 최대한 이곳에서 버텨야 하는 것이 적으로서도 유리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런 엄청난 능력을 지닌 마법사까지 보유한 적군이 이 정도로 물러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 어쩔 수 없다. 아직은 마나가 충분히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상황을 살펴봐야겠어.’

이미 어느 정도는 이곳 타론 성에 함정이 만들어져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알마리온은 정령을 소환하여 보다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실프.’

아직은 마나가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금 정령을 소환하자 확실히 온몸이 부서지는 것처럼 고통이 밀려왔다.

-…….

‘이 성안에 마법사나 마법에 관계된 것이 있으면 좀 찾아 줘. 조심해야 해. 혹시라도 마법사가 있다면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마. 네가 들킬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알았지?’

어려서 단 한 번 본 것이었지만 마법사란 늘 신기한 물건을 많이 가지고 다니는 자들이라는 것을 기억해 낸 알마리온은 실프에게 마법사나 마법에 관계된 무엇인가가 있는지 살펴 달라고 부탁하였다.

한데 이것이 결정적으로 포넬군의 함정을 깨뜨리게 되는 것은 물론, 포넬의 비밀 병기인 마법 아이템까지 획득하게 되는 행운을 가져다주리라는 것을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

고개를 끄덕여 보인 실프가 작은 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대장, 여길 벗어나면 어떻게 할 거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아군을 찾아가서 복귀해야지.”

“진심이우?”

“그럼 그것 말고……. 너 설마 탈영할 생각이냐?”

“…….”

“하긴 어쩌면 그것이 너희 입장에서는 더 좋을지도 모를 일이지.”

탈영을 하다 발각되면 즉결 처분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노예 병사들인 알마리온과 요들의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전장에 끌려다니다가는 설사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과연 이들에게 약속했던 것이 지켜질지도 의문인 상황에서 끝까지 군에 버티고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대장은 어떻게 할 거요? 끝까지 남아 있을 거요? 아니면…….”

“인마, 내가 도망간다고 해서 뭘 하고 살 수 있겠냐? 너희 나이에 군에 끌려와서는 지금까지도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 알잖아.”

“하긴. 알, 넌 나랑 같이 갈 거지?”

“…….”

“알? 뭐 해? 혹시 몸 상태가 더 안 좋아진 거야?”

“아! 아냐. 뭣 좀 생각하느라고.”

“이런 판국에 생각은 무슨……. 넌 다 좋은데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이라고.”

“누구처럼 머리를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는 것보단 훨씬 나은 일이지.”

“뭐라고요!”

“조용해! 이러다가 들키면 모두 끝장난다는 것 몰라서 그렇게 목소리를 높여!”

“쳇! 그러게 누가 가만있는 사람 성질 돋우래요!”

이런 상황에서도 또다시 투탁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쉴 때 실프가 돌아왔다.

‘뭐? 마법사는 전혀 없다고?’

-…….

성안 곳곳을 살펴보고 돌아온 실프가 성안에는 마법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뭐? 마법사는 없는데 이상한 물건들이 있다니?’

하급 정령과는 직접 대화를 나눌 수가 없고, 지금처럼 의지를 통해 간단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알았어. 그럼 놈에게 부탁해 볼게.’

마법사는 없지만 마법 기운이 감도는 이상한 물건들이 성 곳곳에 설치되어 있음을 알게 된 알마리온은 대지의 하급 정령인 놈에게 성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는 이상한 물건들을 모두 수거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놈, 그것들을 모두 수거해서 네가 보관해 줘. 위험한 것들일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야 해.’

놈은 고개를 몇 차례 끄덕여 보인 후에 다시금 사라졌다.

“알! 너 정말 괜찮겠어? 안색이 다시 안 좋아지잖아!”

툭탁거리던 한센이 다시금 안색이 창백해져 있는 알마리온의 모습에 깜짝 놀라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괘, 괜찮아요.”

사실 전혀 괜찮지가 않은 알마리온이었다. 단지 정령을 소환하는 것이 아닌, 정령으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시키게 되면 그만큼 마나의 소모가 빠르고 많았다.

가뜩이나 지나친 마나의 소비로 위험했던 상황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어 그나마 조금 나아졌던 그가 다시금 정령을 부리게 되면서 다시금 상태가 안 좋아지게 된 것이다.

“고, 곧 괜찮아질 거예요, 대장.”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한센과 요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알마리온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워, 놈.’

그러는 사이 놈이 마법의 기운이 감도는 물건들을 모두 수거하여 땅속 깊이 묻어 버렸다고 전해 오자 알마리온은 서둘러 정령을 정령계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정령을 돌려보내자 끊어질 듯 아파 오던 창자도 이내 괜찮아지기 시작했고, 절로 식은땀이 흘러나오게 만든 고통이 사라지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정말 괜찮은 것이냐?”

“네. 정말 이젠 괜찮아요.”

확실히 조금 전까지 파리하기만 하던 알마리온의 안색이 빠르게 좋아지는 모습을 보자 조금은 안심이 되는 한센이었다.

“그래도 모르니까 무리하지 마라. 알았지?”

“예, 대장. 그보다 적들이 모두 성을 빠져나가면 성안을 샅샅이 뒤져 봐야 할 것 같아요.”

“성을? 왜?”

“아까 적병의 옷을 입고 있었던 자들 말이야, 그들이 정말로 억지로 이곳에 끌려와 싸운 자들이라면 분명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악에 받쳐 싸울 수밖에 없게 만든 이유가 있었을 거야.”

이미 정령을 통해 성의 지하에 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능성 있는 일이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니잖아요.”

“그렇지 않아, 요들.”

“그렇지가 않다니?”

“혹시라도 이 성안에 로엔의 백성들이 갇혀 있다면 우리가 구해 주어야 해.”

“왜? 무엇 때문에?”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두 가지라니요?”

“첫째는 혹시라도 이곳에 함정이 만들어졌다면, 가령 아까와 같은 그런 마법이 다시 한 번 터진다면 분명 이 성은 무너지고 말 거다. 그렇다면…….”

“으음.”

“설사 그렇지 않다 해도 아군이 이 성을 되찾은 이후에 그들이 발견되면 의심을 받을 수도 있어.”

“의심이라니요? 무슨 의심을 말이에요?”

“적을 위해 부역을 했는지를 말이다.”

“아!”

힘없는 백성들이야 그저 당장 죽기 싫어 적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였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백성들의 행동은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로 그것이 확인되면 곧바로 처형을 당하거나 운이 좋다 해도 노예로 팔려 나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증거가…….”

“증거? 훗! 이 녀석아, 위에 놈들이 언제 증거 따지면서 사정 봐줬냐?”

“하긴.”

“이제 알겠지? 왜 알이 혹시라도 이곳에 갇혀 있을지 모를 백성들을 풀어 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지?”

“쳇! 알았다고요! 한데 이 난리에 그냥 풀어 준다고 해서 제대로 살아남을 백성들이 있을까?”

“없어도 할 수 없지. 그래도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몰살당하거나 얼마 후에 노예로 팔려 나가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알겠어요. 그럼 저놈들이 모두 나가면 당장 찾아보도록 하자고요. 한데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알?”

“우리도 성을 나가야지.”

“그게 좋겠다.”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하자고.”

앞으로 할 행동을 결정한 이들 세 사람은 몸을 숨긴 채 성안의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1개 군단의 병력이 일거에 성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좀 어떠냐?”

“많이 좋아졌어요, 대장.”

포넬군이 성을 거의 빠져나갔을 무렵, 이젠 움직여야 할 때라고 판단한 한센이 먼저 알마리온의 몸 상태를 챙겼다.

“움직일 수 있겠어?”

“응. 충분해.”

“좋아. 그럼 움직이도록 한다. 나, 요들, 그리고 마지막이 알 너다. 알겠지?”

“예, 대장.”

“알겠수.”

한센이 먼저 움직이고 그 뒤를 요들과 알마리온 순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은 얼마 가지 않아서 성벽 위로 통하는 계단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병사들과 만났다.

“으악!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저, 저희는 포넬 병사들이 아닙니다. 나리! 제발 살려 주십시오!”

이미 잔뜩 겁을 집어먹은 이들은 저항을 하기보다는 알마리온 등을 보자마자 이내 손에 쥐고 있던 어설프게 만들어진 무기를 내버리고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항복하였다.

“너희가 전부냐?”

“모, 모르겠습니다, 나리!”

“확실히 말해! 너희가 전부냐?”

한눈에 보아도 이들은 포넬의 정규군들이 아니었다. 만약 저항을 하려 하였다면 설득을 하였겠지만, 이처럼 잔뜩 겁에 질려 무조건항복을 하는 자에게는 설득보다는 강하게 나가는 것이 통제하기가 쉬운 일이었다.

“그, 그렇습니다, 나리.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소인네들에게는…….”

“닥쳐! 지금이 네놈들 하소연이나 늘어놓을 때라고 생각하나!”

“아이고, 나리. 제발,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제발…….”

“좋다. 네놈들 목숨을 살려 주겠다. 하지만 이제부터 내 명령에 따라야 한다. 어쩌겠느냐?”

한센의 말에 항복을 한 사내들은 잠시 저들끼리 시선을 마주쳤다. 하지만 이들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따, 따르겠습니다, 나리.”

“좋아! 그렇다면 무기를 다시 들고 내 뒤에 서라. 알! 요들! 만약 이놈들이 허튼수작을 부리면 가차 없이 베어 버려라. 알겠나?”

“예, 대장!”

“걱정 마시오! 조금이라도 허튼수작을 부리면 단번에 목을 쳐 버리겠소!”

당장이라도 목을 베어 버릴 듯이 거칠게 행동을 하는 요들의 모습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자들이 멈칫거리자 한센이 다시 한 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뭣들 하는가! 어서 무기를 들지 않고!”

“예? 예, 나리…….”

성벽 위에 올라 있던 자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라 생각되었지만 의외로 살아남은 자들도 꽤 되었는데, 이들은 독전관이 사라지자 그 틈을 이용하여 성벽 위에서 도망친 자들이었다.

그렇게 포넬군이 모두 성을 빠져나갈 동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수습한 장정들의 수는 족히 삼십여 명이나 되었다.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하지만, 너희도 살고 이곳에 갇혀 있는 너희 가족들까지 살리고 싶다면 내 명령에 따라 확실히 움직여야 할 것이다. 알겠나!”

“예, 나리.”

“좋아. 가자.”

마지막으로 딴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다짐을 받은 한센은 그들과 함께 성의 곳곳에 갇혀 있던 로엔의 백성들을 찾아내 모두 풀어 주었다.

훗날, 이들 세 사람 덕분에 풀려나 화를 면한 인근 지역 백성들은 이 세 사람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해 각 마을마다 알마리온, 한센 그리고 요들을 상징하는 상징물을 만들어 입구에 세워 놓았으며, 매년 이들에 의해 구함을 받은 날이 돌아오면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술과 음식을 차려 놓고 축제를 벌이는 전통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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