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2017년 12월 24일.
이사한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자고 해서, 조성현 후보가 당선된 이튿날에 새로운 곳으로 이사했다.
장소는 평창동의 단독주택.
청와대에서 차량으로 10분이 채 안 걸리는 위치였다.
당연히 이촌동의 고급 아파트보다 나았다.
지상 3층의 건물에 정원과 수영장, 승강기까지 딸려 있는데다가, 지하에는 차량 6대를 댈 수 있는 주차장과 경호원이 거주하는 관리실까지 있었다.
그 중 3층의 테라스에 나와서 찬바람을 맞는데, 한사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내려다보자, 그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보, 박민표 보좌관 전화 왔어요.”
아직 이삿짐 정리가 덜 끝난 이른 아침이었다.
1층 마당으로 나온 그녀의 말에 얼른 대답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계속해서 울리는 벨소리에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의원님, TV보셨습니까? 입장 발표문을 일찍 당겨서 기자회견 해야 될 것 같은데······.
“잠깐만요.”
어수선한 탁상 테이블 위에서 리모컨을 찾아서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24시간 뉴스채널이 바로 나타났다.
앵커와 기자의 모습보다 화면하단에 나타난 빨간색 띠가 눈에 들어왔다.
[(속보)당선인 비서실장 윤수혁 의원 내정]
이미 약속된 일이었다.
두 달간 당선인 비서실장을 하고, 초대 비서실장까지 역임할 예정이었다.
이윽고 앵커와 기자가 나누는 대화도 귀에 들어왔다.
- ······선거운동 기간 동안 비서실장을 맡았던 성태우 의원도 1965년생으로, 비서실장에 내정 됐다면 역대 최연소 비서실장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윤수혁 의원은 그보다 20년이나 더 젊은 1985년생으로, 정계 일부에서는 연륜과 경험을 무시한 처사라는······.
기자의 브리핑에 박 보좌관의 목소리가 맞물렸다.
- ······의원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금일 당사 기자회견실하고 정론관, 프레스센터까지 예약은 풀로 맡아놨습니다.
“바로 기자회견 해야겠네요. 오늘 점심에 발표하는 걸로 합시다.”
- 알겠습니다, 의원님. 그럼 장소는······.
“당연히 정론관이죠.”
다른 말로는 국회 기자회견장.
내가 금뱃지를 단 이후에 당선 소감을 발표했던 자리이자, 수많은 국회 활동을 발표했던 장소였다.
이번 발표도 당연히 거기서 해야 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금뱃지를 떼는 일이었다.
시작한 곳이니, 끝도 국회 정론관에서 보는 게 맞았다.
기자들이 얼마나 몰려들까?
TV를 보는데 괜스레 웃음이 났다.
데스크에 앉아 있는 나이든 패널이 열 오른 모습으로 떠들고 있었다.
- 비서실장은 장관급이지만, 대통령의 손발이 되어 모든 부처를 조율하는 직책이에요. 수석들은 당연하고, 장관들까지 지휘해야 하는 겁니다. 그 자리에 쉰셋이 아니라, 서른셋이라뇨? 그 나이는 동사무소 주무관 또래에요. 아무리 유능하고 실력이 좋아도 그렇지, 서른셋에 연로한 장관과 수석들을 어떻게······.
맞는 말이지만, 빼먹은 게 하나 있었다.
그가 나를 모른다는 것.
알긴 하겠지만, 언론이나 기록, 풍문에 의해 아는 내가 전부일 터였다.
그는 나를 겪지 못했다.
그래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설핏 웃음이 났다.
저런 사람들까지 나를 알게 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국회에서 보낸 6년의 시간보다는 덜 걸리겠지.
일개 비서였던 윤수혁이 아니라, 훈장을 추서 받으며 영웅 소리를 들었던, 국회의원을 두 번 역임하고, 선거캠프를 총괄 지휘한 경력이 시작점이 될 테니까.
나는 TV를 끄고, 박 보좌관의 통화를 마쳤다.
아직 열려 있는 테라스로 찬바람이 밀려들어왔다.
차갑지만, 유독 상쾌했다.
* * *
2018년 1월 1일.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 대통령 당선인 집무실.
[인수위 역대 최대 규모, 22개 분과 3개 특위로 구성(종합)]
[趙인수위 첫 업무, 국방․안보 분과 업무 보고 예정···인수위원장 국방부 개혁 다짐]
[인수위 출입 기자들 조성현 당선인 95% 이상 긍정적 평가]
언론 상황을 보고 받은 조성현이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윤수혁이 서 있었다.
“일은 어때요? 할 만합니까?”
“음, 잘 모르겠습니다.”
“윤 실장이 그런 말을 해요? 모르겠다는 대답은 처음 듣는 것 같은데.”
“국회 업무 볼 때하고 차이가 없어서요. 아니, 캠프에 있을 때하고 비슷하네요.”
“하하하, 일이 많긴 하지요?”
“그렇긴 합니다.”
“혼자 다 끌어안을 생각은 하지 마세요. 윤 실장 그러다가 쓰러집니다.”
“괜찮습니다, 안 그래도 영부인께서 보내주신 배즙도 매일 챙겨 먹고 있습니다.”
“그럼 잘 됐네요, 마침······.”
조성현이 그러면서 집무 책상 아래서 보자기로 쌓인 박스를 하나 꺼냈다.
“이거 한 번 먹어봐요.”
제법 묵직한 무게에 윤수혁이 시선을 들었다.
“이렇게까지 챙겨주진 않으셔도 됩니다······.”
“대통령 당선인이 주는데, 좀 받아요.”
“······알겠습니다.”
“집에서 숙성시킨 약꿀이에요. 숙취 다음 날에 배즙이랑 같이 먹으면, 밤새 달려도 출근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윤수혁이 쓰게 웃었다.
당선 직후에 조성현의 집에서 새벽까지 술을 대작했기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래요, 그럼 가봐요. 참······, 집들이는 언제합니까? 윤 실장, 평창동에 저택 샀다면서요?”
“아······, 예.”
“왜요, 구경시켜주기 싫은 겁니까? 윤 실장도 우리 집에서 한 잔 해놓고서?”
“아닙니다, 취임식 전에 한 번 모시겠습니다.”
윤수혁이 다시금 웃었다.
대통령이 집들이를 오는 건 과거에 상상해본 적이 없던 일이었다.
“그럼 수고해요, 윤 실장.”
당선인 집무실을 나온 뒤, 윤수혁은 한국금융연수원으로 향했다.
인수위원회 사무실이 있는 곳으로, 통의동과는 경복궁을 사이에 두고 있는 삼청동이 소재지였다.
직선거리가 1.3㎞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
금세 도착한 윤수혁이 별관 2층의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테이블에 빼곡히 앉아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났다.
22개 분과와 3개 특별위원회의 담당자들이었다.
간사나 간사 대리로 참석한 이들이자, 차기 장차관과 수석비서관 내정자들이기도 했다.
윤수혁은 그들이 서 있는 ‘ㅁ’자의 회의테이블을 지나서 가장 끝으로 향했다.
유일하게 비어 있는 자리.
회의테이블의 정 중앙이자, 가장 상석이었다.
임시로 제작된 삼각 명패가 선명했다.
[대통령 당선인 비서실장 윤수혁]
윤수혁이 자리에 앉았다.
툭툭-
마이크가 켜져 있는지 확인한 윤수혁이 목소리를 냈다.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앉아주십시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자리에 앉았다.
의자 끄는 소리가 회의실을 시끄럽게 채웠다.
이후 소음이 가라앉을 무렵, 배부된 회의 계획서를 펼친 윤수혁이 말을 이었다.
“비공개 실무회의인 만큼 국민의례는 모두 생략하고, 바로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안건은 국방․안보 업무보고의 건입니다. 바로 5페이지부터 보시죠.”
종잇장 넘어가는 소리가 회의실을 채웠다.
다음 발언을 기다리는 시선에 윤수혁에게 다시 모였다.
“먼저 국방․안보 간사님의 발표를 듣겠습니다.”
그러자 회의 테이블의 시선이 금세 한 쪽으로 쏠렸다.
윤수혁은 그들을 한 차례 둘러보고는 국방․안보 간사의 시선을 마주했다.
끄덕.
허락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간사가 마이크를 켰다.
회의가 시작됐다.
* * *
2018년 2월 26일 오전 11시.
여의도 국회 앞마당.
중앙 분수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방사형 무대에 한 명의 사람이 올랐다.
조성현 대통령이었다.
그가 표시된 단상에 올라서 마이크를 잡았다.
대통령 취임사 낭독의 차례.
그가 정면의 카메라 대신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10만 명의 운파와 200여 명의 외교 사절 특사가 있는 객석이 아니었다.
내각 내정자와 후보자가 있는 구역.
그 중에서도 정확히 나였다.
그가 내 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몇 초 정도.
침묵 속에 이어진 시간이라 제법 길게 느껴졌는데, 바라본 의미는 금세 알았다.
고맙다는 것이겠지.
이미 평창동 단독 주택에서 조촐한 식사 자리를 가졌을 때도, 수십 번은 들었던 말이었다.
지금처럼 감격스런 순간에도 그가 할 말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앞을 바라본 그가 대통령 선서를 낭독했다.
짧은 대통령 선서가 끝나자, 팡파르가 울렸고, 사회자가 다시금 취임식을 진행했다.
“내빈께서는 모두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국방부 군악대와 의장대 행진, 예포 발사가 있겠습니다.”
행진이 시작되자 금관악기 연주가 국회를 채웠고, 오래지 않아 21발의 예포까지 발사됐다.
이어진 퇴장 후에 사회자의 목소리가 국회를 울렸다.
“다음은 대통령께서 국정 운영의 목표와 정책 방향을 말씀드리는 취임사를 하시겠습니다.”
조 대통령이 정면을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700만 해외동포 여러분. 이 자리에 참석하신 전임 대통령과 해외 경축 사절, 내외 귀빈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늘 대한민국의 제 19대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제가 국민여러분께 드릴 각오는 분명합니다. 저에게 부여해주신 책무를 숭고하게 받들어, 제대로 일할 줄 아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일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취임사 발표가 제법 자연스러웠다.
객석을 둘러보고 카메라도 응시하면서 적절히 쉼표를 찍고 있었다.
수백 번을 읽고 또 읽게 한 덕분이었다.
거울 앞에서, 카메라 앞에서, 비서진 앞에서 반복해서 연습을 시켰었다.
원고 분량은 다해서 37분.
전임 대통령보다 한참은 긴 취임사 발표 시간이었다.
덕분에 취임식이 더 고루해질 예정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건 조 대통령의 스타일이었다.
의식이나 행사에 대한 관념도 고지식한 편이라 전임 대통령 취임식에 나오던 연예인도 한 명 없었다.
시립국악단과 방송전통무용단, 대중예술가가 나와 공연하기로 되어있었다.
사전 진행자도 마찬가지였다.
지상파 출신의 아나운서가 얌전하고 정숙하게 행사를 봤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 머리가 벗겨진 전임 대통령이 꾸벅 졸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어쨌든 조성현 당선인이 19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리고 나는 대통령 비서실장이 됐다.
* * *
“역시 사무실 스타일은 같으시네요, 국회에 있을 때하고.”
박민표가 그러면서 비서실장 집무실을 둘러봤다.
다른 집무실과 달랐다.
생필품을 제외하고는 국가 세비로 구입한 일반 보급품이 없었다.
컴퓨터, 모니터, 태블릿PC, 사무책상과 의자 등 사무집기가 모두 고가의 물품이었다.
그것도 윤수혁이 사비로 구입해서 반입 허가를 받은 것들이었다.
국회에 있을 때도 윤수혁은 원활한 업무를 위해서, 초고가의 용품으로 사무실을 싹 바꿔 놓곤 했었다.
박민표가 꼼꼼히도 살펴보자, 윤수혁이 엷게 웃었다.
“비서실도 전부 같은 거니까 찾아보지 마세요.”
“아, 정말요?”
“그래도 명색이 국장급인데, 그냥 뒀겠습니까?”
박민표를 말하는 것이었다.
정식 직책은 대통령 비서실 소속의 2급 행정관이었고, 호칭은 국장이었다.
박민표가 히죽 웃자, 윤수혁이 말을 덧붙였다.
“대통령 비서실까지 전부 저하고 동일한 급으로 바꿔놨습니다.”
박민표가 잠깐 동안 머리를 굴렸다.
2급부터 5급에 해당되는 행정관이 기십은 되었고, 그 이하 비서진은 수십 명이나 됐다.
그들의 물품을 모두 샀다면, 대충 계산해도 억 단위의 숫자가 나왔다.
박민표가 힘이 바짝 들어간 듯 대답했다.
“열심히 보필하겠습니다! 비서실장님.”
“하던 만큼만 하시면 됩니다.”
“국회에 있을 때처럼 하면 부족하진 않겠습니까?”
박민표가 조금은 부담스럽다는 듯 대답하자, 윤수혁이 고개를 저었다.
“지역구가 더 커졌다고 생각하세요. 할 일은 결국 똑같습니다.”
그 말에 박민표가 입을 벌렸다.
“······역시 예상을 뛰어 넘으십니다.”
국회에 있을 때도 그랬었다.
윤수혁은 예측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해냈고, 불가능하다고 여긴 목표를 이뤄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랫사람에 대한 보상까지 확실했다.
물질이든, 명예든.
8년 전, 기초의회에 출마할 생각을 가졌던 박민표가 쓰게 웃었다.
그사이, 사무집기 위치를 확인한 윤수혁이 입을 열었다.
“그럼 BH(BlueHouse:청와대) 첫 일정이 뭡니까? 아니, 일정표 가져 오세요.”
그 말에 박민표가 움찔했다.
취임식한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일정을 찾는단 말인가?
“한 바퀴 돌아보지 않으시고요? 오늘이 취임식인데 구경도 하시고······.”
“돌아봤었습니다.”
“여길요?”
박민표가 비서실장 방을 쳐다보며 말하자 윤수혁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여기도 왔었죠. 저쪽 벽에 서 있긴 했지만.”
“아······.”
“국장님, 일정표는요?”
자신을 깨우친 목소리에 박민표가 서둘러 움직였다.
“아! 네!”
비로소 청와대 첫 업무가 시작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