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135화 (135/191)

# 135

41. 벌써 (4)

“정말 이러기예요?”

한사랑이었다.

존 패터슨 미 대사가 다녀간 뒤, 박 보좌관과 의견 조율하던 중에 그녀가 찾아온 것이었다.

“정말……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할 말이 많아요.”

그녀가 입을 앙다물었다.

그 사이, 박 보좌관은 눈치껏 담배 한 대 피고 오겠다며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갔다.

병상 앞에 서 있는 한사랑에게 웃어 주었다.

아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생기가 도는 붉은 입술을 씹은 모습이 너무나도 예쁘고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93년생의 풋풋함이 그대로 느껴질 만큼.

“순서 정해서 천천히 말해 봐요.”

그러자 한사랑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왜 간호사가 전화해요?”

“아, 상처 꿰매고 대사님도 왔다가서 내가 직접 못했어요.”

“꿰맬 때 전화 해도…….”

“좀 아팠어요. 과도라도 나름 칼 맞은 건데, 아픈 소리 들려주기 싫어서 그랬어요. 이해하죠?”

“그럼 왜 수혁 씨가 몸을 던져요? 수혁 씨가 경호원이에요? 아니면 무슨 특수부대예요?”

“육군 병장 만기인데……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내 말에 한사랑의 눈썹에 힘이 들어갔다.

가늘고 잘 다듬어진 눈썹.

쓸데없이 그런 게 보여서 한사랑의 눈을 마주했다.

“그건…… 그냥 어쩔 수 없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위험한 상황이니까, 나도 모르게 그랬던 것 같아요.”

“정말…… 이해를 못하겠어요. 내가 생각한 수혁 씨는 분명 구체적인 목표도 있고, 계획도 있는 그런 사람이잖아요? 근데 칼에 대신 찔려요?! 정말 죽고 싶어서 그래요?”

그녀의 말에 웃음이 날 뻔했는데, 얼굴 근육에 긴장을 주면서 잘 참아 냈다.

화내는 모습마저 예뻤다.

속설로 떠도는 말 중에 결혼하면 여자 외모는 3년을 못 간다고 하던데, 내가 봤을 때는 정말 예쁘면 평생을 가고도 남을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화내는 모습을 처음 봐서 그랬다.

결혼을 해서 그런가?

영원호 사건 때도 화 대신 걱정 먼저 했던 그녀가 이번에는 언성까지 높이고 있었다.

정말 화가 나긴 난 모양이었다.

하긴, 침몰하는 배에서 사람들 구하는 것과 대신 피습당한 건 느낌이 다르니까.

물론 내가 나선 이유는 말할 수 없었다.

애초에 어떻게 말하랴?

전생에도 봤던 거라, 내가 잘 아는 거라서 일부러 몸을 날렸다고?

존 패터슨의 통역 옆자리를 얻기 위해 일부러 뒤에서 압력을 넣었다고 얘기할 순 없었다.

나는 그냥 의로운 사람이어야 했다.

겉은 계산적이더라도, 그 속은 따듯한 사람.

츤데레하고는 좀 다르지만.

어쨌든 이렇게 목숨을 바치는 척, 내 생명을 희생하는 척 연기할 기회가 필요했다.

애초에 이런 기회 자체가 아주 희소했다.

우방국 대사가 피습당하는 건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손꼽을 만한 일이었으니까.

눈에 힘을 준 한사랑을 바라보다가, 이 상황을 무마하기 위한 말을 꺼냈다.

“미안해요.”

“……앞으로도 또 그럴 거예요?”

앞으로 그럴 일은 없었다.

정말 큰 사건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앞으로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인재(人災)에만 개입할 생각이었다.

안그래도 연평도나 영원호 때에 위기가 있었고, 무리했었다.

특히 연평도 포격은 근처에 포탄이 떨어졌었고, 까딱하면 죽을 뻔했었다.

당시에는 주목받는 정치 데뷔를 위해서 좀 무리했던 것이었지, 지금 같았으면 유선으로 상황을 판별하고 정계를 움직였을 터였다.

어찌 됐든 한사랑에게 한 가지 대답은 해 줄 수 있었다.

“아뇨, 안 그럴게요.”

“……나도 이제 수혁 씨 와이프잖아요. 맞죠?”

“맞아요, 근데 왜 아직 서 있어요? 그러지 말고 여기 앉아요. 왜 거기 남처럼 서 있어요.”

내 말에 한사랑이 조심히 침대에 앉았다.

회색 정장 차림의 그녀를 손으로 끌어당겼다.

“흐흐.”

저절로 웃음이 났다.

그녀가 와이프라고 했지만, 아직은 애인 같았다.

혼인신고하고 결혼식 올린 뒤에 동거만 하고 있을 뿐, 별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안일 해 주는 사람이 따로 있고, 아직 아이도 없었으니.

그렇게 한사랑의 허리를 감싸자, 묘하게 몸에 열이 돌았다. 피습을 막느라 흥분해서 그랬던 것인지, 욕구가 꿈틀한 것이었다.

대충 입고 온 회색의 정장을 당기자, 한사랑이 움찔했다.

“여기 병원이에요…….”

“그리고 1인실이죠.”

“아, 안 되는데…… 어제 아침에 씻고나서 못 씻었어요.”

“향기만 나는데?”

손목을 당기며 더욱 가깝게 당기는 사이.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한사랑이 급하게 일어났고, 박 보좌관이 헛기침을 했다.

“저, 의원님.”

“무슨 일이세요?”

“당대표님하고 당 지도부에서 오늘 저녁이나 내일 저녁 안으로 기자 동반해서 병문안 온다고 합니다, BH에서도…….”

“일정은 보좌관님이 알아서 잡아주시고요, 다음은요?”

“아, 네. 방금 복도에 경찰 배치까지 마쳤습니다. 권창훈 수행팀장은 이만 돌려보낼까요?”

“권 팀장하고 잠깐만 얘기할게요, 들어오라고 하세요.”

“네.”

박 보좌관이 빠진 뒤.

“나도 나가 있을래요. 여기 있다가는 큰일 날 거 같아요.”

“음…… 그럼 나 갈아입을 옷 좀 가져다 줘요.”

“옷만 가져 올 거예요.”

마치 더는 안 된다는 듯 검지손가락까지 세운 모습.

픽 웃자, 한사랑이 금방 병실을 나갔고, 권 팀장이 조용히 들어섰다.

들어오자마자, 손을 내밀어서 악수를 나눴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팀장님.”

“아닙니다. 제가 의원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서…….”

“권 팀장님은 제 지시대로 훌륭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부른 겁니다.”

“…….”

“팀장님 덕분에 무사한 겁니다. 참 감사드리지만, 아시다시피…… 언론 응대를 제가 맡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말하며 바라보자, 권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아는 것이었다.

이번 사건의 주인공은 오직 나만 있어야 한다는 것을.

“물론입니다, 의원님.”

“그럼 부탁합니다. 그리고 다친 데는 없죠?”

“……저 형사 출신입니다. 쉽게 칼 맞진 않습니다.”

말을 마치면서 그가 엷게 웃었다.

“그래요,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고개 숙이고 나가려던 그를 불러 세웠다.

“참, 권 팀장님.”

“예, 의원님.”

“제가 드린 돈은 다 어떻게 쓰셨어요?”

“네?”

추궁으로 알아들은 것인지 그가 움찔하기에 손을 내저었다.

“드린 게 꽤 될 텐데, 아직 EF쏘나타 타고 다니셔서 여쭤보는 겁니다.”

“아…… 그게 대출금도 갚고 혹시 몰라서 저축도 하다 보니…….”

“저 퇴원할 때 자동차 매장이나 한 번 같이 가시죠.”

“……?”

“강북구에 아는 지점장님이 계신데, 제가 좀 팔아드리기로 했거든요. 저도 차 한 대 새로 사야 되고.”

권 팀장이 급하게 입을 열었지만, 내가 손을 들어 막았다.

눈치가 보인 모양이었다.

월급 외에도 여태 준 돈이 수천만 원, 그리고 사줄 차 값도 4,000만 원은 너끈히 넘어갈 테니까.

그러나 오늘 같은 이벤트성 사건이 있을 때는 해명을 무마할 만한 게 필요했다.

강연장에서 눈이 마주치지 않았던가?

그 직후에 피습이 발생했고, 내 긴장을 알았을 권 팀장은 여태 한 마디도 하질 않았다.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겠지.

묻고 싶을 수도 있고, 내가 기획한 거라고 의심할 수도 있고.

“원래는 그냥 사려다가 취향에 안 맞을까 봐 말씀드리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이럴 때 차 한 대 사줘야 했다. 덤으로 나도 유세하기 위해 타고 다닐 국산차가 필요했고.

국민을 위한 히어로가 고가의 외제차나 슈퍼카를 끌고 돌아다니는 모습은 별로였다.

유능함과 겸손함을 모두 바라는 유권자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국산차를 타고 사람들 앞에 나와야 했다.

렌트하면 그만이긴 해도, 앞으로 차 탈 일이 더 많아질 예정이라 한 대 사는 게 나았다.

국산 애용하는 좋은 모습도 보여 주고.

***

이틀 뒤.

같은 내용이 신문 타이틀에 실렸고, 전국에 깔렸다.

[윤수혁 존 패터슨 주한 미 대사의 피습 막아]

[캡틴코리아 윤수혁, 미 대사까지 구하다···존 패터슨 미 대사 한국말로 고맙다고 전해]

[윤수혁 “칼을 든 피의자를 먼저 발견해서 움직였을 뿐.”···격투 끝에 12바늘 꿰맬 정도의 상처 입어, 현재는 오성서울병원에서 요양 중]

간만에 터진 굵직한 사건.

언론은 물론이고 주요 인사들까지 움직였다.

그 탓에 병실 입구를 지키는 두 경찰은 교대하기 전까지 다른 의미로 바짝 긴장해야 했다.

경례라도 안하면 징계가 떨어질 테니까.

다름 아닌 여야 국회의원과 서울시장, 외교부 장관 등의 거물들이 왔었다.

내로라하는 고위직들.

그 뒤를 보좌진이 수행했고, 휘하 고위 공무원과 기자들이 우르르 쫓아다녀서 더 소란이었다.

중소 단체장이나 지역 유지, 개인적인 지인은 10층을 얼쩡거리기만 했다.

감히 찾아온 건가 싶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들이 먼저 병실에 있던 탓이었다.

더구나 병원 앞에 진을 친 기자들도 검은색 세단이나 정장 입은 사람만 보면 일단 사진을 찍고 볼 정도로 취재열이 강렬했다.

그래서 윤수혁의 1인실이 있는 서울오성병원 본관 10층은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병실 앞에서 4급 보좌관 박민표가 전화를 받아 방문 약속을 잡고, 입구에서 기자나 눈치 없는 정치인들을 걸러낸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무질서하게 몰려들어 윤수혁은 한숨도 못 쉬었을 터.

“……너도 그렇지만 새아가도 고생이다. 어디 불편해서 있겠니? 벌써 몇 명째니.”

윤수혁의 친모, 김을자가 불편에 익숙해졌다는 듯 투정을 섞듯 말을 늘어놨다.

하루 만에 몰려온 정관계 인사들이 십수 명.

같이 온 기자나 수행원을 더하면 머릿수가 백 단위는 넘은 지 오래였다.

이제는 대통령이 와도 놀라지 않으리라.

김을자가 옆자리에 앉은 한사랑의 손을 잡았다.

“네 남편이 저렇다, 너처럼 곱고 예쁜 아내 두고도 지 몸 아끼질 못해요.”

“괜찮아요, 어머님.”

“쟤가 연평도에 들어갔다고 했을 때는 정말…… 어휴.”

김을자가 한숨을 내쉬자, 친부 윤동현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만하고 갑시다. 애들도 좀 쉬어야지, 붙잡고 뭐하는 거야.”

“이 사람 봐, 당신 아들 칼에 찔려서…….”

“수혁이도 서른이고, 가장이야. 제 갈 길 알아서 가는 거지, 거 유별은…….”

“어머? 늙어 죽어도 아들은 아들이지, 어떻게…….”

둘의 말이 늘어질 때.

침대에 누워 있던 윤수혁이 소파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분 다 그만 하시고, 이제 들어가세요. 얼마 전에 강아지도 데려다 키우신다면서요?”

그 말에 김을자가 퉁명스런 얼굴로 일어났다.

“너는 걱정을 해 줘도…… 어휴, 그래. 새아가가 남편 좀 봐주렴.”

“네, 어머님.”

한사랑이 대답하자, 두 부부가 겉옷을 챙겨 들었고 금세 병실을 나갔다.

윤수혁은 닫힌 병실 문을 보다가 소파를 바라봤다.

“흠, 사랑 씨. 이제 손님도 없는 거 같은데…….”

“안 돼요, 무리하면 실밥 터진다고 했어요.”

한사랑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고, 윤수혁은 픽 웃었다.

“그럼 손만 잡아요.”

“왜요?”

“……예쁘잖아요. 보고만 있어도 좋아서.”

그 말에 한사랑이 몸을 일으켜 윤수혁의 곁에 앉았고, 손을 내줬다.

눈을 마주친 윤수혁이 픽 웃었다.

“참, 그거 알아요?”

“……?”

“우리 벌써 1주년이에요. 딱 한 달 남았잖아요, 4월 5일.”

“푸흐, 알아요.”

“뭐 하고 싶은 거 있어요?”

“가로수길……?”

윤수혁이 다시금 피식 웃었다.

찾아오는 사람이나 김을자를 대할 때는 노련한 커리어우먼 같다가도 이럴 때보면 영락없는 20대 초반처럼 보인 탓이었다.

이윽고 윤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가로수길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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