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32. 자, 이제 시작이야 (1)
러시아 대사와의 오찬, 대사 이하 무관부와의 대화, 안면이 있던 러시아 상원의원과의 티타임…….
필요 없는 일정으로 러시아의 남은 시간을 보냈다.
내가 접촉한 로만 라브로프와의 만남을 최대한 가리려는 수작이었다.
그래도 알만한 놈은 결국 위장이라는 걸 알게 되겠지만.
시간 벌이도 되고, 러시아의 얘기도 들을 기회여서 괜찮았다.
특히 러시아의 상황을 파악하기에 적절했다.
그 중에는 뜬소문도 있었지만, 러시아의 분위기를 대강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실질적인 외교력을 갖는 인사들, 한국에 영향을 끼치는 러시아 관리들에 관해 대강 알게 되었다.
그것도 수박 겉핡기에 불과하겠지만.
나는 시간 맞춰서 공항으로 향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늦은 저녁 즈음 될 시간, 예약했던 퍼스트클래스에 몸을 실었다.
피곤했는지, 의자에 앉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러시아의 시차나 추운 날씨 때문만이 아니었다.
형의 태국 신혼여행에 손을 뻗친 장 의원, 그 일을 수습하는 과정이 꽤 피로한 탓이었다.
나는 중간에 깨서도 뻐근한 뒷목을 풀고 이따금 찾아오는 두통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와인을 들었다.
이틀 간 받은 스트레스가 얼마던가?
근래에 겪은 일 중에 가장 골치가 아팠다.
룸살롱에서 내가 당할 뻔했을 때도 무덤덤했었는데, 형이 당한다고 하니 크게 흔들렸던 것이었다.
사달이 날 수도 있었다.
형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때리면 맞고 쓰러질 부류.
그랬기에 나도 본능적으로 연락처에서 도와줄만한 사람들을 골라냈었다.
당장 쓸 수 없음에도.
시간이 얼마나 됐을까?
“의원님, 도착했습니다.”
언제 잠든 것인지 안드레 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러시아로 향할 때와 다르게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운된 기분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나름 성공한 무역업체 대표라더니, 인맥이나 경영 능력뿐만 아니라 감각도 괜찮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인천 공항을 나와서 안드레 한과도 헤어졌다.
나는 공항 측에서 미리 빼준 벤츠에 올라 도착 문자를 몇 군데에 보냈다.
국정감사 기간에 들어 한 번도 못 봤던 한사랑이나 업무 보고를 해 주는 오 대표, 안 위원장, 권 팀장, 정 대표 등등.
마지막으로 나를 도와준 고 의원한테도 복귀를 알렸다.
마저 눈을 붙이려다가 운전석을 바라봤다.
영석이가 남아 있었다.
내가 편하기 위해서, 그리고 작은 비밀을 공유하고자 일부러 데려간 것이었다.
쉽게 말해 훈련.
내 하나뿐인 아군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게 첫날밤부터 꼬였지만, 그래도 영석이는 묵묵히 내 일을 보좌했었다.
“영석아.”
“네, 의원님.”
“러시아 출장은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된다, 알지?”
“알겠습니다.”
“가족한테도 함구해야 돼.”
“알겠습니다.”
연이은 칼 같은 대답.
제법 단단한 말투가 흡족했는데, 주저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하나만 여쭤 봐도 됩니까?”
“당연히 되지.”
“혹시 결혼하십니까?”
안드레 한이 틈틈이 결혼 얘기며 한사랑의 얘기를 꺼냈으니 모를 수가 없을 터.
“어, 결혼 하려고.”
“아…… 축하드립니다.”
“아직 정한 거 없어, 해도 내년 봄에나 할 거야. 그게 궁금했어?”
“제 주변 사람 중에는 아직 결혼한 사람이 없어서 좀 궁금했습니다.”
“하긴 네 나이에 결혼하기에는 이르지.”
“의원님도…… 아닙니까?”
“흐흐흐, 맞다.”
잊고 있던 내 나이가 불현듯 떠올랐다.
20대라는 사실을 까먹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정신적으로는 이미 30대 후반인 데다가, 20대가 받을 수 없는 대우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20대라면 쉽게 들을 반말도 내게는 먼 일이었다.
웬만한 중장년층이나 고위 인사들도 나를 웃어른 대하듯했었다.
물론 원로들이나 국회의 중진 의원들이면 몰라도.
그 덕에 30대와 20대의 경계가 흐려진 것이었다.
“그리고…….”
“어, 왜?”
“혹시 사진이라도 볼 수 있을지…….”
“야, 당당하게 말해. 너 그냥 비서 아니야, 내 동생이잖아.”
“그럼 사진 좀 보고 싶습니다.”
“그래, 좀 그래라. 사진은…… 자!”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마침 적색 신호.
영석이의 양손이 조심스레 스마트폰을 가져갔다.
“…….”
같이 찍은 셀카만 있는 화면을, 영석이는 매직아이라도 보는 것처럼 뚫어져라 쳐다봤다.
빠앙-
뒤차의 경적소리.
어느새 녹색 신호로 바뀐 것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놀란 영석이가 허둥지둥 스마트폰을 돌려주었고, 핸들을 잡았다.
나는 영석이가 보던 화면을 그대로 바라봤다.
넋 나갈 정도로 예뻤다.
분명 옆에 내가 있었는데, 누가 있는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영석아?”
“아, 네.”
“봤으면 말이 있어야지, 어디 아프냐?”
“아…… 아. 네, 너무 아름다우셔서…….”
“흐흐, 그래.”
“……혹시 미성년자는 아니시죠?”
“이 새끼가.”
“죄송합니다, 정말 어려 보이십니다. 사진만 봤을 때는 10살 정도 차이날 것 같아서…….”
“잘 되면 내가 친구라도 연결시켜 줄게, 어때?”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냥 비즈니스였어?”
“아, 아닙니다.”
나는 피식 웃고 사진을 마저 바라봤다.
역시 예뻐야 하는구나.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러시아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가라앉는 듯했다.
물론 장 의원을 향한 분노와는 별개였다.
눈을 감기 전에 다시금 문자를 적어 넣었다.
권 팀장, 그리고 논설위원.
일단 이 둘로 시작할 생각이었다.
* * *
짜악-
뺨을 휘갈기는 소리.
맞은 사내의 고개가 돌아갔다.
주먹을 말았다 펼치던 장세룡이 이번에는 정강이를 걷어찼다.
팍-
사내가 반걸음 물러섰다.
“……그걸 보고라고 해?”
임무 실패, 그리고 구속.
장세룡이 들었던 내용을 한 줄로 줄인 결과였다.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장세룡의 표정은 더욱 찌그러졌다.
대답도 볼품없는 데다가 장신의 사내를 휘갈긴 손바닥까지 얼얼했다.
“이래서 몽둥이로 패야지…… 시벌.”
욕설을 중얼거린 장세룡이 다시금 구두 뒷굽으로 정강이를 깠다.
팍-
사내는 반걸음 물러서면서도 아무런 신음 소리를 내지 않았다.
“하…… 그래서 너도 동남아로 넘어가게?”
“아닙니다.”
“그럼?”
“일단은 윤수혁에 대해서 세밀하게 조사를…….”
짜악-
다시금 사내의 얼굴이 돌아갔다.
장세룡은 거칠게 손을 털고서 고함을 터뜨렸다.
“이 병신 새끼야! 비서실 팀장 했다던 새끼가 대가리가 그것 밖에 안 돌아가?!”
“……죄송합니다.”
“죄송?! 뭐가 죄송해!”
“…….”
사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장세룡이 다시금 정강이를 걷어찼다.
“세밀하게 조사해서 공사하겠다? 그게 말이야, 막걸리야! 그랬으면 내가 진즉에 대통령을 해먹었어!”
장세룡의 말 대로였다.
공식적인 수사도 그렇지만, 특히 불법적인 조사에는 건 한계가 있었다.
정보 자체가 적었다. 그리고 불확실 했다.
또한 시간이나 비용도 상상 이상으로 많이 들어갔다.
경로 자체도 제한적이었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한다고 해도 제대로 성공하기가 힘들었다.
언제 역풍이 불어올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압도적인 권력이나 돈이 있는 게 아니라면, 애초에 그렇게 움직이기도 힘들었고.
이윽고 장세룡이 입을 열었다.
“……행한당하고 국방위나 털어.”
“알겠습니다.”
뺨이 벌겋게 달아오른 사내가 고개 숙이는 사이, 장세룡은 한숨을 삼켰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발에 걸리는 돌부리로만 알고 있던 윤수혁이 바위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싹수가 더 커지기 전에 밟으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어려웠다.
행복한국당이나 국방위를 때리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윤수혁이 직접적인 해악을 끼친 적도 없었고, 그럴만한 기색이 보인 것도 아니었지만.
장세룡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윤수혁은 크게 될 놈이었고, 반드시 자신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었다.
그게 장세룡의 생각이었고, 본능이자 직감이었다.
‘내 목을 조를 놈이지.’
법보다 주먹, 분석보다 직감이 필요한 경우가 있지 않던가?
그게 지금이었다.
장세룡은 눈앞의 장신 사내에게 턱짓을 해 보였다.
* * *
“근거 있는 얘기 맞아요?”
백윤지 정치부 기자.
혁신정부의 첫 번째 국방부 장관 후보자를 낙마시키는데 앞장섰던 그녀가 짝눈을 해 보였다.
“급진좌파 데모에서나 들을 얘기 같은데요, 아니면 완전 찌라시.”
내가 해 준 얘기 때문이었다.
장 의원의 여성 편력과 성 취향.
그것도 아주 저급한 수준의 성생활이어서 백 기자의 표정은 좋질 못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의 그녀에게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뭐가 있어요?”
그녀가 놀라서 수첩을 펼치고, 펜을 쥐는 사이.
같은 톤으로 대답을 이어 갔다.
“그런 게 있긴 있습니다만, 말씀드리기는 힘듭니다.”
“네? 그게 뭐예요? 그러니까…… 의원님이 말했으니까 믿고 따라라, 그런 거예요?”
“비슷합니다.”
“아니, 이건 저번하고 다르잖아요. 무슨 찌라시도 아니고…….”
백 기자가 단번에 불쾌하단 표정을 지었다.
내게 벌벌 기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
기자라서 그런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갑‘이 되는 그녀는 국회의원의 몇 안 되는 천적이었다.
한숨을 내쉬던 그녀가 소개해 준 논설위원을 떠올렸는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저기, 의원님. 그냥 서로 편하게…… 소스를 주세요. 주로 가는데 라든지…….”
“호텔을 이용하고, 여성을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양평의 별장을 이용합니다.”
“별장 주소는요?”
“이겁니다.”
기다렸다는 듯 메모지를 한 장 건네자, 그녀가 나를 힐끗 쳐다봤다.
“이게 다예요?”
“그게 전부입니다.”
“아휴…… 진짜 이거 좀 아닌데…….”
백 기자가 망설이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논설위원의 당부가 세긴 센 모양이었는지, 결국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일단 찌라시로 흘리고 정식 보도는 자료 나오면 그때 할 거예요.”
“좋습니다, 꼭 나올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세요? 들은 게 있는 거예요, 아니면 본 게 있는 거예요?”
“그걸 보기는 좀 그렇죠.”
출장 여성의 소변을 받아먹는다고 말했었다.
백 기자가 상상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아, 네…… 그럼 들은 게 있는 거라고요?”
“아마도요.”
지금이 아닌 전생에 들은 것이었다.
때가 맞으면 내가 업소 부장을 통해 여성을 호출하기도 했으니, 당연히 듣는 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출장 여성들이 저들끼리 소곤거리거나 불평하는 게 한두 번 이던가?
그사이, 떠날 채비를 하던 백 기자가 나를 쳐다봤다.
“들으셨다고 하니까 해 보겠는데, 그래도 정식 보도는 어려워요. 아시죠?”
“그럼요, 압니다.”
“알았어요, 대신에…… 정보 생기면 저한테 먼저 주세요. 그것도 아시죠?”
“당연하죠. 제가 단독 드릴게요.”
“뭔데요?”
“그걸 말씀드릴 순 없죠. 대신에 특종은 확실할 겁니다.”
“알겠어요, 그럼 갈게요.”
백 기자가 카페를 나가고, 옆 자리에 있던 권 팀장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의원님.”
“팀장님도 하실 일이 있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지금부터 보수신당과 국토위 털 겁니다. 찌라시부터 관련 자료까지 싹 다 긁어 주세요.”
전방위로 공격을 들어갈 생각이라서 장 의원의 상임위와 보수신당까지 염두에 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제 형 귀국하는 대로 경호 확실하게 해 주세요, 부모님도 마찬가지고. 국내니까 그 정도는 가능하겠죠?”
“네, 확실히 하겠습니다.
권 팀장이 단단한 대답 뒤에 물러갔고, 마지막으로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런 일에 가장 확실한 게 따로 있었다.
바로 공권력.
그것도 검찰이라는 사정기관이 있지 않은가?
곧장 손기택 서울지검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