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27. 만남 (1)
예비군 훈련 전에 강 사장과 한 번 더 만났었다.
정확히는 훈련 며칠 전.
내가 몇 가지를 질문하기도 했었고, 강 사장이 추가 정보를 알려 준다고 해서 본 것이었다.
그 중에 하나는 한사랑의 집안과 친부인 안드레 한에 관한 정보였다.
안드레 한은 표면상 드러난 중소무역업체 대표이사였으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강 사장이 은근하게 운을 뗐다.
“의원님은 러시아에 대해서 잘 아십니까?”
“잘 모릅니다, 안 그래도 일주일에 두 번씩 과외 받습니다.”
“과외라, 생각보다 로맨티스트시네요.”
“보내 주신 사진을 보면 누구나 그러지 않을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의원님께서 조금 예외죠. 아, 일단 이거 먼저 보시겠습니까?”
강 사장이 내 칭찬만 하고는 은근히 말을 돌렸고, 태블릿PC를 내밀었다.
안드레 한에 관한 정보가 화면에 표시되어 있었다.
이미 확인한 내용이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나홋카에서 안드레 한 씨는 한국 국적의 유력한 사업가입니다. 교포도 아니죠.”
“예, 저도 기사 검색 해 봤습니다. 무역회사 이름도 몇 번 나오던데요.”
“아주 어려운 일이죠, 교포도 아닌 한국인이 이렇게 성공하기는.”
“그런가요?”
“네, 러시아는 우리나라의 연고주의나 중국의 꽌시 만큼 인맥이 크게 작용하는 국가입니다. 맨바닥에서 한국인이 성공하기는 어렵죠.”
“뭐가 있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공무원들과 밀접합니다. 안드레 한 씨의 아내가 러시아 사람으로 다리 역할을 많이 해 줬습니다.”
“그럼 한사랑 양의 친모가 브로커라고요?”
설마 하고자하는 말이 그건가?
약간 놀라서 묻자, 강 사장이 손을 내저었다.
“아, 그건 아닙니다. 불법적인 정황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있어도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지요.”
“그러면요?”
“한사랑 양의 친모 율리아 씨가 퇴직한 공무원의 딸이었습니다.”
“아, 그래서 다리 역할을 했다고요.”
“네, 안드레 한 씨는 그걸 기반으로 수출과 수입을 성공시킨 사업가입니다. 지금은 나홋카라는 주 활동 무대와 블라디보스톡, 그 외 인근 지역에서도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럼 좀 더 쳐줘야 했다.
단순 사업가보다는 나름 인맥까지 가진 유력가라고 보는 게 맞았다.
그리고 인맥을 유용하게 이용할 줄 아는 영리한 사람이기도 했고.
그러니 내 주선 상대로 나왔을 것이었다.
나름 한국 결혼정보업체에서는 VVIP등급으로 취급되는 게 나였으니, 어느 정도 격은 맞는 셈이었다.
업체에서는 나를 대기업 일가, 언론사 사주와 동급으로 대우해 준다고 했었고, 내게 주선 상대로 톱클래스의 연예인, 학원재단 이사장의 손녀 등을 맞춰 준다고 했었다.
그렇다고 내가 넘어간 것도 아니고, 딱히 메리트를 느끼지 못해서 강 사장을 찾게 된 것이긴 했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이득이었다.
아예 손해가 없다고 볼 순 없었지만, 이 정도는 감수할 만했다.
아니면 내가 언제 이상형을 만나 보겠는가?
배우자 상대로 이만한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옛말에도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용기가 이 상황과 비슷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튿날.
청담동의 한 레스토랑.
고급 주택가 사이에 위치한 레스토랑은 약 800여 평의 부지에 2미터가 넘는 담으로 이루어진 회원제 식당이었다.
천연 대리석으로 외관을 꾸민 여러 채의 별채와 잘 정돈된 잔디가 아름다운 곳이기도 했고.
그중 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널찍한 원형 테이블과 깔끔하지만 호화로운 내부 디자인.
디자인도 괜찮았다.
약간 궁전 같기도 했고.
아쉬운 게 있다면 바깥 풍경이었다. 주택가 한가운데로 고층이 아닌, 1, 2층에 불과한 높이라서 분수와 정원, 조각상과 조경 정도가 보이는 전경의 전부였다.
그래도 마감재가 값비싸 보이고, 조명이 근사해서 봐줄만 했다.
강 사장 말로는 음식 맛이 괜찮대서 믿고 온 것이었다.
사실 레스토랑은 분위기가 절반은 먹는다고 들어서 바닷가나 고층으로 가려고 했었는데.
그러던 중, 기다리던 알림이 왔다.
“예약 손님 오셔서 안내 중입니다. 오시는 대로 아뮤즈 부쉬 먼저 내오도록 할까요?”
“제가 따로 부를게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웨이트리스가 작게 미소 짓고는 자리를 떴다.
금세 묵직한 양문이 열렸다.
일어나다가 주춤했다.
눈이 부셨다.
새하얀 피부와 또렷한 이목구비,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원피스, 그리고 어깨에 살짝 걸친 재킷.
그런 걸 다 빼도, 그냥 아름다웠다.
여권 사진은 실물을 담지 못한 조악한 인쇄지에 불과했다.
사람이 이렇게 예쁠 수 있을까?
가까이 다가올수록 미모가 더욱 절절하게 느껴졌다.
내 이상형 그대로였다.
그래서인가?
입술이 달싹거리다가 간신히 떨어졌다.
“……안녕하세요, 윤수혁입니다.”
“한사랑이에요.”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아름답고 청순한 느낌의 외모와 다르게, 음성에서 약간 허스키한 분위기가 풍겼기 때문이었다.
나직했고, 무게까지 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어느새 다가온 웨이트리스가 한사랑의 의자를 빼주었고,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나도 자리에 앉는데, 뒤늦게 어색한 공기가 밀려왔다.
잠깐이지만 주춤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그런 고민을 했기 때문이었다.
헛웃음이 날 뻔했다.
룸에서 여자깨나 주물렀었고, 여자를 만나도 몇 번은 만났었는데.
그런 내가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부터 실수했었다.
러시아 인삿말을 준비해뒀는데, 익숙한 한국말이 나간 것이었다.
중매자리가 처음이라 그런 것인지.
하긴 상대 신상부터 이력까지 서면보고 듣듯 다 알고 나온 경우는 살면서 없었다.
나는 속을 가다듬었다.
숫총각도 아니고 여자 앞에서 절절 맬 거냐고, 생각을 곱씹고 다음 말을 내뱉었다.
인사말 다음으로 연습해 둔 러시아어였다.
“выглядите намного лучше, чем на фотографии.(사진보다 실물이 낫네요.).”
러시아어 강사에게 배운 짧은 말을 뱉자, 한사랑이 피식 웃었다.
그녀의 입에서 다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Я много слышал.(많이 들었어요.).”
대답이 짧았지만, 알아듣진 못했다.
애초에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 되질 못했다.
한 달도 채 배우질 못한 데다가, 러시아어 자체가 발음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뱉은 한 줄의 문장을 발음하려고 얼마나 연습했던가?
나는 한사랑의 러시아어에 한국말로 대답했다.
“아직 대화할 수준은 못 됩니다. 공부한 지 얼마 안 돼서요.”
“그런 것 같아요. 공부한 지 얼마 안 됐죠?”
“예, 이제 한 달 정도…… 아, 식사 주문할까요?”
“네.”
시선을 들자마자, 웨이트리스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오기에 식사를 부탁했다.
이후부터는 한사랑과 가벼운 잡담을 나눴다.
한 번 입을 떼기 시작하니 긴장이 좀 풀린 모양이었다.
그녀가 나보다 어리기도 했고, 생각 외로 대화도 잘 통해서 남아 있던 긴장마저 사라졌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중간에 식전 빵과 아뮤즈 부쉬가 나왔다.
앞으로 후식까지 총 아홉 번의 메뉴가 더 나올 예정이었기에 쉽게 나눌만한 대화를 이어 갔다.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언제 들어왔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늘 날씨는 어땠는지 등등.
어렵지 않은 얘깃거리를 주고받았다.
이윽고 메인 메뉴가 테이블에 놓인 뒤.
바닷가재 살을 발라먹던 한사랑이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를 냈다.
“의원님.”
“예.”
“아직 젊고, 직업도 국회의원이잖아요? 장래희망은 뭐예요?”
방금 잘라 넣은 안심을 마저 씹으며, 왼손을 들어 보였다.
살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장래희망이라니.
고등학생 이후로 듣지 못했던 오래된 단어였다.
하긴 한사랑은 스물한 살의 어린 나이였다. 나도 그녀가 보기에는 아직 서른도 안 된 젊은 놈이겠지만.
나는 안심을 다 삼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재선이 목표예요. 그리고 청와대 입각(入閣).”
전부터 생각했던 것이었다.
재선과 입각.
그게 내 당장의 목표였다.
정권이 바뀔 때까지 버티고, 당권을 잡아야 하니 반드시 재선을 해야 했다.
입각은 출세의 수순이었으니, 마찬가지로 내가 가야 할 길이었고.
“입각이요?”
“그러니까…… 정부 구성원이 되겠다는 뜻이죠.”
내 설명에 한사랑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엷게 웃으며 물었다.
“그다음은요? 대통령?”
말끝에 번진 그녀의 미소에 나도 웃어 주었다.
보고 있기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는 아름다운 미소라서, 그리고 물음이 귀여워서 웃은 것이었다.
나는 한사랑의 물음에 물음으로 답해 주었다.
“굳이 대통령을 해야 하나요?”
내가 입각했다면, 정권이 바뀐다는 뜻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입각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누가 야당 소속을 청와대의 요직에 쓰겠는가?
그러니 입각이란, 내가 대통령의 측근이 되고, 대통령 또한 내 측근이 된다는 뜻이었다.
즉 실무자로서, 조언자로서 막강한 힘을 갖게 된다는 의미.
일명 비선(秘線) 정치.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있던 존재였다.
재계나 학계의 권위 있는 인사, 혹은 가까운 인맥의 유력자부터 청와대 측근들까지.
대통령에게 영향을 끼치는 그들 모두가 비선이었고, 실세였다.
그렇기에 모든 정권에 그런 이들이 있었다.
보수와 진보를 따지지 않고, 대통령에게 입김을 불어 넣을 수 있다는 이유로 갖은 사조직이 생겨나고 라인이 만들어지곤 했었다.
전 정권만 봐도 수요회, 영포라인, 천 년회 같은 온갖 모임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전횡이었다.
대통령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당하는 사람이 모른 채로, 혹은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어서 더 그랬고.
어느새 한사랑이 내 되물음에 또다시 물음을 던져왔다.
“하고 싶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다시 미소가 지어졌다.
묘한 대화였다.
서로 묻고, 묻고, 다시 묻고 있으니.
내 의중을 다 아는 것처럼 들렸다. 그녀의 무게 있는 목소리 때문일까?
속을 보여 준 것만 같았다.
권력을 향한 욕심.
그리고 정권의 실세 같은 목표.
그것과 별개로 왠지 가슴 한편이 은근히 달아오르는 듯했다.
속이 들킨 것 이상으로 정곡이 찔린 것 같았다.
한사랑의 말대로 였다.
일개 장관이 아닌 대통령이었다.
하고 싶은 게 당연했다.
실세도 비선도 좋지만, 보다 직접적인 권력만큼 좋은 게 있을까?
피식 웃음이 났다.
어느새 만 40세가 되어야 한다는 대통령 출마 자격이 떠오른 탓이었다.
결국 하고 싶긴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애초에 욕심이 없던 게 아니었다.
나는 처음부터 힘을 갖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권력.
단순히 장세룡을 짓밟고만 싶었다면 이럴 필요가 없었다. 내 인생을 포기해서라도 장세룡을 쇠파이프로 때려 죽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내가 한 선택은 그런 게 아니었다.
권력을 바랐기에, 그리고 탐이 났기에 스스로 억지스러운 목표를 세웠었다.
권력으로 짓누르자고.
그렇다면 그 끝에는 결국 하나만 남지 않을까?
비선도, 실세도 필요 없는 우리나라의 최고 권력.
대통령.
어느새 마주 앉은 스물한 살의 한사랑이, 마치 다 안다는 듯 엷게 미소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