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84화 (84/191)

# 84

26. 번거롭게 (4)

“제가 왜 굳이 훈련을 받겠다고 왔겠습니까? 다른 예비군들 짬밥 먹을 때 초밥 먹으려고요?”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여단장이 얼른 사과했다.

여기서 더 실수하면, 군생활을 준장에서 끝내야 될 지도 몰랐다.

별을 달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던가?

알토란처럼 모아둔 억 단위의 돈을 써야 했고, 소위 말하는 ‘줄타기’를 하느라 자존심까지 팔아야 했었다.

이윽고 윤수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는 규정대로 훈련 받고, 훈련이 끝난 뒤에는 국방위 위원으로 다시 돌아갈 겁니다. 그럼 뭐하겠습니까? 이번 예비군 훈련을 업무 보고 때 지적하거나 법안 개정에 참고하겠죠?”

그래서 이렇게 값비싼 도시락까지 사 왔고, 특별히 챙겨 준다는 미명하에 증편 신고식에 맞춰서 달려왔지 않았던가?

여단장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속에 눌러 담고 짧게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그러니까 훈련 기간 동안에는 일반 예비군처럼 대해 주세요. 번거롭게 하실 필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의원님.”

“식사는 다음에 하는 걸로 하십시다. 이런 자리 말고, 바깥에서 사복입고 편하게 드시죠.”

“아아, 감사합니다.”

“그럼……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아, 아닙니다. 일 보셔도 됩니다.”

여단장이 얼른 대답했다가 조심스레 뒷말을 달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불편한 사항이 생기시면…….”

그러면서 나온 명함.

윤수혁이 명함을 받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 생기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괜히 오해 만들고 불편하게 해 드려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좀 무례했습니다. 그럼 가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작전과장, 뭐해? 모셔다드려.”

여단장의 시선에 작전과장이 우렁차게 대답했고, 금세 대대장실을 나갔다.

침묵이 불편하게 퍼질 무렵.

윤수혁의 말을 되새김질하던 여단장이 멈칫했다.

바깥에서 사복 입고 편히 밥 먹자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가만…… 짬밥 먹는댔지?’

그의 시선이 대대장에게 쏘아졌다.

“야, 병사식당 메뉴 뭐야?”

“호성아! 점심 메뉴판 가져와!”

대대장이 소리치자, 당번병이 얼른 뛰어들어와서 식사 메뉴표를 내밀었다.

여단장이 휙 낚아채듯 메뉴표를 보다가 눈을 찌푸렸다.

[김치, 코다리 튀김, 오징어채 / 된장국, 밥.]

“야이…… 이걸 먹으라고 해놨냐?”

“죄송합니다.”

“니미, 이러니까 예비군들이 사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지, 이 새끼야!”

“죄송합니다!”

“부식 추가하고, 내일 메뉴 싹 바꿔놔. 너랑 니 밑에 애들도 다 같이 가서 먹어, 알았냐?”

“알겠습니다.”

“뭘 가만있어? 급양관리관한테 지시 안 해?!”

“아, 알겠습니다.”

대대장이 얼른 스마트폰을 꺼내는 사이, 여단장이 담배를 빼물었다.

이윽고 라이터를 꺼낼 무렵.

여단장이 다시금 인상을 구겼다.

반색하며 결재했던 예비군 교육 일정도 싹 바꿔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 탓이었다.

‘어쩌나 이걸…….’

이윽고 여단장의 눈이 다시금 대대장을 쳐다봤다.

“의원님 번거롭게 하지말고, 병무청장도 적당히 의전해 주고 돌려보내. 알았어?”

“알겠습니다.”

“……후, 도시락이나 먹자. 부속실 애들 들어오라고 해.”

***

여단장한테 까칠하게 대한 게 효과를 본 모양이었다.

점심 메뉴부터 달라졌다.

후식으로 퍼먹는 아이스크림과 요구르트가 나왔고, 반찬도 메뉴에 없던 비엔나소시지로 바뀌었다.

그리고 당직 분대장이나 차리 행보관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이 정도면 만족스러웠다.

훈련도 빡세다곤 했지만, 사회인인 만큼 함부로 대하진 않는 것처럼 보였다.

자정까지 교육하는 전반야도 졸다시피 진행했고, 연병장 한 가운데서 이뤄진 숙영도 불편해도 눈을 붙일 만했다.

옆자리의 예비군도 욕설 대신에 내게 가벼운 말을 붙이기도 했고.

다음 날, 2일차 밤.

20km야간 행군이 끝나고 1층의 단체 샤워장에 우르르 들어갔을 때였다.

샤워 타올에 비누칠을 할 무렵.

“아저씨, 국회의원 맞죠?”

모르는 얼굴이 말을 걸어왔다.

여태 조용했는데 이렇게 들키는구나.

차마 거짓말을 할 순 없기에 조용하게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일부러 말조차 꺼내지 않았었다.

예비군들이 서로 나이를 묻거나 가벼운 잡담을 나눌 때도, 최대한 조용히 있었다.

묻는 말에만 짤막하게 대꾸했었고.

이런 곳에선 튈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국회의원이라는 직업을 먼저 밝혀서는 더더욱 좋을 게 없었다.

내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 받을 확률이 컸다. 잘 해도, 못해도, 실수해도.

이번 2박3일의 동원예비군 일화는 홍보용 기사로, 의정보고서 결과물로, 국회 상임위 회의장에서 질의 내용으로 언급되면 될 일이었다.

그거면 내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 셈이었다.

그사이, 예비군이 말을 이었다.

“와, 대박. 국회의원 처음 봐요. 얼마 전에 예비군 받는다고 기사 봤어요.”

“알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대꾸하고, 상황을 종결시키듯 손을 내밀었다.

속옷까지 다 벗은 채 조악한 샤워 수전 앞에 서 있었으니, 얼른 이 사람을 돌려보내야 했다.

국회의원이나 돼서 아랫도리 사이즈를 품평 당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악수하고 한 명을 돌려보낸 이후.

묘한 눈빛이 느껴졌다.

좌우 옆자리에서 샤워 타올을 비비던 이들이 힐끔거린 것이었다.

‘쟤가 걔야?’하고 중얼거리는 듯한 시선.

얼른 머리를 감았고, 몸을 닦아냈다. 양치는 생활관이 있는 포대로 올라가서 해결할 생각으로 후다닥 목욕탕을 나왔다.

처음의 사교성 좋은 예비군 말고 다가오는 이가 없긴 했지만, 목욕탕 안에서, 탈의실에서 국회의원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들었다.

안 그래도 간부들 사이에서는 국회의원 때문에 훈련이 빡세다는 말이 돌고 있었다.

예비군한테 충분히 말이 흘러 들어갔을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이 2일차 한밤중이라는 점이었고, 내일 퇴소일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조용히 매트리스를 깔고, 포단을 펴고 누웠다.

그리고 새벽에 불침번 근무를 위해 일어났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국회의원’소리를 들었다.

당직 분대장과 불침번 근무를 선 기간병도 물어 왔다.

혹시 국회의원이시냐고.

다음부터는 ‘요’자를 쉽게 쓰던 병사들이 어느새 ‘다’나‘까로 말투를 바꿨고, 당직 부사관도 우수한 근무 태도를 보여 줬다.

병사와 예비군의 생활관을 일일이 드나들며 온도, 수면 상태 등등을 일일이 체크하며 확인하는 것이었다.

탄약고 근무를 나갔던 예비군도 돌아오면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진짜 국회의원이세요?”

“예, 맞습니다.”

“아…… 원래 훈련들 받아요?”

“원래는 법에 강제사항이 없었는데, 이번에 국회의원도 필히 예비군과 민방위 훈련에 참가하게 법안 수정해서 제출했습니다.”

“나 같으면 안 받을 텐데…….”

“어쨌든 국민의 의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제 상임위가 국방위원회입니다. 오늘 겪은 일은 제가 법 개정이나 소관부처에 수정 권고할 예정입니다.”

“국회의원은 처음 보는데, 아저씨는…… 아니, 국회의원님은 좀 달라 보이네요.”

“고맙습니다, 얼른 들어가서 주무세요.”

그렇게 근무자 한 명을 보내고.

복도를 서성거리다가, 눈치 보는 듯한 현역 병사에게 가벼운 대화를 걸면서 근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예비군 훈련의 마지막 야간 근무가 끝났다.

운이 좋았고, 다행이었다.

크게 튈만한 것도 없었고, 퇴소할 때까지 조용히 있었다.

아침부터 같은 생활관을 쓰던 사람들이 내게 국회의원이냐고 물으며 떠들고, 몇몇 예비역들이 생활관을 어슬렁거리며 힐끗댄 게 전부였다.

그렇게 스마트폰을 돌려받고, 부대 정문을 나서는 순간.

“의원님!”

기자들이 보였다.

돌아가는 예비군들이 나를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봤다.

개중 일부는 기자들에게 누구냐고 묻기도 했고, 가다 말고 스마트폰을 꺼내서 나를 촬영하기도 했다.

아직 모르는 사람이 있던 모양이었지만, 이미 다 끝났다.

내년부턴 예비군도 출퇴근하게 될 것이었다. 그게 더 번거로울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기자들과의 짤막한 포토타임 뒤에 영석이를 찾아 이동했고, 곧 새까만 벤츠 E클래스 한 대를 발견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불편하신 사항 있으십니까?”

“없어, 출발하자.”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국회로. 오늘 2정조위 회의 있잖아?”

“지각, 불참 미리 신고했습니다. 댁으로 돌아가셔서 준비 다 하시고, 천천히 나오셔도 됩니다.”

“아냐, 바로 가자.”

새한국당에 있는 총 6개의 정책조정위원회 중 하나인 2정조위는 외통위와 국방위, 정보위의 위원들과 외부 자문인사로 구성된 당내 기구였다.

나는 국방위원이라 당연히 2정조위에 소속된 상태였고.

회의는 국회 의원회관의 회의실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리고 정조위 회의에서는 예비군 훈련 관련 사항으로 생색도 내고, 젠체할 생각이었다.

그러려고 간 훈련이었다.

현역 국회의원 중에 예비군 훈련 받은 사람은 없을 게 뻔했고.

이윽고 주차장을 나서던 영석이가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네, 트렁크에 갈아입으실 옷 준비해뒀습니다.”

“참, 별일 없었지?”

“민원인이 꾸준히 증가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사항 없었습니다.”

“내가 만날 만한 민원인은?”

“굳이 만나실만한 민원인은 없었습니다. 웬만한 사안도 박민표 보좌관 선에서 해결보고 있습니다.”

역시 박 보좌관이었다.

강북구 사무실과 의원실로 찾아오는 민원인만큼 껄끄러운 게 또 없었다.

민원인이 온갖 이유를 대며 찾아오기 때문이었다.

억지를 쓰고 이익을 취하려는 사적인 문제부터 타인과의 분쟁 조정, 주소지 인근의 님비 혹은 핌피 현상 등등.

주로 지역구 거주자가 많았고, 그 중에는 국회의원을 데리고 오라며 강짜를 놓는 이도 많았다.

그런 유형 말고도 착오적인 법안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거나, 사회 문제를 제보하는 정상적이고 올바른 경우가 있기도 했지만.

바빠 죽겠는 내 입장에서는 어쨌든 아래서 해결을 보면 좋을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예비군 훈련도 직접 하기에는 시간이 아깝고 번거로운 것이었지만, 써먹을 게 있으니 나쁘진 않았다.

그렇게 한 시간을 넘게 달렸고, 오래지 않아 국회에 도착했다.

예비군복을 입은 모습 그대로, 갈아입을 옷가방을 손에 들고 걸어 들어갔다.

입구를 지키던 국회 경찰이 멈칫했으나, 나를 알아본 듯 인사를 해 줬다.

그리고 때 마침, 국회에 상주하듯 생활하는 기자와 민원인이 그 모습을 찍어 줬다.

내가 바라던 것이었다.

원래는 기자를 부르고 싶었으나, 이런 걸로 부르면 오히려 욕먹을 게 뻔해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윤수혁 의원님이시죠? 오늘 예비군 다녀오셨어요?”

“네, 지금 정조위 회의가 있어서 바로 왔습니다.”

“대단하시네요, 나는 예비군 다녀오면 피곤하던데. 흐흐흐. 그래서 훈련은 어땠어요? 특혜 시비 될 만한 건 없었고?”

사진을 몇 장 찍은 기자가 은근히 인터뷰를 시도하길래 씩 웃었다.

“규정대로 잘 받고 왔습니다, 제가 이만 옷 갈아입으러 가봐야 됩니다.”

“에이, 선수끼리. 미리 코멘트 해 줘요.”

“고쳐야 할 점도 있었는데…… 저 정조위 회의 10분 뒤에 있어서 정말 가봐야 됩니다.”

“흐흐, 그래요. 군복은 갈아입고 들어가실 건가?”

“예, 그래야죠. 이거 입고 2박 3일 뒹굴었습니다.”

그와 악수를 나눈 뒤에 얼른 자리를 옮겼다.

할 일이 많았다.

당장 정조위도 있지만, 내일은 더 중요한 일정이 있었다.

저녁 일곱 시, 청담동의 한 레스토랑.

한사랑과 만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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