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11화 (11/191)

# 11

5. 기브 앤 테이크 (2)

안 고문은 그동안 먹은 정치밥이 적잖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처럼 보였다.

의심이 보통이 아니었다.

총선에 나간다고 했는데도, 여전히 뒷배를 찾는 모양새였다. 카드키나 갖다 주는 심부름꾼은 아니더라도, 내가 뭔가를 하기에는 과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했다. 나도 나 같은 놈을 보면 받아들이기가 쉽진 않을 것이었다.

어느새 안 고문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너 같은 허수아비를 공천할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거잖아. 이계진 같은 놈이 용 쓸리는 없고…… 당지도부에 연이라도 있느냐?”

순간 안 고문의 눈이 반짝거렸다.

무슨 희망이라도 본 것인지, 어떤 욕심이 싹을 틔운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순수한 정치적 열망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 뒤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누가 있어서도 안 됩니다. 앞으로도 없을 거고요. 말씀하신대로 허수아비 꼴이 될 테니까요.”

어느새 안 고문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 말을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 누군가가 있지만, 말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었다. 아니면 충성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었고.

나 혼자서 이런 짓을 벌이는 건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스물여섯 밖에 되지 않은 사회초년생의 뒤에는 누군가가 있기 마련이었다. 이런 호텔의 비즈니스 룸이라면 더더욱 그러했고.

나는 안 고문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뒤는 아니지만, 제 옆에는 설만한 자리가 있습니다.”

“……옆 자리?”

못 마땅한 것인지, 고민이 많은 것인지 모를 안 고문의 의뭉스런 말이었다. 나는 안 고문의 옆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고문님 옆 자리에도 뭐가 있네요?”

내 말에 시선을 옮긴 안 고문이 주춤했다.

5만 원권 뭉치 스무 개, 총액 1억 원이 담긴 쇼핑백이었다. 안 고문도 예상하는 듯 천천히 손을 움직여 쇼핑백 안을 들여다봤다.

손 떨리게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적은 돈도 아니었다.

당황함이 그의 안색을 스쳐 갔다.

예상했던 모습이었다. 지금은 그가 살아온 인생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것들만 있었다. 핏덩이나 다름없는 스물여섯의 나와 갑작스러운 제안, 그리고 현찰 다발까지.

애초에 접점조차 없는 게 그와 나의 관계였다. 이 의원도 마찬가지였고.

생각이 많아진 것인지 안 고문의 입이 더디게 벌어졌다.

“……무슨 수작이냐?”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저 12년 4월 총선에 나갑니다. 그러니까…… 이건 안 고문님한테만 제의하는 게 아닙니다. 총선 나가는데 도와줄 사람을 뽑는 겁니다.”

안 고문의 시선이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속이라도 헤집으려는 것처럼 보였는데, 두려울 게 없었다.

죽기 전에, 나는 차기 대권 후보이자 당권을 틀어쥐었던 장 의원과 독대하던 사이였다.

이어서 내 폴더폰을 꺼내 연락처에 저장된 이름들을 읽어 내려갔다.

안 고문이 아는 이름들일 것이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정치계에 있던, 지금은 은퇴한 원로들이었으니까.

“……곽승철, 정남우, 박기림. 안 고문님이 거절하시면 순서대로 이분들께 갈 겁니다. 제 옆자리하고, 고문님 옆자리에 있는 것도 다해서요. 그러니까 절 도와주시면 그에 맞는…… 아니다, 짧게 정리해서 말씀드릴게요.”

안 고문이 채 입을 열지 못했다.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안 고문의 흔들리는 시선을 마주했다.

“기브 앤 테이크입니다.”

* * *

안순익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난장과 다름없는 머릿속을 정리하지도 못했고, 눈앞의 윤수혁을 가늠하지도 못했다. 고작 몇 분이었지만, 정신없이 뭇매를 쳐 맞는 기분에 안순익은 차마 입도 열지 못했다.

‘내가 이런 것 하나 분간을 못하니, 원…….’

길지 않은 고민 끝에 안순익이 윤수혁을 쳐다봤다.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었으나, 윤수혁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따박따박 말대꾸를 한 것만 뿐만이 아니라, 윤수혁은 쳐다보는 눈빛이 예리했고, 말의 어조와 행동에는 여유가 있었다.

누군가의 지시에 의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윤수혁은 명백하게 상황을 쥐어 잡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었다.

‘진짜배기란 게지?’

여태 서 있던 안순익이 의자를 당겨 털썩 앉았다. 그를 마주 보고 서 있던 윤수혁도 이어서 자리에 앉았다.

정장 상의 단추를 푼 안순익이 입을 열었다.

“그래, 너 공천 받을 만하다.”

“고맙습니다, 고문님.”

윤수혁의 낭랑한 말씨에 안순익이 눈매를 좁혔다.

인정은 했으나, 믿는 것은 아니었다. 수십 년 동안 정치를 하던 사람으로서 안순익의 인내는 길었고, 의심도 깊었다. 윤수혁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안순익이 짐짓 근엄한 목소리를 냈다.

“그게 공천 확정은 아니지 않느냐?”

“대권 후보는 당선 되면 당에 특별당비를 납부하지 않습니까?”

뜬금없는 소리였으나, 안순익은 별다른 소리를 하지 않고 눈살만 찌푸렸다.

대통령의 특별당비 납부는 정치적인 관례였다.

당의 이름을 걸고 출마한 대권 후보는 당선 되면 당에 재산 일부를 특별당비로 납부했었다. 액수는 수억에서 수십억으로, 당의 노고를 치하하며 여당으로서의 체신을 지키기 위한 돈이었다.

안순익이 눈썹을 꿈틀거렸고, 윤수혁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저도 낼 겁니다, 특별당비.”

“허수아비는 저 돈으로 모자란다, 그리고 정치는 돈으로만 하는 게 아니야.”

안순익이 바닥에 놓인 쇼핑백을 쳐다봤다가 윤수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내 안순익은 윤수혁이 아닌, 윤수혁의 뒷배를 상상하며 속으로 말을 삼켰다.

‘얼마나 내줄 수 있다던?’

윤수혁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10억이요.”

안순익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10억은 공식적으로 납부하기에 적은 돈이 아니었다.

윤수혁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제가 돈만 있는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뭐, 부족하다면 돈은 더 올려도 됩니다.”

안순익이 되물었다.

“더 올린다고?”

“예, 대신 검은 돈은 안 만질 겁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순수한 정치적 열망에서 나온 의지입니다.”

안순익은 윤수혁의 뒷말은 듣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검은 돈이 아닌 특별당비 10억이라 함은, 국세청을 통과할 만한 깨끗한 현금성 유동자산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부자라는 의미였다.

그것도 건물 몇 채씩 가진, 월세로 대출금 갚는 졸부와는 차원이 다른 부자.

“그렇게 쓸 돈이 있으면 사업을 하지, 뭣하러 뺏지를 달아?”

“그건 순수한 정치적 열망에서…….”

윤수혁이 기계처럼 대꾸하자 안순익이 말을 끊었다.

“쯧. 그놈의 열망은…… 이 호텔방은 그렇게 순수하던?”

“하하, 제가 죄지은 건 없잖습니까? 그리고 고문님, 제대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훌륭한 정치가가 될 겁니다.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당을 혁신할 만한 그런 사람 말입니다.”

그 말에 안순익이 길게 숨을 내뿜었다.

‘이게 말장난인지, 진심인지…… 뻔뻔한 꼬라지를 보니 정치질은 잘 하겠네.’

이내 고개를 저은 안순익이 입을 열었다.

“……헛소리 그만하고, 원하는 게 뭐야?”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기브 앤 테이크요.”

“도와달라는 말이지. 네가 원하는 대로?”

“예, 맞습니다.”

“너는 뭘 주려고?”

안순익이 물음을 던져놓고 윤수혁을 떠보려는 듯 쳐다봤다. 윤수혁은 전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태도로 대꾸했다.

“저기에 쇼핑백도 있고요, 제 옆자리도 있지만…… 고문님이 원하시는 걸 드릴게요.”

안순익이 입꼬리에 자조 섞인 웃음을 달았다.

“내일 모레면 팔순이다. 나한테 뭐가 필요해 보이던?”

“일이요.”

“일?”

“예, 고문님 남은 시간 동안 하실 일이요. 애초에 출판회 열고, 시의회 자문이나 해 주실 깜냥이 아니잖습니까? 제가 고문님 신나서 일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무시하던 놈들 매달리게 만들고요. 덤으로 제 옆자리하고 돈도 받으실 겁니다. 어떠세요?”

윤수혁은 말을 마치면서 안순익을 봤던 17년도 대선캠프를 떠올렸다.

자문위원단장을 맡은 안순익은 원로 우대로 들어온 사람답지 않게 발언권이 제법 강했었다. 발언권과 함께 안순익은 정치질이라도 해 보겠다는 듯 이리저리 간섭했었다.

비록 윤수혁이 그의 곁을 보좌하지 못하고, 대선이 지는 바람에 속내도 결과도 알진 못했지만.

지금의 안순익도 한적한 전원주택에서 정원을 손질하지 않았고, 바둑이나 두며 시간을 때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안순익은 각종 공기관 행사에 내빈으로 초청받는 것을 시작으로, 규모 있는 시민단체의 고문을 맡았고 시의회 자문회의와 공청회 따위에 참석했으며, 민간단체가 이끄는 기관장 토론회에도 자리했었다.

한마디로 안순익은 언제라도 자신을 써달라는 듯 역량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록 권력의 핵심부인 청와대에서는 너무나도 먼 곳이었지만, 안순익은 쉼 없이 일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17년도 대선캠프의 자문위원단장을 맡았으리라.

윤수혁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안순익을 쳐다봤다.

세월에 윗입술이 쳐진 안순익이 헛웃음을 뱉었다. 어느새 얼굴에 서려 있던 노기가 풀어져 있었고, 날이 서 있던 눈빛도 무난해졌다.

“빠꼼이 같으니 편하게 말하마.”

“예.”

“알아보고 다시 연락주마, 네 말만 따져 볼 순 없지 않겠냐?”

“얼마나 걸리시는데요? 오늘 저녁 안에 되시겠어요?”

안순익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마.”

대답과 동시에 둘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안순익이 몸을 돌렸다. 그러나 입구로 나가려던 발이 쇼핑백 옆에서 멈췄고, 안순익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건 들고 가라고 여기 뒀냐?”

“에이, 알 거 아시는 분이.”

윤수혁의 장난스런 말에 안순익이 다시 앞을 바라봤다.

“그래, 왠지 똥냄새가 난다더니…… 들고 갈 생각도 없었다, 억지로 손에 들려줬으면 너나 네 주인 얼굴에 내가 똥칠을 했을 거다.”

“하하, 주인 없다니까요.”

“별 걸로 고집부리기는, 이따 연락 주마.”

“예, 들어가세요. 고문님.”

끝에 붙은 말만 고문님이었지, 윤수혁은 동네 할아버지에 인사하듯 고개를 숙였다. 처음에 출판 기념회장에서 봤을 때와 다르게 여유 가득한 말씨였다.

안순익은 윤수혁의 너른 어조를 못 들은 채 하고 비즈니스 룸을 빠져나갔다.

이내 문이 열렸다 닫히고 내부가 고요해지자, 윤수혁이 의자에 편하게 앉았다. 시간을 확인한 윤수혁은 웃음이 밀려오는 것처럼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없는 주인을 어디서 찾아올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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