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12화 (12/191)

# 12

5. 기브 앤 테이크 (3)

안 고문이 나간 뒤.

예약해 둔 비즈니스 룸에서 쉴 겸, 박 보좌관도 기다릴 겸해서 나는 방을 떠나지 않았었다.

그저 수첩을 훑으면서 혹시라도 내 계획에서 부족한 게 있는지 확인하고, USB에 저장해 둔 기록물도 호텔 컴퓨터로 한참이나 읽던 중이었다. 기록해 두고도 잊는 게 사람이었으니까.

이내 식사 시간이 다 되어 일어날까 하는데.

우우웅-

내 폴더폰이 진동했고, 작은 화면에는 안 고문의 이름이 보였다.

이 양반 성격에 뭐라고 할지, 나는 폴더폰을 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내일 만나지, 다시 연락 주겠네.

“제안 수락하신 겁니까?”

- ……그래.

묻는 말에 한 템포 늦게 답이 따라왔다. 제 나름대로 속을 좀 태운 모양이었다.

“그럼 다시 연락 주세요.”

- 그러지.

세 글자에서 안 고문의 고심이 느껴졌다.

아마도 이곳저곳에 전화 돌리고서, 내가 보통이 아님을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 안 고문이 찾던 배후는 어디에도 없고, 나는 평범한 사회초년생이니까.

전화를 끊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보좌관과의 약속 시간이었다.

택시를 타고 강남의 일식집으로 향했다.

방 여러 개가 딸려 있는 곳이 아니라,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식당이었다. 어르신들 데려다가 정담(政談)을 나눌 게 아니고, 술 먹으면서 친목을 도모할 곳이니 개방된 장소가 나았다.

안에 들어서니 박 보좌관이 자리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는 정장 바지에 와이셔츠가 아닌, 청바지에 카라도 없는 티셔츠 차림이었다.

“윤 비서!”

“먼저 와계셨네요, 주문은 하셨어요?”

자리에 앉아 박 보좌관이 능청스레 웃었다.

“얻어먹는 사람이 양심이라도 있어야지. 그나저나 고마워, 조카가 작가들 사인 받았다고 좋아하네.”

“뭘요, 시장하시죠?”

“으흐흐흐, 나 이거 먹으려고 점심부터 굶었어. 여기 뭘 먹어야 되나? 가격대가 조금 있던데, 당첨금이 적잖은 가봐?”

“하하하, 좀 됩니다. 코스 요리 어떠세요?”

“코스? 이야, 코스 좋지.”

종업원을 호출해서 메뉴를 주문하자, 박 보좌관이 호강한다면서 우스운 소리를 늘어놨다.

나는 먼저 나온 사케를 박 보좌관에게 따라 주고, 밑반찬을 안주 삼아서 그와 대작했다. 술을 몇 잔 나누고, 나오기 시작한 회와 초밥들을 먹었다.

박 보좌관은 밥값을 하려는 것인지, 자신이 겪었던 고문관들과 비교하면서 나를 한껏 추켜세웠다. 눈치 빠르고, 일도 잘하며, 사회생활도 기가 막힌다고.

듣기 좋은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박 보좌관과 더 친해질 생각이었다. 이런 자리를 만든 것도 같은 이유였다.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는 게 나았다.

그것도 잘 나갈 때가 아니라, 조금 모자랄 때 친하다면 더 좋은 법이었다.

이내 사케 한 통을 다 비울 무렵, 박 보좌관이 취기가 오른 말을 뱉었다.

“너 정말 보통 아니다.”

“제가요?”

“보좌관 동기 같아. 일하는 것도 그렇고, 말도…… 이참에 우리 친구할까? 흐흐흐흐.”

피식 웃음이 났지만, 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다.

앞으로 정무와 정책을 오가며 나를 보좌할 박 보좌관이었다. 가까이 두고 지내야 할 사람이었고, 그가 나를 개인적으로 좋아하게 만들어야 했다. 영석이처럼 마음을 빼앗을 만한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기에, 더 친해져야 했다.

“어쭈? 대선배님이 말하는데 비웃냐?”

“어떻게 보좌관님하고 친구를 하겠습니까, 형님은 어떠세요?”

나는 박 보좌관의 눈을 살피면서 농담조로 말했다. 의원들 사이에서도 선후배가 아닌, 형동생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박 보좌관이라면 수긍할 것이었다.

의원실과 국회 내에서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준 것도 박 보좌관이었다. 한 달 만에 내 소문을 사방에 퍼뜨린 것도 박 보좌관의 칭찬 덕분이었고.

“봐, 이게 신입 입에서 나올 말이냐. 끄흐흐, 보통이 아니다?”

“그럼 형님 할게요, 보좌관님.”

내 말에 박 보좌관이 히죽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장난스런 표정이 잔뜩 어려 있었다.

“내가 국회에 10년 있었는데 너 같은 놈 처음 본다.”

“저도 보좌관님 같은 사람은 처음 뵀습니다.”

“오늘부터 동생해라, 내가 너 잘 챙겨줄게. 영감 임기 끝나면 너 6급, 아니. 5급부터 꽂아줄게. 맞다, 너 몇 살이라고 했지?”

“스물여섯이요.”

어느새 박 보좌관이 손가락을 접으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가 나를 생각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11년하고도 4급하고 있으니까…… 스물여덟에 5급이면 초고속 승진이네.”

나는 그의 빈 잔에 사케를 따라 주면서 물음을 던졌다.

“그럼 형님은 임기 끝나고도 보좌관 계속 하려고요?”

“글쎄, 새한국당에서 당직 제의가 있긴 한데…… 지금 하는 꼬라지 보니까 내키질 않네. 괜히 어쭙잖게 당직하다간 흐지부지 될 거 같고.”

보좌관 에이스답게 감이 괜찮았다. 전당대회가 코앞인 지금 MB와 친김의 대립으로 당 내가 많이 시끄러웠다. 미래에 김 대표는 사임할 것이고.

당 분위기를 알기 어려울 정도로 바쁜 사람이 저렇게 말한다면, 감은 좀 된다는 소리엿다.

그가 거쳐 온 상임위를 생각하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정도는 되어야, 국회에서 원조 에이스 대우를 받을 수 있을 테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붙였다.

“형님, 저하고 쭉 같이 가시죠.”

“그래, 나 잘 따라오면 내가 2년 뒤에 5급 달아주고, 4급가는 길도 만들어 줄게.”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2년 뒤에 내가 공천 받고 들어오면 이 양반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거꾸로 될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거꾸로라니?”

“저 운빨 좀 좋잖아요. 형님 인생 제가 펴줄게요.”

웃으면서 말했는데 박 보좌관이 눈을 껌뻑거리면서 물어 왔다.

“……너 로또도 됐어?”

“푸하하하하, 아직 안 됐어요.”

그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헛웃음을 뱉고는 힘 빠진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로또 되면 내가 잘 따라갈 테니까, 인생 피게 해 줘라.”

듣기 좋은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형님.”

* * *

다음 날.

일요일이었으나, 제네시스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

행사에 이 의원이 얼굴을 비춰야 했기 때문이었다. 동네 하계 체육대회였는데, 오늘도 이 의원은 막걸리며 맥주를 얻어 마셨고, 찬조금을 건네면서 악수를 나눴다. 뙤약볕에, 술에 얼굴이 벌겋게 익은 모습이 사진에 그대로 나타났다.

돋보기안경을 꺼내 콤팩트 카메라를 본 이 의원은 혀를 찼다.

“쯔쯧, 재선하기 전에 쩌 죽겠다…… 집에 가자.”

나는 곧장 차를 돌려 이 의원의 집으로 향했다. 매번 그래 왔듯 담배 냄새가 풍겨 오고, 작게 열린 창문에선 미지근한 바람이 밀려왔다.

한참을 가던 중에 뒷좌석에서 이 의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윤 비서.”

“예, 의원님.”

백미러로 슬쩍 살폈는데, 이 의원의 묘한 눈빛과 마주쳤다.

담배나 피고, 재선에만 몰두하는 노인네가 보여 줄 시선이 아니었다. 그것도 차나 모는 일개 비서한테 무슨 압박을 주려고?

짐작을 못해서 모른 척하고 있었는데, 이 의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앞으로 뭐할 생각이야? 정치하고 싶어?”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그 순간 안 고문이 떠올랐다.

말이 새어 나간 것일까?

안 고문이라면 내 뒷조사를 하다가 실수로, 혹은 고의로 무슨 말을 흘렸을지도 몰랐다. 내 제안을 수락한다고 했어도, 정치인들 말 뒤집는 게 어디 하루이틀이던가?

다만 안 고문이 뭘 얻겠다고 그랬을까, 머릴 굴려도 답은 없었다.

이 의원의 폼 잡는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윤 비서, 왜 대답을 못해? 청년 뭐시기 부위원장이라면서.”

“아, 예.”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어조로 내 당직까지 읊었다.

이게 안 고문의 작품이라고? 끝까지 정치하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그 노인네가?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이 의원이 혀를 찼고, 눈매를 좁혔다.

“과욕이야, 과욕. 당에서 신청서 좀 돌렸다고 그런 거 아니야. 지금?”

흐려지던 안 고문의 이미지가 완전하게 지워졌다.

이건 안 고문과 상관없는, 당에서 소속 국회의원과 보좌진까지 관리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팩시밀리로 전송받은 보좌진의 당적, 당비 납부, 당내 활동 따위를 이 의원이 본 것일 터였다.

애초에 당에서 보좌진의 당적 가입과 당비 납부까지도 반강제로 요구하는 마당이었다. 9급 비서 이수경이 당연히 보고했으리라.

그럼 이제부터 별로 들을 필요가 없는 말이겠구나, 나는 이 의원이 내뱉는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자연스런 보고 과정에서 드러난 내 당직이야 국회의원에게는 흔해빠진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의원도 어른 흉내 내는 말이나 하고 있으니.

어느새 이 의원은 전당대회와 엮어가면서 아이들 투정부리듯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러다 전당대회 한다고 청년 뭐시기 소집하면 어쩌려고? 가뜩이나 골이 아픈데…….”

이 의원의 말대로 보름 뒤에 전당대회가 있었다.

당대표와 최고위원 등 당 지도부를 2년마다 선출하는, 전국의 진성당원과 대의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당 내 최대 규모 행사.

거기서 장 의원이 재선의원임에도 최고위원에 붙을 예정이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몇 포인트 차로 갈려서 최고위원이 되던지, 낙선하던지 할 예정이었다.

“뭐…… 들은 얘기 없나? 전당대회 말이야.”

백미러로 슬쩍 보니 이 의원이 내심 궁금하단 듯 날 보고 있었다. 잘만 빨던 담배도 손가락에 끼워진 채 타고 있었다.

일개 비서한테 별 걸 다 묻는 것처럼 보였지만, 줄타기와 재선에 목매단 사람이니 그럴 만했다.

아는 척은 아니더라도, 장단은 맞춰야 좋겠지.

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들은 게 있긴 합니다만…….”

원하는 게 뭔가 싶어서 물었다. 이 의원이 그간 고민깨나 한 것 같은 말을 꺼내 놨다.

“어차피 신 의원님이야 당선되실 거고…… 혹여 조성현 의원님 얘기가 있나? 자네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 같은 거 말이야. 뻔한 말들은 빼고.”

조 의원.

그는 최고위원에서 떨어질 사람이었다.

MB계와 친김파의 사이에서 초계파를 주장한 사람으로, 중립지대에선 나름 영향력이 꽤 있던 사람이었다. 물론 낙선해서 볼일 없는 사람이 됐지만.

이 의원이 뜬금없이 조 의원을 언급한 걸로 봐서는 줄을 하나 더 대려는 것으로 보였다.

그것도 자신에게 비례 공천을 준 MB계 몰래.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신 의원 같은 당선이 확실시 되는 거물이 아닌, 중위권에서 피터지게 싸울 사람을 내심 염두에 둔 모양이었다.

위험을 감수하면 돌아오는 게 많기 때문이겠지.

그래도 몰래 줄을 대 놓을 생각을 하다니, 나름 머리를 굴린 모양이었다. 하긴, 이 의원도 국회 짬을 코로만 먹은 건 아니겠지.

제 살 길 찾는 철새들이 얼마나 많던가?

나는 이 의원에게 당연한 대답을 했다.

“그 부분은 예측이 어렵습니다, 중위권 싸움이다 보니.”

“……네가 뭘 알겠어, 물은 내가 바보지.”

헛물을 켰다는 듯 이 의원이 중얼거렸다. 말끝에서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런 이유에서 나한테까지 전당대회 얘기를 물었구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아마도 당에서 보낸 일상적인 공문도 그래서 챙겨봤을 확률이 컸다.

사서 고생을 하네,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그의 아파트 단지로 진입했다.

어차피 낙선할 테니 푹 쉬라는 말은 차마 불쌍해서 하질 못했다. 내리는 이 의원의 뒷모습이 기운 없는 노인을 꼭 닮아 있었다.

나는 차를 주차장에 대고, 화창한 하늘을 보면서 걸었다.

오늘은 안 고문을 만날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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