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하준보다 먼저 앞서 인사를 건네온 그녀.
자신의 명치 앞으로 뻗어진 그녀의 손바닥을 바라보며 하준의 머릿속은 일순 빠르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분명 기억엔 전혀 없는 얼굴일뿐더러, 느낌과 분위기 또한 조금의 낯익음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게다가, 그녀의 사회적 위치를 고려하면 더더욱 자신과의 연관성은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고.
대체 왜 그녀는 ‘오랜만’이라는 표현을 썼던 걸까.
“아, 네. 유하준이라고 합니다. 만나뵙게 돼 반갑습니다.”
아무리 떠올리려 애써도 도저히 떠올려지지 않자, 하준은 일단 그녀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녀의 두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기억은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런 하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려 왔다.
“풉. 제가 누군지 전혀 기억 안난다는 얼굴 같은데요 대표님? 감독님, 이거 지금 제가 굉장히 서운해할 만한 상황인 거 맞는 거죠? 그쵸?”
갑작스러운 그녀의 물음에 최형수가 눈동자를 요리조리 움직이며 답했다.
“아! 그, 그럼요! 하하…….”
그러고는 하준에게만 들릴 만한 작은 목소리로 복화술을 꺼내왔다.
“대프님. 증말 느근지 므르시겠어요? 지금 대프님이 기억 믓하시면 굉장히 난감한 상황이 펼쳐질 긋 그튼데…….”
굳이 짚어주지 않아도 하준 또한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 촬영장의 최고 실세라 할 수 있는 광고주가, 그것도 자신과 이미 안면이 있다는 듯 먼저 인사를 건네온 상황에서 그녈 기억해내지 못한다면 꽤나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말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하준의 좌우 측두엽에 존재하는 해마들은 그 어떠한 성과도 보여오질 못하고 있었다.
“에잇, 참. 오늘 만남을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기대를 품고 있었는데. 이거 영 기억을 못하시니 서운한데요? 정말 이러기에요, 대표님?”
복잡하게 뒤엉킨 하준의 얼굴 표정과는 달리, 그녀는 말을 내뱉는 동안에도 마치 이 상황이 재밌어 죽겠다는 듯 연신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한껏 올라가 있는 그녀의 입꼬리를 바라보던 하준의 머릿속으로 일순 어떠한 기억 하나가 빠르게 스쳐간 건 바로 그때였다.
그와 동시에, 하준은 설마하는 마음과 함께 반신반의하는 어투로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저, 혹시.”
“풉. 이제야 겨우 기억해냈나 보네?”
지금까지와는 달리 존대가 없어진듯한 그녀의 말투.
그 말투를 듣는 순간 하준 또한 이제야 확실히 알겠다는 듯 표정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하. 믿어지지가 않네. 너였다니.”
* * *
오전 내내 이어지던 촬영은 늦은 점심쯤이 돼서야 잠깐의 휴식 시간을 가졌다.
오늘 하루만에 모든 촬영을 끝내기 위해선 남은 오후 일정 또한 다소 빡빡할 수밖에 없는 상황.
멤버들을 포함한 전 인원은 내부에서 간단히 식사를 해결하기로 했다.
“우욱…… 나는 점심 패스할게. 지금 먹었다간 오후에 토하게 되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를 것 같으니까.”
촬영 내내 한시도 벗지 않았던 대형 토끼 복장을 하고선 은호가 손을 절레 내저으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다른 멤버들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은호에게 위로 한마디씩을 건넸다.
“그래요 형.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양의 햄버거를 먹었는데. 이게 또 들어가면 사람이 아니죠. 좀 쉬어요.”
“형, 소화제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오후에도 또 그만큼 먹어야 할 텐데…….”
“야, 다른 건 몰라도 저 형 소화제는 절대 안 먹는 거 모르냐. 세상에서 저 형이 제일 극혐하는 게 소화제야. 먹은 거 아깝게 왜 그런 걸 먹냐고. 그냥 잠깐 쉬면 또 금방 소화돼서 잘 먹을걸?”
하늘에게 내뱉는 지호의 마지막 말에 은호가 한껏 앓는 소릴 내오면서도 손가락을 위로 치켜들었다.
“지호, 빙고오.”
“풉. 것 봐, 내 말 맞지?”
오전 촬영 내내 멤버들이 먹은 양보다도 훨씬 이상의 햄버거를 흡입한 은호.
이미 짜여진 콘티의 방향은 실제 촬영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수정을 거듭했고, 결국 최종 콘셉트는 은호가 갑자기 나타나 멤버들의 햄버거를 한 입씩 뺏어먹는 내용이었다.
너무나도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그 비주얼을 참지 못하고 마치 토끼처럼 잽싸게 날아와 햄버거를 낚아챈다는 그런.
광고 촬영의 특성상 각각의 상황들을 모두 찍어낼 뿐 아니라 거기에 맞는 다양한 리액션 컷까지 담아내야 하기에 당연히 촬영의 회수 또한 그만큼 많아질 수밖엔 없었을 터.
그때마다 한 입씩 먹어치운 햄버거의 양은 은호의 한계치를 이미 돌파하고도 남을 만한 그것이었다.
물론, 애초에 은호가 아니었다면 그걸 해낼 수 있는 사람도 없었겠지만.
소파에 드러누워 배를 어루만지고 있던 은호가 잠시 몸을 일으켜 문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전 내내 자신들의 촬영을 지켜보던 광고주님. 과연 해당 콘셉트를 마음에 들어 하셨을지 문득 궁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호가 시선을 고정시킨 그곳엔 위대하신 광고주님뿐만 아니라 하준 또한 그녀와 함께 서 있었다.
“풉. 전혀 못 알아보는 눈치던데 너? 내 작전이 완전 성공했어. 딱 원했던 반응이라니까? 후훗.”
촬영이 이어지는 동안 잠깐 대화를 멈췄던 두 사람. 하준은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의 외관에 계속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사심이 있어서가 아닌, 말 그대로 정말 그녀가 맞는지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나도 말이 안 되는 수준의 변화였으니까.
하준은 인정한다는 듯 순순히 고갤 끄덕였다.
“그 웃는 소리랑 웃을 때 입모양이 아니었다면 정말 절대 못 알아봤을 거야. 완전 딴 사람이 돼 버렸으니까.”
하준이 감탄해 마지않고 있는 그녀는 바로 박채희.
하준이 아버지처럼 모시고 있는 구명호와 가장 가깝고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현동 그룹 박성필 회장의 막내딸이기도 했다.
하준과는 어릴 적부터 가족 간의 식사 자리에서 종종 봐왔던 사이였고, 미국으로 떠나기 수 개월 전에도 우연히 카페에서 만난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 아예 새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전혀 다른 외모로 바뀌어 있었던 것.
비록 그게 자연적인 건지 아니면 어떠한 힘을 빌린 건진 알 수 없지만.
하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그녀가 웃음소릴 내며 말했다.
“호호. 얘,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거든? 그냥 살만 뺀 거야, 살만. 한 40㎏ 뺐더니 굳이 성형 안 해도 딱 마음에 드는 외모가 되더라고? 알고 보니 내가 긁지 않는 복권이었지 뭐야? 호호호.”
첫 등장 때와는 180도 달라진 그녀의 행동들. 이렇게 놓고 보니 자신이 알고 있던 과거의 그녀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진작 이렇게 했으면 바로 알아봤을 텐데.
하준은 조금 전 말에 동의한다는 듯 살짝 고갤 끄덕였다.
“그러네. 정말 살만 뺐는데도 이렇게까지 달라지는 걸 보면. 게다가 이렇게 능력까지 갖추고 있으니까 정말 딴 사람이 된 것 같은데?”
휴식 시간 동안 그녀의 경영 승계 과정에 대해 이미 모두 전해 들은 하준.
박 회장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개의 계열사 중 그녀는 지금 맡고 있는 것을 시작으로 하나씩 차근차근 늘려가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외동딸도 아닌 막내딸인 그녀가 이런 행보를 보일 거라곤 하준도 다소 예상치 못했던 부분.
그녀의 과거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러했고.
“뭐, 나라고 못할 거 있나 싶더라고? 살 한번 빠진 것뿐인데도 이상하게 자신감이 막막 상승하는 거 있지? 훗. 아니나 다를까, 역시 나한테도 아빠의 사업적 DNA가 있었나 보더라고. 하나씩 성과가 나다 보니까 전혀 없었던 열정도 막 솟구치고 말야.”
씨익 웃어 보인 그녀가 희고 가느다란 손으로 칼단발을 쓸어넘기며 하준에게 물어왔다.
“아 참, 세희랑은 아직도 같이 살아? 이젠 아니지? 다 큰 성인남녀인 데다가 서로 각자 분야에서 자리도 잡을 만큼 잡았는데. 당연히 독립 했을 거야, 그치?”
마치 압박 아닌 압박감이 있는 듯한 그녀의 물음에 하준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세희도 이젠 독립해서 따로 살고 있어. 회장님만 계속 평창동 그 집에 살고 계시고.”
“어머, 잘됐다, 얘!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호호호, 다행이다, 정말.”
“…….”
뭐가 다행이란 건진 모르겠지만, 구태여 묻진 않았다.
딱히 궁금하지 않기도 했고.
내내 흐뭇한 미소를 띠며 하준을 바라보던 박채희가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벌려왔다.
“아! 맞아. 세희는 안 본 지 꽤 오래 되긴 했는데, 그 사이에 회장님은 몇 번 마주쳤었어. 그것도 매번 같은 곳에서.”
“그래? 회장님도 너 못 알아보진 않으셨고? 아마 나랑 비슷한 반응이셨을 것 같은데.”
“풉. 처음엔 그랬지. 근데 두 번째로 뵀을 땐 바로 알아보시고 들고 있던 전복 상자까지 냉큼 주시던데? 뭘 그렇게 많이 사셨는지 엄청 무겁더라고.”
다소 뜬금없게 느껴지는 전복이란 단어에 하준이 살짝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전복?”
“아~ 응. 회장님을 뵌 게 두 번 다 부산에서였거든. 나야 사업상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주 간다고는 하지만 회장님을 두 번 다 거기서 뵈니까 되게 신기하더라? 따로 비서나 운전기사도 대동 안 시키시고 매번 혼자 오시는 것 같던데?”
박채희가 꺼낸 얘기들에 하준의 표정은 한층 더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정기적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신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부산이라는 먼 거리까지 가는 일정이라곤 생각치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전복.
평소 본인은 입에도 대지 않으면서 매번 하준 자신을 위해 챙겨주시는 그것.
그것의 출처가 다름 아닌 부산이었다니.
쉬이 납득이 가질 않고 있는 박채희의 얘기들에 하준의 표정도 사뭇 진지해졌다.
그러고는 곧 박채희를 바라보며 질문을 건넸다.
“혹시, 뭐 때문에 오셨다는 얘긴 너한테 따로 없으셨고?”
* * *
같은 시각, 평창동 구명호의 자택.
잠시 짐을 가지러 집에 들른 구세희는 현관문 입구에 놓인 골프 가방을 보곤 곧바로 가사 도우미에게 물었다.
“어? 아빠 집에 있었어요? 이 시간에 웬일이시지?”
가사 도우미가 안쪽 욕실을 잠시 힐긋하곤 구세희에게 답했다.
“오전에 다른 회장님들이랑 라운딩 끝내시고 잠시 씻고만 가신다고 들르셨어요. 오후에 회의가 있으시다고.”
“아~ 그렇구나. 난 또 무슨 일 있으신가 했네. 회장님 식사는 하셨어요?”
“네. 회장님들이랑 곰탕 드시고 오셨다 하더라고요. 늘 드시던 거기서.”
“에휴. 그놈의 곰탕 질리지도 않으신가? 아주 그러다 곰이 되시겠어, 곰이.”
고개를 절레 내젓곤 구세희가 가사도우미에게 물었다.
“그 제가 좀 챙겨달라는 거 그것 좀 가져다주세요. 저도 오후에 미팅이 있어서 곧바로 가봐야 해서.”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가씨.”
가사도우미가 2층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구세희는 잠시 식탁 의자에 앉았다.
시간을 보니 샤워를 끝마치고 나오면 인사 정도는 하고 갈 수 있을 것 같단 판단.
휴대폰을 꺼내 들곤 들어온 보고메일이 없나 확인하기 위해 메일창을 열었다.
그런데, 그때.
가까운 곳에서 휴대폰의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고갤 돌리니 식탁 위에 구명호의 휴대폰이 올려져 있었다.
발신자로 찍힌 번호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 게다가 지역 번호 또한 서울이 아닌 곳.
왠지 함부로 받으면 안 될 것 같아 다시 구세희는 휴대폰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러는 사이 울려오던 휴대폰 벨소리는 멈추었고, 그와 동시에 안쪽 욕실에서 들려오던 샤워기 소리 또한 일순 정지됐다.
그건 곧 그가 밖으로 나올 거라는 의미.
구세희는 곧바로 휴대폰을 전해주기 위해 다시 그것을 집어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구세희가 들고 있던 휴대폰 액정화면 위로 어떠한 메시지 하나가 떠오르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구세희의 표정은 일순 크게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 전화 안 받으셔서 문자로 남깁니다. 이정화 씨 검사 결과는 모두 정상으로 나왔고요, 딱히 걱정하실 만한 부분은 없는 걸로 사료됩니다. 자세한 얘기들은 다음번에 부산 내려오실 때 상세히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연락 주십시오.]
다른 무엇보다 구세희가 놀란 건 그 메시지 속에 담긴 누군가의 이름.
그 이름은 결코 구세희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기 때문에.
“이정화……? 검사 결과라니 이게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