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윤채경의 물음에 대답 대신 양 작가와 잠시 시선을 마주치는 이재호.
그러고는 곧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케이 스튜디오라고, 생긴 지 그렇게 오래된 곳은 아니야. 근래 들어 급격히 몸집을 키우고 있는 곳이지. 얼마 전에 종영한 <봄의 피아노>도 거기서 제작한 거고. 아마 채경 씨는 알 것 같은데…….”
어딘가 낯설지 않으면서도 잘 떠올려지지 않는다는 듯, 윤채경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그러는 동안 이재호가 윤채경의 표정을 살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채경 씨도 잘 알겠지만 지상파에선 자체 제작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환경이잖아. 애초에 방송법 때문에 현금 협찬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그럼 결국 PPL이나 협찬에 제약이 없는 외주로 맡겨야 한다는 건데…… 이번 작품처럼 스케일이 큰 경우엔 그나마 선택지도 몇 없을 수밖에 없거든. 그마저도 감독이나 작가, 또 어떤 배우가 캐스팅되냐에 따라 계약 여부가 정해지는 거고.”
윤채경도 다 알 법한 얘기들을 계속해서 내뱉어가는 이재호.
그러는 동안에도 웬일인지 자꾸만 윤채경의 눈치를 야금야금 살피고 있었다.
“채경 씨도 대본 봐서 잘 알겠지만 작품 자체는 정말 나무랄 데가 없잖아? 드라마는 90% 이상이 대본의 몫인데 말이야. 그럼 찍기만 하면 시청률은 무조건 보장이 된다는 건데. 제작사를 못 구해서 이런 아까운 작품을 지하 창고에다가 그냥 처박아둘 수는 없는 노릇이란 말이지. 채경 씨만 캐스팅 완료되면 케이 스튜디오 쪽에서 바로 계약하겠다고 하니까 당연히 우리야 마다할 이유가 없는 거고.”
케이 스튜디오, 케이 스튜디오.
이재호의 말을 귓바퀴로 주워 담으면서도 윤채경은 계속해서 기억을 더듬어갔다.
그러다 잠시 후, 마침내 기억을 떠올렸는지 윤채경이 표정을 바꾸고는 이재호를 바라봤다.
“잠깐, 잠깐만요, 감독님. 혹시 거기…….”
웬일인지 눈에 띄게 어두워진 그녀의 얼굴.
분명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어투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B&D에서 인수하려고 하는 곳 아니에요? 투자금이나 제작비도 다 B&D 쪽에서 끌어오는 거고.”
윤채경의 얘기에 이재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맞아. 채경 씨도 얼마 전까지 거기 소속이라 잘 알고 있겠지만, B&D가 지금 제작 쪽으로도 사업을 넓히려는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케이 스튜디오랑 작품 몇 개 같이 하면서 미리 체계를 갖추려는 것 같고. 뭐…… 우리 입장에서야 B&D 같은 빵빵한 곳에서 지원해 주겠다고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거지.”
B&D 대표 박성환과 윤채경 사이의 일을 알 리 없는 이재호.
그럼에도 이 바닥의 생리를 잘 알고 있는 그는 혹시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껄끄러운 일이 있을까 싶어 꽤나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윤채경의 재계약 거절 및 새 소속사 이전은 업계에서도 꽤나 이슈가 됐던 일이었기 때문에.
이재호가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한층 더 밝은 톤으로 입을 열어왔다.
“아, 그래도 박 대표가 채경 씨를 굉장히 아끼는 모양이더라고? 비록 이제 자기 식구는 아니지만 그래도 채경 씨가 주연을 맡는다면 지원은 절대 아끼지 않겠다 했다더라고. 이 바닥에선 서로 얼굴 붉히면서 헤어지는 일도 다반사인데 말야.”
이재호의 얘기에 함께 듣고 있던 하준 또한 표정이 사뭇 달라질 수밖엔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박성환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윤채경에게 그런 호의를 보일 리는 만무했기에.
그 누구보다 두 사람 사이의 일을 잘 알고 있는 하준은 의심과 의구심이 동시에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윤채경이 뭔가 짚이는 게 있다는 듯 이재호에게 물었다.
“감독님. 이번 작품에 B&D 소속 배우 몇이나 캐스팅됐어요?”
확신이 담겨 있는 듯한 윤채경의 물음에 이재호가 양 작가와 잠시 눈을 마주치고는 답했다.
“둘이야. 둘 다 조연급으로. 다른 자리는 내가 절대 안 된다고 했더니 박 대표가 그 두 자리는 꼭 자기 소속 배우로 채워달라 하더라고. 자기도 그 이상은 욕심 안 부리겠다고.”
“그게 누군데요?”
“이세연, 장호민.”
처음 듣는 두 사람의 이름에 하준은 윤채경 쪽으로 잠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하준과 달리 윤채경에겐 제법 익숙한 이름들인 듯,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하. 완전 쌩신인이나 다름없는 애들을 조연 자리에 밀어 넣겠다 이거네요? 그것도 전 작품에서 발연기로 말아먹다시피 했던 애들을?”
윤채경의 격앙된 어투에 이재호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후우, 그래도 뭐 어쩌겠어. 천하의 박 대표가 그 정도만 요구해 온 걸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채경 씨 커리어가 있으니까 같은 작품에 출연시키면 인지도 확 올릴 수 있겠다는 생각인 것 같더라고. 채경 씨 출연한 드라마가 지금껏 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나자, 하준도 이제야 그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윤채경을 이용해 일거양득을 취하겠다는 의도.
그녀가 출연한 작품의 성적은 항상 보장돼 왔으니 제작 쪽으로는 비즈니스적 수익을 크게 기대할 수 있다는 거였고, 엔터 쪽으로는 자신의 소속 배우들의 인지도를 확 끌어 올리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의 밑바탕엔 윤채경에 대한 완벽한 신뢰가 깔려 있었을 거고.
하준의 미간이 구겨져 있던 때, 윤채경이 양 작가를 쳐다보며 말했다.
“작가님. 작가님이 집필하시면서 생각해 둔 캐릭터나 떠올렸던 이미지가 분명 있었을 텐데 이렇게 아무나 막 캐스팅해도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다른 것도 아니고 작가님 인생에 단 한 번밖에 없을 입봉작인데.”
윤채경의 물음에 양 작가는 곤란한 표정만 지어 보인 채 선뜻 입술을 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신인 작가인 그녀에게는 자신의 작품이 세상에 나온다는 것 자체가 지금으로선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무작정 제안을 거절하기엔 또 몇 년이란 인고의 시간을 더 보내야 할지 모르는 거였고.
양 작가의 반응에 이재호도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후우, 당연히 나나 양 작가나 그런 부분이 내킬 리는 없지. 그냥저냥 아무나 맡아도 되는 역도 아니고 무려 조연 역인데. 그치만 다른 부분들까지 다 감안하면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라는 걸 우리 둘 다 아니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거고.”
잠시 어두워졌던 표정을 의도적으로 풀고는 이재호가 톤을 높였다.
“그래도 어쨌든 작품 자체가 좋고, 주인공도 채경 씨니까 무조건 잘될 수밖에 없지 않겠어? 까짓것 그 둘이 연기 못하면 내가 될 때까지 밤을 새워서라도 찍어내면 되는 거고 말야! 알잖아? 나 마라톤 촬영으로 유명한 거, 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무조건 잘 될 거라며 윤채경을 안심시키는 이재호.
그때였다.
이재호를 바라보던 하준의 시야가 갑자기 뒤바뀌기 시작하더니.
이내 기시감 가득한 어떠한 현상 하나가 하준의 눈앞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미 수도 없이 겪었던 그것의 등장에, 하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미팅 내내 느껴지던 불길한 느낌이 왠지 전혀 기우가 아니었음을 방증하려는 것 같아서.
대체 어떤 미래를 보여주려고 이 타이밍에 나타난 걸까.
잠시 후, 뒤집어진 시야 속으로 이재호와 양 작가가 나타났다.
장소는 지금과 같은 양 작가의 작업실.
머리를 거칠게 쥐어뜯던 이재호가 짙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하아…… 미치겠구만 진짜. 고작 드라마 하나 찍으면서 대체 뭔 놈의 사건 사고가 이렇게 끊이질 않는 건지. PD 생활 15년 해오면서 내 이렇게 쫄딱 망하는 경우는 진짜 처음이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답도 안 나오고. 후우…….”
분노와 답답함, 망연자실의 표정이 다 섞여 있는 그의 얼굴에 양 작가도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어왔다.
“이제 어떡하죠, 감독님……? 시청자 게시판부터 해서 저희 드라마 절대 안 보겠다고 여기저기서 보이콧까지 하고 있던데…… 게다가 오전엔 누가 청와대 국민 청원에까지 올렸대요. 우리 드라마가 한국의 위상을 다 떨어뜨려놨다고. 흑, 정말 어떡하죠, 저희…….”
정확히 어떤 유의 내용인지는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꽤나 심각한 상황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드라마 감독과 작가의 입에서 수습, 보이콧, 국민 청원이라는 단어가 나온다는 건 결코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후우, 미안해 양 작가. 전적으로 다 내 잘못이야. 박 대표 그 인간이 그 큰돈을 선뜻 지원하겠다고 할 때부터 의심을 했어야 했는데. 하, 나 참. 이 시국에 중국 자본으로 드라마 만든 것도 모자라 온갖 중국 제품들로 PPL 도배를 해놨으니 이 사단이 날 수밖에 없는 거지. 안일하게 생각했던 내 잘못이야, 전부 다.”
박 대표와 중국 자본.
이재호가 내뱉은 말들로 하준은 빠르게 상황을 추측했다.
박성환이 케이 스튜디오에 끌어온 드라마 제작 비용이 중국 기업들로부터 유입된 것.
그게 도를 지나쳐 결국 시청자들의 반발을 사게 된 것.
대략 이런 상황인 듯보였다.
“흑, 아니에요. 빨리 입봉하고 싶은 마음에 저도 다 동의했던 거잖아요…… 제가 경험만 있었어도 그렇게 다 수긍하고 받아들이진 않았을 텐데…….”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양 작가의 모습에 이재호도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아직 방송은 절반도 안 나간 상황인데 벌써 시청률은 한 자릿수로 곤두박질치고 있으니. 게다가, 위에선 조기종영 압박까지 들어오고 있고. 후우,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판단이 안 서서 돌아버리겠구만.”
그의 입에서 내뱉어진 조기 종영이라는 단어에 하준 또한 심각해질 수밖엔 없었다.
조기 종영은 배우에게도 큰 타격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기에.
게다가, 윤채경 같은 주연 배우에겐 더욱더 치명적인 오점으로 커리어에 오랫동안 남아 있게 될 거고.
하준의 심각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양 작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흑…… 저희도 저희지만 채경 씨한테 너무 죄송해서 어떡하죠, 감독님……? 채경 씨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주연 배우라는 이유로 온갖 비난들에 우리 드라마를 대표해서 사과까지 하고…… 너무 죄송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흑.”
그 순간 울먹이는 양 작가와 입술을 질근 깨무는 이재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하준의 시야가 다시 바뀌기 시작했다.
잠시 후, 회복된 시야 사이로 윤채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케이 스튜디오랑은 오후에 최종적으로 도장 찍기로 하신 거예요?”
“으응. 물론 채경 씨가 찝찝하고 언짢을 수 있다는 건 내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이해해! 그치만, 채경 씨가 우려하는 그런 상황은 절대 만들지 않겠다고 내가 꼭 약속할게. 우리 또 같이 채경 씨 커리어에 대상 트로피 하나 더 얹어야 하지 않겠어? 응?”
조금 전 장면들과는 확연히 다른 이재호의 모습.
하준이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윤채경이 짧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일단 알겠어요. 저 온전히 감독님과 대본만 보고 이 작품 결정한 거 아시죠? 박 대표가 앞으로 또 뭘 요구해 오든 분명하게 거절할 건 거절하셔야 해요. 안 그럼 작품이 산으로 갈 수밖엔 없게 될 거니까. 제 말 아시겠죠?”
“아, 그럼그럼! 나도 짬밥이라는 게 있는데 그렇게 마냥 끌려 다니기야 하려고? 하하. 고마워, 채경 씨!”
이제야 마음을 놓은 듯 한결 표정이 밝아진 이재호와 양 작가에게 윤채경이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하준을 바라보며 그만 가자는 사인을 보내왔다.
“가시죠, 대표님.”
“네.”
하준도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윤채경과 함께 작업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머릿속으론 여전히 아까의 미래 예지 장면들이 내내 떠나질 않고 있는 상태.
“대표님 무슨 일 있어요? 아까부터 계속 표정이 심각해 보이던데.”
윤채경의 물음에 하준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는 윤채경을 바라봤다.
“채경 씨, 이 작품 꼭 하고 싶으신 거죠?”
“응?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이거 좋다고 대표님이 먼저 말씀하셨던 거잖아요. 물론 저도 들어온 시나리오 중엔 이게 제일 끌리기도 했었고.”
“……음.”
부정할 수 없는 그녀의 말에 하준도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방법은 이제 단 하나뿐.
이미 머릿속으로 생각을 끝마친 하준이 윤채경과 시선을 마주하고는 말했다.
“채경 씨. 금방 갈 테니 먼저 차에 가 있으시겠어요? 전 잠깐 감독님과 할 얘기가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