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하준과 윤채경이 떠나고 난 양 작가의 작업실.
다소 어두워 보이는 이재호의 표정에 양 작가가 조심스럽게 살피며 물었다.
“저, 감독님.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재호가 짧은 한숨을 섞어 말했다.
“흐음…… 왜인진 모르겠는데 자꾸만 찝찝한 기분이 들어서 말야.”
“찝찝한 기분요?”
“윤채경이 캐스팅된 걸 알면서도 박 대표가 왜 굳이 우리 작품에 제작 지원을 나서려고 하는 건지, 그게 자꾸만 걸려.”
“음, 감독님이 그러셨잖아요. 계약은 해지됐어도 윤채경 씨 작품에 자기 배우들 꽂아 넣으면 무조건 B&D 입장에선 이득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분명 그거 노리고 이러는 걸 거라고.”
“그거야 그렇긴 한데…….”
B&D 최고의 간판 배우였던 윤채경.
누구보다 그녀의 커리어를 잘 알고 있는 박성환의 의도는 분명 노골적으로 보였다.
그녀가 주연으로 출연하는 작품에, 그것도 주조연급으로 함께한다는 건 엄청난 인지도의 상승을 가져올 테니까.
게다가, 그게 신인급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럼에도 왠지 모를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 없는 이재호.
일반 드라마에 비해 몇 배는 넘는 제작비를 B&D에서 어떻게 끌어올지도 미지수일 뿐더러, 박성환의 요구가 단순히 이번 끼워팔기만으로 끝날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던 이재호가 표정을 풀고는 양 작가에게 물었다.
“양 작가는 괜찮아? 아무리 캐스팅이 감독 권한이라고는 해도 양 작가가 죽어도 안 되겠다고 하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지. 그래도 드라마의 9할은 작가와 대본 몫인 건데.”
“어차피 다른 방법도 없잖아요. 저 공모전 당선되고 벌써 4년이나 지났어요. 신인 작가한테 이 정도 제작비를 선뜻 내줄 제작사가 또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거고. 감독님만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 그게 끼워팔기든 아니면 다른 게 되든.”
“앞으로 협찬이나 PPL 건으로 대본 수정 요청이 많이 들어올지도 몰라. 그래도 정말 괜찮겠어?”
“뭐 그런 거야 감독님한테 전적으로 위임하면 되죠! 감독님이 오케이하시면 머리를 쥐어뜯어서라도 수정하고?”
“참나. 신인이라는 걸 아주 무기로 삼는구만그래. 앞으로 모든 책임 전가는 다 나한테 하겠다 이거지?”
“어쨌거나 제가 신인인 건 팩트니까요?”
양 작가의 말에 그제야 이재호도 표정을 풀고는 웃어 보였다.
찝찝한 기분이야 어쨌든, 윤채경의 캐스팅이 확정됐다는 사실은 그에게 엄청난 든든함으로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작업실 벽면에 걸려 있는 시계를 잠시 확인하고는 방송국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엉덩이를 떼는 이재호.
그런데 그때, 작업실의 초인종 소리가 울려오기 시작했다.
인터폰 화면을 확인하던 양 작가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 유 대표님이 왜 다시 오셨지?”
곧장 현관으로 가 문을 열어주는 양 작가.
“왜 다시 오셨어요, 대표님? 혹시 뭐 놓고 가신 거라도.”
“아뇨. 감독님과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 해서.”
“아! 네네. 들어오세요.”
함께 나갔던 윤채경은 보이지 않고 홀로 작업실로 돌아온 하준의 모습에 이재호도 의아한 마음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준이 맞은편에 앉자, 이재호가 물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는 게.”
“제작사 관련해서 감독님과 얘기를 좀 더 나눠볼 수 있을까 해서요. 물론 양 작가님도 함께.”
하준의 얘기에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던 양 작가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우선, 제가 하는 얘기에 두 분 모두 오해는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채경 씨가 저희 소속 배우다 보니 대표 입장에선 이번 제작사 문제에 우려되는 부분들이 있을 수밖엔 없어서요. 혹여나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발생할 수도 있는 거고요.”
제작사와 관련된 문제라는 말에 이재호의 표정도 사뭇 달라졌다.
혹시나 그사이에 윤채경의 마음이 바뀐 건 아닐까 싶은 걱정과 함께.
겨우 떨쳐냈던 그 문제를 하준이 다시 꺼내왔기 때문이었다.
이재호와 양 작가의 긴장된 침묵 사이로 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제작비 외에 다른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다른 제작사를 알아보는 게 어떠실까요?”
다소 예상치 못했던 하준의 얘기에 이재호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다른 제작사라면.”
“제작비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요구들까지 다 수용하면서 손을 잡지 않아도 되는 그런 제작사 말입니다. 그럼 작품의 질도 훨씬 높아질 테니까요.”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여전히 이해가 가질 않는 이재호.
하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곧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하. 저, 대표님……? 뭔가 상황을 잘못 이해하신 모양인데요. 저희가 그런 걸 몰라서 그쪽과 작업을 하려는 게 아니라, 제작비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겁니다. 현재로썬 그만한 제작비를 선뜻 내줄 제작사가 없으니까요.”
이재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하준.
곧이어 여유로운 어투로 말을 내뱉어왔다.
“그 말씀은 제작비만 해결이 된다면 굳이 그곳과 할 이유가 없다는 말씀이시겠군요.”
갑자기 찾아와서는 뜻 모를 얘기만 자꾸 내뱉고 있는 하준의 모습에, 이재호와 양 작가의 표정엔 내내 물음표가 가시질 않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하준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제작비 부분은 제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감독님께선 좋은 제작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는 제작사를 찾아주세요.”
윤채경이 작품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유일한 해결책은 제작사를 바꾸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예지를 통해 본 미래에서의 모든 문제는 제작사로부터 비롯된 것들이었으니까.
그로 인해 작품은 물론, 자신의 소속 배우인 윤채경에게도 엄청난 타격이 오는 듯싶었고.
애초에 박성환과 연관된 곳인 것부터가 내내 찝찝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하지만, 전혀 기우가 아니었음을 확인하고는 빠르게 상황을 바꾸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하준이 내뱉은 얘기에 이재호가 말까지 더듬으며 되물어 왔다.
“제, 제작비를 대표님께서 직접 알아보시겠다고요? 그 말씀은…….”
“제작비를 지원해 줄 곳만 찾을 수 있다면 작품은 물론, 감독님과 작가님도 굳이 외부 상황에 휘두릴 필요는 없으니까요. 물론 저희 쪽에서도 훨씬 마음이 편해질 거고.”
하준의 마지막 말의 의미를 이해 못할 리 없는 이재호.
그럼에도 여전히 납득이 가질 않는다는 표정으로 하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거야 그렇지만…… 그 많은 제작비를 어떻게 알아보시려고. 대표님도 아시겠지만 저희 편성 날짜가.”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가능한 빨리 연락드릴 수 있도록 하죠.”
자신감과 단호함이 섞여 있는 하준의 어투.
하준이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재호를 향해 한마디를 덧붙였다.
“새 제작사만 알아봐주세요.”
* * *
다음 날, 영신 G&M의 회장실.
상석에 앉아 있는 구명호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하준에게 되물었다.
“흐음, 그러니까 드라마에 제작 지원을 해달라 이 말인 거지?”
“네. 드라마 설정상 주인공들이 대기업을 배경으로 움직이다 보니까 매 회차마다 회사명이 직접적으로 노출될 거예요. 그럼 자연스럽게 기업 홍보에도 도움이 될 거고요. 여러모로 회사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일 같아서요.”
하준의 얘기에 구명호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흠, 하준이 네 부탁이라면 당연히 들어줘야지. 관련 부서에 전달해서 차질 없이 진행하라고 얘기해 둘 테니, 필요한 것들 있으면 언제든 요청하도록 해. 최 비서한테도 따로 말해놓으마.”
“감사합니다, 아저씨.”
늘 그렇듯 하준의 일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흔쾌히 승낙하는 구명호.
하준의 감사 인사에 구명호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다 문득 구명호의 머릿속으로 일전의 신문 기사가 떠올랐다.
“하준아. 일전에 기사를 보니까 미국에서부터 쭉 그 일을 해왔던 것 같던데. 나름 그 업계에서 인정도 받았던 것 같고 말이다. 어쩌다 그쪽 일을 시작하게 된 건지 물어봐도 될까?”
처음 하준이 엔터 일을 한다고 했을 때만 해도 그저 우연일 거라고만 생각했던 구명호.
하지만, 얼마 전 기사를 접한 이후 그의 마음은 심란함과 복잡함이 공존할 수밖엔 없었다.
계획했던 경영 승계는 둘째 문제로 치더라도, 하준만큼은 그 길을 걷지 않길 바랐기 때문에.
구명호의 물음에 하준이 찻잔을 내려놓고는 답했다.
“처음부터 계획하고 시작했던 일은 아니었어요. 하다 보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거고요.”
구명호의 사뭇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며 하준이 말을 이었다.
“경영 승계 문제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아직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아요, 아저씨. 꼭 이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아저씨 뒤를 이어서 제가 그 일을 잘해낼 수 있을지는 저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라.”
“흐음. 그래, 분명 생각이 필요한 문제겠지. 나도 네가 정 싫다고 하면 계속 강요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고. 그 문제는 차근차근 생각해 보도록 하자.”
“네, 아저씨도 아직은 정정하시니까요. 물론 앞으로도 그러실 거고.”
하준의 얘기에 구명호가 웃어 보였다.
“허허, 다른 집들은 서로 승계받으려고 형제간에 치고받고 난리도 아닌 모양이던데. 어찌 세희나 너는 둘 다 내 건강만 그리 끔찍이 생각하는지. 너희들 효심 때문이라도 내가 이 회장 자리에서 눈을 감아야지. 허허.”
“그런 말씀 마시고요.”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구명호가 시계를 바라봤다.
“음, 마침 점심 먹을 시간도 됐고 온 김에 식사나 같이할까? 너랑 밥먹은 지도 꽤 된 것 같은데.”
구명호의 제안에 하준도 시계를 한번 바라보고는 답했다.
“제가 조만간 세희랑 집으로 한번 들를게요. 오늘은 뒤에 바로 일정이 있어서.”
“으흠. 그 일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쁜 거야? 그래도 끼니는 챙기면서 해야지!”
“평소엔 잘 챙겨 먹어요. 걱정 마세요.”
“그래, 그럼 조만간 세희랑 꼭 들르거라. 아무리 바빠도 가족끼리 종종 얼굴은 보고 해야지.”
“네, 아저씨. 그렇게 할게요.”
구명호와 미소를 주고받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하준.
다시 한번 구명호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회장실을 빠져나왔다.
가장 중요한 이슈였던 제작비 문제는 이걸로 해결.
더는 이번 작품에서 박성환과 얽힐 일은 없어진 셈이었다.
만약 그 타이밍에 나타난 미래 예지가 아니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을지도 모를 상황.
하준은 안도감이 섞인 옅은 한숨을 내뱉으며 엘리베이터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
하강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길 기다리는 동안, 하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그와 자꾸만 얽히게 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번 일을 알게 된 박성환의 성격상 그냥 넘어갈지도 미지수기에.
지난번 주차장에서 들었던 그의 대화들을 떠올리며 하준은 도착한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1층 버튼을 누르려는데.
하준의 시야가 일순간 뒤집어짐과 동시에, 강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어떠한 장면 하나가 또 한 번 나타난 건 바로 그때였다.
매번 악몽처럼 나타나 하준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꿈속 장면들.
검은 양복의 사내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색 입술의 여자.
그런데, 오늘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또 하나의 장면이 이어진 것.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주고받기 시작하는 어떠한 문서들.
그리고 그곳에 찍힌 어느 한 로고.
로고.
하준은 그것의 형태를 보는 순간, 빠르게 기억을 상기시키기 시작했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