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윤채경.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데뷔해, 십수 년째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방부제 같은 미모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청순가련의 대명사답게 아직도 많은 남성들의 마음속에서 ‘국민 첫사랑’이라는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물론 그녀의 현재 위치가 단순히 외모 하나로만 평가받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미 데뷔 이래로 숱하게 받아온 여우주연상은 물론.
몇 해 전엔 커리어 최초로 지상파 연기 대상까지 수상함으로써, 장르, 매체의 구분이 필요 없는 최고의 연기파 여배우라는 수식어까지 따라붙었으니까.
대부분의 여배우들이 그렇듯 그녀 또한 작품 활동 외에 자주 얼굴을 비추는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껏 단 한 번의 사건사고도 없이 활동해 온 탓에 매 작품마다 수많은 팬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아온 톱스타였다.
그런 그녀가 지금 하준이 있는 룸의 문을 열고 들어온 것.
갑작스레 룸 안으로 들이닥친 그녀는 하준의 존재를 확인하고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최윤섭은 당황스러움과 곤란함이 섞인 듯한 표정으로 윤채경을 바라봤다.
“채, 채경 씨. 일행분도 계시는데 이렇게 갑자기 들어오시면…….”
“기자님이 어떤 일로 저를 보자고 하신 건지 알게 됐거든요. 물론, 그 출처에 대해서도.”
차갑게 말을 내뱉은 윤채경이 하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죄송하지만, 잠깐만 자리 좀 비켜주실 수 있으실까요? 무례한 상황이라는 건 아는데, 제가 지금 그런 거 가릴 때가 아니라서. 대신 오늘 여기서 드신 술값은 제가 다 계산해 드리도록 할게요.”
“아이, 이것 참…….”
윤채경의 말에 최윤섭은 더욱더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준은 잠깐 동안 윤채경을 올려다 본 뒤 차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마침 잠깐 나갔다 오려던 참이라.”
짧게 내뱉고는 최윤섭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 대화 다 끝나시면 연락 주세요. 기자님.”
“아, 예예…… 알겠습니다, 유 대표님. 이거 본의 아니게 죄송하게 됐네요…….”
미안한 표정의 최윤섭을 일별하곤 룸을 빠져나왔다.
분명 무례한 상황임에는 틀림없었지만, 하준에게도 정리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잠시 자리를 비켜준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 상대가 윤채경이었기에.
바깥의 시끄러운 소음들 사이에 선 채로 잠시 생각에 잠긴 하준.
분명 미래 예지 속 멤버들의 입을 통해 ‘채경’이라는 이름이 언급됐었다.
현존하는 연예인 중 그 이름을 쓰는 이가 윤채경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가장 먼저 떠올려지는 인물임에는 틀림없는 사실.
게다가, 그간의 경험을 봤을 때 지금의 상황 또한 단순히 우연으로만 치부하기엔 어려웠고.
대체 미래 예지 속 멤버들이 뱉은 말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채경 누나를 데려온 게 대표님이었으니까.”
“채경 누나는 어떻게 들어오게 된 거예요?”
발걸음을 뗀 하준은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아까의 분위기상 분명 짧게 끝날 대화는 아닐 터.
마냥 그 자리에서 기다릴 수만은 없었기에, 주차된 차량 뒷좌석으로 잠시 몸을 실었다.
스트레이트로 마신 양주 탓인지 얼굴 위로는 열기가 올라왔다.
하준은 열을 식히기 위해 뒷좌석의 창문을 열었다.
“후우.”
반쯤 열어둔 틈새로 들어오는 밤공기를 맞으며 옅은 한숨을 내뱉는 하준.
여전히 머릿속으론 아무것도 정리가 되질 않고 있었다.
그런데, 꽤나 짙은 향의 담배연기와 함께 낯선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근원지는 자신의 차량 바로 옆에 주차된 검은색 세단 차량.
하준의 시야에 보이고 있는 앞좌석에선 두 명의 남자가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어떡하시려고요? 기사가 진짜로 나가기라도 하면 걔 이미지도 완전 박살 날 건데. 그때 돼서 재계약한다고 한들 수습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잖아요.”
운전석에서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
하준은 대화의 내용보단 바람을 타고 불어오는 다량의 담배 연기로 인해 미간이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창문을 닫기 위해 버튼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뒤이어 들려오는 또 다른 남자의 말들로 인해 하준의 손은 그대로 허공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정도도 생각 못 하고 칼을 뽑았을라고? 윤채경 그년 어차피 안 돌아와. 이미 한참 전부터 계약 해지날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다소 거친 어투와 함께 내뱉어진 그녀의 이름.
하준은 뻗었던 손을 다시 거두고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릴 땐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더니, 대가리 크고 나서는 당최 컨트롤이 안 된단 말이지. 날 바라보는 눈빛부터도 반항기가 잔뜩 실려 있고 말야.”
“언제는 채경이 그런 모습이 좋다면서요. 회사에 그런 애도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면서.”
“그랬지. 어디까지나 내 새끼로 평생 간다는 전제하에. 그래서 나도 그냥 귀엽게 봐주고 걔한텐 딱히 터치 안 하기도 했었던 거고.”
조수석 창문 밖으로 또 한 번의 짙은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후. 너도 본부장 달기 전까진 걔 맡았으니까 잘 알 거 아냐? 내가 접대 문제로 마카오를 가든, 홍콩을 가든, 룸살롱을 가든. 다른 애들을 데리고 가면 갔지, 채경이 걔는 단 한 번도 동행 안 시켰던 거. 걔는 다른 여배우 애들이랑은 결부터가 다르게 키우려고 했단 말이야.”
“그거야 잘 알죠. 그것 때문에 다른 애들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니까.”
꽤나 뚜렷하게 들려오는 그들의 대화를 듣는 동안, 어느새 하준의 표정도 굳어 있었다.
그들의 대화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와 동시에, 조수석에서 거친 말을 내뱉고 있는 그의 정체 또한 알 것 같았고.
하준의 머릿속으로 최윤섭의 통화 내용이 스쳐 갔다.
“딱 보니까 재계약 거절했다고 흠집 좀 세게 내려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는 동안에도, 그들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창석아. 내가 국내에 내로라하는 배우들을 어떻게 꽉 잡고 있는지 아냐? 그것도 매번 재계약까지 성공시키면서?”
“그거야 대표님이 워낙 운영을 잘 하시니까…….”
“큭, 웃기는 소리. 다들 내 품을 못 떠나서는 이 바닥 생활 더 이상 못 하게 만드는 거야. 최소한 그런 불안함이라도 갖게 만드는 거라고. 진짜로 그렇든 아니든 간에.”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그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이 바닥 생활하면서 구린 곳 하나 없이 백 프로 깨끗한 인간이 있을 것 같냐? 설령 있다 한들, 그런다고 흠집이 안 날 것 같아? 나 같은 인간이 언제든 맘먹고 달려들면 얼마든 끝장낼 수 있는 건데.”
“…….”
“같은 식구일 땐 그냥 친목이고 비즈니스였던 것들이 각자 등 돌리고 나면 곧바로 X파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뜻이야. 그거 하나면 나락으로 떨어뜨리기엔 충분한 미끼라고.”
이 바닥의 생리를 모르지 않는 하준이었기에, 그의 입에서 내뱉어진 말들은 불쾌한 마음을 더욱더 짙게 만들었다.
다른 무엇보다, 그의 이런 마인드가 이번 윤채경 일과도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 같았기에.
아니나 다를까, 뒤이어 그녀의 이름이 곧바로 나왔다.
“근데 그러기엔 이번 채경이 일은 좀 애매하지 않습니까? 없다던 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난 건 좀 시끄러울 순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걸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기엔 뭔가…….”
“약하지 않겠냐고?”
“그렇잖아요. 부모님 모두 안 계신 걸로 그동안 동정표를 꽤 많이 받아오긴 했지만, 사실은 아버지가 살아 있다, 다만 알코올 중독자에 가정 폭력이 심했기에 인연이 끊긴 지 오래고 그래서 마음속에선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호소하면 크게 타격받을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그게 또 사실이기도 하니까 오히려 동정표가 더해질 수도 있을 거고.”
“크큭. 넌 독립해서 네 회사 차리려면 아직 한참은 더 걸리겠다.”
담뱃불을 다시 붙이는 듯한 라이터 소리와 함께 그가 다시 입을 열어왔다.
“내가 최 기자 그놈한테 그 비싼 선물까지 바쳐가면서 고작 그런 허술한 기사나 써달라고 했을까 봐? 크큭, 두고 보라고. 아마 최 기자 그놈이라면 내가 던진 떡밥 하나로 아주 휘황찬란한 소설 하나 써낼 테니까.”
“떡밥요? 떡밥이라면…….”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보험 하나 들어놨거든. 뭐 이번 재계약은 어그러지더라도 내 품을 떠나면 어떻게 되는지 정도는 본보기로 보여줘야 할 거 아냐? 그래야 다른 애들도 그딴 마음은 절대 품지 못할 테니까.”
“……아.”
고요한 주차장 분위기.
하준과 그들 간 거리로 인해 목소리가 꽤나 뚜렷하게 들려오고 있었지만, 그들은 하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거침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윤채경 아버지라는 인간, 지난 몇 년간 나한테 받아간 돈만 해도 자그마치 수억이야. 뭐 물론, 내 쪽에서 일부러 쥐어준 거긴 하지만.”
“에? 대표님이요? 아니…… 왜요?”
“왜긴 왜야? 말했잖아. 보험이라고. 자신의 성공을 위해 돈으로 아버지의 존재를 줄곧 숨겨온 여배우 윤채경. 어때? 이 정도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리기에 충분한 기삿거리 아니겠어? 크크큭.”
“……아.”
“뭐 물론 나도 이렇게까지 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할 수 없는 거지. 참나. 부모도 없는 고아 년 이만큼 키워줬더니 은혜를 몰라도 유분수지.”
줄곧 불쾌함으로 짙어 있던 하준의 얼굴은 그의 입에서 내뱉어진 특정 단어를 듣는 순간 한층 더 굳어갔다.
‘그 단어’만큼은 하준에게도 분명한 의미가 있었기에.
“암튼, 빠르면 내일 중으로 최 기자가 기사 터뜨리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미리 준비들 해놔. 며칠 뒤면 이제 우리 식구도 아니니까 감싸줄 필요도 없고.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 예 대표님. 홍보팀한테도 그렇게 당부해두도록 하겠습니다.”
“가자, 피곤하다.”
조수석에 앉은 그의 말을 끝으로 검은색 세단 차량은 유유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림자에 묻힌 채 그들의 대화를 모두 주워 담은 하준은 이제야 모든 상황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또한.
열렸던 창문을 닫고선 뒷좌석 밖으로 빠져나온 하준.
곧장 가라오케의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겨 나갔다.
이미 머릿속으로 해야 할 정리는 모두 끝낸 상황.
가라오케의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하준의 오른손엔.
차 안에서부터 줄곧 빛을 내고 있던 그의 휴대폰이 뜨겁게 열을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