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청담동에 위치한 P 가라오케.
최윤섭과의 만남을 위해 이곳에 온 하준은 벌써 20분째 룸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통화 때부터 꽤나 술에 취한 듯 보였던 그의 목소리.
하준은 만남을 다음으로 미룰까도 싶었지만, 어차피 한 번은 봐야 했던 터라 그냥 오늘로 수락했던 것이었다.
무엇보다 지난번 일에 대한 답례를 해야 하기도 했고.
“저, 사장님? 세팅은 어떻게 해드릴까요?”
노크와 함께 룸으로 들어온 웨이터가 하준에게 물어왔다.
이미 두 차례나 주문을 미뤘던 하준은 왼쪽 손목을 잠깐 확인하고는 짧은 한숨과 함께 답했다.
“우선 기본으로 주세요. 필요한 게 있으면 따로 부르겠습니다.”
그러고는 지갑을 꺼내 오만 원짜리 두 장을 건넸다.
“그럼 고생하시고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럼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한껏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인 웨이터가 90도 인사와 함께 룸을 빠져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양주와 안주들이 테이블 위로 세팅되었다.
어느새 최윤섭을 기다린 지도 벌써 30분을 훌쩍 넘어가고 있는 상황.
하는 수 없이 하준은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그의 번호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다시 한번 룸의 문이 열리더니 드디어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고, 유 대표님! 제가 좀 늦었죠? 먼저 있던 선약이 조금 길어지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하하. 먼저 주문하셨네요?”
첫 만남 때와는 달리 꽤나 능청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최윤섭.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거하게 취한 듯한 모습은 아니었다.
하준의 맞은편에 앉은 그가 곧바로 스트레이트 잔에 양주를 채우고는 하준에게 건넸다.
“그나저나 지난번에 제가 도와드린 일은 어떻게 잘 해결되셨나 모르겠습니다?”
“네, 덕분에 잘 해결했습니다.”
“크큭,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저 그날 그 기사 써내느라 애 좀 먹은 거 아시죠? 대표님이 하도 급하게 쪼아대는 바람에 데스크 승인도 없이 그냥 막무가내로 올려 버렸다니까요? 크큭.”
웃음소리와 함께 최윤섭이 스트레이트 잔을 그대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
“네, 그렇지 않아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드시고 싶은 거 있으시면 편하게 더 시키셔도 됩니다.”
“아아. 혹시나 해서 미리 말씀드리는데, 오늘 이 자리는 제가 사는 겁니다, 대표님? 그러니 대표님이야말로 부담 없이 그저 편하게 쭉쭉 들이켜시면 되고요!”
최윤섭의 얘기에 하준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하준의 표정을 읽은 듯 최윤섭이 다시 입을 열어왔다.
“아이참,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유 대표님, 제가 그깟 기사 하나 좀 써줬다고 이 야심한 밤에 바쁘신 대표님 불러서 술값이나 내게 하겠습니까? 저 그렇게 그지 근성 있는 놈 아닙니다?”
술잔을 들어 올리며 그가 말을 이었다.
“뭐 사실, 저도 이번 일로 덕을 좀 보긴 했거든요. 맨날 그놈의 기레기 소리만 듣다가 이번엔 선플도 많이 달리고, 주변에서 좋은 소리들도 듣고 하니까 기분이 좋긴 좋더라고요? 참, 이 맛에 기자 생활 시작한 거긴 했는데.”
지난날을 회상이라도 하듯, 잠시 씁쓸한 표정이 스쳐 가는 최윤섭.
“무튼 뭐, 그래서 그런 거니까 오늘은 그냥 맘 편하게 드시면 됩니다. 제가 이래 봬도 최연소로 차장 대우까지 올라간 사람입니다? 이 정도 술값은 전혀 무리 없다고요. 크크큭.”
말을 마치고는 건배의 의미로 자신의 잔을 하준에게 내밀었다.
여전히 미심쩍은 마음이 드는 하준이었지만, 일단은 응하기 위해 잔을 들어 올렸다.
“아무쪼록 앞으로도 우리 좋은 관계 유지해 봅시다, 유 대표님!”
지난번 만남 때와는 분명 어딘가 달라진 듯한 그의 태도.
단순히 그가 말한 이유들 때문이라고 하기엔 석연찮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신생 기획사 대표에게 차장 대우급 기자가 이렇게까지 대접하고 나설 리는 없기 때문에.
그때, 잔을 입안에 털어 넣은 최윤섭이 묘한 표정과 함께 하준에게 시선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저…… 유 대표님? 제가 구 사장님한테 듣기론 유 대표님께서 세련 씨랑 꽤 오래전부터 가깝게 지내온 사이라고 하던데. 그게 정말 사실일까요?”
“아, 네. 물론 최근엔 딱히 이렇다 할 교류가 없긴 했지만.”
“아하! 그러셨구나!”
일순간 그의 표정이 반색으로 바뀌었다.
“하하, 이것 참. 그런 줄 알았더라면 지난번 만남 때 제가 그렇게 까탈스럽게 굴진 않았을 텐데요! 진작 말씀을 하지 그러셨습니까, 유 대표님. 하하. 행여나 앞으로도 저번처럼 부탁할 일이 생기시면 언제든 주저 말고 얘기해 주세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제 사람’ 챙기는 거 하나는 아주 으뜸이거든요, 으뜸! 하하하.”
“…….”
언제부터 자신이 그의 사람이 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하준은 이제야 그의 달라진 태도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이미 지난번 만남 때부터 세련에 대한 최윤섭의 마음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하준을 향해 연신 매력 있는 미소를 내뿜어대던 최윤섭이 갑자기 가슴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곧 휴대폰을 꺼내 들더니 곧바로 수화기를 귀에다 가져다댔다.
“예, 부장. 그렇지 않아도 이제 막 인터뷰 끝내고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말을 내뱉으면서도 계속 술잔을 채우는 최윤섭.
“아이참, 제가 또 무슨 술을 먹어요, 술을 먹기는. 일하러 왔으면 일만 딱 하고 가야죠! 프로답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잔을 입안에 털어 넣으며 통화를 이어갔다.
“예예. 전 소속사 대표가 직접 제보한 거니까 우리 입장에서야 딱히 상관없죠 뭐. 예, 딱 보니까 재계약 거절했다고 흠집 좀 세게 내려는 것 같더라고요?”
수화기 너머에서 남자의 음성이 희미하게 들려오긴 했지만, 어떤 유의 대화인지까지는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하준은 잠시 손목을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했다.
딱히 특별한 목적이 있어 부른 것은 아닌 것 같아 보였기에, 굳이 많은 시간을 할애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렇게 한가하게 술이나 마시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뭐 아무튼, 저는 미팅이 하나 더 남아 있어서 그것만 끝내고 바로 현장 퇴근하는 걸로 할게요. 부장. 그래도 되죠?”
하준을 향해 살짝 입꼬리를 올려보이고는 곧바로 다시 표정을 바꾸는 최윤섭.
“아, 누구긴 누구겠어요. 윤채경이지! 그래도 저랑은 인터뷰도 몇 번 하고 했는데 미리 언질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정이라는 게 있는데.”
최윤섭의 입에서 내뱉어진 이름 세 글자.
그 세 글자가 귓바퀴로 들어온 순간, 하준의 시선은 곧바로 그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전혀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이 아니었기에.
“아이참, 제가 그렇다고 언제 뭐 공과 사 구분 못 한 적 있습니까? 정은 정이고, 일은 일이지! 암튼, 제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부장은 그저 저만 믿고 편안~ 히 계시면 됩니다. 아시겠죠? 으흠, 저 그럼 이만 끊습니다?”
통화를 끝내고는 휴대폰을 다시 안주머니에 집어넣는 최윤섭.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하준을 확인하고는 금세 표정을 바꾸어왔다.
“아이고, 하하. 기자라는 직업이 이렇게나 힘듭니다, 대표님. 이 시간까지도 술 한잔을 맘 편하게 못 하고. 아 참, 이것도 행여나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요. 제가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런 곳이나 들르는 거지, 평소엔 절대 근처에도 안 옵니다, 유 대표님? 괜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변명하듯 내뱉는 최윤섭에게 하준이 곧바로 물었다.
“통화 중에 윤채경 씨 이름이 잠깐 나오는 것 같던데. 혹시 그분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아, 다 듣고 계셨구나. 이거 말조심한다는 게 나도 모르게. 으흠, 이건 단독 기삿감이라 보도 전까진 일급기밀이긴 한데…….”
턱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하는 듯싶던 최윤섭이 곧 입꼬리를 살짝 올려왔다.
“뭐, 세련 씨랑 워낙 각별한 사이라고 하시니 어디 가서 함부로 발설하실 분은 절대 아니겠죠? 하하. 네, 윤채경 씨 관련해서 제보를 하나 받았는데 이게 아무래도 좀 충격적인 일이다 보니까, 아마 한동안은 꽤 떠들썩하지 않을까 싶네요?”
최윤섭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에휴, 그래도 나름 친분이 있던 배우라 안타깝기는 한데. 그래도 뭐 어쩌겠습니까,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어차피 내보낼 기삿감인데.”
정확히 어떠한 내용의 기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뉘앙스상 그것의 크기가 결코 작은 듯 보이진 않았다.
하준 또한 사뭇 진지해질 수밖엔 없었다.
미래예지 속 언급되었던 그녀가 과연 지금의 이 윤채경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채경 누나를 데려온 게 대표님이었으니까.’
‘대표님, 채경 누나는 어떻게 들어오게 된 거예요?’
꿈속에서 멤버들이 했던 말들.
게다가, 멤버들에게 꽤나 큰 도움이 되었다던 그녀.
분명 마냥 무시할 수 없는 정보였지만, 부분적인 정보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현재의 상황에선 그 어떤 것도 쉽사리 정리가 되질 않았다.
자신의 왼쪽 손목을 한번 힐긋해 보이던 최윤섭이 하준에게 조심스럽게 말해왔다.
“아, 그래서 말인데요, 대표님. 제가 본의 아니게 오늘 일정이 조금씩 겹치는 바람에 조금 있다 잠깐만 자리를 좀 비워야 할 것 같은데…… 혹시 괜찮으실까요? 뭐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니까 금방 끝내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방 자리를 정리하려 했던 하준.
하지만 급변한 심리 상태로 인해 일단은 조금 더 이 자리를 유지하기로 했다.
“네, 그러시죠.”
하준의 대답에 최윤섭이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하준의 술잔을 다시 채웠다.
그러고는 하준의 얼굴을 슬슬 살피더니 이내 말을 건네왔다.
“그나저나 대표님 표정이 아까보다 좀 어두워지신 것 같은데. 혹시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아닙니다. 그냥 잠깐 생각할 일이 좀 있어서.”
“그러신 거죠? 전 또 대표님께서 윤채경 씨의 굉장한 팬이면 어떡하나 했습니다. 하하. 그럼 제가 괜한 얘길 꺼낸 게 될 테니까요!”
하준이 누군가의 팬을 자처할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윤채경이라는 이름은 그에게 전혀 낯설지 않았다.
비단 이번 일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대한민국에서 그녀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기 때문에.
그때, 희미하게 들려오는 진동 소리와 함께 최윤섭이 다시 한번 자신의 가슴팍을 더듬거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아, 네 채경 씨! 벌써 도착하셨어요?”
통화를 연결함과 동시에 수화기 너머의 상대 이름을 내뱉는 최윤섭.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어갔다.
“아, 예. 저는 잠깐 8번 룸에 들어와 있는데 지금 바로 나가겠습니다. 몇 번으로 가면 될까요?”
하준을 향해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사인을 보내며 문 쪽으로 걸어가는 최윤섭.
하준 또한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런데, 최윤섭이 아직 문 앞에 채 닿기도 전인 그때.
벌컥.
바깥쪽에서 먼저 룸의 문이 열려오더니, 그와 동시에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조명 아래 선명히 비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하준은 그녀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최 기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