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경기도 모처의 한 고급 스파.
전면을 과감 없이 드러내고 있는 유리창 바깥으로, 이제 막 필드를 끝마친 드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햇살 아래, 티타임을 가지고 있는 노년의 남성 셋.
가운 차림의 윤 회장이 찻잔에서 입술을 떼고는 맞은편을 바라봤다.
“허허, 우리 구 회장. 오늘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가 보구만? 내기에서 지고도 이렇게 내내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옆자리의 박 회장도 곧바로 거들었다.
“아, 누가 아니래. 평소 구 회장 성격 같았으면 집에 갈 생각은 엄두도 내지 말라고 아주 엄포를 놓았을 텐데 말이야!”
의아함이 가득한 두 사람의 시선에도, 당사자인 구명호의 얼굴에선 여전히 웃음꽃이 사라지질 않았다.
찻잔을 입으로 가져다대며 구명호가 짧게 답했다.
“허허, 이 사람들도 참. 내기라는 게 이길 때가 있으면 질 때도 있고 그러는 거 아니겠는가? 허허허.”
역시나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그.
오로지 구명호의 머릿속엔 7년 만에 만날 ‘그’에 대한 기대감으로만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속내를 알 길 없는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내저으며 찻잔으로 손을 옮겼다.
서로 간의 짧은 침묵이 흐르던 그때.
한쪽 편에 마련된 대형 TV에서 어느 한 예능 프로그램 사회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자, 이번 코너는 금주간 있었던 핫 이슈들을 한 번에 모아보는 시간인데요! 많고 많았던 이슈들 중 아무래도 가장 떠들썩했던 사건은 바로 이번 ‘대형 열애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화제의 주인공들은 바로 인기 남자아이들 그룹 레드엑스의 시우와 여배우 김주희 씨!
열애설 그 자체보다 더욱 놀라움을 자아냈던 건 당사자들의 빠른 인정이었습니다.
레드엑스의 소속사 TGM의 입장문에 따르면…….
노년의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윤 회장과 박 회장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사회자의 흥분된 톤에도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다만, 구명호만큼은 대형 TV로 시선을 고정한 채 꽤 유심히 경청하는 모습이었다.
지켜보던 윤 회장이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참. 저게 구 회장네 딸이 하는 방송국이었지?”
“그렇지.”
“흠, 호기심에 잠깐 하다 말 줄 알았더니 제법 끈질기게 하는 모양이구만 그래.”
윤 회장의 말에 박 회장이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쯔쯧. 자식이라곤 딸 하나밖에 없는데 가업을 물려받을 생각은 않고 있으니 구 회장도 참 답답하겠구만. 그렇다고 ‘영신’이 어디 동네 구멍가게도 아닌데, 아무한테나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구명호가 밑바닥부터 손수 일구어온 영신 G&M.
숱한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이젠 대한민국 재계 20위 내에 드는 어엿한 대기업에 속했다.
다만 유일한 걱정거리가 있다면, 바로 ‘후계자 승계’ 문제.
아직 구 회장에게 건강상으로 특별한 이상 징후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타 기업들의 행보와 비교해 본다면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하나밖에 없는 그의 딸 구세희는 아버지의 사업과는 전혀 무관한 다른 사업을 독자적으로 시작한 상황이었으니 더더욱.
그런 구 회장의 근심을 평소 누구보다 잘 아는 두 회장들이기에 이런 말을 입 밖으로 직접 꺼낼 수 있는 것이었다.
묵묵히 듣고 있던 구명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녀석의 뜻이 워낙 확고하니 이젠 나도 포기해야 할 때가 된 거겠지.”
이전과는 달리 약간은 어두워진 듯한 그의 표정.
하지만 희미한 미소가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뭐 물론, 마침 최고의 대안책이 생겨나기도 했고 말이야.”
구명호의 입에서 흘러나온 뜻밖의 말에 윤 회장과 박 회장 두 사람이 일제히 눈썹을 치켜세웠다.
동시에 가운을 여미며 구명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나는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 이만 먼저 일어나보도록 하지. 그럼 실력들 쌓아서 조만간 또 보자고들.”
“응? 식사도 안 하고 가려고? 구 회장 여기 곰탕이라면 아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 아니었나?”
“허, 참. 그러게 말이야. 구 회장한테 곰탕보다도 더 중요한 스케줄이라니. 어디 대통령이라도 만나러 가는 건가?”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두 회장의 말에 구명호가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대통령? 대통령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자리지.”
그러고는 곧 기대감이 가득 찬 어투로 덧붙였다.
“무려 7년 만에 보는 아들놈과의 자리니까.”
* * *
영신 G&M의 로고가 크게 박힌 영신 사옥의 1층 로비.
점심시간이라 그리 한산하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이제 막 교대를 끝마친 데스크 여직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으아아, 지루하다, 지루해…… 월요일이라서 그런가?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 것 같죠?”
“그게 과연 월요일이라서 그럴까? 아마 내일도, 모레도 똑같을걸?”
“힝, 그 얘기 들으니까 더 슬퍼. 정말 특별한 일이라곤 일도 없구나, 일도 없어.”
“참나. 예지 씨는 여태껏 일해보고도 몰라? 매일 똑같은 사람들 보면서 똑같은 일만 하는데 특별한 일이랄 게 뭐 있겠어?”
“힝, 그래도요…….”
여직원들의 대화가 이어지던 그때, 안내데스크 앞으로 한 남자가 걸음을 멈추더니 이내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출입증 좀 받으려고 하는데.”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여직원들.
하지만 시선이 마주한 그곳엔 목소리보다 훨씬 더 낯설게 느껴지는 뜻밖의 비주얼이 서 있었다.
“아…….”
머리카락 한 올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는 깔끔한 포머드 헤어에 한참을 우러러 봐야 할 것만 같은 훤칠한 키.
거기에 디자이너가 직접 맞춤으로 제작한 듯한 그레이 색상의 쓰리피스 수트와 무척이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윙팁 슈즈까지.
평소 이곳에서 보던 직장인들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외모에, 직원들은 대응 매뉴얼조차 순간적으로 잊어버린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죄, 죄송합니다! 혹시 방문 예약은 하셨나요? 방문하려고 하시는 부서명과 담당자 이름 알려주시면 확인 후 발급 도와드리겠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내뱉은 여직원의 물음에 남자는 여유로운 미소로 답했다.
“구명호 회장님입니다.”
“아……!”
흘러나온 뜻밖의 이름에 곧바로 예약자 명단을 확인하는 여직원.
이윽고 명단에 적힌 이름 세 글자를 확인한 직원이 되물었다.
“혹시 성함이…….”
“유하준입니다.”
“아, 네!”
이름을 확인한 여직원은 곧바로 출입증 발급 절차를 거치고는 임시 출입증을 건넸고.
남자는 옅은 미소로 화답하고는 게이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 언니! 비고란에 가족이라고 돼 있던데, 회장님한테 저런 아드님이 있으셨어요?!”
“그, 그러게 말이야. 분명 그런 얘긴 듣지 못했었는데…….”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두 여직원.
아니나 다를까, 로비를 지나던 다른 사람들의 시선 또한 그에게로 일제히 달라붙고 있었다.
곧이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은 말이 동시에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건 바로 그때였다.
“완전 연예인이네…….”
* * *
“크하하. 이게 대체 얼마만이냐, 하준아! 너 귀국한단 연락 받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이미 꽤 격한 환영 인사를 한 탓에 상석에 앉아 있는 구명호의 머리털은 여전히 살랑거리고 있었다.
“연락 자주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아저씨. 건강에 이상은 없으시죠?”
“허허, 말도 마라, 말도 마. 늙으니까 머리는 하루가 다르게 굳어가지, 몸은 점점 더 예민해지지.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라는 걸 매일 실감하며 산다, 내가. 허허허.”
“그런 말씀 마시고요.”
숨길 수 없는 함박웃음을 유지한 채 구명호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대체 미국에선 어떻게 생활한 거야? 소식을 물을래도 그놈의 시차 때문에 연락하기가 좀 어려워야지. 게다가 쓰라고 준 카드는 대체 왜 몇 년 동안 한 번을 쓰질 않은 거고.”
구명호의 물음에 하준은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녀석, 웃기는! 나도 나지만 세희 녀석이 너 오기만을 잔뜩 벼르고 있어. 아주 가만 안 두겠다고 말이야. 아, 세희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지?”
“네. 아저씨가 많이 도와주셨겠던데요.”
“허허. 어릴 적부터 지 방송국 가지는 게 꿈이라고 아주 노랠 부르더니 기어코 해보겠다고 하더라고. 아, 그러니 별수 있나! 애비로서 도와줄 수밖엔.”
김이 모락 피어나고 있는 커피잔으로 구명호가 손을 옮겼다.
“그럼 이제 완전히 온 거지? 다시 돌아가는 일은 없는 거고?”
“네, 아마도요. 생각보다 오래 있기도 했고.”
“그래, 7년이면 꽤 긴 시간이지. 잘 생각했다. 최 비서한테 얘기해서 너 살 집이나 급한 것들은 최대한 빠르게 준비하라고 할 테니까 그때까진 호텔에서 머물도록 해. 더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고.”
“아뇨,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집은 전에 살던 곳에서 계속 살 거라서.”
“응? 거기에 계속 살겠다고? 흠…… 니 뜻이라 처분하지 않고 그대로 냅두기는 했다만, 아무래도 오래된 집이라 새집으로 가는 게 낫지 않겠어?”
“전 그 집이 편해서요. 짐도 다 거기로 보내놓은 상태고.”
“흠.”
잠시 고민하던 구 회장은 곧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생각이 정 그러면 하는 수 없고. 다른 필요한 것들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도록 해. 알았지?”
“네, 아저씨.”
다시 찻잔으로 입술을 가져다대는 구 회장의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도무지 숨겨지질 않았다.
무엇보다 무려 7년 만에 보는 하준의 모습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의젓하고도 듬직한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준이라면 역시 모든 걸 믿고 맡길 수 있겠어. 크흐흐.’
동시에, 자신의 오랜 걱정거리 또한 이젠 완전히 해결할 수 있을 거란 강한 기대감에 휩싸였기에 더더욱.
등받이에 몸을 기댄 구 회장은 하준에게 온화한 눈길을 보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정리할 것도 많을 텐데 당분간은 푹 쉬도록 해. 얼추 정리 끝났다 싶으면 출근 날짜 한번 잡아보자고. 세희 녀석이야 지 발로 걷어찼으니 이제 이 회사는 다 네 것인 거 알지? 하하하.”
조금 늦은 감이 없진 않았지만, 현재 자신의 컨디션과 하준의 능력을 고려한다면 후계자로 키워내기엔 여전히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다는 판단이었다.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다시 찻잔으로 손을 옮기는 구 회장.
하준의 대답이 돌아온 건 그와 거의 같은 타이밍이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아요, 아저씨.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있어서.”
“중요한 일?”
하준의 대답에 찻잔으로 뻗던 손을 멈추고는 구 회장이 곧바로 되물었다.
“회사를 물려받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니…… 그게 대체 어떤 거냐, 하준아.”
구 회장이 꽤나 진지한 어투로 물어오던 그때, 하준의 상의 안주머니에서 짧은 진동이 일기 시작했다.
하준은 잠시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곧 고갤 들어 구 회장을 바라봤다.
“하고 싶은 일, 아니,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매끄럽고도 차분한 음성이었지만, 그 안엔 뭐라 형용하기 힘든 위압감 같은 것이 잔뜩 베어 있는 듯한 대답.
자신이 보았던 미래 장면들을 떠올리며, 하준이 옅은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이미 시작한 상태이기도 하고요.”
* * *
상암동에 위치한 종편 방송 채널 NTV.
디지털 미디어 시티의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NTV의 사장실에선 때아닌 뾰족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뭐?! 지, 지금 뭐라고 했어? 누가 왔다고?”
“하준이 말이야, 하준이. 7년 동안 깜깜무소식이던 그 유하준! 나도 방금 최 비서님한테 전해 들은 거야. 네가 하도 전화를 안 받아서 나한테 전달 좀 해달라고 하시더라.”
방송국 개국 이래로 단 한 번도 흑자를 내지 못하고 있던 탓에, 회의 내내 잔뜩 히스테리를 부리고 온 구세희.
그녀의 머리카락은 이미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진 상태였다.
거기에, 조금 전 세련으로부터 들은 뜻밖의 소식은 머릿속까지 복잡하게 만들기 충분했고.
“지금 그거, 확실한 거지? 정말 유하준이 돌아왔다 이거지?”
“아이참, 그렇다니까 그러네? 최 비서님이 언제 없는 얘기 전달하는 거 봤니?”
세련으로부터 다시 한번 확인 도장을 받는 구세희.
곧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나지막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유하준 너 이 자식…… 딱 두고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