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52화 (152/164)

< 성안 - [2] >

곳곳에서 악에 받친 고함소리가 울려퍼졌다.

“죽여!” “살려······” “죽어!”

비명과 전투함성, 혹은 양쪽 의미에서의 외침들. 병사들의 몸에서 떨어져 내린 피와 땀은 차가운 바닥에 떨어져 내려 김을 피워 올렸다.

싸우는 본인들로서는 일생에 다시없을 사투일 것이다. 저 거대한 괴물 군대와의 싸움이라니.

그러나 그 장엄한 전투는 약 열 명의 인원에게 별 다른 감동을 안겨주지 못했다.

“멀리서 보자니 그냥 허탈하네.”

제이슨이 중얼거렸고 헤임달은 이를 악물었다.

헤임달이 보기에도 저 장면은 꼴사나웠다. 허공에 창질하다 비명 지르며 고꾸라지는 남자들이라니.

‘방금 전까지는 나도 저 꼴이었단 말이지.’

헤임달은 발할라의 전사들을 노려보았다. 지금 그들은 헤임달에게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저 상처만 치유해주고 방치하다니. 그림자들답게 신에게 바칠 경외심마저 없는 것인가?

헤임달이 홀로 분노를 삭이는 차, 발할라의 전사들은 자기들끼리 말을 섞었다.

“환영에서 다치면 쇼크로 기절하거나 죽을 수도 있다고 했던가? 그런 개죽음 당하도록 저대로 내버려둬야 하나?”

제이슨이 물었고 모지가 대답했다.

“달리 뭘 어쩔 수 있나? 하나하나 꿇어앉혀놓고 샘물을 마시게 할 것이 아니고서야. 어차피 저들로서는 환영과 싸우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지. 진짜 거인들과 싸우는 쪽은 훨씬 더 많이들 죽고 있으니······.”

모지는 성으로 진입하는 병력을 가리키며 말을 흐렸다.

위에서 아래를 향해, 연신 벼락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화살의 형태를 한 벼락이.

성벽 위에 늘어선 거인 궁수들은 한시도 쉬지 않았다. 시위를 떠난 거인의 화살은 굉음과 함께 내리꽂혀 시체와 흙먼지를 휘날렸다.

거인이 아무렇게나 날린 화살도 최소 두 명을 죽였다. 아직 성벽 안에 돌입하지 못한 병사들은 밀집해 있었던 것이다. 공기를 찢어발기며 화살이 날아와도 병사들은 피할 수 없었다. 어찌 몸부림친들 서로를 짓밟거나 깔아뭉개면서 또 다른 희생자들을 만들어낼 뿐이었다.

저러다가 얼마나 죽어나갈 것인가. 제이슨은 헤아리고 싶지도 않았다.

원정대에서도 포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쾅쾅 하고 울렸다.

그러나 이제 그 굉음은 귀를 아프게 찔러오지 않았다. 모두들 그 소리에 익숙해지다 못해 고막이 마비되었다.

그 광경 앞에서 아서는 움츠러들지 않기 위해 애썼다. 말 그대로 전쟁통에 내놓인 셈 아닌가.

다른 동료들은 어떤가 살펴보았다. 우선 신전에서 데려온 유저들, 예상대로 다들 얼어붙은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베테랑 삼인조는? 문득 제이슨을 쳐다본 아서는 질겁했다.

제이슨은 저 아비규환의 장을 심드렁하게 보고 있었다. 얼마나 죽건, 승패가 어찌 되건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이.

그러던 제이슨의 안면에 문득 화색이 떠올랐다.

제이슨은 자기 흑기사가 데려온 늙은 기사를 보며 환성을 내질렀다.

“알론소!”

흑기사에게 업혀온 알론소는 반쯤 죽어있었다. 아서가 그 늙은 몸을 어루만지며 주문을 외운바, 그 상처 입은 몸은 신속히도 치유되었다.

알론소에게 생기가 돌아오자 제이슨은 싱긋 웃더니, 이내 그 미소를 거두고 중얼거렸다.

“생환해온 노기사께서는 위업을 이루어냈다 치고. 우린 이제 어쩌면 되는 거냐? 멍하니 서서 전장의 참극을 애통해하면 되는 거냐?”

이제 와서 돌격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성벽 입구 앞은 돌입하거나 달아나려는 병사들로 막혀있었다.

진영 따위는 붕괴한 지 오래.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저 공간에 어찌 진입할 수 있을까? 병사들을 밀치고 들어가기라도 해야 하나? 그 와중에 거인들이 화살을 쏜다면 피할 수도 없이 죽는 것은 아닌가?

“롤랑은 입구 뚫겠다더니 막혔나? 우리가 가서 도와줘야······”

제이슨이 투덜거렸고 헤임달이 씹어 내뱉듯 말했다.

“롤랑은 성벽 근처에 없다.”

“그럼?”

“그는 성탑 안에 돌입했다. 롤랑에게 쫓기는 듯, 저 앞에서 달리는 거인의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롤랑을 쫓는 거인들의 발자국 소리는 그 뒤에서 들려온다. 도우려거든 성벽을 지나 성탑 안에 들어가라.”

무전기도 없으면서 그걸 어찌 알고 있느냐 물을 필요는 없었다. 저 신은 헤임달이니까. 멀리 보고 멀리 듣는 신.

그 신통력에 제이슨은 감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며 헤임달을 바라보았다.

“그거 하나 알려줬다고 다 퉁치려는 건 아니죠?”

“무슨 소리냐?”

“당신 탓에 우리가 다 여기 묶였잖아요.”

“그래서 어쩌라고? 책임이라도 지란 말이냐?”

“그럼 이대로 나 몰라라 하려고 했어요? 도와줘요. 평화협정이든 뭐든 뭐라도 해줘야 할 거 아니에요.”

헤임달은 욱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하기야 자기가 보인 추태는 자손대대 구전할 만한 것이었다.

잠시간의 고민 끝에 헤임달은 입을 열었다.

“나와 너희 간에 있었던 일을 영원토록 함구하겠노라 맹세한다면.”

“궁니르에? 맹세하죠. 그럼 어찌 도와줄 거······”

그 말을 끊고는 헤임달이 명령했다.

“무릎 꿇어라, 이름 모를 그림자.”

제이슨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패배한 주제에 자존심 챙기려는 것인가?

그래도 시키는 대로 따랐다. 제이슨이 자기 앞에 무릎 꿇자 헤임달은 계속해서 명령했다.

“이제 눈을 감아라, 그림자. 나는 헤임달, 오딘과 아홉 파도 자매의 아들이라. 세상을 밝히는 신 앞에 선 네 이름은 무엇인가?”

제이슨은 눈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제이슨······.”

그리고 제이슨의 눈꺼풀 너머 어둠 속에 웬 남자가 나타났다. 헤임달 신.

제이슨은 무심결에 눈을 껌벅거렸지만 어둠도, 저 앞에 오롯이 서있는 헤임달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 공간에 있는 것은 헤임달과 제이슨 둘뿐이었다.

헤임달이 입을 열었다.

“세계수와 아홉 세계에 새겨진 룬에 의거하여 계약을 맺는다. 나 아스 신족의 헤임달이 힘을 빌려주리라. 등을 보여라, 제이슨.”

제이슨은 저 명령이 어쩐지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상황이 언제 또 있었나?

그래, 레벨 업이었다. 프레이 앞에 불려갈 때마다 등을 보이라는 지시를 받았더랬다.

제이슨은 희희낙락하며 무릎 꿇은 그대로 뒤돌았다. 헤임달이 새로운 룬을 선물해주리라 기대하며.

그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헤임달이 손을 뻗자 그 등에 룬이 새겨졌고, 고통이 뒤따랐다.

비명을 지르며 제이슨은 눈을 떴다. 헐떡거리면서 머릿속에서 빛나는 룬을 읽어내렸다.

그리고는 그 뜻에 기겁했다.

“소환 계약?”

헤임달은 더없이 수치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영혼을 일부 나누어 분신을 내보냈다. 거인들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도록, 분신의 크기는 나보다 작게 만들었다. 그러나 불평하진 말라. 이것은 내게 큰 손실이었음을 명심하고 감사하라.”

제이슨은 차라리 레벨 업을 시켜줄 것이지, 불평하려다 말았다. 어쨌건 새로운 소환물이 생겨난 것은 좋은 일이다.

헤임달은 과연 신답게 고강했다. 괴력과 초월적인 기술을 자랑하는 유저들에게 둘러싸여 몇 분이나 버틸 정도였으니.

이를 갈며 헤임달은 뒤돌아섰다. 그리고 자신이 본래 있었던 계단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우린······”

제이슨이 중얼거리던 차, 굉음 속에 다른 종류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포격이 또 다시 성과를 거두엇다. 저쪽에서 성벽 한 곳이 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 너머로도 성채 내부가 보였다. 통로 한곳이 더 생겨난 것이다.

사람이 몰려있지 않은 통로는 저기가 유일했다.

“가자!”

제이슨이 외치며 달려 나갔다.

열한 명의 유저들과 두 현지인이 뒤따라 달리는 가운데, 마법사 유저들은 달리면서 주문을 외웠다. 가속과 투명화의 주문을.

이내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무리는 성벽을 지나 성탑 안으로 들어섰다.

*******

성탑에서의 추격전은 끝났다.

롤랑은 벽을 등진 채, 자신을 둘러싼 거인들을 노려보았다.

서리거인들. 그 중에는 유드문터스가 보였다. 그리고 그 못지않게 강력해 보이는 거인들이 그 누구 빠져나갈 틈 없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이미 상황은 끝난 듯했다. 롤랑이 어찌 분투한들 그것은 그저 발버둥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인들이 당장 공격해오지 않는 것은 영웅적인 포로를 원해서가 아니었다.

“기사가 어찌 인질을 잡느—냐? 기사답지 않은 짓 말고 어서 왕을 돌려보—내—라. 롤랑.”

유드문터스의 말에 롤랑이 대꾸했다. 어찌어찌 사로잡아 자기 옆에 꿇어앉힌 거인 왕, 우트가르달로키의 목에 칼날을 들이댄 채로.

“왕을 사로잡는 것은 기사답지 않기는커녕 명예로운 일인데?”

“그래, 포로를 잡으면 몸값이나 다른 포로와 교환을 요구할 수 있단 게로—군. 포로교환을 원하는 건—가—?”

“그렇다.”

“좋아, 그러지. 네가 왕을 풀어준다면 우리 또한 널 풀어주리—라 맹세한—다.”

“그리고?”

“‘그리고’라니. 몸값이라도 더 내놓으라, 이건—가? 너 하나 풀어주면 됐지 그 이상 뭘 바라는 거냐, 롤랑?”

“아니, 포로는 한 명당 한 명으로 대응해야지. 하지만 내가 왕을 돌려주듯 너희도 왕을 돌려줘야 해.”

“네 머리에 왕관이라도 씌워—주—랴?”

“아니, 너희가 내놓아야 할 포로는 내가 아니야. 나는 신들의 왕을 돌려받길 원한다.”

유드문터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전쟁신 말인—가.”

“달리 누가 있나? 당장 그 분을 자유롭게 하라. 그러지 않으면 너희 왕의 목숨은 오늘로 끝임을 명심하고.”

호통을 치면서도 롤랑은 초조했다. 과연 이 인질극이 통하기나 할까? 오딘과 거인 왕을 교환하자니, 격의 차이가 커 보인다. 거인들은 그 교환을 자기네가 손해라고 여길지 모른다. 차라리 이 몸뚱이라도 돌려보내주겠다고 약속할 때 얼른 벗어나는 게······.

롤랑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거인들은 당장 개소리 말라며 덮쳐오지는 않았다.

한 거인이 말했다.

“왕? 명하시오. 우리는 따를 테—니.”

그 말에 우트가르달로키는 허벅지가 반쯤 베여나가 허덕거리는 와중에도 애써 고개를 들어올렸다.

거인 왕은 자신을 금방이라도 죽일 듯한 롤랑을 향해 말했다.

“말했······ 지 않나. 전쟁신은······ 풀려나선······ 안 돼. 그건 우리뿐만 아니라 너희 족속에게······ 도 재앙이란 말이다······.”

“그 말을 들어먹지 않겠노라 거부를 밝혔을 텐데?”

“내 몸값을 원한다면······ 다른 걸 주지. 내 몸뚱이만큼의 황금이든······ 난쟁이들의 보물이든······ 뭐든 줄 테니, 그러니 제발······.”

거인답지 않게도 힘없는 목소리. 지금 우트가르달로키의 말은 귓가에 울리기는커녕 떨리고 흐렸다.

‘출혈 탓에 추워죽겠나 보군.’

롤랑은 가슴에 차오르는 희망을 느꼈다. 모름지기 절박한 상황에 처하면 무슨 값이든 치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지금 거인 왕은 충분히 약해진 듯 보였다.

롤랑은 약자 앞에 선 강자의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목숨이 아까우냐, 로키? 그렇다면 어서 오딘을 내놔라!”

“오딘은 우리에게 없······”

“어디서 발뺌이냐, 너희가 억류하고 있음은 이미 알고 있다!”

롤랑은 우트가르달로키의 목에 더욱 가까이 칼날을 들이댔다. 지켜보던 거인들이 신음하는 가운데, 롤랑은 우트가르달로키의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좋아······.’

롤랑은 칼을 쥔 손에 더욱 힘주며 외쳤다.

“다시 묻겠다. 오딘, 있나? 없나? 또 거짓을 고한다면······”

우트가르달로키는 겨우 입을 열었다.

“있다······.”

“그럼 어서 내놓으란 말이다, 허튼 수작 말고!”

“그러지 않으면 죽이겠······ 단 말이지······ 나를······”

거인 왕은 겁에 질려있었다. 더욱 겁먹어서 약해지도록, 롤랑은 포효하듯 외쳤다.

“그래!”

“젠······ 장······.”

우트가르달로키가 신음했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키더니,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거인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 어서 오딘에게 가라······.”

“잘 생각했다, 거인 왕.”

롤랑이 말했지만, 우트가르달로키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우트가르달로키는 마지막 힘을 끌어내어 외쳤다.

“가서 오딘을 죽—여—!”

< 성안 - [2]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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