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51화 (151/164)

< 성안 - [1] >

알론소는 어찌 해야 할지 몰라 멀거니 섰다.

저기서 발할라의 전사들이 싸우고 있었다. 알론소는 그들의 동료로서 어깨를 나란히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빛이여, 퍼져라!”

“닥쳐라! 이름도 버린 주제에 어디서 카를 흉내냐?”

발할라의 전사들은 한 거인을 둘러싼 채 손발을 맞추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주춤했고 선뜻 공세에 나서지 못했다.

거인은 사방에서 공격을 받는 와중에도 광포하게 모두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발할라의 전사들이 밀리고 있었다. 도와주어야 할 것 같지만 알론소는 여전히 몸이 굳었다.

과연 자신이 저기 낄 수나 있을지, 그래도 될지 의심스럽다.

듣자하니 저 거인은 신이라지 않나. 그것도 헤임달 신, 누구나 이름을 알 법한 신에게 달려들어야 하는가?

지금 저기서 웬 늑대 무리가 달려오는 마당에?

발할라의 전사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것인가? 알론소로서는 물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제발, 신이시여.’

뭐가 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 처할 줄 알았으면 차라리 롤랑을 따라갈 것을 그랬다. 롤랑이 하도 맹렬하게 달려가기에 알론소로서는 감히 쫓아갈 시도를 못 했지마는.

안절부절 하는 와중에도 펜리르 늑대와 그 수하들은 착실히 다가오고 있었다. 군대처럼 착실하게 진형을 갖춘 채 쿵, 쿵.

그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온몸이 함께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알론소는 창을 움켜쥐며 침을 삼켰다.

예전에 보았던 나무늑대들을 떠올렸다. 그 괴물 무리를 향해 롤랑이 뛰쳐나간 순간 자신도 같이 달려갔더랬다. 이제 와서 생각하자니 어찌 그럴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백 마리 늑대들 사이에서 이 늙은이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도.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적어도 혼자서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알론소는 용기를 내어 외쳤다.

“늑대들이 지척까지 다다랐습니다!”

그러나 발할라의 전사들도, 신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싸움에나 열중했다.

기사가 든 아론다이트가 허공을 갈랐다. 신은 민첩하게도 피했지만 칼날이 볼을 스쳤다.

신의 피가 튀겼지만 전혀 신성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피를 본 신은 더욱 광분하여 노성을 내지르고 발할라의 전사들은 방어하는 데만 열중할 뿐.

“늑대들이 온다고요!”

알론소가 다시금 외친 순간 신이 이쪽에 시퍼런 눈길을 보내오기는 했다. 그러나 그뿐, 싸움은 계속되었고 늑대 군단은 계속해서 다가왔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잠시 걸어오던 늑대들이, 다시금 걷는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저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론소는 알 수 있었다. 피를 덥히고 질주하는 기병돌격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늑대들은 늑대들은 슬슬 덮쳐올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곧 전력으로 달려올 것이다.

알론소는 일순 도망갈까 생각했다. 모지가 불러내준 유령 군마도 한 마리 있겠다,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그러나 이내 늑대들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늑대들이 슬슬 달리기 시작한 순간, 알론소는 천천히 말을 몰아 발할라의 전사들을 지나쳤다.

그러고는 말을 달리게 했다. 저대로 달려오게 내버려둔다면 아마도 발할라의 전사들을 덮칠 늑대들을 향해서.

‘죽자. 늙어서 편히 죽느니 장렬하게 죽자. 싸우다가······ 도움이 되는 식으로 죽자······’

유령 군마는 바람을 가르며 달려 나갔다. 멀리서 볼 때도 컸던 늑대들이 더욱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공포와 함께 달아나도 될 핑계가 알론소의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세계수 일 층 문구에서 뭐라 경고했던가? 늑대 밥이 되면 발할라에 못 간다고 하지 않았나? 게다가 신과 싸우는 전사들을 위해 돌격하는 것이 과연 사후세계에 이로운 행위일까?

역시 달아나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늑대들이 달려오고 있었기에 알론소는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되뇌었다.

‘저것들은 풍차다······ 날개가 멈춘 풍차······’

상상, 특히 망상하는 것은 특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안한 와중에는 그마저 쉽지 않았다.

어떻게든 저 늑대들을 풍차라고 자신을 속이는 것은 성공한 듯싶었다. 그러나 분명 멈췄다고 설정한 상상 속 풍차의 날개가 미친 듯이 회전하는 것이 아닌가.

이대로 돌격하면 풍차 날개에 나가떨어질 것이다. 미친 자살돌격이었지만 알론소는 창을 꼬나 쥐고 계속 달려 나갔다. 어쨌건 집보다 큰 늑대보다는 풍차가 나았으므로.

펜리르 늑대가 저 앞에 있었다. 저건 또 뭐라 해야 하나?

탑보다 크고 송곳니가 돋아난 털복숭이 풍차?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알론소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빛난다는 자신의 신을 향해 기도 올렸다.

“발두르여!”

문득 눈을 떠보니 기도는 효과가 있었다. 창이 빛나기 시작했다.

신 내린 무기, 그러나 평소와는 무언가 달랐다. 창끝에서 방출된 빛이 이상할 만치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빛은 확산했다. 그리하여 저 앞에 있던 늑대들, 그리고 펜리르 늑대마저 빛이 뒤덮었다.

알론소는 눈부시다 못해 눈을 감았지만 별 소용없는 짓이었다. 빛은 눈꺼풀마저 가려버렸다.

정말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 순간, 알론소의 뇌리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두르가 말했다.

‘광명의 신이 함께 한다. 가자, 늙은 기사.’

알론소가 허벅지에 힘을 주자 유령 군마가 도약했다.

온 세상이 빛에 휩싸인 와중이었다. 잠시나마 두려움은 사라졌다. 지금 이 순간, 풍차도 늑대도 펜리르 늑대도 풍차도 그저 희끄무레한 실루엣에 불과했다.

빛의 광원, 알론소의 창끝이 어마어마하게 큰 풍차 혹은 펜리르 늑대에게 닿은 순간이었다.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겁에 질린 병사들도, 발할라의 전사들과 헤임달 신도 모두.

모두 비슷한 광경을 보았지만 느낀 것은 각기 달랐다. 병사들은 공포 위에 희망이 덧씌워지는 신화적인 장면을 보았다. 악의 군대에게 신성한 빛이 부딪친 순간이었기에.

헤임달 신은 저기서 발한 빛 자체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발두르의 빛은 천상에서 너무 흔한 조명이었으니까. 그래도 어쨌건 섬광 탓에 흘긋 시선을 돌려본바, 늑대들이 이토록 가까이 다가왔음을 깨닫고는 기겁했다.

그러고는 이 이득 없는 싸움일랑 관둬야겠다고, 이 자리를 얼른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라고 뒤늦게나마 판단했다.

“다 꺼져!”

헤임달 신은 앞을 가로막은 흑기사를 필사적으로 뿌리쳤다. 이제 포위망을 벗어나려던 차, 발할라의 전사들은 빛도 늑대도 보고 있지 않았다.

발할라의 전사들은 저 빛과 늑대 어느 쪽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저기서 벌어진 상황은 그저 웬 기사가 허공을 향해 달려나 가더니 빛을 뿜어낸 것에 불과했기에. 발할라의 전사들은 눈앞의 헤임달 신에게만 집중했으며, 그리하여 헤임달 신이 도주하고자 내보인 옆구리와 등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가했다.

헤임달의 허벅지를 명검 아론다이트가 찔렀다. 그 발목에 허공에서 돋아난 덩쿨이 휘감겼다.

그리하여 헤임달은 달리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신음을 애써 참으며 몸을 일으키던 순간이었다.

더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헤임달의 목에 흑기사가 칼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흑기사의 주인으로서 제이슨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겼어, 오만한 십팔 새끼야.”

바로 모지가 윽박질렀다.

“닥쳐라, 이아손. 아무튼 간에 이렇게 됐습니다. 헤임달. 더 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합니다.”

헤임달은 굴욕을 느끼기보다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다. 바로 고개를 돌려 늑대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모든 것을 감쌌던 빛은 걷혔다. 그리하여 보이게 된 장면이 헤임달의 눈을 사로잡았다.

목에 창이 박힌 펜리르가 고꾸라져 있었다.

달의 살해자, 종말의 늑대가 죽었다. 헤임달은 그 장면을 믿을 수 없었다.

“펜리르가 죽어? 어떻게?”

방금 그 빛 때문에? 그건 분명 발두르의 빛이었다. 보기는 좋아도 무슨 특별한 힘은 없을 터였다. 거기에 펜리르 늑대를 죽일 힘이 깃들었다고는······.

헤임달은 휘둥그렇게 눈을 뜨고 저 거대한 늑대 시체를 바라보았다.

모지가 말을 걸었다.

“펜리르가 죽었습니까? 방금 그 빛이 눈속임으로 작용했나 보군요.”

“무슨 소리냐?”

“병사들 보기에 그 빛은 악의 세력을 일소할 신의 징벌이었을 테지요. 늑대들에게 무슨 응징을 가할 수 있으리라 믿었을 겁니다. 그리 믿은 대로 환영이 진행된 게 아닐까 싶군요. 이제 환영임을 아셨습니까?”

“아직도 환영 타령이냐, 천한 그림자야.”

“진짜 펜리르였다면 저기 시체로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허망한 환영이 아니고서야. 이제 다른 환영들도 거둬야겠지요. 여기 샘물이 있으니 부디 드십사.”

헤임달은 엎어진 채로 모지가 내민 물병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그 병을 낚아채고는 고개를 들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리고 고개를 내린 헤임달의 눈에 늑대는 보이지 않았다.

저기 있는 것은 그저 웬 말과 거기 올라탄 기사 한 명뿐이었다. 거대한 무언가에 마구 치이듯 이리저리 꿈틀거리고 있는 늙은 기사 하나.

모지가 보기에는 그저 처량한 꼴불견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이 보기에는 괴물들 사이에서 한 기사가 분투하고 있는 장렬한 모습으로 보이리라는 점을 감안했다.

모지는 목소리에 주문을 담아 외쳤다.

“메디아의 알론소 경이 거대한 괴물을 고꾸라뜨렸다! 적들은 수장을 잃었다! 더 이상 당해내지 못할 적이 아니다! 돌격하라! 돌격해서 기사를 구해내라!”

그 외침에 반응하여 웬 병사가 달려나갔다.

“발두르여, 제가 갑니다!”

그리고 그 뒤를 다른 병사가, 그 옆의 병사가 뒤따랐다. 그리하여 멈춰서있던 병사들이 달려 나갔다. 끔찍한 적들, 그래도 방금보다는 덜 끔찍해진 적들을 향해서.

*******

성안으로 들어온 우트가르달로키는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아, 제발.’

그 눈은 자기 바지를 붙잡은 롤랑을 향해있었다.

아직 로키의 몸을 가린 주문이 남아있었다. 그러니 보이지 않을 터였지만, 롤랑의 반응은 신속하고도 정확하기 그지없었다.

롤랑은 허공을 향해 뒤랑달을 쭉 뻗었다. 우트가르달로키가 질겁하며 몸을 뒤틀었기에 뒤랑달의 칼날은 그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 일격으로 롤랑은 보이지 않는 적의 위치를 가늠했다.

이제 맹공을 퍼부으려던 차, 롤랑의 귓가에 바람소리가 났다. 보이지는 않아도 뭔가가 날아오는 것이다.

롤랑은 머리를 옆으로 움직였고 우트가르달로키가 필사적으로 내뻗은 비수는 빗나가버렸다.

‘젠장.’

비수의 불꽃이 거세게 타오른 순간, 투명화 주문이 풀렸다.

적의 모습이 보이게 된 롤랑은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옷깃을 잡아당긴 그대로 공격을 퍼부었다.

“로키!”

우트가르달로키는 나름대로 침착하게 대응해보았다.

우트가르달로키는 오래 살았고 서리거인답게 무기를 쓸 줄 알았다. 자신에게 주문을 걸어 그 몸을 빠르게 만들었다. 비수를 세게 쥐면서 스스로에게 축복을 내렸다.

‘모르페우스여.’

자기 능력을 한껏 보강한 뒤에야 거의 보이지도 않던 롤랑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거센 칼날이 덮쳐오고 있었다.

우트가르달로키는 비수를 저어 뒤랑달을 가로막았다.

팔이 저릿했다. 밀리는 느낌, 우트가르달로키는 곧바로 정면승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러고는 발작적으로 비수를 휘저었는데, 롤랑이 아니라 자기 하반신을 향해서였다.

비수가 허벅지를 그으면서 살이 타올랐지만 고통쯤은 감내해야 했다. 살뿐만 아니라 바지마저 타오른 덕분에 로키는 롤랑의 손에서 풀려났다.

바로 주문을 외워 순간이동, 자기 몸을 이동시켰다.

로키가 그러리라고 롤랑도 예상한 바였다. 지체 없이 주변을 살펴 로키의 위치를 살폈다.

복도 저편에 등을 보이고 달려나가는 거인이 보였다. 그 모습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우트가르달로키가 다시금 투명화 주문을 써서 자기 몸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그 방향으로 쏜살같이 달려나가며 롤랑은 생각했다.

‘다시 순간이동도 할 테니 이대로면 놓친다······’

어찌해야 하나? 미친 듯이 뛰면서도 고심하던 차, 롤랑의 눈에 복도 벽에 걸려있던 창이 들어왔다.

거인이 쓰기 위한 창인지 너무 컸지만 롤랑은 달리면서 그것을 손에 낚아챘다. 그러고는 이제야말로 신에게 빌어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오딘이여!”

그리고 던진 창에 신이 내린바, 창은 붉게 달아올랐다.

우트가르달로키는 등 뒤에서 공기 갈라지는 소리를 듣고 질겁했다. 도피하고자 바로 순간이동, 복도를 꺾어 자기 몸을 이동시켰다.

그러나 궁니르는 목표물을 놓치는 법이 없다.

“억······”

복도 갈림길에서 들려온 신음소리. 롤랑은 그 방향으로 뛰었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사냥감이 달아남에 따라 바닥에 피가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그 흔적이 있건 말건 결코 놓칠 수 없었다.

사냥감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리고 등에 창이 꿰여 중상을 입은 채로도 우트가르달로키는 도주를 계속했다.

롤랑의 손이 닿으려던 찰나 로키는 주문을 완성했다. 또 다시 순간이동.

거리가 다시 벌어진 가운데 롤랑은 계속 달렸다. 그리고 다시금 따라잡으려던 순간, 복도에 있던 문이 열리며 거인 전사들이 나왔다.

롤랑을 본 거인은 도끼를 겨누며 외쳤다.

“뭐지, 큰난쟁이? 어떻게 성안에 들어왔—지? 너희들, 모두 나—와—!”

뒤따라서 거인들이 나왔지만 롤랑은 그들을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지금 중요한 것은 거인들을 처치하는 것이 아니라 적들의 군주를 잡는 것이었다.

“서라, 마술쟁이—!”

롤랑이 전투함성을 내지른바 롤랑을 쫓던 거인들은 잠시 굳었다. 그 덕에 롤랑은 더 수월하게 달릴 수 있었지만, 그 외침은 성의 모두가 들을 만큼 컸다.

이내 결전을 준비하던 거인들은 모두 무기 손질을 관두고 복도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큰난쟁이를 발견한 거인들은 지체 없이 롤랑을 쫓아 달렸다.

추격전이 계속되었다.

*******

< 성안 - [1]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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