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35화 (135/164)

< 백일 층 - [3] >

그 말에 제이슨은 질겁했다.

‘설마.’

지형 따위를 기억할 리가 없었다. 저 롤랑은 옛날 이 세계수에 오른 기사 본인이 아니다. 설령 진짜 롤랑이더라도 수백 년 지나서까지 지형을 기억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롤랑은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이 망할 곳은 거의 변하지 않았군. 수백 년이 흘렀는데 나무들만 조금 높아졌을 뿐이야. 전에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겹게도 커······.”

그 말에서는 감회인지 애수인지 모를 감정이 물씬 묻어나왔다. 그 말에서 진실 된 무언가를 느낀 제이슨은 경악했다.

저것이 정말 연기로 가능한 것인가?

‘만약 연기가 아니라면······.’

한편 보어조아가 감탄한 눈으로 롤랑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정 수백 년의 세월을 넘어 강림한, 그야말로 신적인 존재를 보는 눈초리.

롤랑은 둘 모두의 신경에 신경 쓰지 못했다. 말하다 말고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픈 티 내지 않으려고 표정을 관리하던 차, 문득 모지가 말을 걸어왔다.

“롤랑, 여기 지형의 위치가 정말 잘 기억나나?”

롤랑은 무신경한 투로 대답했다.

“그럭저럭.”

“혹시 샘 따위 수원(水原)의 위치도 기억하는가?”

“기억이 날 듯도 말 듯도 한데. 자네는 기억 못하나?”

“나야 당연히 기억 못하지. 나는 거인들과의 마지막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 못했잖은가? 하지만 들어서 아는 정보들은 많은데, 내 보기에 중요한 것이거든. 이곳의 샘물 말이야. 기억할 수 있으면 기억해보게.”

“천천히 그래도 되나?”

“가능한 빠르면 좋겠는데.”

제이슨은 물론 롤랑도 모지가 왜 갑자기 샘물 타령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내 기억이 안 난다고 대답하려던 찰나였다.

롤랑 경은, 그러니까 카를 대제의 변경백으로서 최후의 전쟁 당시 보급을 담당했던 기사는 물의 확보가 중요하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롤랑 경은 직접 각 수원의 위치를 모두 기억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돌아다니며 보급로를 개척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는 것을 모른다고 대답하기에는 롤랑 경은 자기 임무에 매우 자부심 넘치는 기사였다······.

롤랑 경은 자신들이 방금 빠져나온 그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샘이라면 저 숲 깊숙한 곳에 하나 있을걸. 하지만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어째서?”

“이 층만 해도 거인들이 저렇게 많이 쏘다니잖나. 당연히 수원지에 전초기지 비슷한 걸 세워뒀지 않겠나? 거기에 거인들이 적어도 수십 놈은 있을걸. 놈들과 맞붙으면서까지 샘을 차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나?”

“그리 생각하네.”

“위험해. 내 기억과는 달리 샘의 위치도 변했지 않겠나? 우물도 수십 년 만에 말라버리기도 하지 않나. 그러니 샘 하나 찾으려면 꽤 헤매야할 테고 그건 거인들의 뒷마당에서 정처 없이 걸어 다녀야 한다는 걸 의미해.”

“그건 문제없지. 내가 마법사라는 걸 잊었나?”

제이슨이 문득 물었다.

“다우징? 마법 중에 물을 찾는 주문도 있나?”

그리고 모지는 더없이 짜증스럽다는 얼굴로 제이슨을 바라보더니 그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제이슨은 이게 화날 질문인가 싶어 놀랐다. 그리고 모지가 휙 하고 고개를 돌리자 롤랑이 주의를 주었다.

“모지.”

롤랑이 나서고서야 모지는 겨우 대답해주었다.

“난 요정에게서 자랐다. 숲속에서 드루이드 수업을 받아가며 마법사가 되었단 말이다. 그런데 짐승들의 흔적을 살필 줄도 모르겠나? 혹시 짐승의 흔적과 샘물이 무슨 관련이냐는 멍청한 질문을 할까봐 심히 걱정되어 미리 말하자면, 짐승들이 다니는 길만 파악할 수 있으면 샘물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아.”

제이슨은 답답함을 느끼며 물었다.

“그놈의 샘물엔 왜 그리 집착하는데? 병력이 마실 물이 필요한 거라면 백 층의 강에서 마시면 되잖아?”

모지는 다행히 그 질문에는 화내지 않고 대답해주었다.

“이곳의 샘물은 예사 샘물과 다르다. 도움이 될 거야. 롤랑과······ 알론소, 그대에게도.”

난데없이 지적받은 알론소가 눈을 크게 떴다.

“저 말입니까?”

모지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늙은 머리에 총기가 돌아올 터이지. 지혜의 샘물을 마신다면 말이오······.”

*******

지혜의 샘의 또 다른 이름은 미미르의 샘이다.

이름처럼 그 샘의 주인은 미미르였으며, 샘물을 마시는 자에게 지혜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 효능이 얼마나 탁월한지 옛날 오딘은 미미르에게 자기 눈 한쪽을 바쳐가면서까지 그 샘물을 마셨을 정도다.

샘의 주인 미미르가 그 자리를 벗어난 지금도 그 샘물을 쉬이 마실 수는 없다. 샘은 세계수 뿌리 끝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지의 말에 따르면, 세계수 뿌리가 빨아들인 지혜의 샘물은 이 거인들의 영역에 퍼진다고 했다.

오딘이 마셨던 그 수준의 효능은 없으리라고 했다. 세계수의 체관을 타고 흐르는 동안 기껏 빨아들인 샘물이 다른 물과 섞이고 또 섞이니까.

하여튼 손에 넣을 수 있으면 넣어야 한다고 모지는 주장했다.

“롤랑 자네도 이곳 샘물의 덕을 톡톡히 보았더랬지. 자네가 광전사답게 광기에 빠진 자네가 홀로 뛰쳐나가려는 마당에 아스톨포가 나섰던 일 기억나지? 아스톨포가 광분한 자네를 어찌어찌 제압해서는 샘물에 처박았더니 그 샘물을 한껏 들이켠 자네가 이성을 되찾던 것 말이야.”

롤랑은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작게 대답했다.

“대강은.”

”정확히는 기억 못하고? 뭐 이해는 하네. 자네에게는 수치스러운 사건이니까. 하지만 당시 내게도 그 샘물은 깊은 인상을 주었다네.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어 샘물을 연구해보고 그 활용법을 찾았을 정도로······.”

무슨 활용법인지는 롤랑도 짐작할 수 있었다.

롤랑은 서사시 ‘광란의 아마디스’를 떠올렸다. 이성을 잃은 롤랑에게 그 동료 아스톨포가 신비의 물을 주자 정신을 차린 일화를.

모지는 그 신비의 물이 지금 이곳에 있을 샘물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의 샘물을 마시면 광폭화 상태에서 풀려난단 말이지? 그러니까 후환이 두려워 아무 전투에서나 막 쓸 수 없는 광폭화를 부담 없이 쓸 수 있게 되는 거고······.’

속으로 중얼중얼, 롤랑은 무리를 이끌고 숲속을 걸어 나갔다.

이백 명 가량의 무리였다. 정예 중의 정예들이라지만 최소 수십은 될 터인 거인들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롤랑의 계산에 따르면 최소 열 명씩은 달라붙어야 거인 하나를 상대할 만했으므로.

이대로라면 큰 사상자가 나올 텐데, 모지는 그 피해를 감수하다 여기는 모양새였다.

*******

의견을 제시한 장본인답게 모지는 무리에서 가장 열심히 움직였다.

모지는 투명해진 채 숲속 어디론가 들어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샘물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모지의 안내를 따라 걸어가자니 일행은 여러 괴물들과 마주쳤다.

이 높은 나무들에서 잎사귀를 따먹기 위해 진화했는지 기린처럼 목이 긴 짐승들, 그리고 거대 늑대들.

초식 짐승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면 되었다. 그리고 거대 늑대들과도 싸울 필요가 없었다. 늑대들은 이 무리의 규모를 살피고는 그저 지나가려는 모양새였다.

‘정찰?’

롤랑이 경계하는 가운데 알론소가 외쳤다.

“나무늑대입니까? 놈들과 싸울 때 저는 끼지 못했는데 지금 다시 싸울 기회가 생겼습니다! 모지 공, 제게 군마를 불러주시길!”

롤랑은 질겁하여 외쳤다.

“뛰쳐나가려고? 안 되오! 독단행동은 금물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그제야 알론소는 뽑아든 창을 내렸다. 롤랑은 그 치기 어린 모습을 보며 맥이 빠졌다. 오딘이 무어라 말했던가?

‘발두르와 그 신자들을 경계하라고?’

지금 롤랑이 생각하기에 그 경고는 무가치했다.

만약 발두르가 직접 이쪽에 적대할 위험은 그리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신들의 왕이 직접 죽이려 덤벼온다면 이쪽은 그저 얌전히 목이나 내미는 것이 나을 테니까.

당장 거인들의 성채를 어찌 돌파할지 막막한 마당 아닌가. 그런데 거인을 넘어 신들의 왕까지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발두르의 신자들. 이쪽도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카를은 친구일뿐더러 그다지 신앙심 깊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저 치매 걸린 노인네는 치명적인 배신을 저지를 것 같지가 않고······. 그렇다고 경고를 그냥 넘어가도 되나? 다름 아닌 오딘의 경고인데? 지금껏 오딘의 쓸데없이 의미심장한 발언은 다 복선처럼 터져 나왔다. 이번 경고도 뭔가 일이 터지는 건······.’

한참 생각에 골몰하던 와중 모지가 외쳤다.

“이쪽으로!”

그리고 일행은 그 방향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개활지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 있는 오두막과 목책들을 바라보며 아말릭이 중얼거렸다.

“정말 거인 기지가 있군요. 롤랑 경 말씀처럼······.”

개활지에 있는 것은 거인들의 기지였다. 오두막 여럿과 그 오두막들을 둘러싼 목책. 심지어 봉화대까지 보였다.

거인들의 수는? 아무리 봐도 마흔은 넘어보였다. 놈들은 이미 이쪽의 접근을 느꼈는지 뛰쳐나와 경계를 취하는 마당이니 기습의 효과도 없을 터였다.

‘아무리 봐도 싸우지 말고 돌아가는 게 낫겠는데.’

그리 생각한 롤랑은 자기가 데려온 기사들을 보고는 흠칫했다.

공포, 두려움, 머뭇거림 등, 전투를 앞에 둔 사람들다운 표정이 그들의 얼굴에 드러나 있지 않았다.

오히려 정 반대였다. 기대, 희열, 의욕 따위를 드러낸 채 기사들은 무기를 빼들었다.

하기야 저들도 괴물들과의 싸움을 거듭해온 전사들이었다. 알론소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무모한 자들.

아무래도 저들에게 꽁무니를 빼자고 말해봤자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다른 물러날 핑계가 필요한데, 보어조아의 무리 쪽은?

보어조아의 얼굴을 흘긋 보고서 롤랑은 속으로 신음했다.

보어조아는 거인들을 보며 혀를 쭉 내밀었다. 마치 입맛을 다지듯이.

“정말, 좋군요. 고립된 곳에 사냥감들이 저리 많이······.”

보어조아가 보기에 저들은 숫제 통통한 사슴 떼쯤 되어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 부하들은 어떤 심정일지 모르지만 지휘자가 저래서야 역시 물러나자고 말하기는 글러먹었다.

어쩔 수 없었다. 롤랑은 모두를 향해 말했다.

“영광스러운 전투가 우리를 기다리는군. 모두 준비하시오.”

기사들이 자세를 잡는 한편, 모지는 알론소를 위한 유령 군마를 불러내었다. 알론소가 그 위에 희희낙락 올라타는 사이 제이슨은 지팡이를 잡고는 소환물들을 불러내고 있었다.

한편 저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쪽에 거인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았는데. 시간을 끌고자 롤랑이 홀로 앞으로 나섰다. 속으로 자신에게 축복을 걸며.

‘오딘께 내 영혼을.’

그리고 다가온 거인들과 마주친 순간 롤랑은 칼을 들어 예를 취하고는 말했다.

“나 미드가르드의 기사가 거인 전사들을 마주하노라. 한 차례 서로 솜씨를 보이기에 앞서 통성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나 친애하는 황제 폐하의 기사이자······”

거인들은 롤랑이 떠드는 내용에서 영양가를 발견하지 못했고, 그래서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활을 쏘았다.

“죽어—라, 난쟁이!”

그리고 거인들이 쏜 큼지막한 화살 네 개가 롤랑을 향했다.

롤랑은 피하려 하지 않았다. 저 뒤에 다른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롤랑은 그 자리에 선 채 칼을 휘둘러 화살 네 개를 모두 튕겨내고 잘라냈다.

그 묘기를 부린 팔이 욱신거렸다. 계속 이러기는 버겁다고 생각하던 차, 거인들은 기겁했다.

“어떻게?”

그리 놀라면서도 거인들은 다시금 시위를 당겼다. 화살 네 개로는 안 되었으니까 이번에는 일곱 개.

과연 그것은 다 막아낼 수 없었다. 롤랑은 엄청나게 집중해낸 결과 화살 다섯 개는 잘라냈지만 그 시점에서 이미 팔이 저릿했다.

결국 두 화살이 몸에 충돌했다.

조금 아플 뿐, 별 피해가 없었지마는.

“저 뭔?”

거인들은 화살이 저 조그만 종족의 갑옷을 좀 우그러뜨렸을 뿐 피 한 방울 흘리지 못하게 했음에 경악했다. 유격용 활이라 위력이 약하다지만 어째서?

거인들의 경악한 표정을 보다 말고 롤랑은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둘로 분열한 모지 중 하나가 주문을 외워 자기 몸을 보이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소환물들은 이미 셋이나 나타나 있었으며, 기사들은 금방이라도 땅을 박찰 듯했다.

준비가 끝났다고 판단한 롤랑이 외쳤다.

“이 배워먹지 못한 트롤들에게 기사도를 알려주어라—!”

비로소 기사들이 뛰쳐나갔다.

“롤랑을 위하여!”

그리고 알론소는 달리던 기사들을 지나, 우뚝 서있던 롤랑마저 넘어 가며 고함질렀다.

“발두르를 위하여!”

가속 주문을 받은 유령군마는 정말 유령처럼 달려 나갔다. 알론소의 겨드랑이에 낀 창이 찬란하게 빛났다.

그것만 봐도 이 조그만 무리가 보잘것없는 난쟁이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거인들은 알 수 있었다.

거인들 역시 이쪽의 돌격에 맞서 무기를 치켜들며 고함질렀다.

“티탄 신들이 지켜보신—다! 우트가르트 만—세—!”

< 백일 층 - [3]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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