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란의 트롤랑-134화 (134/164)

< 백일 층 - [2] >

‘오딘께 내 영혼을.’

롤랑은 자신을 축복하면서도 거인들을 노려보았다. 서리거인 이외에 철로 몸을 가리지 않은 거인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전형적인 거인상. 근육질 거체 위에 덥수룩한 수염과 울퉁불퉁한 머리통이 달렸다. 그 험상궂은 모습을 보며 롤랑은 긴장했다.

전에는 거인 부대를 무척 쉽게 전멸시켰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한 거인들이 발리사다를 몰라 너무나도 쉽게 당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편리한 룬검은 없다.

게다가 저 거인들의 표정은 어떤가. 아무리 봐도 약자들을 멸시하는 방심과 거리가 멀었다. 거인들은 이 작은 기사를 상대로 경계하고 있었다.

제대로 붙어야 할 터였다.

하기야 거인 부대는 저 아래층에서부터 이쪽 정세를 살펴왔다. 오랜 정탐 끝에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췄으리라.

쉽지 않으리라고 롤랑은 직감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달려 나갔다.

거인들은 뭉치며 고함질렀다.

“어깨를 맞대—라—!”

금세 롤랑과 거인들과의 거리가 좁혀졌다. 거인들 중 절반은 계곡의 인간들을 경계한 채, 나머지 절반은 롤랑에게 무기를 겨눠왔다.

롤랑은 앤지가 작별선물로 내준 검을 앞으로 뻗었다.

제발 부러지지만 않기를. 그리 빌며 땅을 박찼다.

“꺼, 져!”

거인이 뻗은 도끼의 궤적을 피해서 롤랑은 상반신을 아래로 숙였다. 그리고 허리 숙인 자세 그대로 돌격.

주문까지 걸린 마당이다. 거인들은 롤랑의 속도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롤랑의 코앞에 거인의 하반신이 보였다. 그 위로는 심장과 목도 있지만 바로 손이 닿기에는 너무 높이 있었다.

롤랑은 요행을 바라지 않기로 했다.

우선은 급소부터. 그리 생각한 롤랑이 칼을 뻗어 그 가랑이 사이를 찔렀다.

칼날이 뭔가를 깨뜨렸다 느낀 순간, 거인에게서는 비명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 롤랑은 옆으로 달리면서 흘긋 희생자를 보았다.

거인은 입을 벌린 채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난쟁—이—자—식—!”

복수하려는지 다른 거인이 달려왔다. 그에 맞서 롤랑은 피하려는 척 하다가 마주 달려들었다. 그리고 성난 거인의 코앞에서 포효했다.

“못생긴—트롤—!”

그리하여 움츠러든 그 손목을 타격하듯 후려쳤다.

발리사다라면 그 손목을 뼈째로 베어버렸을 것이다. 당연히 이번 칼은 그러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 보호대를 뚫고 그 안의 뼈를 부수는 데 성공했다.

이 정도면 괜찮다. 롤랑은 안도하며 무력화 된 거인의 옆을 스쳐 달렸다.

저기에 궁수들이 보였다. 절벽 아래 인원들을 사격하고자 시위를 당긴 놈들.

롤랑은 막 활을 쏘기 직전이던 거인에게 도약하여 그 목에 칼을 쑤셔 박았다.

“놈이 거기로 간—”

궁수들에게 경고하려던 거인의 말은 늦어도 너무 늦었다. 이미 롤랑이 또 한 명의 거인 궁수마저 쓰러뜨린 뒤였기에.

거인 궁수들이 칼을 들어 대응하려던 차 롤랑은 다시 거리를 벌리고자 달렸다. 정면승부를 벌여 치열하게 맞붙을 필요는 없었다. 저 아래에 동료들이 있으니 분명 지원이 올 터였다.

과연 그러했다. 절벽 위로 한 맹금류가 솟구쳤다. 두 날개를 활짝 편 발키리가 룬 창을 겨눈 순간 롤랑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섬광.

“어, 어거어, 어어어거거······”

눈꺼풀 너머로도 그 번개를 느낄 수 있었다. ‘레벨 업’으로 말미암아 더욱 강력해진 번갯불.

롤랑이 눈을 뜨자 구워진 거인이 연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거인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눈이 녹아내려 흘렀다. 그리 생겨난 구멍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로테스크한 형상, 보기 역겨웠으나 롤랑은 어쩐지 그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꼈다. 트롤 시체를 보면서도 섬뜩할 뿐이었는데.

의아해 할 여유는 없었다. 계속 달리다가 롤랑은 옆구리를 보인 거인에게 달려들어 그 살을 도려내었다······.

뿜어져나오려는 내장을 움켜쥐며 거인은 비명처럼 외쳤다.

“우—트—가르—트—!”

그 외침은 계곡에 쩌렁쩌렁 울렸지만 그뿐이었다. 끝내 롤랑이 칼에 힘을 주자 그 몸은 이내 힘을 잃고 쓰러졌다.

잠시 후 흑기사가 절벽에 칼날을 찍어가며 올라왔을 때, 이미 거인 부대는 절반의 인원을 잃은 상태였다.

이후로도 방심하지 않고 싸운바, 거인 부대는 전멸했다.

롤랑은 절벽 끄트머리에 서서 칼을 들고 외쳤다. 모두에게 이 모습이 보이도록.

“오딘께 이 영광을 바친다!”

그리 외친 순간 롤랑의 눈이 절로 감겼다.

********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나의 대전사.”

오딘의 말에 롤랑은 고개 숙인 채 대답했다.

“어려운 여정은 아니었나이다. 위대한 당신께 가까워지기 위함이라면 더욱.”

“참 든든한 말이다만 앞으로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세계수 가지에 매달린 채로도 나는 놈들의 묵직한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거인들이 그 더러운 발을 부딪치는 소리······.”

“거인들이 당신께 다가갑니까?”

“아니, 거인들은 그저 원래 행동하던 대로 행동할 뿐. 달라진 것은 놈들이 아니라 나다. 네가 준 반지는 미미르의 샘을 마시어 가지고 있던 내 전지(全知)를 일부나마 돌려주었다. 더 많은 소리를,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

그 말에 롤랑은 소리 높여 물었다.

“어디에 계시나이까!”

“세계수는 모든 땅으로 이어져있다는 것을 알 테지? 거인들의 땅 요툰헤임 또한 세계수를 넘어서야 갈 수 있다. 그 길목 역할을 하는 나뭇가지에 내가 매달려 있다, 롤랑.”

“요툰헤임의 길목에?”

“그래, 그 길목 앞에는 거인들의 성채도 있지. 우트가르트 성채 말이다······.”

롤랑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수심이 떠올랐다. 과거 롤랑과 성기사들은 세계수에 올라 거의 모든 곳을 정복했다. 그러나 끝내 요툰헤임에는 발을 디디지도, 그 앞을 가로막은 우트가르트 성채를 돌파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지금 오딘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구하려면 생전에도 도달하지 못한 곳을 넘어서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 과거의 업적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위업을 대체 어떻게?

롤랑은 애써 걱정을 그 얼굴에서 지우고자 노력했다. 다행히 금세 용기 있는 표정을 그 주인 앞에 내보일 수 있었지만, 이미 듬직하지 못한 표정을 보일 대로 보인 뒤였다.

그러나 오딘은 자기 대전사를 질책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며 말했을 뿐.

“물론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지. 나 역시 안다.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리라.”

“어디 계신지 밝혀졌으니 이제 천상의 신들께서 나선다면······”

롤랑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오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신들은 믿을 수 없다. 나는 참 불쌍한 처지다, 롤랑. 이 얼마나 애처로운 늙은이인지 내 아들들마저 믿을 수 없어. 발두르, 내 빛나는 아들······. 내가 없는 사이 내 권좌를 차지했다고? 내 얼마나 총애했거늘 그런 배신을 저지르다니······”

“발두르께서는 그저 신왕의 공백을 채우고자 어쩔 수 없이 지휘하게 되셨을 겁니다.”

“그랬을 수도 있지. 아닐 수도 있고. 어느 쪽이건 발두르를 더 이상 믿을 수 없다. 한 번 권좌에 앉아 그 안락함을 느낀 이상 그 자리에서 일어나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발두르는 권좌의 원래 주인이 돌아오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제 아비가 귀환하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는 어찌 해야······”

“경계하라. 발두르를, 그 신자들을 주의하라. 그들에게 네 등을 맡기지 마라. 발두르의 명 한 마디에 모든 의리와 맹세를 헌신짝처럼 내버릴 것이니. 하기야 내가 없는 지금 무슨 맹세를 믿을 수 있을 것인가? 하잘 것 없는 자들이 궁니르의 맹세를 입에 담고는 쉽게도 어기는 세상 아닌가.

그 꼴을 계속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기필코 돌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신들과 아들조차 믿을 수 없는 내게 남은 것은 너뿐이다. 롤랑. 오직 너만이 나의 구원이다! 그 점을 명심하고 절대 배신당하지 말라. 배신당하지 않기 위해 아무도 믿지 말라.”

롤랑은 깊이 고개 숙여 절했다. 그 말을 깊이 수긍해서가 아니라, 오딘에게 자신의 어두운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과연 오딘도 롤랑의 심정을 눈치 챘는지 흐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울한 말뿐이었구나. 불쌍한 노인네의 입에서 나오는 건 죄 이 모양이지. 말이 너무 길었다. 사과하노라, 롤랑.”

롤랑은 이 종에게 사과하실 필요가 없노라 부르짖었다. 오딘은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되었다, 롤랑. 되었어. 쓸데없는 말이 길었으니 이제 보답을 해주어야지. 네가 바친 영혼들은 감사히 받았다. 무슨 룬을 원하느냐?”

롤랑은 조금 생각한 끝에 대답했다.

“신성한 룬을······.”

*******

눈을 뜬 순간 롤랑은 자신이 레벨 업 했음을 깨달았다.

원하던 신성도 올랐다. 좋은 일이었다. 당장 성검은 없지만 꼭 필요하다면 카를에게 반환 요청을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환호성을 내지를 겨를은 없었다. 저편에서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에.

또 다른 거인 부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어떻게?

‘거인이 내지른 단말마를 듣고······’

방금 부대가 그저 정찰부대였다면 저쪽은 전투부대 같았다. 경무장을 했으나마 제대로 갑옷을 갖춰 입었고 사냥개인지 늑대인지 모를 거대한 짐승을 거느렸다.

그 수는 스물. 감당하지 못할 수는 아닌 것 같았지만 쉽게 싸워 이길 수 있는 적들도 아니었다.

게다가 잘 보니 저 뒤로도 흙먼지가 보였다. 또 다른 부대가 그 뒤에 있는 것이다. 저 모두와 싸우면 어찌 될 것인가?

몸을 피해야 했다. 과연 그것을 눈치챘는지 밑에서 제이슨이 소리질렀다.

“돌아와!”

그러나 롤랑은 자신을 향해 화살이 날아오는 와중에도 적들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유지한 채로 저 밑에 외쳤다.

“알론소, 창을 던져주시오!”

흐리멍텅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알론소는 뒤늦게 그 말에 반응했다.

“창이요? 예!”

그러더니 짊어진 통에서 창 하나를 꺼내 절벽 위로 힘차게 던졌다.

던진들 닿을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지만 알론소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알론소는 이제 초인이었다. 그 괴력에 말미암아 알론소가 던진 창은 롤랑의 발치에 정확히 꽂혔다.

“빨리 내려오라고!”

제이슨의 재촉에 아랑곳하지 않고 롤랑은 창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화살 하나를 껑충 뛰어 피해내며 오딘에게 기도했다.

‘당신의 힘을.’

그리고 신이 내린 창을 힘차게 던졌다.

시뻘건 선을 그리며 날아간 창은 목표물에 정확히 명중했다. 거인 부대의 선두에서 달려오던 사냥개의 미간에.

그 즉시 화살이 날아왔지만 흑기사가 방패를 들고 가로막았다.

사냥개의 죽음을 확인한 뒤 롤랑은 부리나케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모지가 그 착지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롤랑이 지면에 충돌하기 직전 주문을 외워 그 낙하를 느리게 만들어주었다. 공중부양 주문.

지면에 발이 닿기 무섭게 롤랑이 외쳤다.

“이제 이곳을 벗어난다!”

보어조아와 염동력자들은 뒤돌아서서 왔던 곳으로 달리려 했다. 그러나 그 등에 대고 롤랑이 외쳤다.

“그쪽으로 가지 마! 추격자들을 본대에 유도할 셈인가!”

“그럼 어디로······”

“저쪽 숲속으로! 조금 빙 돌아서 돌아간다!”

그리 외치고는 롤랑이 앞장서서 뛰었다. 반대편 광활한 숲속으로.

모두를 이끌고 뛰면서 롤랑은 지시 내렸다.

“모지, 발키리에게 투명화 주문을······ 그래, 발키리여! 돌아가서 기사들에게 전해주오! 오지 말고 왔던 길로 돌아가 있으라고!”

그 말에 응해 전령 노릇을 하고자 발키리는 투명해진 모습으로 날아갔다.

그 밖에도 롤랑은 이것저것 지시 내렸다. 모두를 투명하게 만들라. 공중부양 주문도 모두에게 걸어 발자국이 깊이 남지 않도록 만들라 등등.

계속 지시하면서 롤랑은 모두를 이끌고 숲속을 뛰어나갔다.

함께 뛰는 가운데 제이슨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나침반도 없는 마당에 길은 어찌 파악하려고?

숲속에서 길을 잃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 아닌가. 발키리까지 보낸 마당에 지금 지형을 파악하려면 모지가 악마라도 불러내야 할 판이다.

‘그 악마 년 부르는 건 공짜가 아닌데······’

그리 걱정했지만 롤랑은 그저 이리저리 달렸고 일행은 그 뒤를 따를 뿐이었다.

이대로 괜찮은가? 제이슨은 자기 불안을 지적하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뒤에서 모지가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지는 제이슨이 롤랑에게 무어라 지적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 잘못을 지적하여 이아손 따위가 위대하신 롤랑 경의 체면을 손상시키기라도 했다가는 아예 죽이려들지도 몰랐다······.

그러나 일행이 숲을 배회하는 일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지형이 눈에 들어오더니 금세 들판이 드러났다.

그리고 저기에 아군 기사들이 보였다.

“롤랑 경!”

제이슨은 저기 보이는 아군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

“롤랑? 길을 어찌 알고?”

롤랑은 그저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잘.”

제이슨은 홀린 표정으로 롤랑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와중 보어조아가 탄성을 터뜨렸다.

“알겠습니다! 이미 와보신 길이니까 지형을 다 파악하고 계신 거로군요!”

< 백일 층 - [2] > 끝

ⓒ 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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